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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190회] 이슈 픽 쌤과 함께
―찬란한 절규 뭉크가 전하는 인생 사용 설명서 - 이미경 미술사학자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 [KBS1 공영방송 50주년 대기획 다큐 인사이트] 인간 신세계로부터 - 3부 절규
✺ [KBS1 공영방송 50주년 대기획 다큐 인사이트] 인간 신세계로부터 - 3부 절규(다시보기)
절규하는, 형태조차 불분명한 인간은 어떻게 그려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는 산업혁명을 거치며 실존적 위기를 마주한 인간이 어떻게 내면을 들여다 보았는가로 이어지며 고통은 그것을 직시할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는 뭉크의 메시지를 통해 지금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을 전한다.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296&program_id=PS-2023189213-01-000&broadcast_complete_yn=&local_station_code=00§ion_code=05
✺ KBS1 <예썰의 전당> [38회] 밤의 방랑자,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 KBS1 <예썰의 전당> [38회]『밤의 방랑자,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다시보기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절규(The Scream)’,
1893년, 판지에 유채, 템페라, 파스텔, 크레용, 91×73.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2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절규 그의 인생을 표현한 작품 중 하나였다. 그의 그림에서 두려움, 슬픔, 피 같은 묘사로 보인다. 후에 뭉크는 이 그림의 모사작에 연필로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kan kun være malet av en gal mand) 라고 적어놨다.
실제로 뭉크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자신의 부모에게 엄격하고 무시무시한 교육을 받고 살아왔으며, 매질을 당하고 호되게 혼나는 일이 하루에도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정신질환을 앓았던 그의 아버지는 25살 때 생을 마감했고, 그보다 더 어릴 때엔 어머니가 결핵으로 인해 피를 뿜고 세상을 떠나는 두려운 장면까지 보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성장하면서 결핵 등의 병을 안고 살아갔고,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와류 같은 흐름이나 붉은 묘사 등은 그의 트라우마나 슬프고 암울하게 살아온 인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도 한다.
"나는 죽은 자들을 데리고 살았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절규는 연작품으로 총 4연작인데 첫 작품은 위의 이미지인 원작이고 두 번째 작품은 1895년 완성된 석판화 형태의 절규이다. 세 번째 작품은 1910년 완성된 템페라 화법으로 그려진 절규이다.
파스텔로 그린 네 번째 절규는 유일하게 민간인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으로(나머지 1, 2, 3연작은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박물관 전시) 2012년 6월 이 작품이 소더비 경매장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 절규는 사상 최고가인 1억 1,990만달러(1,355억원)에 낙찰되었다. 2020년 6월, 첼시의 구단주이기도 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소더비에서 1억 2천만달러를 주고 샀다는 러시아 발 뉴스가 터졌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죽음의 침상 곁에서', 1896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병실에서의 죽움’, 1893년, 1601×34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죽음과 아이’, 1899년
✵ 예썰의 전당 서른여덟 번째 이야기는 ‘밤의 방랑자’ 에드바르 뭉크.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 절규를 탄생시킨 화가, 뭉크. 가족의 죽음, 연인과 고국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얼룩진 그의 삶엔 절규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뭉크는 고통과 불안에 굴복하는 대신,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을 향해 걸어 나간 뭉크. 그의 돌파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 '절규' 탄생시킨 화가, 뭉크.
∙ 상처로 얼룩진 그의 삶.
∙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을 향해 걸어 나간다.
∙ 그의 돌파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외롭고 불안했던 어린 시절'
“내 예술은 개인적인 고백이다
삶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길을 잃은 배와 같았을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구 아케르 교회’, 1877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거실', 1879-1880년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Self-Portrait’, 1881-82년, Oil on board. - ‘어두움을 마주한 화가 뭉크’.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885-1886년, Oil, 119.5×118.5cm, Nasjonalgalleriet, Oslo - 임종을 앞둔 누이와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 누이를 돌보는 이모(칼렌 보르스타(Karen Bjølstad)로 추정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칼렌 보르스타(Karen Bjølstad: 뭉크 어머니의 여동생)’
뭉크가 스물세 살 되던 해에 일찍이 먼저 세상을 떠난 누나 소피에를 떠올리며 그렸다. 소피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인이 아닌 창가에 드리워진 검은 커튼.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 죽음에 대한 무력감이 느껴진다. 커튼은 검게 칠한 후 그 색을 조금씩 벗겨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그림 전체에 색을 벗겨낸 흔적이 드러나 있다. 이는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일 수도 있으나 삶 전체에 드리워진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 1907년.
근대 회화의 아버지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1793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실제 사건을 그린 작품 〈마라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았다. 자코뱅당의 지도자인 ‘마라’가 반대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한 소녀에게 자기 집 욕실에서 살해당한 사건을 묘사한 것. 뭉크가 그린 〈마라의 죽음〉은 한때 연인이었으나 결별 후 자신을 스토킹 했던 툴라에게서 받은 상처를 빗대어 표현했다. 그림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은 듯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의 남자는 마라인 동시에 뭉크 자신이며, 침대 옆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은 살인녀인 동시에 툴라이다. 그가 여성혐오증을 넘어 심각한 피해망상증에 시달렸음을 잘 보여준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스페인 독감을 앓은 후의 자화상(Self-portrait after the Spanish Flu)〉, 1919년.
뭉크는 오십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또 한 번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했다. 당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에 걸린 것. 혹독하게 병을 앓은 뒤 수척한 모습이지만 살아남은 자의 자부심과 결의가 느껴진다. 가족들이 병약해 늘 죽음과 질병 속에서 살아온 뭉크는 자신만의 행동수칙을 잘 지킨 덕에 독감을 이겨냈는데 그중에는 발에 물 적시지 않기, 화초 가꾸지 않기, 장례식장 가지 않기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Self Portrait : Between Clock and Bed)〉,
1942년, 캔버스에 유채, 노르웨이오슬로국립미술관.
죽기 4년 전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그린 자화상. 평론가들은 왼쪽의 시계는 현재를 의미하고, 오른쪽의 침대는 죽어 눕는 공간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음을 표현한 것. 평생토록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장수하였음은 물론이고 살아생전 작품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부유한 삶을 살았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멜랑콜리(Melancholy, 우울)〉, 1894년, 72×98cm, 개인 소장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해변의 잉겔(Summer Night(Inger on the Shore:여름의 밤)’,
1889년, Oil on canvas, 126×161cm, 베르겐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Death ant life-Google Art Project(소녀와 죽음)’,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28×86cm, 뭉크미술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칼 요한 거리의 봄날(Spring Day on Karl Johan Street)’, 1890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라파예트 거리’, 1891년
순간의 빛을 포착
짧고 화려한 붓 터치가 특징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리겠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칼 요한 거리의 모퉁이’, 1883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칼 요한 거리의 모퉁이’, 1892년
-1983년 작품과 1892년 작품의 같은 거리에 다른 느낌
● 뭉크는 노르웨이의 정치적, 문화적 격변기에 화가로 데뷔했다. 1880년대에 '크리스티아니아(Kristiania)에서 새로운 보헤미안(Bohemians)적인 철학을 접했고, 파리와 니스에서는 인상주의 회화를 공부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동적인 철학과 더불어 문학과 시각예술의 퇴폐적이고, 상징주의적인 풍토는 그 당시를 이끄는 시대정신의 하나였다. 파리와 니스에서 사는 동안 뭉크는 전시회와 미술관을 통해 인상주의 회화를 접했고, 짧은 기간 동안 이 회화기법을 열정적으로 실험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글을 써야한다”
-한스 예게르(Hans Henrik Jæger, 1854-1910: 노르웨이의 소설가, 극단적 자연주의자.)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1907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파격적인 생각들이 자유롭게 논의 된곳’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수많은 기록으로 남겨진 뭉크 내면의 외침’
✵ 예썰 하나, ‘절규(The Scream)’할 일이 많았던 뭉크의 절규, 두 번이나 도난당했다?! 영화 ‘나 홀로 집에’ 속 케빈, 영화 ‘스크림’ 등 뭉크의 절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함께해온 걸작이다. 이처럼 친숙한 작품 절규는 그 이름처럼 ‘절규’할 일을 많이 겪었다는데. 1994년 그리고 2004년, 무려 두 차례나 도난당했었다고. 도대체 절규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모두가 이토록 탐냈던 걸까? 한편 절규엔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 의심하지 않았던 오해가 하나 있다는데. 바로 그림 속 놀란 표정의 뭉크는 절규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에 귀를 막고 있다는 것! 노을 지는 저녁, 그가 들은 ‘절규’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 친숙한 작품 '절규'는 그 이름처럼
∙ ‘절규’할 일을 많이 겪었다는데.
∙ 1994년 그리고 2004년,
∙ 무려 두 차례나 도난당했었다고.
∙ 도대체 '절규'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 모두가 이토록 탐냈던 걸까?
"나의 예술은
자유로운 고백이자
스스로 인생의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시도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생명의 춤(The of Life)', 1899-1900년, 캔버스에 유채,
124.5×190.5cm, 오슬로 국립미술관 - 사랑의 4단계: 1. 솔로, 2. 구애, 3. 사랑에 빠진 몰입 단계, 4. 욕망.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붓을 들고있는 자화상(Portrait with Brushes)’, 1904년, 91x197cm, 오슬로 뭉크미술관/
‘툴라 라르센의 초상(Tulla Larsen), 1898-99년, 62x120cm, 오슬로 뭉크미술관
뭉크는 인생의 중반, 툴라는 부유한 와인상인의 딸, 툴라(Tulla)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마틸데 라르센(Matilde Larsen)이라는 여인과 아주 요란한 사랑을 하게 된다. 어쩌면 80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5년간 지속되었던 이 사랑은 결국 총성 한방으로 끝나버리고, 이 둘은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랑의 끝은 좋지 않았으며, 평생 그를 괴롭히던 불안장애와 우울증이 심해진 뭉크는 결국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가두어야 했다. 그리고 뭉크는 그때의 트라우마를 많은 그림으로 남겼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여름밤의 꿈/ 목소리(The Voice/ Sunmmer Night)’, 1893년, 90×118.5cm
- 첫 만남의 설렘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마돈나’, 1894년, 채색 석판화, 1894년, 캔버스에 유채, 61×44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 벅차오르는 사랑의 행복
‘흡혈귀’와 ‘마돈나’는 1893년과 1894년에 각각 그린 화가가 느끼는 여성에 대한 매우 이중적이고 혐오스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다. 젊은 시절 뭉크는 몇 번의 연애를 경험하지만, 그 대상이 유부녀이거나 사교계의 여자들이었고 대부분 불행하게 끝나고 만다. 이로 인해 뭉크는 여성에 대해 심한 피해의식을 갖게 된다. 1899년경 오슬로에서 사귄 툴라 라르센(Tulla Larsen)과의 관계는 여성에 대한 뭉크의 절망감을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당시 뭉크를 향한 툴라의 집착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는데, 급기야 툴라는 결별을 선언한 뭉크를 불러내 권총으로 뭉크의 손을 쏘는 참사를 저지른다. 뭉크가 여성혐오증을 넘어 심각한 피해망상증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뭉크는 알코올 중독으로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뭉크는 결국 정신병원 신세를 지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이후에도 뭉크의 삶은 여러 면에서 매우 불안하고 온전치 못했다. 반면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가 절절히 담긴 뭉크의 그림에 열광했다. 화가의 삶과 예술은 그렇게 아이러니한 모순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흡혈귀(Vampire)〉, 1893, 캔버스에 유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포옹하는 남자와 여자를 묘사하고 있으며, 여자는 남자의 목에 키스를 하거나 아니면 물어서 흡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뭉크는 애초에 작품 제목을 〈사랑과 고통〉이라고 지었으나 평론가들이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 때문에 흡혈귀라고 별칭을 붙인 것이 후일 작품 제목으로 굳어졌다. 〈절규〉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작으로 절규보다 몇 달 전에 완성됐다. -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별의 슬픔
뭉크가 1892년 독일 베를린 미술협회 초청으로개인전을 열었을 때 한 방문객이 소리쳤다. "이건 다 악령의 사주를 받아 그린 그림들이에요!" 그의 그림 55점이 걸린 전시장은 난장판이 됐다. 당시 독일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어서 승리의 열기가 뜨거웠다. 모두가 맥주에 취해 기뻐했다. 그런 분위기 속 뭉크의 핏빛 그림은 찬물이자 잿가루였다. 특히 그의 그림 '사랑과 고통'은 저주처럼 느껴졌다. 빨간 머리의 긴 여자가 한 남자를 보듬듯, 사실은 물어뜯듯 감싸 안는 작품이었다. 보수적인 언론과 평론가들은 "소름이 끼친다"고 표현했다. 성과 죽음, 폭력의 이미지를 끌어모아 지옥의 형상을 그렸다고 비난했다. 한 신문은 "뭉크의 그림은 위험하다. 불길한 기운에 전염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성 글도 실었다.
뭉크의 개인전은 결국 여드레 만에 막을 내렸다. 이는 후에 '뭉크 스캔들'(Munch Affair)로 불린다. 뭉크는 황당했다. 자기들이 먼저 초청하고 판을 깔아줄 땐 언제고, 언론 반응이 좋지 않으니 입을 싹 씻었다. 그러고는 뭉크 앞에 모든 책임의 보따리를 풀었다. 뭉크는 '흡혈귀 화가', '악마의 하수인' 등 온갖 찝찝한 별명을 얻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두 사람, 외로운 이들’, 1905년 - 사랑과 이별의 사이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이별(Separation)’, 1896년, 127×96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 사랑의 대서사, 그 모든 감정을 화폭에 담다.
✵ 예썰 둘. ‘노이즈 마케팅’으로 유럽 화단에 이름 날렸다? 뭉크가 예술계에 일으킨 ‘스캔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뭉크. 그의 화가로서의 행보는 어땠을까. 1892년, 뭉크는 베를린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 전시는 ‘뭉크 스캔들’로 유럽 화단을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 됐다. 유럽 언론은 뭉크의 작품에 ‘이게 예술이라니! 비참하다’라며 비난을 쏟았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뭉크를 향한 악평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뭉크에게 인기를 가져다준 것! 심지어 뭉크의 작품으로부터 20세기 새로운 예술 사조가 탄생하기도 했다는데. 뭉크가 예술계에 일으킨 ‘센세이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1892년, 베를린에서 열린 뭉크의 첫 전시는
∙ ‘뭉크 스캔들’로 유럽 화단을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 됐다.
∙ 유럽 언론은 뭉크의 작품에
∙ ‘이게 예술이라니! 비참하다’라며 비난을 쏟았다.
∙ 하지만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베르린에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주선
1892년 베르린 뭉크 전시회
공개 후 혹평
뭉크의 그림은 기폭제가 되어 새로운 독일 미술을 이끄는 분리파 결성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화상〉,
1895년, 캔버스에 유채, 110.5×85.5cm, 노르웨이오슬로국립미술관.
"뭉크는 개인적인 인상을
재창조해내는 예술의 선구자"
-독일 소설가 막스 다우텐데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화상‘은 이미 죽은 자신의 영혼을 그린 것이다. 커다랗게 뜬 화가의 눈과 거친 붓 자국은 내면의 갈등과 집착을 전달한다. 화가는 빛을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인물의 표정을 더욱 강렬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은 죽은 자의 환영처럼 보인다. 이미 죽었지만 그대로 죽음을 받아 드릴 수 없는 영혼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일까? 특히 뿌옇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는 전체적으로 배경을 이루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함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팔뼈가 있는 자화상, 석판화, 1895, 45.5×31.7cm, 소장처 불명
‘팔뼈가 있는 자화상’은 석판화로 제작된 것이다. 화가의 두상만 표현된 이색적인 자화상이다. 바탕도 온통 암흑일 뿐이다. 그리고 그림 하단에 있는 팔뼈가 매우 인상적이다. 뭉크는 왜 팔뼈를 그려 넣은 것일까? 구도상 이 팔뼈는 화가 본인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바탕이 온통 검기 때문에 추론만 가능할 뿐이다. 뭉크는 자신의 존재를 몸은 이미 죽어서 뼈만 남아 있고 영혼만 살아있는 상태로 표현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이승을 떠돌기도 한다는 속설을 담아낸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이 세상에 단 한 조각도 남게 되지 않았을 때 그 영혼까지 완전히 소멸된다고 뭉크는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란 그 영혼을 이 세상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넓은 챙모자의 자화상’, 1905-1906년 - 다시 찾아온 삶의 시련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포두주 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 깊어 가는 내적인 오둠과 공허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지옥에서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95, 81.5×65.5cm,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는 두려움과 공포 등 주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탓에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죽은 자기 존재를 상상하며 자화상을 그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895년에 그린 ‘저승에서, 자화상’이다. 뭉크는 그림의 배경을 검은색과 주황색으로 표현했는데, 마치 불구덩이에 서있는 모습을 그린 것 같다. 그림 속 화가는 발가벗은 상태로 몸 전체가 벌겋게 그을렸다. 온몸이 금방이라도 불길에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으로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뭉크는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의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 “나는 마치 지옥에 있는 것 같습니다”
✵ 예썰 셋. 뭉크의 그림 중 가장 찬란한 ‘이 작품’, 노르웨이 화폐에도 새겨졌다? 유럽 화단을 흔들며 화가로서 정점을 찍은 시기, 뭉크의 내면은 오히려 공허해져 갔다. 고국 노르웨이에선 “혐오스러운 그림”이라는 평을 받았고, 가족과 연인에게선 안정된 지지를 받지 못했던 뭉크. 허한 마음을 술로 달래며 피폐한 생활을 하던 그를 어두운 생활에서 꺼내준 작품이 있다는데. 노르웨이 화폐에도 새겨졌다는 ‘이 작품’은 별은 어두울수록 빛난다는 걸 증명하듯 뭉크의 그림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절규의 핏빛 노을에서 환한 빛을 그리기까지 뭉크에게 어떤 사연이 있던 걸까.
∙ 유럽 화단을 흔들며 화가로서 정점을 찍은 시기,
∙ 뭉크의 고국 노르웨이에선 “혐오스러운 그림”이라는 평을 받았고,
∙ 가족과 연인에게선 안정된 지지를 받지 못했다.
∙ 허한 마음을 술로 달래며 피폐한 생활을 하던 그를
∙ 어두운 생활에서 꺼내준 작품이 있다는데
뭉크는 1908년 가을에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하게 되었다. 이미 유명 화가였지만 명성에 따른 시기와 질투, 노르웨이 언론의 부정적 보도,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죄의식, 친구들로부터 받은 주관적 관점의 배신감, 만성 불면증, 그리고 연인과의 불화에 기인한 불안정한 심리 상태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태였다.
피해 망상증에 시달리며 폭음을 계속했고 손발이 마비될 정도로 몸이 약해졌으며 이유 없이 싸움을 걸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담당의사의 조언에 따라 ‘사랑’이라는 주제로 연작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유명하게 만들어 준 ‘내면의 고통’을 그리는 대신 주위의 자연과 환경으로 관심을 옮겼고, 그 그림들을 그리는 동안 안정을 되찾았다. 8 개월 후 1909 년 4월에 뭉크는 완전히 회복되어 퇴원한다.
퇴원 후 1911년에 그린 그림이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오슬로대학교의 대강당 벽화 제작 공모에 응시하여 최종 선발된 후 인류의 생명과 영속성을 주제로 3 개의 대형 벽화와 8개의 작은 패널로 구성된 작품을 제작했다. 그림 속에 떠오르는 태양은 어둠과 고통을 뒤로하고 찬란하게 승화하는 생명의 영원함을 나타냈다. ‘태양’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뭉크에 따르면 ‘영원의 강력한 힘’을 묘사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 ‘태양(The Sun)’, 1911년, 캔버스에 유채, 455x780cm, 깊은 밤 뒤에는 찬란한 아침이 온다는 걸 알려준 생명의 상징 햇빛, 뭉크의 인생 2막을 열어준 작품,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소장.
개교 백주년을 기념해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대강당을 장식한 거대한 ‘태양’이다. 해골 같은 얼굴의 남자가 소용돌이치는 핏빛 하늘 아래,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그림, ‘절규’를 그린 어두운 화가 뭉크가 이토록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을 그려 지성의 전당에 걸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를 모두 폐결핵에 빼앗기고 아버지의 정서적 학대 속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며 성장한 뭉크는 미술가로 성공한 다음에도 불안과 우울을 극복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었다. 광기의 문턱에 섰던 뭉크를 구원한 건 바로 그 자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뭉크는 장기간 치료를 받고 안정을 찾은 뒤 돌아와 ‘태양’을 그렸다. 바위 절벽 너머, 초록 들판 뒤, 파란 대양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자 밝은 원색을 품은 황금빛 햇살이 힘차게 뻗어 나와 온 세상을 둘러싼다. 뭉크는 ‘태양’을 중심으로 모두 11점의 유화를 그렸는데, 주위에는 태초의 인류인양 벌거벗은 남녀가 거리낌 없이 태양을 향해 몸을 뻗는다.
덴마크-노르웨이 국왕이 1811년에 세운 오슬로 대학은 1946년까지 노르웨이 유일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사실 노르웨이는 1814년 스웨덴에 합병됐다가 1905년에 독립해, 뭉크가 ‘태양’을 그릴 당시 신생국이었다. 뭉크의 태양은 다만 화가 자신의 갱생을 나타낼 뿐 아니라, 어둠을 깨는 ‘계몽’의 상징으로서, 건강한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는 대학에 새로운 나라가 열망하는 밝은 미래가 있다는 걸 보여줬던 것이다.
'노르웨이 2001년 발행 화폐', 1000 크로네(1000 KRONER)의 앞면 초상의 주인공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 - 1944), 뒷면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태양(The Sun)’을 도식화 됨. © Norges Bank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겸 판화 작가이다. <절규>로 잘 알려진 화가로 어릴적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연속된 사랑의 실패를 겪은 뭉크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인물화로 표현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거나 신경증적인, 불안의 느낌이 나는 우중충한 작품이 많다. 다만 평생 우중충한 그림만 그리고 산 것은 아니며 <태양>이라는 작품처럼 밝고 화사한 작품을 그린 바도 있다. 태양 작품은 고흐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그렸다고 한다.
* 노르웨이 1000 크로네(1000 KRONER) 지폐의 도안에 앞면은 에드바르 뭉크의 초상과 그의 1891년 작품 〈멜랑꼴리(Melancholy, 애수)〉, 뒷면은 뭉크의 작품 중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인 〈태양(The Sun )〉의 이미지가 도안으로 사용 되었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대강당 중앙을 장식한 대형 벽화 '태양', 4.5×7.8m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알마 마테르', 1915-1916년
- 젖을 먹이는 어머니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을 표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역사', 1915-1916년 - 노르웨이 특유의 자연과 민족성을 투영
뭉크의 생의 마지막 바람 - 결국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화가, '밤의 방랑자 에드바르 뭉크'
뭉크의 유언장 '오슬로시에 모든 작품을 기증한다', 1940년 4월
“나는 예술로 삶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내 그림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생의 마지막 바람’
뭉크미술관, 오슬로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 오슬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교, 시인, 사학자, 화가 등의 인재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뭉크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족은 노르웨이의 수도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 지금의 오슬로)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빈민 지역에서 의사로 일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다 보니 생활은 늘 궁핍했다.
뭉크가 다섯 살 되던 무렵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10년 뒤 누나도 같은 병으로 죽었다.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잃은 충격을 폭력과 폭언으로 표출했다. 가족의 죽음과 아버지의 폭력에서 생긴 불안정한 정서는 뭉크를 평생 따라다녔고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1879년 뭉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오래 다니지 못하고 1881년 국립 미술학교로 옮겨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885년 파리를 여행하던 중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는 뭉크가 예술적 지향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1889년에 연 개인전이 크게 성공하면서 정부로부터 프랑스에서 3년간 공부할 수 있는 지원을 받게 된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한풀 꺾일 무렵 여든을 넘긴 늙은 화가는 그제야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바로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죽음의 공포를 캔버스에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세계 3대 초대형으로 개관...'절규'의 뭉크관 등 100관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자 파리 최고의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 쌍트 페테르부르크으 에르미타주 박물관(St. Petersburg, Herimitage Museum) 다음으로 큰 초대형 박물관 노르웨이에 개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절규(The Scream)〉, 패널에 파스텔화 , 79×59cm.
작가가 생전에 붙인 제목은 〈자연의 절규〉. 총 4점의 연작이 있으며 유화 작품은 오슬로 국립미술관, 템페라 작품과 판화 작품은 오슬로 뭉크미술관, 그리고 또 하나의 작품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오슬로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화 작품이다.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북유럽 국가 노르웨이 사람이다. 이 뭉크의 세계적인 그림 ‘〈절규 The Scream〉’ 중 가장 유명한 버전을 노르웨이에서 볼 수 있다.
절규가 소장된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이 무려 6억5000만 달러(약 8000억 원)를 들여 새 단장을 하고 문을 열었다. 유럽의 명작뿐 아니라 북유럽 디자인 컬렉션도 볼 수 있다.
다음엔 스페인으로 가면, 작가들이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는 사람 중 한 명인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블랙 페인팅(Black Painting)’이 있었던 공간을 재현한 영상 작품을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불안〉, 1894년, 74×94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Aunt Karen in the Rocking Chair’, 1883, Oil.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Portrait of the Painter Jensen-Hjell’, 1885년, Oil.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Seated Young Woman’, 1892년, Oil.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사춘기〉, 캔버스에 유채, 1895년, 150×111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뭉크는 자화상말고도 여성을 대상으로 자신의 암울한 내면을 담은 작품을 여럿 그렷다. 그 가운데 하나인 ‘사춘기’는 1883년에 처음 완성한 작품인데, 이후 불에 타서 1895년 다시 그린 것이다. 성(性)이란 주제를 매우 대담하게 다룬 이 작품은 사춘기를 겪는 소녀의 불안하고 수줍은 몸짓, 순수하면서도 공포로 가득 찬 눈빛을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소녀 뒤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이 그림의 압권으로 꼽힌다. 소녀의 순결은 머지않아 이 그림자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될 것임을 화가는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자란 소녀가 마음속에 잉태하고 있는 타락의 본능이기도 하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아침(Morning)’, 1884년, Oil on canvas, 96.5×103.5cm, 베르겐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뭉크 여동생 잉케르(Sister Inger)’, 1892년, Oil on canvas.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The Painter Jacob Bratland’, 1891-92년, Oil on canvas.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Tavern in St’, Cloud, 1890년, Pastel on paper.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봄(Spring)’,
1889년, 캔버스에 유채, 169.5×264.2cm, 오슬로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The Military Band on Karl Johan Street’, 1889년, Oil on canvas.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실내', 1863~1944)년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니스의 밤(Night in Nice)’,
1971년, 캔버스에 유채, 48×54cm, 오슬로국립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도로에 내리는 눈〉,
1906년, 캔버스에 유채, 80×100cm, 뭉크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여름밤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a Summer Night)’,
1892년, 86.5x124.5 cm, 캔버스에 유채.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커피 테이불(At the Coffee Table)’, 1883년, Oil on canvas.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기다림(Atardecer)’, 1888년, 100×75cm, 캔버스에 유채.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1849~1912)
스웨덴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초상화’, 1892년, Oil on canvas.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Girl Combing Her Hair’, 1892년, Oil.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By the Roulette’, 1892년, Oil on canvas.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Jurisprudence’, 1887년, Oil on canvas.
○ 8000억 들여 지은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오픈:
유럽에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다음으로 큰 박물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바로 노르웨이 국립박물관(Norway national museum)이다. 노르웨이 대표 작가인 뭉크의 ‘절규’는 물론 유럽 고대 조각과 명나라 도자기, 그리고 북유럽 디자인까지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 고야 블랙페인팅의 공간을 영상으로 재현하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박물관에서 ‘작가들의 작가’로 꼽히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유명한 시리즈 ‘블랙 페인팅(Black Painting)'을 재해석한 영상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고야의 ‘블랙 페인팅’은 ‘귀머거리의 집’(La Quinta del Sordo)이라고 불렸던 곳에 그려져있다가 캔버스에 옮겨졌는데, 이 그림들이 있었던 공간을 영상으로 재현했다고 한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국립박물관. 사진: Børre Høstland/The Nasjonalmuseet of Norway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을 비롯한 노르웨이의 주요 예술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립 박물관의 건물이 6월 11일 문을 열었다. 무려 4개의 국립 기관을 합친 건축물로, 북유럽에서는 가장 큰 박물관이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라익스박물관보다도 크다고 한다. 가까이 가면 전체 건물을 한 눈에 보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 소장된 뭉크의 작품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다리 위의 소녀들〉, 1901. 사진: Nasjonalmuseet/Høstland, Børre
▲ 절규(1893):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일 '절규'는 회화 2점과 파스텔 2점이 알려져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그려진 버전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에 있다. 작년에 이 그림 속에 ‘미친 사람이나 그릴 그림’이라고 적힌 글귀가 뭉크의 친필임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다리 위의 소녀들(1901):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다리의 급경사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뭉크는 불안감을 자아내기 위해 이러한 구도를 즐겨 사용했다.
▲ 아픈 아이(1885-1886): 작년 ‘그림이 있는 하루’에서도 소개한 작품이다. 뭉크가 병으로 떠난 누이를 생각하며 평생 반복해서 그린 그림이란다. 비교적 초기 작품으로, 좀 더 사실적이고 자세한 묘사를 살펴볼 수 있다.
▲ 그밖에 마돈나(1894), 담배를 든 자화상(1895), 멜랑콜리(1892) 등 18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뭉크 갤러리’가 박물관에 마련되어 있다.
○ 미술관을 크게 만든 이유는
▲ 4개 기관을 하나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현대미술관, 건축미술관, 공예박물관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이 바로 국립박물관이다. 그러다보니 규모가 이렇게 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전시장만 100개 가까이: 그만큼 고대 조각상부터 노르웨이의 일상 디자인 제품들과 왕실 패션까지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전시하기 때문에 갤러리만 100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 한 자리에서 소장품 관리: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소장품 약 40만 점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의 수장고와 보존실, 사진 스튜디오를 갖췄다는 점이다. 이 덕분에 최근 뭉크를 비롯한 이곳 소장품에 관련된 흥미로운 뉴스들이 들려오고 있다.
▲ 수백 년 동안 사용할 박물관: 이 박물관은 ‘수백 년 동안’ 사용하기 위해 내구성이 좋은 자재를 쓰고, 비슷한 규모의 다른 건물에 비해 탄소배출이 절반 수준이 되도록 지었다고 한다. 박물관을 짓기로 한 것이 2003-2005년이고, 2008년 부지를 정하고 2009년 건축 공모가 이뤄졌으며, 2014년부터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촘촘한 계획성은 배울만한 것 같다.
▲ 관광산업에 투자: 노르웨이는 석유 산업으로 돈을 벌고 있지만, 화석 연료 사용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시대적 변화에 맞춰 ‘여행 산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박물관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고 한다. 우선 개관 첫 해에 100만 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 미술관이 그렇게 중요한가?
▲ 문화 산업에서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하고있는 어느 사업가의 인터뷰에서 “전시 보는 것을 좋아한다”며 “아트바젤 홍콩에 자주 간다”고 말하는 걸 듣고 조금 놀란 경험이 있다.
▲ 더 놀란 이유는 아트 바젤 홍콩(Hong Kong Art Basel)은 전시가 아니라, 그림을 팔기 위한 갤러리들이 모여서 부스를 차리는 일종의 ‘산업 박람회’ 같은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이것을 ‘아트페어(Art fair)’라고 부른다.
▲ 갤러리와 미술관의 차이 는 이렇. 갤러리는 ‘그림을 파는 곳’, 미술관(주로 공공)은 ‘후대에 남길 가치가 있는 작품을 소장, 관리하고 공공을 위한 기획 전시를 선보이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이런 이유에서 대체로 미술관은 그림을 판매하지 않는다).
▲ 갤러리는 상업성이 두드러지고, 미술관은 공공성에 중요성을 둔다. 이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미술관 전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작품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실 한국에서는 이런 미술관의 공적인 역할이 정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갤러리와 미술관의 차이를 잘 알 수 없기도 했는데, 지금 어떤 작가가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전 세계 유명 미술관들의 기획 전시를 한 번 훑어보면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 영상으로 재현된 고야 블랙 페인팅(Black Painting)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필립 파레노, ‘귀머거리의 집’〉, 2022년
이어서 스페인 마드리드의 유명한 프라도박물관 소식이다. 이곳 미술관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두 작가, 바로 진정한 리얼리티를 구현한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와 '예술가에게 변혁은 곧 숙명이다.고 말한.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e de Goya)인데, 두 작가는 프랑스 인상파 작가들은 물론 현대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 존경하는 작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프란시스코 고야의 걸작 ‘블랙 페인팅’을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가 영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 블랙 페인팅(Black Painting)이란?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노쇠하고 병든 1819년, 시끌벅적한 세상을 떠나 마드리드 남부 어느 마을의 ‘귀머거리의 집’이란 곳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이 집에서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담은 이 벽화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알려졌고, 지금은 캔버스에 옮겨져 프라도박물관에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 블랙 페인팅이 중요한 이유
▲‘나'만을 위한 그림: 우선 이 그림이 고야가 죽고 난 뒤 뒤늦게 발견 되었다고 말했다. 평생 왕실을 비롯한 누군가를 위해 그림을 그렸던 고야는 말년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19세기는 ‘자아(自我)'라는 개념도 희미했을 때인데 자기만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역사적이며 놀라운 사실로 꼽힙니다.
▲ 깊은 내면의 고통을 토로하다: 물론 단지 남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만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 고야가 살면서 겪었던 자식의 죽음, 혼란한 사회상, 여인과의 관계 등의 고통들을 비롯한 깊은 내면을 아주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1930년대 초현실주의 그림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게, 더 빨리 인간의 내면을 포착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마치 자화상 같은 고야의 〈개(Dog)〉, 1819-1823년.
-제목은 후대 연구자들이 붙였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책 읽는 사람들〉, 1819-1823년. 사람들의 표정을 보세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The Roulette I’, 1892년, Oil on canvas.
○ 필립 파레노의 재해석
안타까운 것은 마드리드 남부의 어느 집에 있었던 이 그림들이 모두 벽에서 떼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만약 남아 있었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미술 성지’ 중 하나가 되었을 텐데 참 아쉽다.
프랑스의 예술가인 필립 파레노는 각종 기술을 활용해 이 ‘귀머거리의 집’에 있었을 블랙 페인팅의 공감각적 요소를 재현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이 집에 들어오는 빛의 각도, 소리, 분위기를 영상 속에 생생하게 담은 것이다.
프라도박물관의 블랙 페인팅 작품들 옆에서 함께 관람할 수 있다고 하니, 프랑스 예술가는 이 작품들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을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을 듯하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골고다 언덕(Golgotha),
1900년, 캔버스에 유채, 80×120cm, 오슬로 뭉크미술관, 노르웨이.
골고타 언덕 위에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가녀린 십자가가 있고, 거기에는 발가벗겨진 연약한 그리스도가 비참하게 매달려있다. 이는 뭉크 자신의 처지를 서양문화 깊이 자리 잡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위해 영혼의 고결함을 버리라는 유혹을 받는다. 이런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예술을 위해 부, 명예와 사랑을 포기하려고 몸부림치는 작가의 예술가로서의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의 결백한 선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언덕 위를 가득 메운 군중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진 음흉하고 악한 모습이다. 화면을 뒤덮는 깊은 푸른색은 앙상한 모습의 고독한 예수님을 더욱 처참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러면서도 고귀하게 보이도록 연출하고 있다.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성스러운 아우라로 포장된 구세주는 온데 간데 없고 단지 뼈저린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인간 예수님의 모습이, 그리고 고독한 예술가 뭉크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군중들은 십자가를 등지고 서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뭉크의 마음을 지배하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뭉크가 불륜의 관계를 맺은 여인의 남편.(십자가 아래 서 있는 노란색 수염의 남자) 그를 바라보는 우울한 옆모습의 뭉크.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를 키워준 이모. 뭉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스승까지, 이들은 십자가도, 예수에게도 관심이 없다.
노르웨이(Norway)의 정식 명칭은 노르웨이왕국(Kingdom of Norway)으로, 해안선의 길이는 25148㎞이다. 면적은 32만 3802㎢, 인구는 520만 7689명(2015년 기준), 수도는 오슬로(Oslo)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5231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8만 749달러이다. 입헌군주제의 내각책임제로서,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 변형형태(165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노동당, 진보당, 보수당, 중앙당, 기민당, 사회주의 좌파당 등이 있다.
인종은 대부분이 게르만족인 노르웨이인이며, 그밖에도 켈트족이 있다. 언어는 노르웨이어이며, 전인구의 94%가 복음루터교를 신봉하여 헌법상 국교로 지정되어 있으나, 종교의 자유는 인정된다.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사는
내부 전체가 미술 갤러리처럼 아름답다.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여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노르웨이 게이랑에르 헬레쉴트간 피오르드,
피얼란드 만년설 빙하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해발 1m의 프롬 산악열차(Flåm Railway)는
소그네피요르드의 관광 거점인 프롬과 산악의 마을 뮬달을 잇는 이 노선이다.
길이 20km로 짧으면서도 피요르드에서 푸른 산악지대까지
경관의 변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급경사를 진행하기로 유명한 이 노선은 낭떠러지 절벽을 따라 달리는
차창에서의 전망은 웅장하고 박진감 넘친다.
길속은 164m 높이의 려안네포센 폭포 외에도 많은 폭포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인 쇼스포센 폭포에서는 5분간 정차한다.
밖에 나가서 낙차 93m나 되는 오타키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다.
경관뿐만 아니라 서비스도 만점인 프롬 열차, 꼭 이용해 보는 것을 권한다.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이 있는
프로그네르 조각공원(Frogneparken)은 총면적 32만 3700제곱 미터에
청동, 대리석, 화강암으로 조각한 212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노르웨이는 전국토의 3%만이 경작 가능하여 농업생산은 미미하나, 해운업 및 어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또 풍부한 수력발전을 이용한 금속·제철·목재·제지·조선·전기공업 등이 주종산업을 이루고 있으며, 영국과 공동개발한 북해유전에서 1975년부터 시작된 원유 및 천연가스의 생산은 노르웨이 경제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이웃나라인 스웨덴·덴마크와 더불어 세계 최고수준의 복지국가로, 1971년에 완성된 국민사회보장계획에 따라 전국민에 대하여 무료교육제도·의료혜택·실업수당·노후연금 등의 완벽한 사회보장시책이 베풀어지고 있다.
◆ 노르웨이의 국민 그림, 하랄트 솔버그(Harald Sohlberg·1869~1935)의, '산속의 겨울밤'
하랄트 솔버그, '산속의 겨울밤', 1914년, 캔버스에 유채, 160.4x180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노르웨이 화가 하랄트 솔버그(Harald Sohlberg·1869~1935)는 1899년 4월, 론다네 고산지대에서 스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다 기차에서 내다본 풍경을 스케치해뒀다. 파도가 일렁이듯 겹겹이 이어진 산마루는 높지만, 그 모양이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 부드럽다.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한밤인데도 어둡지 않고 푸르게 빛난다. 하늘 한가운데 또렷이 박혀 있는 샛노란 금성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강인하게 솟아오른 침엽수를 빼고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흔적이 거의 없이 고요한 겨울 풍경이지만 매섭다기보다는 온화하고 신성한 대자연의 기운이 느껴진다. 화가는 오른쪽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솔버그는 이후 여러 차례 같은 장소로 되돌아왔고 수십 년 동안 많은 풍경화를 남겼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이 작품은 1995년에 노르웨이 방송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르웨이 국민 그림’으로 뽑히기도 했다. 사실 노르웨이 화가의 작품으로 더 널리 알려진 건 솔버그와 동년배였던 뭉크의 ‘절규’다.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은 절망에 몸부림치는 현대인의 왜곡된 초상보다는 푸른 설산과 깊은 하늘, 고요한 풍광이 바로 노르웨이라는 국가의 정서적 기반이라고 느꼈던 모양이다.
1960년대에 노르웨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론다네는 여전히 울창한 수목과 산세가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하이킹과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곳이다. 참고로 론다네의 여름 최고기온은 15도 안팎인데, 최근 40년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평균기온이 줄곧 상승해왔다. 언젠가 그림 속 겨울이 전설의 한 장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38회] ‘절규’할 일이 많았던 뭉크의 <절규>(2023년 02월 05일 22:30 방송)/ 동아일보 2022년 6월 18일(토) 문화 |조선일보 2022년 08월 09일 . 오피니언 〉전문가칼럼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440] 노르웨이의 국민 그림|영감한스푼/ 월간조선TV NewsRoom Exclusive 2022년 11월 MAGAZINE(추명희 작가)/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청와대 소개 영상
https://m.youtube.com/watch?v=hhSwQAjs7Jw&feature=youtu.be
고봉산 정현욱 님
뭉크의 그 유명한 '절규' 만 알고있었는데 동영상을 보니 상상도 못할 걸작들을 많이 남겼네요
박물관도 영국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메트폴리탄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만 알고있는데 이에못지않은 유명 박물관이 노르웨이에도 있군요
갤러리와 미술관의 개념 차이도 오늘처음 알았습니다
많은 공부가 되네요
너무 덥고 다습해서 집안에 있답니다.
사워 후 선풍기 켜고 집안에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