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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2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요나 3,1-10
복 음 : 루카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신지,
그리고 메시아이시라면 증명할 수 있는지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루카 10,25; 11,16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여주시는 대신에 그들이 요나의 표징과
“사람의 아들”(11,30)만을 표징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요나는 주님을 피해서 도망갔습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된 상황에서
스스로 물에 빠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내고 살아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나는 구원은 오로지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요나 2,10 참조)
니네베로 다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니네베로 들어간 요나는 살아 있는 구원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한 요나를 만난 니네베 사람들은 기꺼이 회개하였습니다.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구원의 표징이 된 요나를 보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배척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 구원의 표징이 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한 이들을 악한 세대라고 부르셨지만,
사실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더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이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 영국 방직 공장에 방직 기계들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자기 일을 기계가 돕는다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기고 말았고,
노동자들은 해고되었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공장을 습격해 기계를 부쉈습니다.
이것이 1811~1817년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계를 때려 부순 공장만 망했고,
계속 기계를 사용한 공장은 더 잘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인공 지능으로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을 때려 부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더 좋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자리는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거리는 없어지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게 됩니다.
예전에 버스를 타면 운전사만 있지 않고, 버스 안내원이 있었습니다.
만원 버스의 승객들을 꾸겨 넣듯이
안으로 밀어 넣고 “오라잇~”을 외쳤었습니다.
현재 이 직업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망했을까? 아닙니다. 발전 속에서 더 많은 직업이 생겼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며 부정하면
시대의 변화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에 어긋날 때는
잠시 멈춰서서 또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도 그 시대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구약시대의 하느님과 신약시대의 하느님이
너무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하느님 뜻을 마음에 담으며, 지금 시대에 맞게 생활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표징을 제대로 읽으면서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밖에는
따로 보여주실 것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요나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며 하느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알아보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표징입니다.
지금 자기들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 역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맞게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그 활동을 위해 많은 예언자를 나의 이웃으로 보내셨습니다.
내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웃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 예언자를 받아들여서 구원되었던 니네베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그들을 받아들여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완고함을 벗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방인 성읍인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들려줍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여기서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의 병렬 구문에 따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군중이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징을 요구하며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친
‘회개의 때’에 대한 표징이요, 고래 뱃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나온’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당신께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으로
‘구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을 읽을 줄 아는 믿음의 눈’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적을 찾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솔로몬왕 때, 스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 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스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 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점심 먹고 잠시 쉬려고 하는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본당에 교적은 없고, 성당에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병자성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햇빛은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골고루 비춘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본당에 교적이 없어도, 성당에 나오지는 못했어도
어머니를 위한 아들의 효심이 고마웠습니다.
저는 병자성사 준비를 하고 형제님과 함께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92세의 어머니는 기력이 없었고, 이제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못 하지만, 어머니는 사제가 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성체를 영해 드리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며 웃었습니다.
형제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형제님의 사촌 형은 저의 신학교 선배 사제였습니다.
저는 선배 사제와 신학생 양성을 위해서 함께 고민했었습니다.
지역 교육 담당 신부로 있을 때, 지역 교육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했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지 않으면서 어머니를 위해 병자성사를 청하는 것이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니가 병자성사를 받았으니, 앞으로 성당에 잘 다니겠습니다.
어머니가 저의 신앙을 위해서 마지막 가는 길에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형제님은 어머니를 위한 장례미사를 청하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도 않았는데 성당에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위해서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 우리의 재능, 우리의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어도,
비록 우리가 신앙생활을 게을리했어도, 비록 우리가 인색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따뜻하게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희 죄를 눈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희 죄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요양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이 침상 밖을 나오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습니다.
그럼에도 어르신은 자꾸만 침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걱정하였습니다.
어르신이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령으로 제대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이유를 찾으면 10가지도 넘었습니다.
다들 안타깝게 바라볼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입니다. 새로 온 막내 간호사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신발이 작네요.’ 보니까 할아버지의 신발이 정말 작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드렸습니다.
어르신은 힘은 들지만 신발을 신고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다녀오셨습니다.
걷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은 사람들의 눈에 할아버지는
치매 환자였고, 걸을 수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은 막내 간호사는 할아버지의 신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던 요나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롭도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잘 나갈 때 조심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비슷한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받은 요나가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 본들 뭐 하겠어? 귀 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
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 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히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
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
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 천 년 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앗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표징은 지혜를 찾는 이들의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요즘 저희 성당에 저에게 안수를 받겠다고 많은 분이 타 본당에서도 찾아오십니다.
저는 책도 좀 읽으라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안수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책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저도 책을 싫어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성당 성물방에는 읽을 책이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표징만 요구하고 지혜는 추구하지 않는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레지오도 교본에 영적 독서를 하라고 하는데,
그냥 교본 공부만 하고 영적 독서는 하지 않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예수님께서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을 악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된 사랑과 신뢰 없이 결과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찾지 않고 표징만 바라는 것은
복권을 사지 않고 당첨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1950년대 초까지 육상계는
"인간은 절대 1마일(약 1.6km)을 4분 안에 달릴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육상선수 로저 베니스터(Roger Bannister)는
그 벽을 깨기 위해 도전했습니다.
베니스터는 1929년 영국에서 태어나, 육상선수로서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꿈도 키우며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체력과 호흡법을 연구했고,
특별히 과학적 훈련 방법을 고안해 반복적으로 시도했습니다.
바쁜 의대 생활 속에서도 매일 시간을 쪼개 훈련하며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1954년 5월 6일, 마침내 베니스터는
옥스퍼드의 한 경기장에서 역사적인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초반부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아 달렸습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그는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결국 3분 59.4초의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세계 최초로 '1마일 4분 벽'을 깨뜨렸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불가능의 벽을 뛰어넘은
베니스터의 지혜와 노력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공 이후 1년 동안 여러 명이 같은 벽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그 모든 것으로 깨달음을 얻어라." (잠언 4,7)
기적은 먼저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과 성취는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키가 작습니다.
"키가 크면 믿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건강하게 몸을 관리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가 찾아야 할 지혜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수천 번 실패를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노력 끝에 마침내 전구가 세상을 밝혔습니다.
전구를 개발하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면서 청해야 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는 서로 관계를 맺는 지혜를 배웁니다.
어린 왕자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막 여우를 만나려고 그 먼 길을 여행한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별에 있는 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느님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해 주는 심부름센터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기적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적을 얻기 위해 어린 왕자처럼 노력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게 되는 참다운 표징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고정원 씨처럼. 이것이 하느님의 표징을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지혜를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 지혜가 저로서는 '하.사.시.'였습니다.
이 지혜를 찾지 않았다면, "다~주었다."라고 하시는 분을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징은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표징이 용서되지 않는 사람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표징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사랑과 자비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만 바라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찾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의 이해를 도우려면 앞서간 대목을 함께 읽어보아야한다.
예수께서는 루카복음에서도 어제 마태오복음(6,7-15)에서와 같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셨고,
아버지께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청원하라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마귀가 들린 언어 장애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보이셨다.(11,1-14)
예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만큼 의구심도 컸다.
사람들은 예수의 능력을 의심하여 더러는
‘예수가 마귀의 두목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들을 쫓아낸다’(11,15)고 하였고,
더러는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달라.’(11,16)고 요구하였다.
어떤 여인은 예수를 哺乳한 어머니를 찬양하기도 했다.(11,27)
이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여기에 기적 이상의 볼거리를 즐기는 유다인들이 가세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인정이 될만한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업적들을 마귀짓거리로 몰아붙여 貶下하려는 그들이다.
참으로 고약하고 야박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 악할까!”
이 말씀은 고약하고 야박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診斷이다.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이는 악한 세대로 진단된 사람들에 재란 예수님의 處方箋이다.
예수께서는 좀처럼 믿지 못하고 하늘의 기적까지 요구하는 사람들이
악한 ‘不信의 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하셨고,
이 병에 대한 藥箋으로 ‘요나의 기적’을 처방하신 셈이다.
사실 요나의 기적은, 기적이 아닌 기적이다.(요나 2,1-11; 3,1-10)
이 처방전을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니느웨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기적을 보고 회개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일어났던 일은 하느님께서 요나를
그들에게 파견하였던 일과 파견된 요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었다.
이 외침 하나로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기적과도 같은 것이 된 셈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써 주신 처방전의 참뜻은, 요나의 니느웨 방문이 곧 하느님의 현존이요,
그의 외침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의 현존이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요나의 사건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기적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 또한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기적의 표징이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표징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현존보다 예수님의 현존은 더 실재적이며,
그들의 외침과 지혜보다 예수님의 말씀은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은 이미 예수 안에 先在하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져 있을 것이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의 세대가 비록 불신하는 악한 세대로 진단을 받았지만
처방전에 따라 약을 잘 복용하여야 한다.
그들이 해야할 일은 요나와 솔로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께 대한 선택이다.
사순시기는 표징을 요구하는 시기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표징을 잘 읽어야 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의 과제 또한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