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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3일 사순 제1주간 목일
제1독서 : 에스 4,17(12).17(14)-17(16).17(23)-17(25)
복 음 : 마태 7,7-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아들에게
돌을 주는 아버지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빵을 청하면
거저 빵을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청한 것을 무조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좋은 것을
우리가 바라지 않거나 피하고 싶은 방식으로 주실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던 제 발목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전날 발목을 삐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병원에 간 저는 간단한 약 처방만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제 발목에 깁스를 하고,
이틀에 한 번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으라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더 좋은 처방을 준 의사 선생님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덕분에 저는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던 만성 염증을 관리하려면
발목 건강에 가장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게서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비록 십자가 죽음을 피하시고 싶었을지라도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의 표본을 따라,
청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일상에서 키워 가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90년대 이전의 생활상이 담긴 영상을 보게 됩니다.
학교 앞에서 팔던 불량식품을 먹고 싶어서 손수레 근처에 모여 있는 아이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있는 모습,
동네잔치와 같은 가을 운동회, 동네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도 보입니다.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산과 계곡에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해 먹는 등산객,
아무렇지도 않게 무단횡단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직접 살았던 저로서는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는데,
요즘의 어린아이들은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비칠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고 또 성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는 성장합니다.
과거의 불편함을 극복하면서 살기 좋은 곳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성장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과거의 나보다 못한 모습, 그냥 불편함을 간직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후회를 반복했던 것이 아닐까요?
세상이 성장하듯, 우리도 성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 기준으로의 성장만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돈, 명예, 세상의 지위 등의 성장만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잊지 말라고 하시지요.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이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사랑의 삶, 하느님과 일치의 삶, 평화의 삶을 사는 우리의 성장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뜻에 철저하게 맞추어야만 합니다.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이요,
나아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듯이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조욱현 토마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하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으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리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으로 설명하신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년간 있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끝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다쳤습니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경제는 망가지고, 재건이라는 명목으로 외국의 기업들이 들어올 겁니다.
전쟁에 큰 비용을 제공했던 미국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이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참된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손자병법에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한국도 지난 3개월간 큰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몸은 멀리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였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결의했고,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결의했고, 대통령은 탄핵당하였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도 비상계엄의 진통을 넘어서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우제’를 드릴 때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자동차가 달리는 데는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이 틀리면 빠른 속도로 갈지라도 목적지와는 멀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향’입니다.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청한다면,
타인의 재물과 명예를 억지로 빼앗으려고 한다면,
국가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국민을 도탄에 빠트릴 수밖에 없는 문을 열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시지 않을 겁니다.
설령 목적을 이룬 것처럼 보일지라도 끝은 늘 비극이 될 겁니다.
지향도 중요하지만 ‘인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르려야 할 것들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재물과 장수를 청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재물과 장수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이 백성이 바라던 자비를 베푸시고
천상 은혜를 내리시어 청해야 할 것을 올바로 알고 또한 청한 것을 얻게 하소서.”
에스텔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만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청하라고 하시며 그러면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청하지 않으면 주지 않으시는가?
인간사의 경우,
말하지 않으면 상대가 알지 못하니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두드리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겠지요.
그런데 하느님도 그러시느냐 이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샅샅이 다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아실 뿐 아니라 주시잖습니까?
그런데 왜 청해야 하고 찾아야 하고 두드려야 합니까?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불신의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가 아니라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않겠지요.
원하지 않으면 청하지도, 찾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아무리 주셔도 도무지 받으려 하지 않겠지요.
아무런 원의가 없는 사람이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원의가 없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난하지 않고 배부른 사람은 밥을 주십사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파도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으면 하느님께 청하지 않고,
인간에게 얻을 수 있는 사람도 하느님께 청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은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하느님밖에 아무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고,
하느님밖에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며,
나의 필요를 잘 아시고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에스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이 유일한 분이신가?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인가?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믿는가?
나의 필요를 다 아실 뿐 아니라 주시는, 좋은 분이라고 나는 믿는가?
그런데 만일 이런 믿음이 내게 부족하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내가 이웃에게 해주는 것이 주님께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청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받고 있나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남'은 이웃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주님께 청하라고 하는 것이니 주님도 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해 주시기를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웃도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때리고 와서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모에게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형제에게 그것을 주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친구들을 위해 빵 세 덩어리를 청하는 비유에서
만약 친구들이 없이 그냥 빵만 청했다면,
그 친구는 밤에 일어나서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이기적인 거인'은 사랑과 자비를 통해
결국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거인은 거대한 성을 지닌 자랑스러운 거인으로,
자신의 정원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정원은 아름답고 넓었으며, 봄이 오면
꽃들이 피고 나무들이 푸르러지며, 새들이 지저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인은 자기를 위해서만 그 공간을 차지하며,
어린아이들이 놀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렸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거인의 정원을 찾고 싶었지만, 그는 그들을 쫓아내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정원은 황폐해지고 봄의 기운도 멀어졌습니다.
나무들은 시들고 꽃들은 지고, 날씨는 추워지며, 정원은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 휩싸였습니다.
거인은 점차 외로움과 불행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인은 한 아이가 그 정원 안에서 뛰어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에게 마음이 풀리면서, 거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 아이에게 정원을 열어 주기로 결심하고, 모든 아이들을 다시 초대합니다.
그 순간, 정원은 봄의 기운으로 가득 차고, 꽃들이 다시 피고 나무들이 푸르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거인은 이제 자신이 이웃에게 나누지 않았던 사랑과 자비가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은혜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거인은 더 이상 그 아이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거인이 나이가 들었을 때 겨울임에도 흰 꽃이 핀 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으로 갔을 때 그때의 작은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 아이가 봄이 오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상처에요. 이제 내 정원으로 함께 가요 내 정원은 천국이랍니다.”
다음날 아이들이 정원에 와서 늙은 거인을 보았습니다.
하얀 꽃이 가득 핀 나무 밑에 누워 깨지 않는, 깊은 잠이 든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저에게 찾아오시는 분 중에서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최대한 들어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들 특징 대부분은 신자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신자들을 막 대하면 자신이 이야기하고 안수도 받으려는 사제가
자신들에게 그것을 해 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자신이 얻고 싶은 만큼 잘해야 합니다.
저는 ‘탕자의 비유’에서 돈을 다 탕진하고 온 둘째에게는 황소를 잡아주고,
자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한 첫째에게는 염소 한 마리 잡아주지 않은 것이 약간은 의아했습니다.
오늘 복음대로라면 형은 동생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도 몰라주고 동생을 비난한 형에게,
그가 비록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염소를 잡아줄 마음이 생길까요?
우리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기 전에 내가 형제들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는지,
무엇을 주고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