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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4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에제 18,21-28
복 음 :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마태 5,17-20 참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율법을 단순히 지키는 것을 넘어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여 완성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5,21)라는
율법 조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본디 율법이 지키고자 하였던 가치가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까닭 없이 심하게 모욕하는 것도 분명히 일종의 살인이 될 수 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율법까지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교회도 신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을 근거로 주일미사는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말 그대로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에만 몰두하고,
미사에 다녀와서는 온종일 온갖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다면 어떠할까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계명의 본뜻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주일 미사를 드리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롭게 일주일을 시작할 수 있는 영적 위로와 힘을 얻어 가면 좋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91년,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운전면허 따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위해 휴학을 했는데, 입대 영장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의 군 생활은 30개월이라 휴학 후 6개월 이내에 입대하지 못하면
동기들보다 한 해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기병은 좀 더 일찍 입대할 수 있다는 말에 운전학원에 등록한 것입니다.
필기시험을 쉽게 통과하고 운전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르쳐주는 강사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반말과 욕을 섞어 이야기했고, 약간의 실수에도 가차 없이 화를 냈습니다.
이렇게 욕을 먹어가며 학원에 다녀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았던 것은 면허를 획득해야 군대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그때 면허를 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갑작스럽게 입대 영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면허를 따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학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군대에 가는데, 가기 전에 그렇게 욕먹으면서 지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강사를 더 이상 보기 싫었습니다.
반말과 욕을 하는 그 강사가 너무나 미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신부가 되고 나서야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만약 1991년에 계속했다면 훨씬 쉽게 면허를 취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움의 감정 때문에, 또 자존심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계속되지 않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또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을 내세워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의로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의로움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이 의로움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구원받기 싫으면 말아라.”라고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사랑의 의로움을 보여 주셨습니다.
진정한 의로움을 간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다가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 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신다.
예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이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참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에서 ‘회의’를 하게 됩니다.
사목회의, 구역장 회의, 꾸리아 회의, 직원회의, 세대별 모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회의는 ‘시작기도, 안건 토론, 공지 사항, 건의 사항, 사제 강복‘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구역장 회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회의가 진행됩니다.
시작기도, 복음 나누기, 안건 토론, 공지 사항, 건의 사항, 사제 강복’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복음 나누기는 33년 전 서울대교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2000년대 복음화’라는 주제로
2000년을 복음화의 차원에서 맞이하려고 준비했습니다.
2000년대 복음화의 핵심 과제는 ‘복음 나누기’였습니다.
2000년대 복음화는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의 힘으로’ 시작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1993년에 복음 나누기 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해서 필리핀으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당시 연수에서 복음 나누기는 ‘Seven Step’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복음 나누기가 7개의 단계를 거쳐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일 단계는 회의에 주님을 초대합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자유롭게 주님을 초대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암송 기도에 익숙해서 자유롭게 하는 기도를 어색해 하지만,
주님을 초대하면서 회의의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단계는 복음을 읽는 것입니다. 세 번 정도 복음을 읽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복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신앙인으로 지내면서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삼 단계는 침묵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 겁니다.
엠마오로 가는 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 단계는 마음에 와닿은 성경 말씀을 3번씩 선포하는 겁니다.
복음이 이제 나의 마음 안에 머무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오 단계는 마음에 와닿은 성경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그 밭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서 밭을 산다.”
복음 나누기는 말씀이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찾은 보물을 나누다 보면 모임이 풍성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말씀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육 단계는 공동체의 나눔입니다.
공동체가 하였던 일, 공동체가 하는 일,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눕니다.
본당의 사목 방침을 알려줍니다. 본당의 공지 사항도 알려줍니다.
공동체의 의견을 본당에 알려주기도 합니다.
칠 단계는 마침 기도입니다. 참석한 인원 중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는 초대 교회가 살았던 신앙의 삶입니다.
30년이 지났지만, 달라스 구역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습니다.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품격보다 자본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좋은 미생물을 주입한다고 해도,
유전자를 변환시킨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길이도 분명 중요합니다.
남들이 사는 만큼의 수명을 누리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원하는 만큼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강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화내지 않고 남은 인생 여정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제 마음속에서 자주 머리를 쳐드는 것이
젊은 시절 제 인생 여정 안에서 발생한 실수요,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회한의 정입니다.
그때 그 순간 왜 참지 못했을까?
왜 하필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해서 두고두고 후회할까?
특히 오늘 주님께서 건네시는 말씀 들으니 더 그런 생각이 커집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돌아보니 얼마나 자주 가까운 이웃들에게
불처럼 화를 냈고, 또 그 화를 제어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표현을 안팎으로 자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씩 화를 내고 있고,
요즘은 겉으로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런 과한 표현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요즘 화날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숨기지 말고 솔직히 화를 내고,
분노할 일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
자신을 돌보고 방어하는 노력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 껏이라야지, 틈만 나면 흥분하고,
여기 퍼붓고 저기 퍼붓다가는 주변 사람들 다 떠나가고
철저한 외톨이로 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화나 분노의 성숙하고 균형잡힌 발산입니다.
먼저 분노할 일인가 웃어넘길 일인가 식별이 필요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정말이지 억울한 일,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저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그 무엇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그런 순간은 아이큐가 30퍼센트 급하락하는 순간이니,
절대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냉각기간, 짧게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한 후,
이성을 차리고 평상심을 회복한 후, 억울한 일에 대응을 하면 좋습니다.
그런 순간 기도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성모송을 천천히 세 번 정도 바치며,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주 좋은 노력입니다.
언성을 높이면 지는 것이니, 일단 편안한 목소리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것이라며 차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 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나를, 내 스스로 변호하고 배려해 주는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보니 화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계신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여정도 분노 한번 하지 않고 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에제키엘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아무리 악인이어도 죽는 것을 바라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인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요즘 제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대지 않겠지만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불안케 하고 불행하게 하는 자들이고,
그들만 없으면 많은 이가 행복할 것이고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회개하고 살게 되기를 바라지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데
니네베인들이 회개하여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요나처럼
저도 그들이 회개해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죽게 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고
다만 내 앞에서 사라져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데 그의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악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압도적이기에
그 죄와 악이 아무리 커도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크지 않으면 우리는 미워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너무나도 작으면 도리어 악에 압도되어
악에서 그를 빼내지 못하고 악과 함께 그마저 없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제자라면 우리 의가 바리사이의 의를, 능가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바리사이의 의는 단죄하는 의에 불과하고 죄인을 용서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이기는 해도 살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바리사이의 의는 율법의 의를 지키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의는 단죄하는 의일 뿐 아니라 최소한의 사랑입니다.
최소한의 사랑은, 누굴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런 죄,
곧 살인과 같은 큰 죄만은 짓지 말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최대한의 사랑은 남에게는 성내거나 욕하는
그런 작은 죄조차도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내게는 원수가 될 정도로 너무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할 때 가능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고,
인간적인 힘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데
하느님께서 이런 사랑하기를 원하시니 하려는 마음도 먹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 그 힘으로 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죄를 짓고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 예물 드리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갈 때는 반드시 화해하고 난 뒤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에게 갈 때 동생 돈 떼어먹고
그 돈으로 부모에게 갈비 사서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기 전에 해야 할 화해는
내가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만이 아니라
내게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내게 너무 큰 죄를 지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다시 말해서 그가 용서를 청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하느님 사랑 때문에(Propter amorem Dei) 하기 싫은 사랑도 하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못 할 사랑도 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26)
1)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활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예로, 21절-26절에서는
십계명 제5계명을 실천하는 일을 말씀하시고,
27절-30절에서는 십계명 제6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 제5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분노까지 모두 없애야만
제5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간음죄를 안 짓기만 하면 제6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음욕까지 모두 없애야만
제6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위선자들은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분노는 그대로 놓아두고,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위선자들은 “나를 화나게 만든 저자들은 죄인들이고,
저자들을 죽이지 않은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미움과 분노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십계명을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 지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지키는 것과 ‘온 삶으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그 증오심과 분노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고, 많은 사람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보는 일입니다.
2) 23절-24절의 말씀은,
‘내가’ 누군가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의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누구의 잘못이 더 컸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그 형제’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은,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그가 나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즉 그에게 가서 내가 용서를 청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내가 용서를 하는’ 일만 생각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은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살면서 한 번도 용서를 청할 일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앞의 21절-22절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나의 폭언과 모욕과 분노 때문에 그가 큰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큰 고통을 겪고 있고, 몹시 힘들어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는 나의 폭언과 모욕과 분노 때문에
정신적으로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된 것.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위선자들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하면
누구든지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다고 해서 나는 잘했고,
잘못은 그쪽에만 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아니라 ‘그 형제’를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랑’은 항상 ‘나’를 기준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너’를 기준으로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 편안한 것과
‘양심’이 편안한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위선자가 아닌 사람들의 양심은 늘 살아 있고,
뭔가 잘못되었을 때 양심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바로 느낍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양심이 마비되어서 양심의 소리를 못 듣거나,
양심의 소리를 들어도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너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먼저 가서 용서와 화해를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에서는 자존심을 눌러야 하고,
누구의 잘못이 더 크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화해는 항상 ‘내가 먼저’ 청해야 합니다.
3) 25절-26절의 말씀은,
“회개를 미루지 마라.
지금 당장 회개하고 보속 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법정으로 가는 도중’은,
우리 각자의 ‘지금의 인생’을 가리킵니다.
더 옳게 사는 법을 따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8가지 참된 행복의 길을 훈시하는 것으로 시작된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도래로 세워지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조건과 지침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자격조건은 모세의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신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손수 돌판에 새겨준(출애 31,18)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십계명에 딸리고 관련된 수많은 규정들과 법령들이다.
후자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도 있고,
조상들에 의해 덧붙여 만들어진 규정과 전통들도 있다.
여기에 예언서의 말씀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으로 유다인들은 생각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이를 잘 따르고 지켰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음과 의로움을 인정하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은, 율사와 바리사이의 ‘옳음’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옳음’이다.
‘더 옳음’이 原級 ‘옳음’의 비교급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원급과 비교급의 관계와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옳음’의 깊은 뜻은 다른 데 있다는 말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옳게 사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옳음은 그들만의 생각에 기준을 둔 것으로서, 결국 율법의 字句에만 매인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이 요구되는 ‘더 옳음’은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둔 것이며,
율법의 정신을 파고드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도 하느님 계명의 근본정신은 분명히 있다.(신명 5,32-6,25)
그러나 그 근본정신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다는 행실’에는 빠져 있음을 예수께서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정신을 다시 심어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실이 우선 소금과 빛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것이 되기를 요구하신다.(5,13-16)
그런 다음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신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6개의 대당명제 중 첫 번째의 대당명제에 해당한다.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2-17)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따라서 옳게 사는 방법은 이 율법을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옳게 사는 것인가?
더 옳게 사는 것은 율법을 다 지켰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의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역설적인 도식 속에 숨겨져 있다.
율법에는 ‘살인’이 ‘재판’(사형)에 해당 되지만, 예수께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살인과 같은 ‘재판’(사형)을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바보’라는 욕은 ‘중앙법정’에 넘겨지며,
‘미친놈’이라는 폭언은 ‘불붙는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형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바보’나 ‘미친놈’이라는 폭언에 대하여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어도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허나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요구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제5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에 결코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 않음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고 모든 성냄과 폭언이 살인을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형제에게 화도 내고 욕도 하고 폭언을 일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 욕이 되고 욕이 폭언 되며, 폭언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 자기제어 능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을 내기 전의 단계인 마음속의 원한까지도 사전에 풀기를 바라신다.
ㅇ제에게 우 품은 마음으로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신다.
예물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위의 결과보다 그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돠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때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