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불펜조의 무리한 등판'
이건 사실 1995년 OB 베어스 우승때도, 2000년대 초반 미러클 두산때도 늘 베어스팬 사이의 화두가 됐던 주제였습니다. 어찌 보면 해묵은 논쟁이죠. 김인식 감독이 요 몇년 들어 부쩍 중간 투수를 무리 시키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제사 말씀드리지만, 지난 2004년말 김인식 감독 부임 소식을 들었을 때, "재임중에 불펜 투수 2~3명 정도는 다치겠다"는 생각과 각오, 솔직히 했었습니다. 그래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각오(?)를 했다는 얘깁니다. 원래 그 분 성향이 예전부터 그랬으니까요.
돌아보면, 1995년에 40경기에 등판해 101이닝을 던진 이용호가 팀 우승과 자신의 커리어를 바꿨고. 2000년대 초반에는 김인식 감독의 애제자 차명주가 매년 '최다등판 1위' 기록을 세웠습니다. 베어스에는 김경원과 진필중이 있었지만, 선발투수가 빈약한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내준 것은 모두 그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불펜투수들이 대부분 롱런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이승호나 에르난데스처럼 선발로 혹사(?)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리한 등판으로 구위를 잃는 선수들은 대부분 불펜입니다. '마구돌이'라고 불리던 권오준의 요즘, '뱀직구'로 유명했던 임창용의 지난 몇 년은 중간에서의 마구잡이(?)식 등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선수는 바로 양훈입니다. 물론 경기의 상황을 쪼개놓고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등판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게 모이면 선수의 몸에는 과부하가 걸립니다. 게다가 선수의 부상과 구위하락은 팀 사정을 감안하면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바로 이겁니다. 팀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합니다. 팀 사정이 좋은데 혹사당하는 선수는 없죠. 하지만 무리 하다보면 탈이 날 확률이 높아지고. 선수가 탈 나면 결국 팀 사정은 더 나빠집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죠.
여기서 감독이나 투수코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정해진 게임수를 소화하려면 필연적으로 무리하는 선수가 생깁니다. 그렇지만 정해진 게임수를 다 소화하기 위해 힘을 아끼고 비축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죠. 그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 됩니다.
저는 '황재규'의 케이스를 모범(?) 답안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황재규는 김인식 감독에게 '신임'을 얻고 있는 승리조 중 한명입니다. 다만 양훈이 불펜 에이스고, 마무리 토마스도 있으니 상당히 보호 받으며 등판하고 있죠. 우선 올 시즌 황재규의 등판 페이스를 한번 봅시다.
투구수 50개
(1일 휴식)
투구수 33개
(6일 휴식)
투구수 50개
(2일 휴식)
투구수 28개
(1일 휴식)
투구수 24개
(2일 휴식)
투구수 11개
(3일 휴식)
투구수 57개
(5일 휴식)
투구수 88개 - 선발등판
(4일 휴식)
투구수 24개
(3일 휴식)
투수구 27개
(2일 휴식)
투구수 27개
(1일 휴식)
투구수 16개
(1일 휴식)
투구수 8개
(1일 휴식)
투구수 21개
(????????)
물론 등판 페이스가 그 선수의 기용 형태를 전부 설명할 순 없습니다. 이기고 있었는지, 지고 있었는지, 팀이 연승중인지 연패중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죠. 하지만 어쨌든 '자주 나와서 많이 던지면 몸에 무리가 가고, 그 무리도는 휴식을 취하면 회복된다'라는 아주 원시적인(?)가정으로 한번 접근을 해봅시다.
황재규는 시즌 첫 등판과 두번째 등판 사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충분한, 또는 그럭저럭 괜찮은 휴식 일정을 보장 받았고 연투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선발 한경기 포함해 29.2이닝, 기아 팬들 사이에서 "좋은 구위에 비해 맡기는 이닝수가 너무 적다"는 불만이 나오는 유동훈보다 약간 적은 이닝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페이스입니다. 비록 풀시즌 치러 본 경험이 없는 신인이고, 약간은 짜내는 듯한 폼이어서 남보다 좀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유가 뭐든간에 결과적으로) 그의 몸은 관리받고 있습니다.
저는 양훈도 이 수준의 등판 페이스가 유지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화목토는 양훈, 일수금은 황재규로 돌려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죠. 물론 게임과 실전야구는 다르니 가능하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양훈이 이미 던진 47이닝을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부담을 좀 줄일 필요는 있죠. 물론 살다보면 불펜이 연투를 하는 날도 있지만 가급적 한번 던지면 한번은 쉬고, 적어도 두번 던지면 하루에서 이틀은 쉬어 주는 페이스 말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카드가 하나 있습니다. 야수를 줄이고 투수를 한명 늘리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작년, 재작년 우리가 그렇게 투수 엔트리를 12명으로 운용하자고 주장해도 감독은 11명을 고집하고 있죠. 저는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우리 주력 및 백업 선수들이 대부분 '만능형'보다 한쪽에만 특화된 '반쪽형'선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코칭 스태프에서는 아마 야수진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다들 느껴보셨을겁니다. 시즌 막판에 마땅한 대타나 대주자 요원이 없다는 느낌 말입니다. 대타를 내자니 수비에 구멍이 뚤리고, 수비 올리자니 공격은 너무 안습인 그런 상황.
하여, 감독이 야수를 굳이 15명으로 운용해야겠다면 거기까지는 이해 하겠습니다. 대신 투수 숫자가 유지되더라도 양훈의 이닝을 줄이는 방법은 찾아야 합니다. 해답은 명쾌합니다. 바로 유원상과 김혁민의 각성이죠. 게임을 치루면, 이기든 지든 우리팀 투수는 무조건 9이닝, 또는 8이닝을 던져야 됩니다. 그래야 경기가 끝나니까요. '상황에 관계없이 주력 투수가 자꾸 나오는'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깁니다. 정해진 이닝을 다른 사람들이 메꾸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부담이 늘어나는 상황 말입니다.
1차원적인 사고일지 모르지만, 유원상이 지금처럼 9경기 38이닝이 아니라, (평균 5이닝 잡고) 45이닝만 먹어줬다면, 김혁민의 2이닝 경기가 올해 3번인데, 그걸 두번만 줄였더라면, 그래서 선발의 소화 이닝수가 지금보다 13~15이닝만 더 많았더래도 양훈의 이닝수가 7이닝 정도 줄었을 수 있을겁니다. 여기에 감독이 양훈 등판시키고 싶은 욕심을 한두번만 참아준다면 더 좋겠죠. 이 두 가지 가정이 가능했다면 지금쯤 양훈의 이닝수는 35이닝 전후로 맞춰져 있을겁니다. 다른팀 불펜 에이스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말입니다.
물론 선수의 등판을 결정하는 건 감독입니다. 그러니 한 선수에게 과부하가 집중된다면 그에 따른 1차적인 책임은 감독에게 돌아가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좀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양훈이 선발보다 많이 던졌다> 팬들은 이 fact를 갖고 감독을 충분히 비판할 수 있습니다. 감독 역시 그 비판을 감수하고 받아 들여야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양훈보다 덜 던진 선발투수들이 좀 챙피해하고 독기를 품어야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해내지 못했으니 그 부담이 고스란히 동료, 선후배에게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두가지를 주문합니다.
먼저 감독님, 엔트리를 조정할 생각이 없다면 황재규처럼 양훈도 하루씩의 휴식을 보장해주면 좋습니다. 그럼 후반기에도, 가을에도 지금처럼 잘 던질테니까요. 양훈이 던지지 않는 다른 이닝의 6~70%는 다른 선발, 나머지 3~40%는 다른 불펜에게 나눠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2006년 KS때 줄줄이 나오던 삼성의 투수들, 감독님도 겪어 보셨잖아요. 불지르고 사고 치더라도 자꾸 내보내니까 결국 가을에 쏠쏠한 전력이 됐는데 우리는 문동환 구대성만 팔이 빠져라 던졌죠. 올해는 그러지 맙시다.
그리고 동료들, 하루가 멀다하고 마운드에 올라와 공을 던지는 양훈을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김혁민-유원상은 양훈보다 후배들 아닙니까. 선배를 위해 각자 1이닝씩만, 타자 세명씩만 더 잡읍시다. 선발 5명이 1이닝씩만 더 막으면 불펜의 부담은 절반 가까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물론 선발투수라는 게 어렵고 힘든 자리인 줄 다 압니다. 하지만 다들 불펜대신 선발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왜 그럽니까. 5일 푹 쉬고 컨디션 조절하기 더 쉬워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럼 그만큼 자기 몫을 하셔야지요. 자기의 위치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걸맞는 공을 던지기 위해 더 노력합시다. 그래야 불펜에서 고생하는 동료들 부담을 줄일 수 있을테니까요.
양훈을 딱 황재규 만큼만 던지게 합시다. 더불어 황재규의 구위가 양훈처럼 되면 더 좋겠네요. 우리 불펜 약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잘 굴려서 요령껏 돌려 막으면 충분히 불펜 싸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봅시다. 감독님과 선발들, 좀 도와주세요.
첫댓글 특히 선발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안영명선수가 몇게임전부터 투구수관리를 잘하는걸 보니 곧 이닝도 5,6이닝이 아닌 좀더 늘어갈수 있는 발판이 되는거 같습니다
옳습니다..노예 소리 듣던 선수들은 꼭 다음해에 현저한 구위저하가 나타나는게 사실입니다..훈이...이제 피어나기 시작하는데..조로하지 않도록 관리좀 해주었음 좋겠네요 ..황재규도 물론이구요...자 어여 힘내자 한화...6월 대반격 하장~!
참 좋은글이네요 동감합니다 ..항상 보면서 느끼지만 재규정도의 등판횟수와 투구수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고있었음
선발투수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아요! 선발투수들이 많은 이닝을 소화해주면 그만큼 불펜진의 과부하도 줄어들테니까요..양훈 투수는 제발 보호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벌써 너무 많은 이닝을 소화했어요..ㅠ
신문 기사에 보니 선감독이랑 조범현 감독의 투수 운영 2이닝 이상은 담날 쉬게하던데
냉정한 비판과 뜨거운 열정이 공존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훈을 선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