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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59)
천살성의 개시는 피다(3)
주하연을 뒤따르며 백산은 하소연하듯 말했다. 150장 정도 올라왔을
때, 위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런 소리를 들었다.
무림인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분명했다. 내심 궁금하기도 해서 빨리
가보자고 주하연을 꼬드겼으나 그녀는 요지부동.
여전히 '한다.' '못한다.'를 중얼거리며 계단을 오른다.
백산은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그저 멍한 얼굴로 그녀
를 따를 뿐이었다.
어느 덧 계단 마지막 층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비가 오는 모양이네?"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문득 벌써 여름이 되었구나 하는 생
각이 들었다.
"결국 '못 한다.'로 끝나고 말았구나."
두 층 남은 계단을 보며 백산은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주하연이 밟
고 있는 계단은 '못한다'였고, 두 개 남았으니 마지막 역시 못한다로
끝나게 되어있다.
"제길……. 이거 잘못 센 거 아냐?"
느닷없이 욕설을 뱉어낸 주하연은 아래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얘가, 내가 뒤에서 봤는데 빼먹은 계단은 한 곳도 없었다."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말했다. 내려가서 다시 세고 올라올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랬겠지? 일생이 달린 문제였는데 빼먹지는 않았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주하연은 이내 고민스런 얼굴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
았다. '못한다.'로 끝나는 계단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올라갈 생각도 못하고 뚫어져라 계단만 쳐다보는 주하연의 모습에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어 백산은 그녀가 앉아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
다.
"그럴땐 말이야, 처음부터 계단이 없었던 걸로 해 버리면 되는 거
야, 이렇게."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계단 위쪽으로 손을 뻗어 두 계단 사이를 길게
그었다.
"맞아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거야. 내가 빙천수라마공을 얻
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백산의 손을 쳐다보고 있던 주하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그녀의 손에서 백색 투명한 강기가 흘러나오고 계단의 연결된 부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이야합!"
만족스런 얼굴로 계단을 쳐다보던 주하연은 짧게 고함을 질렀다. 허
공섭물을 이용하여 방금 잘라낸 돌을 들어올리더니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이곳엔 계단이 없었던 거야."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계단으로 발을 올려놓으며 한다, 하고
외쳤다.
"축하한다, '한다.'로 마무리지어서. 그런데 원하는 게 뭔지 물어도
되냐?"
왠지 모르게 뒷골이 당기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다.'로
끝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까닭이다.
"하연이만의 비밀. 그만 가요."
몸을 날려 백산의 등에 훌쩍 올라타며 명랑하게 소리쳤다. 여전히
의문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백산은 이내 얼굴을 풀며 힘차게 마지막
계단을 밟고 밖으로 나왔다.
숨을 쉬어야하는 인간으로서는 첫 외출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첫
외출은 생각만큼 달콤하지는 못했다.
"아악!"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훨훨 날아가는 여인은 하낙에 있을 거라 여겼
던 설련이었다.
"쟤들이?"
화들짝 놀란 백산은 피를 토하며 떨어지는 설련을 향해 몸을 날렸
다.
"웬일이냐, 여긴?"
"백 공자!"
자신을 받아 안은 사람이 백산임을 알아본 설련은 울먹이는 목소리
로 불렀다.
"대장!"
"백 공!"
"아미타불!"
일순 혈마총 입구에 정적이 흘렀다. 설련 일행보다 더욱 놀란 사람
은 지금껏 혹독하게 몰아치던 척사대였다. 치열하게 싸우던 상대가 갑
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순 맥이 풀려 망연한 얼굴로 새
롭게 나타난 인물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만자승 또한 부하들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몰아쳤으면 설련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보다
새롭게 나타난 자에 더 놀랐다. 련에서조차 포기했던 귀광두(龜狂頭)
였던 탓이었다.
더구나 그는 좀 전에 경공을 보여주었다. 그의 별호가 귀광두가 되
었던 이유는 거북이처럼 몸이 느렸던 사실에 기인했다.
거북이보다 느린 놈이 미친놈처럼 설친다고 하여 귀광두란 별호를
얻었는데 경공술을 펼치다니. 문득 저저사령계에서 무슨 기연을 얻었
나 싶어 찬찬히 살폈다.
"그동안 경공술을 하나 주워 배웠나보군."
이내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말았다. 녀석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떨어지는 비조차 튕겨내지 못한다.
"도기철! 어떡하면 좋을까?"
곁으로 다가온 도기철을 향해 낮게 물었다. 제갈승후가 기다렸던
자. 그가 나타나면 지체 없이 보고하라고 하였다.
"격렬한 싸움 중이었습니다. 더구나 우린 척사멸혼진 후식을 펼치고
있었고요."
"그래, 그랬지……. 아직 척사멸혼진은 발동 중이었어. 더 강하게
조여라!"
"존명!"
낮게 소리친 도기철은 재빨리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곧이어 백산의 등장으로 느슨해졌던 척사멸혼진이 더욱 강한 기운을
흘리며 포위망을 점점 좁혀가기 시작하였다.
"몸을 치료하셨군요."
마음을 진정하려 하였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그에게 들켰다면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거였다.
"쯥! 하낙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요정은 도대체 뭐한 거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숙의 말을 한마디도 빼지 않고 전했습니다.
소승은 죄 없습니다."
요정대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초막에 기거하며 백산을 기다리긴 했지만 그가 나올 거라고는 생
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건강한 모습으로 주하연과 같이 나왔다.
그를 내보내준 부처님께 감사할 뿐이었다.
"참 설련 너 이거 가져라. 내가 검 한 자루 사준다 했지. 검은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검집은 따로 구해주마."
지저사령계 비역에서 들고 나왔던 검을 설련에게 내밀었다.
"이봐 대장! 검을 선물하려면 이름도 하나 지어줘야지."
곁에서 지켜보던 광치가 느닷없이 끼어들며 말했다.
"이름? 내가 뭐 아는 게 있나."
어색한 얼굴로 백산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검
이고 오래되어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에 명검이란 생각만 했을 뿐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여정검(麗情劒)은 어때?"
"그거 괜찮네, 여정검이 딱입니다, 백공."
광치의 말에 구양중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고운 정을 가진 검이라……. 그럼 그걸로 하지 뭐."
"우씨……! 내게도 관심 좀 가져주면 안 돼!"
백산의 등에서 뾰족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지금껏 침묵하고 있
던 주하연이 여정검이란 말에 폭발한 것이다.
백산이야 여(麗)의 첫 번째 의미인 '곱다.'밖에 모르지만 여라는 말
에는 '짝.'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정검이란 이름은 두 번째 의미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음이 분명했
다.
"난, 남경왕부의 봉선군주란 말이야."
"엥? 대장 네 등에 있는 딱정벌레는 뭐냐?"
느닷없이 터진 고성에 광치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지
금껏 백산에게만 신경 쓰느라 그의 등에 업힌 소녀는 관심 밖이었다.
"네, 이놈! 감히 봉선군주에게 딱정벌레라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
나. 생긴 건 꼭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해 가지고는."
백산의 등에서 팔짝 뛰어내린 주하연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광치
를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설련이나 구양중은 친하게 지냈던 사이고,
요정대사에게는 큰 빚을 졌다.
결국 남은 사람은 처음 보는 광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모든 짜증이
광치를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꼬맹야! 네가 봉선군주면 난 하낙의 왕이다. 어디 군주가 왕에
게 눈을 치뜬단 말이냐!"
하지만 광치 또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오연한 자세로 소리치는
주하연에게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뭣이라? 내 16년을 살았지만 곰처럼 생긴 녀석이 왕이 되었다는 말
은 한번도 듣지 못했노라. 왕의 신분을 증명하는 옥새를 내놔보거라!
어디서 감히 왕을 사칭한단 말이더냐!"
"허!"
광치는 나직이 실소를 터트렸다. 나이만 16살이지 다른 건 어린애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군주님. 제가 잠시 실언을 했습니다."
"잘못을 인정했으니 용서해주마. 하지만 그냥은 안되겠다. 봉선군주
라 했는데도 살기를 뿌리는 저 놈들을 벌하는 걸로 내 죄를 사하여 주
겠노라. 요정할아버지 우린 저곳으로 가요."
강경한 얼굴로 명령을 내린 주하연은 조금 전 요정이 앉아 있던 초
막 아래를 가리켰다.
"다 나으셨군요. 정말 잘됐습니다. 아미타불!"
주하연과 백산을 번갈아 쳐다보던 요정대사는 감격한 얼굴로 불호를
읊었다. 천음신맥이 완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주었던 대환단까
지 전부 내공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공만으로 따진다면 주하연은 자신보다 강자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줄게요. 식량만 충분했으면 나오지 않으
려고 했었는데."
"재미있었나 보군요."
"재미있었다라기 보단 행복했다는 말이 더 맞겠죠."
"그렇게 좋았습니까?"
"당연하죠, 오빠가 사람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대장 사모도 저쪽으로 가서 쉬십시오."
주하연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는 설련을 보고 있던 광치가 말을 건
넸다. 백산이 나타남과 동시에 설련은 다가오는 적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주하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백산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지 연
신 처마 밑을 흘끔거렸다.
"그래라, 무리하면 내상만 심해진다."
"알았습니다."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설련은 주하연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
겼다.
황당함에 말문이 막힌 사람들.
만자승을 비롯한 척사대원들이었다. 강한 경력을 뿌리며 상대를 압
박해 나갔으나 누구 한 명 영향을 받은 이가 없었다.
상대가 반응을 해와야 공격을 가하든지 할 터인데 저들끼리 이야기
하느라 이편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하는 꼴을 보면 지금까지 싸움을 하고 있었던 자들인지조차 의심스
러울 지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척사멸혼진이 뿜어내는 힘을 차단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몰랐군, 귀광두(龜狂頭) 네 놈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은."
"귀광두(龜狂頭)?"
"대장 네 별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광두가 뭐냐, 귀광두가.
광(狂)자를 잃어버리면 대장 넌 큰일난다."
"광자를 버리면 귀두(龜頭)가 된다는 말이네. 이런 개자식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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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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