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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 12~25절/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 이적을 베푸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12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이 변화여 포도주가 되는 이적을 행하시고 예수의 가족과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옮겨간 것은 가나 혼인잔치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요한이 가버나움으로 이주한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표적을 보이신 이후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메시야로서의 사역이 수행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근거지였지만 이곳에서 오래 체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가버나움에서 얼마 있지 않아 떠난 것은 복음을 폭넓게 전하고자 취하신 조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정한 거처를 정하시고 사람들을 소집해서 복음을 전하시거나 전도한 것이 아니라 여러 동네로 이동하시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셨습니다. (마11;1, 눅4;43)
13~14절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울 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대인의 부패상을 부각시키며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과 죄악성을 깨우치기 위해 새로운 역할이 필연적이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절기입니다. 이때 예루살렘은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순례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성전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불법적인 행위들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목격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 안에 들어가셨다가 우연히 이러한 현장을 보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구별하신 성전에서 불법이 행하여지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타락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범죄는 제물로 받쳐질 짐승들을 팔며 돈을 바꾸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멀리서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희생제물을 직접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구해야 했습니다. 이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으므로 제사장들이 직접 적격여부를 심사하였습니다. 비록 흠이 없다할지라도 멀리서 가져온 경우 제사장들은 쉽게 트집을 잡아 불합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다시 가져갈 수 없는 제물을 헐값에 사들였으며 성전에서 비싼 값에 되팔았습니다. 결국 성전에서 파는 제물은 불합격을 받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하게 되었고 대제사장 무리들은 이를 이용하여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돈 바꾸는 행위는 많은 순례자들이 성전을 찾을 기회를 이용하여 매년 바쳐야 하는 성전세 반 세겔을 받쳐야 했는데 이방인 지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시용하던 화패를 가지고 와서 성전에서 사용되는 화패로 바꾸어야 했다.(마17;27) 유월절 환전소는 20일 전부터 예루살렘에 설치되었으며, 환전 수수료는 12.5%나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들이 자신들의 직권을 이용하여 이러한 일들에 관여함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돈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5~16절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들의 행악에 분노하셨고, 이런 예수님의 분노하는 모습에 아무도 항거하지 못하고 성전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의 장면이 소개된 바로 다음에 예수님이 화를 내고 채찍을 들고 분노하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왜 기적의 현장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고 야단치고 진노하는 모습이 소개되어 있을까요?
마태나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사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한 지 삼년만의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가나의 혼인잔치 다음에 소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메시아의 두 가지 모습, 즉 심판과 채찍, 진노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시에 성전의 타락의 중심에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볼 때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격렬한 투쟁의 삶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첨예하게 대립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갈릴리 가나에서 처음에 정중히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적을 베풀고 격려하십니다. 죄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를 심판하시고, 거짓에 대해 진노하고, 잘못에 대해 채찍질을 합니다. 오늘 이 두 종류의 모습을 요한복음에서 동시에 발견합니다. 참된 사랑은 죄를 덮어두지 않고 죄를 치워줍니다. 참된 용서는 잘못을 못 본 척 지나치지 않고, 그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를 대신 치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순교하고 희생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고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도 한국 사회가 외롭고 쓸쓸한 것은 교회가 순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내가 값없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자녀가 용서받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를 통해서 몇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함께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장면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보면 언제나 성전중심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삶의 구심점이 하나님, 말씀,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께서 교회를 중심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와도 교회를 생각하고, 세상에 아무리 좋고 훌륭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세상의 유명한 사상과 철학이 있어도 말씀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두 번째로 교회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행사를 많이 하는 것, 구제를 많이 하는 것,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깨끗함에 있고, 거룩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보시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 오시면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 궁금합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성전에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사용할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제물을 준비해 왔지만 오는 도중에 상처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짐승을 상처가나지 않은 것과 교환해서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환전소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로마의 화폐는 이방인의 화폐이기 때문에 하나님 집에 낼 때는 유대인의 화폐인 세겔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화폐를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일 자체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환전하는 과정에서 이익이 생겼습니다. 이익이 생기니까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예배를 지배하게 되었고, 성소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장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점점 심해져 제사장과 짜고 물건을 팔게 되었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장사에 우선순위를 두고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이익에 충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동기, 선한 목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이해관계와 맞물리고 이익이 생기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짐승처럼 변하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양과 천사같이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안에 강도의 굴혈을 만들고 있는 것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같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필요에 의해서 어떨 때는 음식을 팔기도 하고 농어촌에 있는 물건을 팔기도 하고 바자회를 하기도합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동기로 시작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순한 동기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물건을 파는 일이나 돈을 주고받는 일을 할 때는 열 번 스무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와 순수한 동기와 깨끗한 양심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예수님을 통해 배웁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신중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책망을 하지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파는 것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바꿔 예배를 잘 드리도록, 교회 성전세를 내도록 한 문제를 가지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에서 장사할 수 있느냐? 물건을 팔 수 있느냐?’ 를 가지고 문제를 삼습니다. 그것은 교인의 필요에 의해, 예배의 도움을 위해, 농촌 교회를 돕기 위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는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때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람을 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자기의 분노가 지나쳐서 사들에게 상처를 주고 도덕적 수치를 주는 일을 쉽게 합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진실이 규명되기 전에 신문에 내고, 사업을 망하게 하고,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파멸로 몰고 갑니다. 나중에 사실이 규명되더라도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습니다. 우리사회는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죽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1)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비둘기파는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예수님은 비둘기장을 열어 비둘기를 날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소와 양은 내쫓으면 잡아올 수 있지만 비둘기는 날아가면 잡아올 수 없기에 여기서 가져가라고 말씀합니다.(16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얼마나 신중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한 사람의 인격마저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2)또 한 가지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해서 제자들도 같이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메시지를 주는 일입니다. 그 인격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이것이 부부생활이나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네 번째는 영적 영향력입니다.
17절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제자들은 그렇게 겸손하고 사랑과 인자가 많았던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통해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저를 삼켰구나 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구나!’하는 영적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영향력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모든 사람에게 영적감동을 주길 바랍니다. 영적인 충격, 감동의 절정은 순교입니다. 순교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대신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적 영향력을 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18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 특별히 이해관계에 얽매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돌발적인 태도에 당황했습니다. ‘네가 도대체 누구냐?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우리에게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일을 하기위해서는 유대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성전에서 매매하는 일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권한을 부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을 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보내셨다면 초자연적인 표징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하는 일의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권위를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공박하기 위하여 이러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19~21절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이해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왜 당신은 그런 행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아주 재미있는 대답을 하십니다. 무려 46년 동안 지어진 어마어마한 성전,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성전을 가리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십니다. 46년이나 지은 성전을 헐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소리인데 예수님은 ‘내가 삼일 동안에 다시 일으키리라’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비유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알아들을 자만 알아듣습니다. 비유는 모든 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 있는 자만 듣습니다. 여기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한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예표적으로 말해 주지만 제자들을 포함해 아무도 이 메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절정입니다. ‘네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짓겠다.’(19절)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20절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하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리길 바라고, 복음과 구원의 비밀을 깨닫는 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망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소망이 없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장소였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비밀이 담겨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였고, 우주의 중심이었고, 하나님의 거룩과 순결이 지켜져 있는 장소였습니다. 믿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내가 바로 성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네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령의 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집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교회가 거룩과 순결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부활입니다.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삼 일만에 이 성전은 회복될 것이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부활시키셨습니다. 이것을 믿은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과 순결입니다. 예수님같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을 가득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2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깨닫게 된 시점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때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매시야란 사실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한 이방인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믿게 된 것을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구약성경의 권위와 동일한 권위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23~25절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유월절 명절은 니산월 14일이고 이어지는 무교절은 21일까지 7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 오셔서 유월절과 무교절기가 마치는 21일 이후까지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셨습니다. 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가 그분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표적은 초자연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의 이름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표적을 보고 예수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믿고 따르려는 생각이나 결단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인정한 데에는 예수를 통하여 물질적 이득이나 정치적 욕망을 이루려는 세속적 동기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 곧 인간의 감추어진 내면까지 속속들이 아신다는 사실은 예수님 안에 내재한 신성의 일면을 잘 드러냅니다. 사람이 속내를 정확하게 감찰하시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시139;1~3. 잠16;2. 살전2;4)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정확히 알고 계시므로 굳이 다른 사람들의 보충적인 증거를 들어 확인할 필요가 없음을 밝힘으로 예수의 신적 속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