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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장 그날 밤
단자가.
쌍둥이로 태어난 도신과 도귀의 아버지는 원래 왜인(倭人)이
었다.
왜국(倭國)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로 태어난 그
는 가난을 벗어날 방법으로 칼을 잡았다.
도적질을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장에서는 유명하던 삭
정일도류(索情一刀流)의 도장에 하인으로 들어가 천신만고 끝에
정식 제자가 되어 도를 배웠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무사가
되었다.
도장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출세를 해보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번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연 가마쿠라[鎌食] 막부
(幕府)가 무너지고, 무사 출신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가 연 무로마치[室町] 막부가 일어나던 시대, 권력은 귀족에게
서 신흥 무사 계급에게 넘어오던 때였다.
청운의 꿈에 부푼 그도 그런 출세의 길을 타 보려 했던 것이
지만 시골 도장 출신의, 그것도 농부에서 하인으로, 거기에서
다시 무사로 올라온 그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뗬 번의 좌절을 거쳐 청춘의 힘은 찐이고, 가슴속에 품었던
웅지도 그와 함께 꺾여 눈앞에는 외로운 중년의 나날들만 남았
을 때, 그는 상처투성이의 왜구(倭寇)가 되어 있었다.
술과 약탈, 그리고 살육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그들이 대개 그
렇게 가듯이 배신의 아픈 상처와 함께 바다에 던져진 그를 백리
극의 조부가 구했다. 그리고 새 삶이 시작되었다.
백리가의 가신으로 아내도 구해 살던 그에게 또 하나의 좌절
은 도신과 도귀, 두 형제의 탄생이었다. 젊은날의 방탕의 결과
인지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던 것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지나치게 말을 늦게 배우고, 그의 손뼉이나
목소리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낫을 들고 아
이들을 산으로 데려갔다. 험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고생을 덜어 자는 뜻이었다.
그런 그를 백리극의 조부가 잡았디.
--그런 아이를 얻은 것도 네 업보(業報), 한 사람의 구실을
하도록 키우는 것이 그 업보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그는 고뇌하다가 낫을 버렸다. 그리고 그 뒤부터 아이들에게
매달렸다.
귀 대신 다른 감각을 키우고, 말 대신 손짓을 가르쳤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쓸모있는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는 쓸모있는 인간은 두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되었
다. 랄 솜씨와 충성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손짓과 감각보다는
이쪽이 쉬웠다.
그래서 도신과 도귀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 그 도신과 도귀는 밤이 깔린 단자가를 걷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똑같은 모양의 칼을 똑같은 모습으로
들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걷고 있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
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이 그리 보기 좋은 인상이 아니요, 걸음겊
이는 박자라도 맞추둣 일정해 왠지 공포스러운 분위기까지 감돌
고 있었다.
낮의 단자가도 소란스럽지만 밤도 그에 못지않았다.
오색찬란한 비단천들을 거리에 내걸은 단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이로 비단잉어들처럼 떼지어 걷는 여인들이 있고, 부
드럽고 통통한 손으로 주판을 퉜기는 상인들의 은근한 유흑이
있다.
혹은 비단을 들고, 흑은 수레를 밀며 분주하게 오가는 점원
들. 그 사이로 먹을 것을 담은 담가(擔架)를 메고 손님을 부르
며 걷는 상인들.
비단 같은 섬섬옥수가 살며시 만져 보는 비단천들은 손가락에
삼겨 들 듯 부드럽게 흐르고, 새로운 무늬, 새로운 색깔의 비단
들을 보여 주는 상인들의 목소리 역시 그렇게 귓가에 감겨 들고
있었다.
그 틈을 헤치며 도신 도귀가 나타났다.
그들이 걷는 곳마다 거리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돌변했다. 그
들의 몸에서 흐르는 싸늘한 냉기가 후덥지근한 양주의 억름 밤
거리의 열기를 순간적으로 식혀 버렸다.
그들을 중심으로 한 반경 삼 장여의 공간에는 마치 겨울의 삭
풍과도 같은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곱게 성장한 여인들과, 비단천으로 온몸을 휘감은 부호들, 심
지어는 담가를 둘러맨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그 기세에 질려
분분히 길 옆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그들은 거리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천천히 걸어갔
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들은 돌아섰다.
그들은 다시 반대편 끝을 향해 되걸어오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 똑같은 모양의 칼, 똑같은 자세, 똑같
은 걸음걸이.
박자는 변함 없었지만 발 소리는 더욱 커진 것 같았다. 한걸음
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더 강렬하게 귀를 돠고드는 발걸음 소리!
그들을 휘감고 몰아치는 찬바람은 이제 반경 오 장으로 범위
를 넓혔다.
그들을 향해 두 명의 사내가 다가갔다.
작은 청색 모자를 쓰고, 청의(靑衣)에 붉은색 배갑(背甲;겉옷
의 일종)을 입었다. 허리에는 청색 천으로 만들어진 띠, 청사직
대(靑絲織帶)를 매어 포쾌라는 신분을 과시하는 듯한 두 사내.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둣 도신 도귀를 아래위로 꼬나보며 다
가들던 그들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켕기는 듯한 기색
이 되었다.
그들의 걸음은 점차 느려지고, 보폭도 좁아졌다. 그러나 도신
도귀의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이목구비를 명확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고, 그 눈빛
의 싸늘함을 느끼게 되고, 왼손에 움켜쥔 도갑(刀甲)의 투박함
이 그 속에 담긴 칼날의 !리함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급기야 서로의 콧김을 느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워지자 포쾌들
은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한걸음씩 물러서서 길을 비켜 주었다.
도신 도귀는 표정의 변화없이 그들의 사이로 걸어갔다. 포쾌
들은 굳은 얼굴로 한걸음 이상은 도저히 더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결의를 보이는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살기를 보이지는 않는데도 가슴에 파고들었다가 등골을 흔들
고 지나가는 섬뜩한 기운!
도신 도귀가 포쾌들의 세 걸음 뒤까지 지나갔을 때, 그들은
식은땀을 홀리며 이미 한걸음 더 물러서 있었다.
법의 집행자들인 포쾌들이 면목을 세우지 못하고 총총히 사라
!자 단자가의 손님들 중 절반이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누가 한가하게 비단을 고를 수 있단 말
인가!
도신 도귀는 그렇게 천천히 거리의 끝까지 걸었다. 그리고 다
시 또 돌아섰다.
찬바람은 다시 한번 단자가를 가로지르려 하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밤새도록이라도 단자가를 오르내릴 것 같은 기세
의 그들, 그들의 앞에 몇 사람이 나타났다.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고 있는 점원 행색의 사내들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손에 병장기를 들고 있
는 다섯 명의 사내들.
그 중 하나가 미소를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좋은 비단을 찾고 계신 모양이군요. 보여 드릴까요?"
그의 손이 단자포와 단자포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가리켰다.
다른 네 사내가 그 손과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진(陳)을 짜듯이 도신 도귀를 둘러싸고 있었다.
생문(生門)은 손이 가리키고 있는 골목밖에 없는 그런 진이었다.
도신 도귀는 아무런 반항의 기색도 없이 그 손이 가리키는 방
향으로 걸었다.
처음의 사내가 앞장서고, 그 뒤로 도신 도귀, 다시 그 뒤로
네 명의 사내들이 단자포 옆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을 가질 사람은 몇몇 관계자들을 빼고는 없을 것이
었다.
이런 일은 보지 않고도 그 원인과 결과를 짐작할 수 있는 것
이니 말이다.
그러나 가끔 세상에는 예외가 있고, 그런 예외가 있어 세상은
더욱 재미있 돌아가는 법이다.
"재미있지 앉아?"
그녀는 그리 튀어 보이지 않는 모자에 면사를 드리워 얼굴을
반쯤 가린 모습이었다. 약간 긴 듯한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난
양손에 낀 검은 장갑만 아니라면 여기 단자가를 걷는 다른 여인
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모습.
그러나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드러난 얼굴만으로
도 대단한 미녀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옆에 선, 그래서 그녀가 물어 본 말에 대답할 위치를
가진 사람은 역시 비슷한 분위기의 소녀였다. 비교적 간편한 옷
을 차려 입고, 등에는 손잡이에 진주를 박은 보검을 맨 소녀.
두 소녀 공히 간소한 복장이었지만 천은 최고급 비단을 사용
해 지은 것이라 적어도 이곳 단자가에서만은 최고급 손님으로
환영을 받을 만한 복장이었다.
그렇기도 한 것이 그녀들은 양주부에서 내노라 하는 부호들의
여식들이었던 것이다.
검은 장갑의 소녀는 마상란.
피진장주 철권 마종의 손녀이자 양주쌍교의 하나로 일컬어
지는 재녀(才女)였다.
다른 하나는 상관청조(上官菁潮).
유성쌍인부(流星雙刃斧)로 유명한 양주의 토착 무림 세력인 옥
정산장 장주 상관향(上官鄕)의 여식이었다. 도끼는 여인이 다룰
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멀리 사천에 위치한 아미파(峨嵋派)
에까지 가서 검술을 배우는 중에 집에 잠시 돌아온 소녀였다.
배경이 비슷하고, 가문끼리 친분이 있어 어려서부터 친했는데
오랜만에 만나 같이 단자가로 구경 겸 물건도 살까 해서 나온
참에 도신 도귀를 본 것이다.
그녀, 상관청조가 마상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신선한데! 상인들에게서 돈을 울거 낼 작정이었을까?"
"글쎄?"
마상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지 거리를 몇 번 왕복하는 것만으로 돈을 긁어 낼 수 있다
면 펀한 장사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돈을 노리고 했다기에는 지나치게 고수 같은걸?"
걷는 중에 기세를 드러내어 사람들을 위협한다는 것은 어지간
한 무공으로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생사를 건 격전을 앞두고나
발줄되는 기세인 것이다.
상관청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체다가 점원들도 보통 몸가짐은 아니었던 것 같아!"
도신 도귀의 기세에 눌려 말도 꺼내지 못하고 물러선 포쾌들
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그만한 기세 앞에 태연히 나서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상란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요즘 양주에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어."
"그 은발의 사내도 그렇고?"
"우리가 이대로 두면."
"양주의 두 악녀(惡女)가 아니지?"
두 소녀는 장난꾸러기의 그것 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
더니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 * *
철불사 뒷산.
그는 정말 대단한 식욕을 가졌다. 네 마리의 개 중에서 한 마
리는 조금 작은 것이긴 했지만 혼자서 세 마리를 먹는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그러고도 지금 그는 아쉬운 듯이 다리뼈를 핥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은 한 마리를 오기로 겨우 다 먹고서는 나무에 기대앉
은 챠 단한 식성의 돌중, 도연을 존경익 빛을 가득 담고시 뱌
라보고 있었다.
도연이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수북히 쌓인 뼈다귀 중 하나를
건네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먹을 게 적잖이 남았으니 시주도 드시게
특히 뼈와 뼈가 만난 자리, 그리고 등골 같은 경우는 빠개서 그
속에 있는 걸 먹어야 하네. 그게 진짜거든! 고기의 참맛은 뼈대
속에 있는 법이네. 그래서 사물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정수
(精髓)라고 하지 않나! 골수(骨髓)와 비슷한 말이잖아 빈승은
비록 무식해도 골수가 뼈다귀에 있는 것인 줄은 안다네."
혈문룡은 손을 저었다.
"나는 많이 먹었으니 화상이나 드시오."
도연은 눈을 뒤룩거리더니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술병 중에
하나를 들어 흔들어 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다시 다른 하나를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술병을 거꾸로 입에 물고 술을 들이켰다.
"카! 이 맛이야!"
그는 술병을 입에서 떼고는 소맷자락으로 입술 가를 문질렀
다. 잿빛 승포자락이 기름기로 번지르르한 것이 모닥불에 비쳐
보였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 들어 보았나?"
그는 혈문룡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
"한 톨의 쌀에 농부의 땀이 일곱 근은 들어가 있다는 것일세.
훌륭한 통찰이지. 그래서 우리 중들은 밥을 먹고 난 뒤에 바러
를, 아 자네는 바리라고 하면 잘 모르겠군. 우리 같은 중들이
쓰는 그릇이라네. 그 바리를 어떻게 씻는 줄 아나? 밥을 다 먹
고, 거기에 물을 붓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음식 찌꺼기를 깨끗
이 닦아 내지. 그 물을 버리지 않고 마신다네. 그러면 식사가
끝나면서 동시에 설거지도 끝나는 것이지. 더럽나? 한 톨의 쌀
도 헛되이 버리지 않기 위해 조사(祖師)들이 짜 낸 지혜라네.
이 뼈다귀인들……!"
도연은 뼈다귀를 잡고 흔들었다.
"또 술 한 방울인들 헛되이 버릴 수 있겠나? 개뼈다귀에 농부
의 땀은 안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개의 땀은 적잖이 들어가 있을
걸세. 이 험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이 개가 얼마나 노력했
겠나? 그걸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네."
혈문룡은 씁쓸하게 웃었다. 도연의 말은 어떤 땐 농담 같고,
또 어떤 땐 제법'이치에 닿는 말인 듯도 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화상은 불도를 닦고 있으니 그렇게 하시오. 난 내 마,음대로
굴러먹는 놈이라 먹기 싫으면 산해진미라도 안 먹고, 먹고 싶으
면 뺏어서라도 먹어야겠소."
바로 그 말을 받아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도연은 뼈다귀를 핥
는 것을 멈추고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 되었다. 한참 만
에야 그는 한숨을 내쉬고 뼈다귀를 던졌다. 그는 말했다.
"불법(佛法)이라고도 할 수 없고, 불법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
다더니! 굴레를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 바로 그 경지에
달하기 위해 그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그 모든 수행이 자
네 한마디보다도 못하군. 선연(善緣)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혈문룡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옆에 기대어 놓은 여
의색자창을 들고 일어섰다. 그의 눈빛이 정광을 발하고 있었다.
"잔치는 끝났소. 이젠 서로의 임무를 해야 할 때 같지 않소?"
도연은 혈문룡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혈문룡은 창의 중간 약간 아래부분을 한 손으로 잡고, 창끝을
도연을 향해 벌려 비스듬히 들고 있었다. 대결 직전의 예를 표
하고 있는 것이다.
도연이 손을 저었다.
"왜? 나와 싸우려고? 관두게. 빈승이 패배를 시인하지. 난 보
면 아네. 자넨 창술을 싸움터에서 배웠지? 사람을 하나씩 죽이
고, 자네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 때마다 창도 더욱 예리해진 것
아닌가?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무공은 분명 형편없는데 싸
우면 이기는 사람."
"소림의 명예를 지키러 온 것이 아니었소?"
"객적은 소리 그만하게. 중놈이 무슨 명예라는 말인가? 그저
그 핑계로 절에서 도망친 것에 불과하다네. 하던 얘기나 계속
들어 보게."
도연은 혈문룡의 말을 간단히 일축하고는 말을 이었다.
"분명 싸우면 싸울수록 요령이 생기긴 한다네. 그러나 그것이
정통으로 수련한 무공을 항상 이긴다는 것은 아니지. 싸움은 요
령만으로 하는 게 아니고, 또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으니까. 한
번이라도 요령이 통하지 않거나, 운이 나쁘면 그날로 그는 끝이
지. 실전 감각으로 싸우는 자에게 패배는 죽음이니까. 그런데도
끈질기게 살아 남고, 끝까지 이기기만 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
혈문룡은 이젠 자세를 풀고 서 있었다. 도연의 말은 그냥 잡
담 갈기도 했지만 그 안에 무학의 이치를 품고 있는 듯도 했다.
"난 그런 생각을 했지. 무공이 강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강
해서인 것은 아닐까, 라고 말야. 야수 같은 감각, 강인한 근골,
포기하지 않는 집념, 순간적인 재치와 무엇보다도 엄청난 투지!
그런 사람이라면 실전무예가 아니라 그냥 정통무공을 익혔어도
강했을 것이라고 말일세. 자넨 정통으로 수련한 적은 없지?"
혈문룡이 툭 던져 물었다.
"정통이 뭐요?"
"그래 그것도 말이 되네. 정통이 뭔가? 오랫동안 해오던 습
관이 정통입네 하고 행세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말일세, 왜
사람들은 그 방법을 오랫동안 써 왔을까? 정통이라 불릴 정도로
말일세. 그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도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를 세 마리나 삼킨 그의
가공할 만큼 나온 배가 천천히 움직이는데도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는 옆에 눕혀 둔 동곤을 집어 들었다.
"자넨 곤조도사(棍祖刀師)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혈문룡은 고개를 저었다.
도연이 설명했다.
"곤은 할아버지고, 도는 스승이라, 장병(長兵)은 곤으로부터,
단병(短兵)은 도로부터 수련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뜻일세. 자넨
곤은 수련하지 않고 바로 창부터 수련했지? 그게 정통에서 어긋
났다고 하는 것일세. 창은 찌르기가 주(主)가 되지. 곤은 때리
는 것이 주가 되네. 그러나 창에도 많은 때리기 기법이 있다네.
곤을 연마하지 않고 바로 창을 연마하면 아무래도 그런 때리기
기법을 소흘히 하게 되지. 창의 무궁무진한 효용 중에서 일부분
밖에 쓰지 못한다는 말일세. 하지만 곤부터 수련하면 곤, 즉 몽
둥이에서 파생된 모든 병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창을 비롯
해서 모(矛), 극(戟), 과(戈), 봉(棒), 장(杖), 간(竿) , 기(旗),
산( ), 저(杵), 심지어 독각동인(毒脚銅人)까지!"
도연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동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벽(劈)!"
큰 소리는 아닌데도 이상하게 가슴에 묵직하게 떨어지는 둣한
한소리 기합과 함께 어른의 팔뚝만큼이나 굵은 붉은색 동곤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하게 정면을 내리찍는 것 같은데 곤파(棍把;곤의 아래
끝)는 뒤로 휘둘러져 뒤에서 오는 공격에도 대비하는 동작이었
다. 발은 밟은 듯 밟지 않은 듯 내밀어져 무한한 변화가 그 속
에서 가능했다.
"도(挑)!"
뒤로 돌아갔던 곤파가 앞을 향했다가 다시 옆으로 돌아가며
파랍을 끊었다. 발은 어느새 다섯 절음이나 움직여 있었다.
도연의 몸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착( )! 륜( )! 삽(揷)! 슬(膝)! 교(絞)!"
도연의 곤은 시종일관 절도있고 강맹하게 움직여 갔다. 바람
이 그 곤의 끝에서 끊어지고, 터져 나갔다. 얼굇 보기에도 대단
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연은 곤을 옆에 세워 들고는 숨도 헐떡이지 않고 느긋한 어
조 그대로 말했다.
"이게 기본식일세. 제미곤(齊眉棍)이라 부르는데, 모든 곤의
기초지. 다음은 풍마곤(風磨棍)인데, 제미곤보다는 약간 보기가
나을 걸세."
그는 말을 맺기가 무섭게 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횡격(橫擊)! 하발(下撥)! 하소(下掃)! 삽보(揷步)! 개파(蓋
把)! 격파(擊把)! 륜벽( 劈)! 점곤(點棍)! 탈수(脫手)!"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아홉 개의 구결과 함께 동곤은 옆으
로 휘둘러지고, 아래에서 솟구치고, 아래를 쓸어가고, 위로 올
라가며 나선을 그리고, 정면을 찔러 휘젓고, 위아래로 큰 원을
그리며, 크게 휘둘러져 땅을 쳤다가 마지막에는 손에서 떠나 허
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콰콰쾅!
땅이 울리고 거목이 쓰러졌다. 하늘에는 잠시 먹구름이 밀려
와 덮은 둣 어두워졌다.
"어때? 조금 낫지? 하지만 마지막은 이것보다도 조금 더 낫다
네. 쇄정곤(碎鼎棍)이라 부르는데 소림사의 것이네. 효의 것들
은 강호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지."
그는 다시 곤을 잡고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연의 신색은 앞의 때보다 더욱 신중해지고, 곤은 더
욱 빠르고 영활킁!, 마치 춤추듯 움직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은 소리없이 움직이는 동곤, 그 붉은 동곤이 사방에 꽉
차 아무 곳으로도 빠져 나갈 구멍이 없는 것을 경이에 차서 바
라보고 있었다.
온몸을 휘감아 흐르는 전율은 무공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한
환희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무한한 무공의 깊이와 광대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를 그도 몰랐다.
도연은 보이지 않고 오직 곤과 그 곤의 끄트머리만이 눈앞에
꽉차 있는데, 혈문룡은 그 속에서 자신의 창이 넘지 못하던 벽
을 넘을 단서를 보고 있었다.
"무(舞), 전(轉), 선(旋), 포(抱), 착( ), 척( ), 등(騰),
발(撥), 요(搖), 붕(崩), 벽(劈), 압(壓), 소(掃), 란(欄), 평
(平), 헐(歇), 앙(仰), 점(點)! 이상 열여덟 가지의 구결이 요체
일세. 어떤가?"
어느새 움직임을 그친 도연이 땀 한 방울 홀리지도 않고 그를
보고 있었다.
혈문룡은 뭔가 감탄사를 발하려 했다. 싸울 필요도 없이 완벽
하게 진 것이다.
그러나 도연의 말이 먼저였다.
"멋있지 그럴듯해 보이지 하지만 내 무공은 자네 같은 전투
용이 아니라 시범용, 혹은 전시용이라네. 보기에는 멋있어 보일
지 몰라도 누구와 싸우는 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지. 말 그대로
그냥 줌이랄까?"
"그게 춤이라면 천하에 춤이 아닌 무공은 없을 거요."
도연은 피식 웃으며 곤을 집어 던졌다.
"그래, 옳은 말이야. 춤이야말로 무공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인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다시 배가
고프군. 괜히 멋을 부렸나?"
그는 다시 주저앉아 뼈다귀를 집어 들었다.
혈문룡은 그 앞에 멍청히 서 있었다.
도연이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 말대로 잔치는 끝났네. 그러니 그만 가게. 이대로 산에
서 자네와 둘이 밤을 세우면 정분 난 줄 알겠네. 술, 고기만으
로 부족해서 이제는 남색(男色)까지 ! 뭐, 그런 욕을 먹고 싶진
딴구먼. 잔치는 내일 계속하세."
"내일?"
"그래, 내일 또 놀러가겠네. 자네와 술이나 더 마시고 싶군
그래."
도연은 말을 하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이 영
락없는 땡중이었지만 혈문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괴짜구나 했는데 이건 대단한 고수 아닌가!
게다가 뭔가 속으로 품은 뜻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림곤의 비결을 보여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 눈치를 챘든지 도연이 미리 입을 벌렸다.
"사실은……!"
그는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절에 돌아가면 무서운 사람이 있어서 난 되도록 돌아가기 싫
네. 체질상 절이 내겐 어울리지 않아. 그래도 하는 수 있나? 승
복 입고 하루 몇 번 염불만 하면 그래도 재워 주고 먹여 주는
데는 절밖에 없는데. 그러니 이번 일은 두번 다시 오기 힘든 기
회지. 적을 알아야 한다 어쩌구 하면서 자네랑 이렇게 놀다가
나중에 자네와 내가 마주서서 점잖게 몇 마디 하는 거야. 이런
저런 멋있는 대화를 하면서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하다가 자
네가 한마디 하지, 소림곤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소, 라고. 그
러면 내가 그렇소? 그럼 됐소.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손발을 놀려가며 싸울 필요는 없지요, 운운 하면서 부처님의 지
비 어쩌고 하면 서로 멋도 있을 뿐 아니라 본산의 노땡초들도
트집을 잡진 못할 것일세. 어떤가?"
혈문룡은 묵묵히 서 있다가 한마디했다.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소! 오늘이 아니더라도."
도연은 의외라는 듯 눈을 껌벅이다가 피식 웃었다.
"싸우더라도 될 수만 있으면 시간을 끄세. 자넨 나를 빨리 돌
려보내고 싶은가? 이기든 지든 싸우고 난 다음에는 가야 한단 말
일세. 이 화상을 불쌍히 여기거든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게나."
혈문룡은 돌아갔다.
화상은 뼈다귀를 든 채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혈문룡의 모
습이 완전히 산을 돌아가 사라지자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만 나오라."
그것이 신호였던 모양이었다. 뼈다귀가 바닥에 떨어지자 그를
둘러싼 땅바닥이 천천히 들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덟 개의 인영이 나왔다. 청색 모;싸에 청
색의 상의, 바지와 신발도 청색 일색의 여덟 명이었다.
특이한 것은 하나같이 항아리처럼 뚱뚱하다는 것, 그리고 놀
랍게도 발이 땅에서 떨어져 둥둥 떠 있다는 것이었다.
도연이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의외의 일이 생긴 셈인데, 우리에게는 유리하게 돌아갈지 어
떨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군. 그걸 너희들이 조사해 줘야겠다."
그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그들 한사람 한사람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백리극과 등평, 진운, 혹수당주, 단자가, 모충국과 유소백을
맡고, 나머지 셋은 여태 하던 대로 하라. 다음 모임은 사흘 후
여기다."
청색의 인형들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렇게 뜬 채로 숲속
으로 사라졌다.
도연도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나도 슬슬 가 볼까? 정원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데!"
* * *
단자가.
방은 어두웠다.
한 점 빛도 새어들어오지 않는 밀실 같은 방, 답답한 공기 속
에 그는 서 있었다.
코앞도 분간하기 힘든 지경이었지만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방안의 기물 하나하나,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을 밝게 분간
할 수가 있었다.
사방 열 자가 채 되지 않을 방에 빽빽히 드러누워, 낡은 이불
몇 개로 몸을 가리고 있는 이 여인들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
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소리없이 움직여 방문을 향해 다가가며 여인들의 짓
무른 손과 아이보다 가는 팔목, 그리고 그 팔목에 감겨 있는 사
슬들을 보았다.
단자포의 빛과 어둠 중 어둠에 속하는 한 건물의 방안이었다.
단자포의 그림자, 음습한 그늘에서 양주부의 빈민들이 벌레처럼
살아가는 그 둥우리에 야광충이 와 있는 것이다.
방문 밖에는 또 다른 방이었다.
아까의 그것과는 달리 사방 오 장은 될 듯한 넓은 방. 방 곳
곳에는 화덕이 있고, 거기에는 채 꺼지지 않은 불씨들이 깜박거
리고 있었다.
황덕 위에는 가마솥, 그 안에는 물이 끓고, 바구니마다에는 은
빛이 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누에고치일 것이다.
그리고 방차(紡車), 사람이 앉아 발로 돌리게 되어 있는 몇십
개의 물레들이 흑은 실이 반쯤 감긴 채로, 혹은 빈 채로 서 있
었다. 여기가 단자포의 오색 영롱한 비단실들을 뽑아 내는 곳인
것이다.
방의 사방에 난 문은 방금 보고 온 것과 같은 벌레들의 둥우
리,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고 먹는 곳일 것이었다.
야광충은 조용히 그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무언가 분노와 같은 것이 그의 뱃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생각
해 보면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일들인데 왜
그가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잔인하다는 것을,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몰랐던 것인가?
사람이 비참해지면 얼만큼이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이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었다.
강하면 잔혹하고, 약하면 비굴하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그
런 모습은 이전에도 신물이 나게 보아 왔던 그였다. 사람이 사
는 것은 몽고나 중원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야광충이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자비롭고 동정심
많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여태 그의 손에 죽은 자
들의 시체가 일제히 일어나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럼 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인가?
야광충은 한 방을 지나가면서 문득 깨달았다. 그와 여기 갇힌
이들은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야광충 본인이 그렇게 운명이라는 사슬에 묶여 물레를 돌리고
있는 신세는 아니었던가?
로부 옹고트가 만들어 놓은 그 사슬에 묶여 어딘가로, 그가
아니라 로부 옹고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
닐까?
야광충은 사슬에 묶여 죽을 때까지, 아니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물레를 돌리고 증기를 쐬어 가며 실을 뽑아야 하
는 그들과 같은 신세인 것이다.
몇 개의 방과, 그 두 배 수의 문을 통과해서야 작은 마당이
나왔다. 그러나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건물들이 다닥다
닥 붙어 있는 이곳, 단자가의 뒤편 거리에 그는 서 있었다.
야광충은 요 근래 보기 드물 만큼의 살기에 타올랐다.
원래 단자가6! 주목한 것은 칠화회의 본거지가 여기였다는 말
을 듣고서부터였다. 마차 안에 겁없이 뛰어들어온 부화를 족쳐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통천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던 것
이다.
통천방의 끈은 장락방을 마지막으로 끊어진 줄 알았던 그에게
그 이야기는 의외였다. 그리고 그들이 흑수당이라는 단체보다도
야광충 그 자신에게 직접 주목했다는 사실은 더욱 의외였다.
칠화회 따위로 그를 암살하겠다고 하는 것은 서툰 짓이었지만
제법 핵심을 찌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야음을 틈탄 암살
이 아니라 백주에 덤벼든 것은!
우연이라면 묘한 우연이고, 우연이 아니라면 중요한 점이었
다, 낮에는 그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배후에 있
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는 문득 강렬한 욕망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벌써 때가 되었나?'
오늘은 7월 3일, 아직 피를 마셔야 할 때는 되지 않았다. 평
소에는 보름에 한번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그의 몸 속에
있는 마성은 진정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주기와 관계없이
피에 대한 욕망이 솟구치고 있었다.
오늘의 욕망은 강렬하게 인간의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야광충은 치밀어 오르는 욕망과 살기에 휩싸여 걸었다. 누군
가가 그 손에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초조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충분한 수의 사람이 죽어 나갈 것
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도신 도귀도 야광충이 보았던 것과 비슷한 장소를 지나고 있
었다. 그리고 그들의 칼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었다.
처음 희생자는 작은 마당이 나오자 말도 건네지 않고 암습을
가했던 안내인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의 호위들 네 명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돈 같은 것을 건네주고 도신 도귀를 돌려보낼
생각 같은 것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단자가의 이 음침한 골목,
어둠 속에서는 그들말고도 수없이 많은 시체가 나오고, 묻혀지
는데 두 구쯤 더 늘어난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랴 하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오늘 찾아온 자들, 도신 도귀도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
온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소란을 피워라!
야광충의 명령이었지만 말도 못하는 그들이 어떻게 소란을 죄
울 수 있는가?
그들이 잘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살인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살인은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무공을 지닌 자가 덤비면 그게 몇 명이든 죽여 버려라.
도신 도귀는 오늘밤, 그 명령을 충실히 지키려 하고 있었다.
또 하나 다행스러운 일은 명령을 지키기에 충분한 수의 사람
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
그들이 서 있는 그 작은 마당이 시체로 덮여 피가 웅덩이를
이룰 때까지 적들은 나타나고, 죽고, 또 나타났다.
도신 도귀는 능숙한 도살자들이었다. 그들의 칼은 망설임없이
움직여 돼지고기와 뼈를 나누듯이, 고기에서 기름을 발라내듯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사내들의 목숨을 육체에서 발라내어 버렸다.
그렇게 족히 이십인 분을 처리했을 때, 공격이 멈추고 하수들
이 물러났다. 그 자리에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 * *
용광사.
도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밤새 마신 술이 이제야 올라오는지 쉬이 중심이 잡히지 않았
다. 그는 오른쪽으로 반 걸음, 다시 왼쪽 후방으로 비스듬히 한
걸음을 옮겨 놓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그제서 앞이 바로 보였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
고 용광사 대응전에 선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웬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대웅전 앞에 내다 놓
았나 했다. 그 사내는 그렇게 던치갖 크고, 긱할 정도로 특이
한 모습의 사내였다.
온놈에 흰 무늬가 새겨진 검정 옷을 입고 있난 했는데 자세히
보니 벌거벗고 서 있는 것이 그랬고, 옷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
은 먹처럼 검은 몸에 새겨진 하얀 문신들이라는 것도 그랬다.
검은 몸의 사내는 그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띤고 마치 금
강역사상처럼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도연은 그가 바로 혹수당주의 뒤를 따라다니는 묘족의 사내
흑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 저런 모습으로 서 있더란 말인가?
부쩍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이 술기운을 눌렀다. 도연은 조용
히 흑웅에게 다가갔다.
혹웅은 누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연은 기회다 싶어서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동공이 움직이지 딴는다? 맹인은 아니라
고 들었는데?'
흑웅은 분명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정면의 도연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도취 상태 아니면 운기조식 이렇게 괴이한 모양으로 운기
조식을 하는 무공도 있나?'
도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흑응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마
치 소림의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의 한 동작 같기도 하고, 아
라한신권(阿羅漢神拳)의 한 동작 같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달마역근경(達磨易斤經)중의 근력호환(筋力互
煥)자세 같기도 하고, 아미파의 복마장(伏魔掌)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파의 어느
무공에도 없는 수련법이었다.
도연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끼고 두 손가락으
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문득 그의 머리가 맑아졌다.
"유가신공(瑜伽神功)!"
그는 순간적그로 외쳐 놓고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막았다.
아무리 중이 절을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다른 절의 중 아닌가!
게다가 속셈이 따로 있어서 찾아온 것이니!
오늘 도연은 용광사의 금불상을 훔치러 온 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흑응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그의 그런 생각을 십 리 밖
으로 날려 버렸다. 더 재미있는 일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애초에 불문의 무공들과 비슷해 보인 이유가 있군! 유가신공
이라면 말이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신공이라면 지금 내공연마 중인가?'
유가신공은 중원의 그것과 많이 달라서 여러 가지 기괴한 수
련법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도연은 문득 소림사에도 비슷한 무공수련 방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행중선(行中 )'이 그것이었다.
원래는 먹고 마시고 자는 일상의 생활 중에도 깨우침이 있고,
선을 수련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좌선보다 옳은 것
이다, 라는 가르침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소림의 고승들은 그
것을 무공수련 방법으로 바꿔 놓았다.
'돌중들 같으니!'
도연은 속으로 척를 차면서 생각했다.
행중선에 의거해 내공을 쌓으면 걸어가면서, 자면서, 심지어
용변을 보고 있는 중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방법보다 몇 배는 더 빨리, 강한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인데
지금은 아쉽게도 그 방법이 실전(失傳)되어 버렸다.
그러나 유가신공이라면 그런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도연은 다른 문제를 생각했다.
흑웅이 유가신공을 배웠다면 누구에게 배웠느냐는 것, 그리고
왜 다른 장소는 다 놔두고 억기 용캉사의 대웅전 앞 뜰에서 이
러고 있느냐는 것이다. 남이 보면 곤란한 일도 있을 텐데 그것
을 무릅쓰고 여기서 이러는 이유는?
문득 도연은 흑웅의 나신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엄청 크군!'
그때 혹웅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도여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술 먹은
모습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민활한 신법이었다.
그래도 흑웅의 눈동자보다는 빠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흑웅
은 누군가가 눈앞을 스쳐 간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모르겠다는 둣 포기했다. 그는 옆에
벗어 둔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는 대웅전 방향을 향해 깊게 절을
했다.
그 뒤에야 그는 용광사를 떠났다.
도연이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그의 승복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급한 김에
대웅전 마루 아래로 파고들어 숨었던 것이다.
그는 흑웅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흑웅이 방금 하고 간 동작과 비슷해 보
였다.
'야만족이 하는 짓을 낸들 어떻게 알아? 또 이 부처님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는 부처님이라고 말하다가 문득 오늘 여기 온 목적이 생각
났다. 십 리 밖으로 날아갔던 생각이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대응전을 향해 걸어가서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쇠사슬 소리가 들려 오는 것으로 보아 이중삼중으로 잠궈 놓은
모양이었다.
그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절간에 뭐가 훔쳐 갈 것이 있다고 이렇게 문단속을 해! 돌중
들 같으니라고!"
그 자신이 오늘은 뭔가를 훔쳐 가려고 왔다는 것은 까맣게 잊
고서 하는 소리였다.
"이 부처님에게 방법이 없지는 않지!"
도연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두 손을 문에 대고 그 자세
로 한참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철컹! 철그렁!
자물쇠 풀리는 소리, 그 다음엔 쇠사슬이 끌려 내려지는 소리
였다.
도연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두 번의
소리가 더 들렸다. 용팡사 대웅전 문은 삼중으로 잠겨 있었다.
그것을 도연은 내공으로 연 것이다. 대반야능력(大般若能力)
을 운기해서 격공금룡(隔空擒龍)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도연은 그렇게 풀어놓은 문을 잡아당겨 열며 깜빡 잊어버린
사실을 떠올렸다.
안에서 문을 걸어 놓았으면 용광사의 돌중들은 어떻게 들어가
는가, 하는 것이었다.
의문은 곧 풀렸다. 열려진 대웅전의 마루에는 십여 명의 돌
중, 승려들이 방편산(方便 )과 계도(械刀)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뭐든지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리를 떠는 듯 보이
는 것은 용광사만의 독문보법(獨門步法)일까?
중앙에 선 중년의 승려가 다리뿐 아니라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쳐, 쳐라! 귀, 귀신은 아니다!"
도연은 그대로 뒤로 몸을 던졌다. 용광사의 승려들이 대웅전
안에서 그들의 보물을 지키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던 일이었다.
그들은 아이 머리통만한 자물통이 혼자서 열리고 쇠사슬이 공
중에 떠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 것인가?
그대로 뒤로 굴러 대웅전 앞뜰로 빠져 나온 뒤 몸을 날려 담을
넘으면서 도연은 그 생각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홀렸다.
'그런데 혹시 날 아는 사람은?'
철불사의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워서야 도연은 그 생각을 했지
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다음날 정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깨울 때까지!
* * *
단자가.
"이, 이건 당신이 실수하는 거요. 나중에 반드시 뼈저리게 후
회하게 될 거요."
"후회한다?"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할말은 그게 아니다. 누가 너희들의 뒤를 바주고 있는
지를 말해야 할 게 아니던가?"
그의 발에 신겨진 검은 가죽장화가 한 사람의 입을 툭툭 건드
렸다. 희멀건한 얼굴의 중년 사내, 소가단자포의 주인인 소대야
(蘇大爺)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가죽장화와 그 주인인 은발의 사내를 올
려다보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은발사내의 눈에는 이런 경우 생
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서 오히려 두려
웠다.
무심히 그의 얼굴을 건드리고 있는 가죽장화가 지금 서슬 퍼
런 칼날보다도 몇 배 더 강칠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여차하면
발길에 으깨진 개미처럼 그를 으깨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내의 무심한 눈빛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귀에 야광충의 말이 다시 들려 왔다.
"구련자와는 어떤 관계지? 칠화회는? 그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었지?'"
소대야의 눈빛이 묘하게 움직였다. 그는 이제야 이 은발사내,
흑수당의 당주가 그들 단자포의 주인들을 납치해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이었던가?'
아무것도 모르고 닥달을 당하고 있을 때는 어디까지 알고 있
을까 몰라 두려웠지만 이제 목적을 알고 보니 조금 안정이 되는
그였다.
바쁜 중에 잠시 쉬려고 내실로 들어가는 순간에 그냥 잡혀 온
그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악 본 이 구석진 방안에는 그말고도 단자가의 내로랏
는 단자포 주인들이 거의 모두 끌려와 있었다. 거의가 그와 같
은 방식으로 끌려왔는지 영문을 모르는 눈치들이었던 것이다,
'나를 제일 먼저 닥달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알긴 아는 것
같은데!'
그는 한번 더 은발사내를 떠 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누군데 내게 묻는……?"
그는 야광충의 발이 잠깐 들리는 것을 보고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밀고 당겨 가며 말하는 대화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야광충의 발은 이미 그의 턱을 옆에서부
터 걷어차고 있었다.
팍!
"으아아!"
소대야는 턱뼈가 박살나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움직임을 가죽장화가 다시 막았다. 그는 고통으로 몸부림
치는 와중에도 두려움에 떨며 야광충을 올려다보았다.
야광충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발을 들어 그를 공 걷어차둣
찰 뿐이었다.
팍!
"우와아아아!"
가죽장화의 끝이 오른쪽 가슴팍으로 박혀 들었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졌을 것이다.
우드득!
손가락이 짓이겨졌다.
우드득!
발가락!
야광충은 그를 손가락부터 발가락으로, 거기에서 다시 위로 거
슬러 올라가며 그를 짓밟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죽지 딴는 고통!
가슴으로 직접 밀려오는 고통에 소대야는 눈을 까뒤집고 흔절
해 버렸다.
불행히도 그 혼절마저 길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에 떨며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혼절할 때 밟은 부분 바로 윗부분을
야광충은 밟고 있었다.
그는 존각의 휴식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타……타!"
소대야는 망가진 입으로 소리쳤다. 절규했다. 최대한 원래의
발음에 가깝게 말하려고 있는 노력을 다했다.
야광층의 발길은 그리 허벅지에서 멈추었다. 그 아래는 이미
너절너덜해진 상태였다.
"타앙천아--앙!"
소대야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야광충이 확인했다.
"통천방?"
소대야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흔절 직전이었다.
"단자가는 통천방의 것인가?"
소대야는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야앙……가아……자앙"
"양가장?"
소대야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아득한 나락이 그의 정
신을 삼켜 버렸던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야광충은 문쪽을 보았다. 거기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끌려온 나머지 단자가 상인들의 눈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조
력자가 온 것이다.
그들은 셋이었고, 하나같이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검을 들고 있었다.
제일 좌측의 인물은 백색 옷에 백색의 검집, 거기 꽂힌 백색
손잡이의 검을 들고 있었다.
중앙의 인물은 붉은 옷에 붉은 검집, 그리고 붉은 손잡이의
검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 인물은 검은 옷, 검은 검집, 검은 손잡이의 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검이 유난히 볼이 좁은 검이라는 것, 즉 헙봉검
(狹鋒劍)이라는 것과 검날의 색깔마저 각자의 색깔과 같다는 것
은 검이 뽑히고, 그 검봉들이 야광충의 목을 찔러 들어올 때에
야 알아낸 일이었다.
--칠화회가 중원 제일의 살수들이라고?
오늘 낮에 이통천에게 물었던 말이 야광충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이매십보를 써서 순간적으로 위치 이동을 했다. 희고,
붉고, 검은 세 개의 검봉이 그의 목옆으로 지나갔다.
--그 일곱 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들만큼 유명한 인물들이 또 있습니다. 사천에서 유명한 삼색
검(三色劍)이 그들이죠.
이통천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희고, 검고, 붉은 세 명은 그들의 뒤로 야광충이 돌아가자 손
을 돌려 겨드랑이 사이로 검을 뽑아 내었다. 세 개의 검은 굴
속에서 튀어나오는 뱀처럼 순간적으로 휘어지더니 쏘아져 나완
다. 야광충의 둥을 향해서였다.
--그들은 혈(血), 백(白), 흑(黑)의 세 가지 색으로 된 옷을
각각 입고 다니고 사용하는 검들도 그 색으로 통일해 들고 다닌
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호도 혈검(血劍), 백검(白劍), 묵검(默
劍)이죠.
야광충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등을 찔러 오던 검들
은 이제 그의 가슴팍을 향해 박혀 들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가
--살수라면 평소에는 정체를 감추는 것이 정상입니다. 숱하
원한을 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은 벌써 이십 년째 그
복장으로 다닙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죠.
살아 있다는 것은 그들아 강하다는 증거로는 촤상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야광충은 문득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야광충의 손이 묘하게 원을 그렸다. 그를 향해 찔러 드는 세
개의 검봉을 감싸 안는 원이었다.
한 순간 검봉이 그 원의 중심을 향해서 휘어졌다. 그대로라면
야광층의 손에 잡힐 찰나, 검들은 서로에게 부딪치더니 그 힘으
로 원을 빠져 나갔다.
칙! 칙! 칙!
야광충의 양쪽 어깨와 목덜미에 붉은 상처 자국이 생겼다. 야
광충은 이때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가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생각보단 강하군!"
회고, 붉고, 검은 세 명의 사내가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쓰러졌다. 야광충은 그들의 시체 위에 손에 들고 있던 각자의
머리를 띨구어 주었다.
순간적인 접전 동안 그는 세 사람의 목을 잘라 손에 들고 있
었던 것이다. 조화십삼수가 만들어 낸 조화였다.
그는 단자포 주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이들도 통천방의 인물들인가?"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도 양가장의 대리인이고?"
다시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유는 양가장, 통천방은 청부를 받고 당신들을 보호해 준다
는 것인가?"
그떻다는 대답이었다.
야광충은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질
문이 아닌 말을 했다.
"통천방은 이제 단자가를 보호할 수 없다. 그 자리를 흑수당
이 맡을 것이다."
그는 나갔다.
콰앙!
푸른 섬광과 함께 폭음이 울렸다.
도신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며 칼을 휘둘렀다.
도신의 검은 그를 향해 날아오는 푸른 섬광을 향해 순간적으
로 열여덟 번이나 칼질을 했다.
삭정십팔참(索情十八斬)!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삭정일도류의 몇 안되는 절초 중
하나였다. 웬만한 장력이나 기공도 기세를 꺾어 버릴 수 있는
칼질이었는데, 이 푸른 섬광에는 소용이 없었다. 단지 그 기세
를 어느 정도 주춤하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도신은 입으로 붉은 피를 쏟으며 몇 걸음을 더 물러서야 했
다.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도귀는 이때, 푸른 섬광에 옆으로 비껴 달려가고 있었다. 도
신이 정면으로 상대하는 그 순간에 푸른 섬광와 근원지를 베어
버린 것이다.
칼끝에 닿는 둔탁한 느낌.
'베었다?'
그냥 벤 것과는 어쩐지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에 무거웠다가
어느 한 순간 가벼워지는 그 절단의 느낌이 아니었다.
지금은 마치 굵은 나무 둥치를 반쯤 파고들었다가 간신히 칼을
뺀 것 같은 유쾌하지 않은 기분만이 손끝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살기 !
도기는 순간적으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가 옆으로 세 바퀴
를 굴렀다.
팡!
방금 그가 섰던 자리에서 육중한 폭음과 함께 홅먼지가 피어
올랐다. 분명히 비켜 갔는데도 뜨거운 느낌이 전해져 왔다.
상대는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 그가 혼자 나타났을 때 그들 형제는 약간 얕잡아 본 것
이 사실이었다. 혼자인 데다가, 외팔이. 게다가 얼굴에 반을 가
로질러 칼자국이 나 있고 그 칼자국 때문에 한 쪽 눈마저 사용
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런데 그가 손을 움직이자마자 쏘아 보내는 푸른빛 섬팡은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푸른 번개가 연속
적으로 쳐 오는 느낌이었다.
다시 푸른 번개가 그를 향해 쏘아졌다.
도기는 바닥에서 튀어 일어나며 칼을 휘둘렀다.
쨍!
푸른 불꽃이 튀었다. 칼이 부러져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다시 푸른 번개!
도귀의 눈 깊숙한 곳에 절망의 빛이 홀렀다.
그러나 이번 번개는 그에게서 빗나가 중도에서 방향을 틀었
다. 그 번개의 끝에 허공에 뜬 도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아까
물러났던 도신이 쌍둥이 동생 도귀의 위험을 보고 앞뒤 안 가리
고 달려든 것이다.
빠--앙!
도신이 달려들 때보다 더 빠르게 되튕겨 나갔다. 그의 손에
잡힌 칼도 허공으로 튀어오르고 있었다.
도귀가 뛰었다. 그의 손에 들린 반 토막 칼이 외팔이에 애꾸
사나이의 뒷목을 쳐 갔다.
사내가 뒤돌아 섰다. 그의 왼손이 뒤집어지며 도귀의 가슴팍
을 찍어 왔다. 그 손끝에 푸른 전광이 튀어오르고 있었다.
도신은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날려 갔다. 그의 눈에 도귀의
공격을 맞아 돌아서는 외괄이 사내의 등이 들어왔다. 그리고 허
공에 떴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그의 칼.
그는 오뚝이처럼 회전해서 좁은 마당의 한쪽을 막고 있는 홅
벽을 찼다. 그의 몸이 직선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내장이 뒤틀
리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지만 죽는 것보다
는 나았다. 그리고 지는 것보다도 훨씬 나았다.
도신은 허공에 다시 뜨고, 떨어져 내리는 칼을 잡아 아래를
향해 찍어 내렸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도귀를 향해 내밀어진 손에서는 푸른색이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귀의 가슴팍에 틀어박히려 하던 그 손은 종잇장
같은 틈을 남기고 멈추어졌다.
외팔이 사내, 뇌룡은 온몸을 떨며 뒤돌아보려고 했다. 목에
박힌 칼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그의 몸이 천천히 옆
으로 기울어 쓰러졌다.
그때 그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검은 옷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은발의 사내 야광충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야광충의 눈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뇌룡, 지옥성의 마지
막 싸움에서 그와 황룡와 협공에 그런 모습이 되었던 그 승룡은
그를 보는 순간 마지막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야광충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뇌룡의 비참한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중원에 들어온 지 칠 개월, 그 동안 끊임없이 잡으려 노력했
던 로부 옹고트에 대한 단서를 겨우 잡았다 싶은 순간, 다시 놓
쳐 버린 것이다.
아니, 아니었다.
여기에서 뇌룡을 발견했다는 것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의미
가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로부 옹고트가 이 단자가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는 그제야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도신 도귀를 바
라보았다. 괜찮은지 어떤지는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자존
심을 상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대신 그는 마당 한구석 어두운 그늘을 향해 말했다.
"나오지 않으면 끌어내겠다."
잠시 주춤거리는 기색이 있더니 두 명의 소녀가 마당 가운데
로 걸어나왔다.
마상란과 상관청조였다. 그녀들은 도신 도귀를 따라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야광충이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고 물었다.
"단자가와의 관계는?"
마상란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챈다.
"관계없다고 말하면 믿으실 건가요?"
야광충은 이 의외의 대답에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판단은 내가 한다. 단자가와의 관계는?"
마상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소녀는 피진장에 살죠. 한번 놀러와 보시면 여기 단자가와
저와의 관계는 그저 옷감을 팔고 사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야광충은 더 이상 물어 보지 않고 돌아섰다. 도신과 도귀가
그 뒤에 붙었다.
"마상란을 찾으시면 돼요."
상관청조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ㅈㄷㄱ~~~~~~~~~~~``````````````````
잘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