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패션드 러브Old-Fashioned Love / 이린아
오래된 것들은 찾아오지 않고 찾아지지
구제舊製를 구제救濟하는 기분으로 무엇에 태그tag를 붙여주는 중이었지 무릎만 낡은 청바지의 주머니 걱정을 하고 허리끈을 잃어버린 바바리의 바람기를 의심하면서 한쪽 어깨만 늘어난 카디건의 반대편 어깨를 걱정하면서 점퍼가 잃어버린 모자는 어떤 길고양이의 겨울이었기를 바랐지 한참 동안 여행을 다녀온 커플처럼 모서리가 닳은 여행 가방을 메보거나 루크라는 사내의 신발을 신겨보거나 역할을 끝낸 의상들을 입고 유럽의 한 시장통 속 서민판 「로미오와 줄리엣」도 찍어봤지 난 치마가 풍성해서 얼룩이 불어났다고 믿었고 불어난 얼룩들을 앞치마로 가렸지 우리가 여차하면 숨어들 요량이었던 구멍들은 코르셋으로 조이면서 넌 보풀 가득한 스타킹 위에 호박 바지를 입었고 호박은 늙었고 그래서 가슴골을 잃은 남방을 찾을 수 있었지 살아왔으니까, 새것이 아니니까 실밥들은 뻔히 보이고 나와 비슷한 몸매의 사람이 예쁘게 늘려놓은 니트를 입고 꾸민 듯 안 꾸민 듯 오래전부터 이 예쁜 태를 만들어온 듯 말야 누군가에게 지루해졌을 때쯤, 누군가에게는 가장 예쁜 모습으로 오트 쿠튀르*가 따로 있어?
깃의 끝은 낡았지만 목덜미는 끝없이 아름다운 너의 전 애인이 입었던 옷을 내가 집어들고 그녀보다 아주 잘 어울렸을 수도 있겠지
비슷한 사람을 입고 비슷한 사람을 고르고 비슷한 사람을 찾으러 가는 걸까?
익숙하거나 낯선 얼룩들의 패션, 우리도 입어본 우리였지
*Haute Couture. 상류층의 고급스러운 맞춤옷을 제작하던 옛날 의상실과 그러한 맞춤옷을 지칭하는 용어.
― 이란아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 ...................................................................................................................................
누군가 입었던 오래된 옷을 팔고 사는 시장이 있다. ‘구제’나 ‘빈티지’라고도 불리는 오래된 옷들을 보면서 시인은 사람을 연상한 모양이다. “살아왔으니까, 새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모두 구제가 아닌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고르고 찾는 것은 구제마켓에서 낡은 옷을 사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실밥들은 뻔히 보이고” 늘어나 있다. 하지만 그 흔적들, 얼룩들이 구제를 패션으로 만든다. “누군가에게 지루해졌을 때쯤,/누군가에게는 가장 예쁜 모습”이 된다.
국민일보 / 시가 있는 휴일 2023-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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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사람을 입고
비슷한 사람을 고르고
비슷한 사람을 찾으러 가는 걸까?
익숙하거나 낯선 얼룩들의 패션,
우리도 입어본 우리였지
(이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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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입었던 오래된 옷을 팔고 사는 시장이 있다. ‘구제’나 ‘빈티지’라고도 불리는 오래된 옷들을 보면서 시인은 사람을 연상한 모양이다. “살아왔으니까, 새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모두 구제가 아닌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고르고 찾는 것은 구제마켓에서 낡은 옷을 사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누군가에게 지루해졌을 때쯤,/누군가에게는 가장 예쁜 모습”이 된다.
국민일보 / 시가 있는 휴일 202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