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에스’를 향하여 첫 걸음
알바르게 주인과의 불쾌한 감정을 훌훌 털고 하늘을 쳐다보니 비는 그쳤으나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가까운 산 능성에는 비안개가 자욱하다. ‘생쟝 피드포르’에서 ‘론세스바에스’까지는 25km 경사로를 감안하면 32km (하루 동안 총 1400m의 오르막을 걷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7km 를 더함) 장거리다.
'전체 순례길에서 가장 길고 험난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구간'이라는 가이드북의 정보에 첫 걸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특히 이 구간은 프랑스 라폴레옹이 스페인과 반도 전쟁 중에 부대를 이끌고 드나들 때 즐겨 찾았던 길이라서 ‘라폴레옹 루트’라 하며 중세 순례자들이 숲속의 산적을 피해 선택한 길이라 전해온다. 하지만 일기가 불순할 때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출입을 통제는 경로다.
“인생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사는 거다”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The Way’에서 주인공의 아들이 실종하여 조난당한 곳도 이 구간이기에 친구에겐 애써 웃음을 지여 보이지만 내심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가자 친구야!”
‘순례길에서 서로 묵언하자’고 약속했기에 웃음을 지어보이자 덩달아 친구도 고개를 끄덕인다. 20대 학창시절에 만나 40년을 넘게 절친으로 지내다 보니 눈빛 하나면 모든 감정이 교류되어 더욱 묵언해 보고 싶었다. 남자들도 마음 맞는 친구와 긴 시간 여유가 생겨 이야기 하다보면 전혀 불필요한 군대이야기 까지 꺼내는 속성은 종일 애기하다 헤어지면서 다시 전화를 꺼내드는 주부들과 다를 봐 없기에 가능한 순례길 만큼은 그 동안 못다나눈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나아가 낯선 타국의 순례자들과 교류하기 위해 제안했지만 나도 친구도불편하고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숙소를 나와 옛 성문으로 사용했을 아치형 게이트{포르트 생 자크)를 벗어나니 밤새 내린 빗물이 ‘나브 강’에 넘칠 듯 흘러내려간다. 순례길에 모든 시름과 액운이 나브 강물에 실려 가길 빌어본다.
길목마다 가리비 표식이 있어 제주도 올레길처럼 손쉽게 발길을 인도한다. 동내 어귀가 끝나자 마주치는 양때 목장이다. 얼굴 부분만 시커먼 검은 털을 스카프처럼 두르고 뿔은 버팔로처럼 앞으로 구부러져 있는 ‘마네크’란 양이다. 하얀 양만 보다 얼굴이 시컴하니 순한 모습은 아니지만 저 양 젖으로 만든 이곳 치즈 맛이 일품이라 한다.
일요일 아침이라선지 마을을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두어 시간쯤 스페인 국경 남서쪽으로 향하여 몇 개의 구릉을 지나는 동안에도 만난 것은 목장의 양때와 젓소들 그리고 유일하게 코란도 스포츠 같은 농촌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물차 한 대가 전부였다.
처음으로 운토(Huntto) 이라는 지역의 알베르게를 만났다. 식수통에 물을 담으며 주위를 살펴보니 발아래 비안개로 희미해진 푸른 목장 지대가 펼쳐 있다. 구릉마다 목장의 빨간 지붕들이 보석처럼 푸른 초원에 점점이 박혀있다. 알프스에서나 볼 수 있는 전원적인 풍경이다. 도착 첫날 이곳의 정보를 사전에 알았드라면 이곳 알베르게에서 머물다 출발하는 것이 오늘처럼 긴 여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보니 오늘 순례길에 필요한 점심과 간식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어제 도착하여 동내 한 바퀴를 돌아보아도 가이드북에 있다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은 토요일 오후라 모두 문을 닫았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더욱 열린 곳은 없었다. 행여 이곳 알베르게에서 구입할 수 있는 품목이 있나 둘러봐도 판매하는 물품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 길목에 레스토랑이 있다는 정보만 믿고 발길을 돌려본다.
지금까지는 포장도로였지만 지금부터는 황토길을 따라 산길을 넘어간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판초우의를 뒤집어쓰니 몸이 답답해지고 신발엔 흙이 달라붙어 여간 힘들다. 예당초 8kg으로 조절했던 배낭에 욕심으로 하나 둘 추가로 담은 물품들이 10kg 배낭 어깨끈에 더욱 조여 온다. “앞으로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만을 챙기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체험하는 고난 훈련의 시작이다. 간간이 지나가는 순례객들과 나눈 ‘브엔 카미노’라는 짧은 인사 말 이외 적막함이 숲속 비안개처럼 깔려있다.
앞서가던 친구가 한참 뒤 처져있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넋이 나간 모양이다. 신발 아래 이름 모른 풀꽃들이 빗물을 머금고 빛나고 있다. 들꽃들이 물방울을 머금고 연분홍색 비취색 형형색색으로 반사하며 아름답다.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에 이마에 흐르든 땀방울이 식어간다.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가꾸는 이 없는 천상의 정원이다.
갑자기 아침에 자신도 모르게 억울해하며 주체하지 못했던 감정을 생각하니 부끄러워진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일은 어제 저녁 숙소를 정할 때부터 예견되었던 것 같았다. 8-10명의 다인실에서 1인당 10유러씩 내고 코골이 땀냄새에 시달리는 것보다 10유러씩 더주고 안락하고 편한 투윈 베드에 지내는 것이 더 보편적 경제적이라는 가치기준으로 순례 첫 밤을 택했던 것이 원인이였다. 저 집단으로 피어있는 들꽃들이 “인생은 선택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앞으론 같이 가자. 저 순례자들과 같이...
11시가 다 되어 포장도로와 만나는 지점의 오리송(Orisson)알베르게가 보이면서 멀리서 부터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가 난다. 아침에 버릴 수는 없어서 먹는 등 마는 둥 마신 누룽지 한 컵으로 3시간 이상 땀 흘리며 걸었으니 시장하기고 했다,
레스토랑 내부엔 시골 장터 식당처럼 산속 특유의 간편한 탁자가 낯선 사람과 함께 사용하도록 8개가 놓여있다. 벽에는 사냥으로 포획한 짐승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박제되어 걸려 있다. 20여명의 순례자들이 차례를 기다렸다가 음식을 가져온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메뉴는 간편식이다. 토마토에 치즈가 들어간 스프와 바게트 빵 그리고 와인이 전부다. 장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런 곳에선 비싼 가격이라도 먹음직한 음식을 팔면 더 수익을 올릴텐데... (나중에 알았지만 순례자 들이 아침 점심땐 그런 레스토랑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이럴 땐 갈비탕이나 뜨끈한 곰탕이 최고인데 그래도 따뜻한 토마토 스프가 들어가니 피가 더워진다. 붉은 와인이 들어가니 생기가 돈다. 한잔 더 하고 싶어도 아직 절반도 못 왔으니 빵으로 배를 채우고 갈 길 재촉하며 일어난다.
다시 비는 내리고 바람까지 분다. 이제 인적이 끊겼다. 다시 아스팔트도 끊겼다. 계속 자갈과 바위가 깔린 험한 오르막길이다. 양때들도 궁둥이만 보이고 고만고만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다. 앞서 가던 순례객들이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1200고지를 넘으면서 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앞으로 향하는 길 오른쪽 편은 급경사로 자칫 미끄러지면 한참 밑으로 굴러 다치게 생겼다. 마땅히 비바람을 피할 장소도 없이 길은 이어진다.
16KM 지점에 있는 십자가 (Cruceiro)가 보인다. 가이드북에는 ‘레이자 아태카봉’과 ‘골 데뱅타르태아’로 이어진 환상적인 피레네 산맥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했는데 안개로 10여m 앞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가는 친구가 비바람에 판초우의에 묻혀 구도자의 모습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셔터를 누른다.
한참이나 거친 바위 길을 돌아 스페인 국경에 다다르니 길을 잘못 들었다가 되돌아오는 십 여명의 브라질 순례자들 속에 부산에서 왔다는 여학생 두 명이 끼어있다. 어린 나이에 힘든 순례길을 찾은 온 그들이 가상하고 대견하게 보였다.
어제 기차 칸에서 만난 프랑스 순례자도 눈에 띈다, 70 고령에 DSLR 카메라를 메고 1인용 탠트까지 들고 있어 눈에 확 띤다. 카메라도 무게가 만만치 않지만 그보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며 혼자 밤을 지셀 생각으로 탠트를 들고 왔을까? 중세 이래 이 길을 지나갔던 많은 순례자의 마음가짐을 생각해 본다. ( 다음 계속)
첫댓글 아름답지만 고행길을 잘 담았군요~
무거운 배낭을 맨 순례자와
이슬을 가득 머금은 꽃들이
저절로 유혹을 하며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다음 여정이 기다려 집니다^^*
일년도 안되어 다시 걷고 싶읍니다.
천상의 화원이란 표현이 맘에 와 닿습니다. 걷고싶은 충동 저도 느낍니다. 글 속에서 함께 따라 걷겠습니다.
첫날 이지만 모든 피로를 다 잊게했던 길이였습니다.
한없이 인간이 작아지는 풍경이로군요. 직접 마주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멋집니다.
자신이 자연 속에 한 송이 들풀이였음을 알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