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 싸인 전설의 전투 분석
1371년 중세 세르비아 최대의 전성기를 일궜던 네마냐(Nemanja)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마리차(Marica) 전투에서 사망한뒤 왕조는 단절되었고 세르비아는 몇개의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1370년대 말이 되자 세르비아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군주는 라자르 흐레벨리아노비치(Lazar Hrebeljanovic)였는데 그의 영토는 크루셰바츠(Krusevac)를 중심으로 하는 세르비아 중부와 코소보(Kosovo) 동부였다. 그는 비록 예전 네마냐 왕조만큼의 권위는 없었지만 영토내 광산에서 나오는 경제력과 세르비아 정교회의 후원자역할을 하여 총대주교가 지차(Zica)에 자리잡을 수 있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므로 종교상의 명분도 가지고 있었다.
그외 다른 군주들로는 코소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크 브란코비치(Vuk Brankovic)로 원래 그의 영토 대부분은 발샤(Balsha) 가문의 것이었지만 그들로부터 빼았아 그의 영지로 삼은 것이었다. 발샤 가문은 비록 브란코비치에게 밀려나 페치(Pec)와 프리즈렌(Prizren)을 뺐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몬테네그로의 대부분과 알바니아 북부를 차지한 대가문이었다. 이외 라자르와 함께 강대한 세력을 구축한 보스니아왕 트브르트코(Tvrtko)가 있었다. 라자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두 딸을 각각 브란코비치와 발샤에게 시집보냈으며 이들을 한데 묶어 오토만과 헝가리에 대항하는 동맹을 이루려고 했지만 모든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발샤와 트브르트코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지배권을 두고 자주 전쟁을 벌이는 처지였다.
1385년 발샤의 가주가 알바니아까지 처들어온 투르크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그의 뒤를 이은 제르지2세(Gjergj II)는 투르크의 가신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치욕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발샤가에 상당한 이득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발샤가를 적대한다는 것은 곧 단순한 중세귀족가문 하나를 적대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강대한 투르크를 적대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발샤가 투르크에 종속된 덕분에 보스니아는 함부로 발샤를 상대하지 못했고 발샤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두카진(Dukagjin) 가문이나 두러스(Durres, 옛 디라키온, 이탈리아어로는 두라초)의 토피아(Thopis) 가문은 위축되었다. 특히 토피아 가문은 발샤를 견제하기 위해 투르크를 불러들인 장본인이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발샤를 예속시킨 투르크의 다음 타겟이 은광으로 유명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가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1386년 무라트(Murat)는 라자르의 영토를 침략하여 모라바(Morava) 강과 주요가도 두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 니슈(Nis)를 점령했다. 16세기의 투르크 역사가 네슈리(Nesri)는 이때 라자르가 조공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한 가신이 되었다고 기록했고 후대의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네슈리의 역사서술은 근본적으로 투르크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시키려는데 있다. 그는 몇년뒤 일어난 라자르와의 전쟁을 충성을 맹세하고 가신이 된 라자르가 약속을 어김으로서 일어난 응징이므로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니슈 함락뒤 라자르와 무라트간에 일어난 수많은 소규모 충돌들은 이러한 네슈리의 기록을 의심케한다.
1388년 세르비아를 침략한 투르크군은 코소보뿐 아니라 보스니아 남부까지 침략하였다. 하지만 이 원정은 보스니아의 장군 블라트코 부코비치(Vlatko Vukovic)에 의해 패배함으로서 실패로 끝났고 이에 격분한 무라트는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다음해 여름 코소보로 처들어갔다. 라자르는 곧 보스니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보스니아는 전해 투르크군을 물리친 블라트코 부코비치에게 군대를 맡겨 라자르에게 원군으로 보냈다. 자신의 영토가 투르크군의 진격로상에 위치해있는 부크 브란코비치 역시 상당한 군대를 모아 이들에게 합류했다. 이리하여 세명의 지도자가 이끄는 연합군이 라자르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프리슈티나(Prishtina) 북서쪽에 있는 시트니차(Sitnica) 강과 라브(Lab, 알바니아어로는 Llap) 강이 만나는 코소보 폴리에(Kosovo Polje)에서 6월 15일날 투르크군과 맞서 그 유명한 전설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양측의 최고지휘관인 라자르와 무라트는 둘다 죽었으며 전투후 그들의 후계자는 14살의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c)가 라자르의 뒤를, 바예지트(Bayezit)가 무라트의 뒤를 이었다. 특히 라자레비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라자르의 아내인 밀리차(Milica)가 대신 섭정으로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그런데 아주 유명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의문에 휩싸여있다. 그도 그럴것이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고 모두 단편적이며 게다가 전부 제각각 다른 사실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누가 이겼는지 승패조차 불분명하다. 양측이 모두 얼마의 군대를 동원했으며 구성은 어떻고 전투배치는 어디였고 전투과정은 어떠했는가는 미스테리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단편적인 증거들을 모아 되도록이면 진실을 캐도록 한다.
세르비아군의 구성
전투에 참전한 군은 보스니아,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군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외에 다른 군대의 참전은 없었을까? 설령 이들이 거느린 군대가 전부였다고 해도 보통 이들 정도의 위치에 있는 귀족들이 참전할 때는 휘하의 가신들을 함께 대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독립적인 참전인지 아니면 가신으로의 참전인지 확실치 않지만 몇몇 기록들은 알바니아인들의 참전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세르비아 기록에는 이들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알바니아 기록에는 참전자들의 명단이 남아있다.
알바니아의 귀족가문인 무자카(Muzaka 혹은 Musachi) 가문에서 나온 16세기 초의 기록을 보면 테오도르(Teodor) 무자카가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을 이끌고 다른 알바니아 군주들과 함께 라자르측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가문의 기록은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발샤가의 참전여부다. 알바니아계인지 세르비아계인지 아직도 논쟁이 분분한 발샤가가 라자르측에 참전했다는 말은 네슈리의 기록에만 나오는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네슈리의 역사서술의 근본적인 목적은 투르크의 미화와 정당화이고 당연히 왜곡이 상당수 들어있을 수 밖에 없다. 네슈리를 포함한 투르크측 기록들은 어떻게든 세르비아군의 규모를 부풀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에 제르지 발샤의 참전여부도 후대에 끼워넣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발샤가는 보스니아와 사이가 나빴고 투르크의 가신이었으며 전투가 일어난날 울치니(Ulcinj)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네슈리의 기록은 더욱 신빙성이 떨어진다.
15세기에 씌여진 투르크 기록들은 알바니아인들과 함께 다른 민족들의 참전도 기록하고 있다. 한 기록은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헝가리 용병들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고 또다른 기록은 발라히아(Wallachia), 체코, 프랑크(서유럽인들의 총칭)들의 참전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모두 섭렵했던 네슈리는 위에 나온 모두를 적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대로 투르크 역사가들은 투르크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라자르군의 규모를 늘리는데 열심이었다. 최초의 투르크 기록에는 단순히 "서방에 있는 모든 군대"라고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네슈리에 따르면 라자르는 투르크의 세배나 되는 군대를 동원한뒤 숫적인 우세로 인한 승리의 확신에 들떠 전투 전날밤을 술을 마시며 취했다고 한다. 물론 투르크측이 언급한 라자르에게 가담했던 세르비아 이외의 민족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들의 총수가 투르크군의 세배나 되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세르비아인들이 외국용병들을 자주 기용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여러번 있었다. 세르비아 최대의 전성기를 일구었던 두샨(Dusan)은 자신의 근위대를 독일인으로 편성했고 특히 헝가리인들의 참전은 라자르와 한 헝가리 귀족이 장인-사위관계였다는 사실을 감안할때 상당히 설득력있는 말이다. 하지만 전투에서의 주력은 아마 라자르 자신과 브란코비치, 보스니아군대였을 것이다.
투르크군의 구성
투르크군의 경우 비투르크계 군대가 참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당시 마케도니아와 불가리아에는 두 세르비아 지도자들인 마르코 크랄리에비치(Marko Kraljevic)와 콘스탄틴 데야노비치(Konstantin Dejanovic)가 각각 군주로 있었는데 이들은 투르크의 가신이었고 또한 가신의 주요임무는 군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한 술탄이 직접 나선 원정인만큼 최소한 이들중 한명이 술탄과 동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투후 70여년뒤 씌여진 피렌체 기록에는 투르크군에 참가한 그리스와 기독교 병사들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무라트가 다수의 그리스, 제노바 용병들을 대동하고 있었으며 그중 오천명의 석궁병들이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피렌체의 기록이라 제노바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갖고 글을 썼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정도의 진실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투가 일어난 같은해 비잔틴의 투르크 가신위를 받아들인 요한네스7세는 제노바를 방문하여 자신의 할아버지인 요한네스5세를 공격하는데 지원을 받고자 했다. 다음해 봄 그는 자신의 군대와 제노바, 투르크 연합군을 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을 공격했는데 코소보 전투에서도 그리스와 투르크군의 지위만 바꼈을뿐 같은 구성으로 군대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을까?
전투후 몇년뒤 씌여진 세르비아 연대기에는 무라트의 군대에는 그리스, 불가리아, 알바니아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와 불가리아는 당시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충분히 참전여부가 가능하지만 문제는 알바니아다. 말러시(Malesi, 지명이름이지만 직역하면 highland임. 가끔 highland라고 쓰는 경우도 있음)의 호전적인 카톨릭 부족인 미르디타(Mirdita)와 컬멘디(Kelmendi)는 수백년 후 전투에서 자신들이 투르크의 편에 서서 싸웠다고 주장하며 오토만으로부터 세금감면을 받았다. 문제는 이들이 스스로의 주장 외에는 직접적으로 투르크군에 참가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전무할뿐 아니라 이것을 주장하여 세금감면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신빙성에 의심이 가게 만든다. 하지만 굳이 이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때 알바니아는 통일되지 못한체 분열되어 있었고 알바니아의 상당부분이 투르크의 영향권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알바니아인들이 투르크측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높다.
군대의 규모
세르비아나 투르크군의 숫자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네슈리는 자신의 기록에서 처음에는 적군의 숫자가 셀수없이 많았다고 했다가 곧 적의 숫자가 오십만명이라고 했다.15세기 중반의 투르크 기록자인 우루즈(Uruc)에 따르면 무라트의 군대를 육만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당시 투르크의 동원능력에 비하면 많은 수이다. 문제는 세르비아와 투르크측 기록들의 상반된 주장인데 이들은 서로 아군이 적군보다 더 적은 숫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은 투르크쪽이 더 자세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역사가들은 투르크 기록들을 참조하여 전투 당시 투르크는 사만에서 육만, 세르비아는 십만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세르비아군의 숫자가 비현실적이 된다. 세르비아의 전사학자들은 이를 뒤집어 투르크 사만, 세르비아 이만오천, 혹은 투르크군 이만칠천에서 삼만, 세르비아군 만오천에서 이만으로 추정하는데 대부분의 발칸연구자들은 뒤의 것을 받아들인다.
군대의 배치
당연한 말이지만 승패조차 불분명한 전투에서 군대의 배치를 알아내기란 더욱 어렵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록들과 당시의 실전원칙 등을 통해 어느정도는 추정이 가능하다. 투르크군은 중앙과 좌우익으로 나뉘어 중앙은 무라트가 우익은 작은 아들 바예지트(Bayezit)와 에브레노즈(Evrenoz) 장군이 유럽군단(루멜리)을 지휘하고 좌익은 큰 아들 야쿱(Yakup)이 아나톨리아(아나돌루)군단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네슈리는 전투전에 무라트와 에브레노즈가 의견을 나눈것에 대해 적고있는데 무라트는 낙타를 전면에 배치하여 세르비아의 말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려고 했지만 에브레노즈가 그를 설득하여 전면이 아닌 조금만 뒤에 배치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같은해 10월 피렌체 원로원이 보스니아 왕에게 보낸 서신에는 무라트 앞에 사슬로 묶인 낙타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낙타를 내세우는 목적이 말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거라면 세르비아측은 기병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세르비아군이 선제공격을 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전투는 세르비아측이 먼저 공격하고 투르크군이 방어하는 형태로 치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세르비아군은 아마 다른 유럽군대같이 중장기병을 전면에 배치했을 것이다.
세르비아군의 배치는 라자르가 중앙, 부크 브란코비치가 우익, 보스니아군을 비롯한 모든 외국인부대가 좌익에서 블라트코 부코비치와 네슈리의 기록에 따르면 윤드(Yund)의 아들 디미트리(Dimitri)의 지휘하에 있었다고 한다.
전투과정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아무도 전투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무라트의 아들인 바예지트가 쓴 두장의 편지가 남아있긴 하지만 16세기 오토만 관리들에 의해 조작된 위조일 가능성이 많아서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재로서 가장 믿을만한 기록은 네슈리의 기록밖에 없는데 이에 따르면 세르비아군은 좌익을 거의 붕괴시키고 중앙에서는 커다란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이때 바예지트와 에브레노즈가 이끄는 우익이 활약하여 세르비아군을 패퇴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바예지트가 술탄을 계승한 것을 생각해볼때 네슈리의 기록은 바예지트를 미화하기 위한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전투과정에 관련하여 풀어야할 세가지의 의문점은 부크 브란코비치의 배반(전투는 민담으로 전해내려와 롤랑의 노래와 함께 중세 서사 문학의 최고봉에 오르는데 이 민담에는 반드시 브란코비치가 배신자로 등장한다)과 라자르와 무라트의 죽음의 시점이다. 그중 브란코비치의 배반은 전투 이후 서서히 발달해갔을 가능성이 크다. 13년후 씌여진 세르비아의 수도원 기록에는 "진실은 알수없지만 라자르는 그의 부하 중 한명에게 배신을 당했거나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또한 몇년 뒤 씌여진 카탈루냐 기록에는 브란코비치에 대해 라자르가 죽은뒤 곧바로 전장을 떠나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간 것에 대해서만 비난하고 있을뿐이다. 불가리아 태생이자 라자르의 아들인 라자레비치의 궁정행정을 맡은 적이 있는 역사가 콘스탄틴은 브란코비치의 배신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라자르가 처음부터 다른 영주들을 무시하고 짓밟았기 때문에 라자레비치는 다른 세르비아 군주들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만 적고있다. 세르비아 출신의 예니체리였던 미하일로비치(Mihailovic)는 1490년대에 쓴 자신의 반투르크적 회고록에서 어느편이 이길지 전투를 관망만 하고있던 세르비아 귀족들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같은 시기 베네치아나 달마티아(Dalmatia) 출신인 것으로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사가는 드라고슬라프 프로비시치(Dragoslav Probisic)라는 영주가 갑자기 자신의 군대를 돌려 세르비아군과 싸웠고 이를 들은 부코비치가 전장에서 철수했다고 단언한다. 프로비시치의 이름은 다른 어떤 곳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그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의심했지만 프로비시치에 의해 주조된 동전이 발견되고 그것이 브란코비치가 주조한 동전과 비슷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브란코비치의 가신이 아니었을까하고 추측한다.
처음으로 브란코비치를 배신자로 기록한 책은 1601년에 발행된 라구사(Ragusa)의 수도사 마브로 오르비니(Mavro Orbini)의 연대기였는데 그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브란코비치가 투르크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라자르를 배신하기로 합의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전투가 일어난지 이백년도 넘는 후대였고 또한 오르비니는 민간인들의 전통설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현재 남아있는 이 당시의 서사시들을 살펴보면 항상 두 영주의 대립구도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무라트를 살해한 충성스러운 귀족이고 또하나는 무라트와 결탁한 배신자라는 구도다. 몇몇의 시에서는 배신자를 브란코비치로 무라트를 살해한 영웅으로 밀로슈 코빌리치(Milos Kobilic)를 지목하고 있다. 대충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평소 항상 배신할 마음을 품고있던 브란코비치는 투르크와 결탁하고 세르비아군 내부에 자중지란을 일으키기 위해 코빌리치가 투르크와 비밀협상을 맺었다며 라자르에게 고발하였다. 사위를 신임한 라자르는 코빌리치를 의심하였고 이에 분개한 코빌리치는 라자르에게 술탄을 죽여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겠다고 맹세하고 실제로 이를 시행한다. 이런 내용의 기원은 1450년대에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에 살았던 독일인들에 의해 서유럽에 소개되었는데 최초의 이야기에서는 브란코비치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고 단지 누가 더 투르크와 잘 싸울지 경쟁하다 그중 코빌리치가 무라트를 죽였다고만 되어있다.
그렇다면 1601년이 되어서야 브란코비치가 배신자라는 말이 처음 나왔다는 말인데 이것은 아무래도 1448년에 일어난 두번째 코소보 전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전투는 트란실바니아의 귀족 후냐디(Janos Hunyadi, 루마니아어로는 Iancu de Hunedoara)가 이끄는 군대가 투르크군과 벌였던 전투인데 이당시 부크 브란코비치의 아들이었던 주라지(Djuradj) 브란코비치는 후냐디군이 자신의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투르크에게 후냐디의 움직임을 알려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차 코소보 전투에서 브란코비치가 배신자로 알려진 것은 아마 이 두번째 코소보 전투와의 혼동때문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달마티아 출신의 바르(Bar) 대주교였던 마르틴 비지(Martin Bizzi)는 코소보에 관한 기록에서 지앙코(Gianco, 후냐디를 말함)와 밀로스 코빌리치(Milos Cobilich, 밀로슈 코빌리치)를 동시에 언급했고 다른 민담들에도 다른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이 함께 뒤섞인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보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히 보인다. 만약 브란코비치가 실제로 무라트와 비밀협상을 벌였다면 전투후 바예지트의 특권을 받는 가신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투 이후 투르크측과 어색하게 지내다가 1392년 투르크의 가신이 되었지만 스코피에(Skopje)를 뺐기고 그뒤 95년에서 96년까지 일어난 바예지트의 발칸원정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일 그가 배신했다고 말해지던 라자르의 아들인 라자레비치는 이때 투르크의 가신이 되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바예지트와 동행했다. 브란코비치는 말년 자리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갖혀 죽게된다. 전투 이후의 이러한 사건들을 보면 과연 브란코비치가 라자르를 배신하고 투르크측에 붙었는가는 심히 의심스럽다.
하지만 브란코비치가 투르크와 아예 접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세르비아 전역은 네마냐 왕조의 단절 뒤 영주들이 제각기 독립하여 많은 정치적 충돌이 있었고 그런 와중 투르크와 가장 가까웠던 브란코비치가 자신의 영지안보 때문에 투르크와 외교적으로 접촉했을 가능성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투르크와의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을테고 투르크측과 외교적으로 잘 협상하여 자신의 소유를 지키고자 했을 가능성은 많다. 그렇다고 민담에서처럼 라자르를 배신했다기에는 증거가 없고 위에도 언급한 카탈루냐의 기록이 말하듯 라자르가 죽은뒤 더이상 전투를 진행시키지 않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투르크의 기록에는 세르비아를 배신한 배신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지만 위에도 언급했듯이 투르크는 자신들의 역사를 미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라였다. 따라서 술탄의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뤄냈던 승리에 누가 될 수 있는 적군 배신자에 대해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을지도 모른다.
무라트의 죽음에 대해서 오토만 기록들은 일관된 주장을 하고있다. 무라트는 그의 곁에 가까이 올 수 있었던 한명의 기독교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초기 투르크의 기록자이자 황실에서 바예지트의 아들을 돌보다 1412년에 죽은 아메디(Ahmedi)는 세르비아군이 무너지고 도주한뒤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이렇게 적고있다.
"군대의 대부분은 적을 쫓아갔고 오직 폐하와 몇몇 조신들만이 한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한 이교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체 그곳에 숨어있었다. 그는 시체들 중에 숨어서 칸(Khan, 술탄 무라트)을 지켜보고 있었다. 운명의 순간 그는 누웠던 곳에서 일어나 단검을 가지고 폐하에게 달려가 그를 찔렀다."
우루즈를 포함한 다른 기록들도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만 전투가 끝난뒤가 아닌 전투중으로 사건의 시간을 잡았다. 게다가 살해과정도 약간 다른데 이 이교도는 무라트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키스를 할것을 부탁했고 무라트는 이를 허락했다가 그만 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무라트의 죽음에 관한 투르크 기록들을 모두 비교분석한 알렉세이 올레스니츠키(Aleksej Olesnicki)는 투르크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고 해석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암살자에 대한 정보가 이교도라는 것 외에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무라트가 죽은 후 암살자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기록에 없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올레스니츠키는 무라트가 전투중에 잠시 혼자 남겨졌고 얼마뒤 그의 부하들에게 죽은체로 발견되었다는 논지의 주장을 하였다.
무라트의 죽음에 대한 세르비아측의 기록에도 역시 한명의 활약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시 투르크와 마찬가지로 기록들마다 틀린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민담에 의하면 무라트를 죽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밀로슈 코빌리치다. 민담에 따르면 부크 브란코비치의 음모로 라자르의 의심을 사게된 코빌리치는 라자르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15일 아침 무라트의 막사로 가서 무라트에게 항복하러 왔다고 말했다. 무라트는 그에게 복종의 의식(발이나 무릎에 입을 맞추는 것)을 행할 것을 명했고 여기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한 시는 이렇게 적고있다.
"술탄의 앞에 밀로슈는 머리를 숙이네
그리고 그의 무릎에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숙이네
그의 황금빛 단검이 빠져나와 술탄을 찔렀네
그리고 밀로슈는 그를 짓밟았네."
부크 브란코비치의 배신행위와 같이 이 이야기 또한 후대 이야기꾼들의 상상의 산물로 보인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고대의 약탈혼으로 보이는데 주인공이 적의 땅으로 들어가 교묘한 책략으로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을 세르비아 민담들과 서사시들이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초기부터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태생의 역사가 콘스탄틴은 1430년대에 씌여진 자신의 연대기에서 잘못된 내용으로 고소된 한 귀족이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술탄에게 가서 책략을 부려 그를 살해한 이야기를 실었다. 콘스탄틴은 1411년부터 라자레비치의 궁정에서 일했으므로 궁정의 음유시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 차용은 민담이나 서사시에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라자르가 전투 전에 했다는 유명한 연설은 1390년대 세르비아 총대주교가 교우들에게 했던 연설의 뼈대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여기까지를 보면 무라트는 과정이야 어쨌든 한명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기록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그해 10월달에 오갔던 보스니아 왕과 피렌체 원로원 간의 서신과 전투보고서들은 무라트의 죽음이 전투 중에 용감히 뛰어든 한무리의 영주들로 인해 일어났다고 적고있다.
"행운 중에 가장 큰 행운은 전투 중 검을 들고 적열과 사슬에 메인 낙타들을 뚫고 무라트의 막사까지 도달한 열두명의 영주들입니다. 그리고 더욱큰 행운은 그중 한명이 그처럼 강력한 군주를 자신의 검으로 찔러죽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열둘이라는 상징적인 숫자 때문에 이 기록이 과장이라고 생각하며 브라운(Braun)같은 경우는 이를 보스니아의 조작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문서는 전투후 불과 몇달뒤에 씌여진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또한 부하들이 직접적으로 전투에 관여했던 보스니아 왕의 친필이기 때문이다. 낙타에 대한 언급은 다른 기록들과 들어맞는다. 그리고 열둘이라는 숫자가 상징적이든 아니든 몇몇 기사들이 힘을 합해 적의 수괴를 공격하는 것은 별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전투후 20년 이내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불명의 피렌체 기록에는 좀더 자세한 무라트의 죽음이 실려있다. 여기에 따르면 세르비아군이 패배한뒤 라자르는 다른 12명의 기사들과 함께 무라트의 막사를 공격했고 창으로 무라트를 죽였다는 것이다. 비슷한 기록은 1402년까지 오토만에 살았던 시에나(Siena) 상인이 1416년에 발행한 역사기록에도 나오는데 라자르와 몇몇의 귀족들이 무라트의 막사로 돌격하다가 잡혔고 이들이 무라트 앞으로 끌려나오자 이들중 한명이 이때 무라트를 찔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 앞의 두 이야기(소수의 기사들이 돌격 무라트 전사, 속임수를 써서 무라트를 살해한 병사)가 섞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02년 이전에 씌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작자불명의 카탈루냐 기록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기록은 여러 사실들이 미화되고 과장되어 다른 기록들과 불일치하는 기사들이 많기 때문에 역사가들이 거의 언급을 안하지만 전투가 끝난뒤 바예지트에게 죽임을 당했던 무라트의 큰아들 야쿱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바예지트가 계속해서 다스리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바예지트가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죽은
1402년 이전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의 마지막은 코소보 전투로 끝맺고 있는데 많은 카탈루냐 학자들은 전투에 대한 기록만은 미화투성이인 기록의 성격과 다름을 지적했다. 이 책은 비잔틴의 그리스인이나 반바예지트파의 투르크인에게 씌여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정체불명의 작가는 장소이름이나 투르크의 관습, 역사적인 사실 등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라자르의 군대는 이만육천명의 보병과 사천명의 기병, 다수의 독일인과 헝가리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투전 한 거구의 헝가리 기사가 라자르에게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줄것을 부탁했고 라자르는 그에게 상당수의 군대의 지휘권을 주고 나머지는 자신과 부크 브란코비치가 지휘권을 가졌다. 무라트는 낙타를 삼열로 세워 사슬로 메어놓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한무리의 독일기사들이 낙타의 열을 무너뜨리고 투르크군 깊숙히 뚫고 들어왔다. 순간 투르크군은 혼란에 휩싸였고 이때 그 헝가리 기사가 무라트에게 곧바로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무라트는 그에게 화살을 쐈지만 그는 계속 돌격하여 방패와 흉갑을 랜스로 관통시켜 무라트는 깊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헝가리 기사는 곧 투르크군이 쏜 화살에 죽었지만 무라트 역시 얼마 안가 죽고말았다.
이 기록에서 무라트를 죽인자를 헝가리인이라고 한것은 충분히 주목할만한 것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라자르의 군대에 헝가리인들이 참가했을 확률은 거의 100%이고 특히 그의 사위인 니콜라스 가라이(Nicholas Garai)는 헝가리의 강력한 귀족 중 한명이었으며 발칸 일에 깊숙히 관여되어 있었다. 가라이 자신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보낸 고위기사가 라자르와 함께 싸웠을 가능성은 있다. 어떤 기록에는 코빌리치가 라자르의 사위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아마 가라이와 라자르의 관계를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해지는 민담들에 헝가리를 대입시키면 어느정도 설명이 되는 것도 있다. 세르비아 민요 중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원 전사한 아홉명의 유고비치(Jugivic) 형제들에 관한 민요가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들은 라자르의 처남들이지만 민요 외에 어떤 기록에서도 이들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실존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다. 옛 민요를 기록한 책에는 이들의 이름이 우고비치(Ugovic)라고 되어있는데 이 단어는 아마 헝가리 영주를 뜻하는 ugarski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헝가리인의 아들"이란 뜻의 우가로비치(ugarovici)에서 나온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설의 유고비치 형제들은 사실 가라이에 의해 원군으로 보내진 헝가리 기사들이 아니었을까?
만약 무라트를 죽인 사람이 헝가리인이고 가라이와 관계있는 사람이라면 세르비아 민담에서 무라트를 죽인 것으로 알려진 밀로슈 코빌리치를 라자르의 사위라 한것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카탈루냐 기록에서 말하는 거구의 헝가리 기사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무라트에게 뛰어들었고 보스니아 왕이 피렌체 원로원에 보낸 서신에 나오는 열두명의 기사는 바로 이들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이 나중에 싸우다 전사한 아홉명의 유고비치 형제로 승화되었을 수도 있다.
서방의 기록 중 이 카탈루냐 기록과 정황상 이정도로 일치하는 기록은 없다. 게다가 1413~21년에 씌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불가리아 연대기에는 무라트를 죽인 기사를 바로 세르비아 전설에 나오는 밀로슈라고 적고있다. 이 이름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변질되고 여러개로 분화되는데 보통 알려진 밀로슈 코빌리치 외에 16세기 이후에는 코빌로비치(Kobilovic), 밀로이스(Milois), 밀로스 코빌라(Miloss Kobyla), 밀로스 코빌리트(Milos Cobilith), 밀로수스 코빌리츠즈(Milossus Kobyliczh), 밀로스치 코빌로비츠(Milosch Khobilovitz), 밀로 콤네네(Milo Comnene), 민코스 코플라키(Minkos Koplaki), 오빌리치(Obilic) 등 다양한 이름들로 여러 기록들에 등장하게 된다. 민담들에는 밀로슈 코빌리치로 통일되어 있지만 18세기 오빌리에(obilye, 고귀한)라는 단어와 유사한 오빌리치가 많이 쓰이게 되었다.
코빌리치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일까? 만약 존재했다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학자들은 밀로슈라는 이름이 당시 알바니아계가 많이 거주했던 코소보 서부에서 흔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가 알바니아인이 아니었는지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알바니아어로 코필(copil, kopil)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자식이나 서자라는 의미이며 코빌리치의 어원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코소보 북서부에는 코빌리체(Kobilice)나 코필로비체(Kopilovice)라는 비슷한 발음의 마을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코스티치(Kostic)나 드란촐리(Drancolli)는 밀로슈 코빌리치가 알바니아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주장으로는 코빌리치가 코빌라(Kobila)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세르비아어로 암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코빌리치는 암말의 아들이란 뜻이다. 실제로 어떤 민담에서는 밀로슈가 어렸을적 암말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도 있다. 위에도 언급한 네슈리의 기록에는 세르비아군을 선두지휘했다는 기사를 윤드의 아들(yund-oglu)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윤드는 고(古)터키어로 암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네슈리는 그를 밀로슈라 적지 않고 디미트리라고 적었을까? 어쩌면 그는 디미트리의 지소어인 미토(Mito)와 밀로슈를 혼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미트리가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세르비아군의 좌익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자불명의 카탈루냐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카탈루냐 기록에 좀더 중점을 둔다면 코빌리치 전설의 헝가리 기원에 뭔가 초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밀로슈는 사실 흔한 헝가리 이름인 미클로스(Miklos, Nicholas)이고 코빌리치라는 말은 헝가리어로 무예수련자(koborlovag)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하지만 발음의 유사성보다 더 설득력있는 것은 "암말의 아들"의 모티브이다. 이때까지 헝가리는 마자르족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져온 샤머니즘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헝가리 샤먼들이 숭배하는 동물들 중 가장 큰 숭배를 받았던 동물은 말이었고 헝가리 미신에 따르면 백마는 샤먼들을 천국으로 데려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샤머니즘 풍습은 헝가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고 귀족들도 전쟁에 나설때는 샤먼들로부터 수호품을 받아 대동하고 다녔는데 이것은 현대후사르(hussar)들의 금몰의 형태로 남아있다. 비록 코빌리치의 정체는 불분명하지만 헝가리와의 관련성은 다른 어느나라들보다 더 관심이 가게 만든다.
물론 카탈루냐 기록을 전부 믿는다면 왜 오토만 역사가들은 무라트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남겼는지 설명하기 복잡해진다. 여기에서도 몇개의 설명이 가능한데 먼저 기만에 의한 암살이 전투 중의 전사보다 더 투르크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시에나 상인의 두가지의 살해방법이 뒤섞인 기록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혹은 기사들의 돌격은 실패로 끝났고 술탄의 죽음은 그것과 별개였는지도 모른다. 서방측은 기사들이 돌격하는 모습만 목격했고 나중에 무라트의 죽음을 알고서는 기사들이 무라트를 죽였다고 생각한건지도 모른다. 무라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무라트가 밀로슈 코빌리치나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졌거나 혹은 그의 전설의 모티브가 되는 적병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라자르의 죽음 역시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그에 관한 민담들은 여러가지 전승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극적인 것은 라자르와 무라트가 서로 일대일로 겨뤄서 함께 동귀어진했다는 것이다. 투르크 기록에는 라자르가 바예지트 앞으로 끌려왔고 그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했다고 나오며 초기 세르비아 기록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뒤 민담이 발전해감에 따라 무라트를 죽인 사람이 코빌리치가 아닌 라자르로 둔갑하기도 한다. 서방측 기록들은 어떻게든 라자르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그리기 위해 열심이지만 가장 간략한 기록은 앞에 언급한 카탈루냐 기록으로 라자르는 무라트가 죽은뒤 얼마 안되어 투르크 좌익의 기병을 지휘하는 아이나 베이(Ayna bey)와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이 카탈루냐 사서는 많은 부분에서 신빙성이 의심받지만 여기에 나온 라자르의 죽음은 어느정도 진실에 가까운듯 보인다.
승패여부
전투의 승패여부는 어느쪽이 이겼는지 부분적으로 논란이 되고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오토만의 승리에 무게를 실지만 과연 이 전투가 오토만의 일방적인 대승이었는지 아니면 오토만도 많은 타격을 입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 전역을 휩쓸지 않고 자국으로 후퇴한건지는 논란이 분분하다. 초기기록들을 보면 골치가 아파지는데 그들은 이 전투를 세르비아의 승리라고 하고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국왕이 피렌체에 보낸 서신에는 이 전투를 승리라고 하고있고 몇년뒤 씌여진 프랑스 작가 필립 드 메지에르(Philippe de Mezieres)와 비잔틴의 기록들은 이 전투가 투르크의 치욕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세르비아 기록 중 라자르의 종교송덕문(pohvala)에는 무라트가 패배했다고 찬양하고 있다. 1530년대 코소보 일대의 민담을 기록한 슬로베니아 책에는 무라트가 밀로슈 코빌리치에게 죽자 투르크군은 곧 도망치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는 자유를 되찾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지게된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르비아의 공국들이 어떻게 되건 별 관심이 없었던 비잔틴과 다른 서방인들이 무라트의 죽음을 전해들었기 때문이고 또하나는 세르비아의 종교송덕문들은 오직 개인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체적인 전략전술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라자르 개인에게만 온 관심을 쏟아부어 그를 영웅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이들이 자주 쓰는 대목은 다윗과 골리앗인데 이들의 대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들은 장군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싸운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또다른 이유는 전투가 끝난뒤 투르크군이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새로 술탄이 된 바예지트의 자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급히 회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투르크가 성공적으로 격퇴되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따라서 이 전투를 세르비아군의 승리로 해석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승리를 조작하여 이득을 얻으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보스니아는 당시 헝가리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투르크가 격퇴되어 발칸지역이 안전하다는 것을 이탈리아 세력들에게 보여줘 이들에게서 군사, 경제적인 지원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전투가 투르크의 일방적인 승리였는지 아니면 투르크도 만만치않은 피해를 입었는지는 논란이 분분하다. 무라트가 어떻게 죽었느냐에 따라 투르크군의 피해상황도 달라지지만 여러가지 기록들을 종합해볼때 투르크군도 어느정도의 피해는 입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를 미화하는데 열심인 투르크 역사서들은 이때 무라트의 죽음 외에는 투르크군의 피해를 적지 못했지만 몇몇 초기 종교서적들을 보면 양측이 너무 지쳤기 때문에 전투가 멈춰졌다고 설명했고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이탈리아와 라구사 기록들도 비슷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투르크군이 전투가 끝나고 후퇴한 것과 무라트의 죽음에 비추어볼때 대승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전술적으로는 투르크의 승리로 보고있다. 여러가지 정황을 볼때 세르비아군이 먼저 무너졌으며 끝까지 전장에 남아있던 것은 투르크군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르비아와 오토만 양국의 군사적인 역량을 볼때 세르비아는 이 전투에서 거의 온 국력을 기울인 반면 투르크는 다음에도 또 다음번에도 전보다 강한 군대를 몰고올 수 있었다. 그럼으로 세르비아의 마지막 군대라 할 수 있는 라자르의 군대가 이 전투에서 무너졌다는 것은 세르비아측으로서는 전략적, 전술적 패배였다. 이 사실을 반영하듯 종교사서나 타국의 기록이 아닌 세르비아 국내의 정사들은 이 전투를 투르크의 승리라고 적고있다.
결론
라자르와 수많은 세르비아군이 산화한 코소보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전설이 되어갔다. 하지만 문헌학적으로 볼때 19세기 이전의 전설은 그저 세르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전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이 전투가 전설의 경지를 넘어 신화로 끌어올려진 계기는 19세기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크게 일어나면서 세르비아 민족의 구심점을 역사를 이용해서 찾으려는 민족주의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를 만드는데 특히 큰 역할을 한 민족주의자들은 19세기의 민요수집가이자 사전편찬가인 부크 카라드지치(Vuk Karadzic)와 몬테네그로의 정치인이자 시인인 페타르 페트로비치(Petar Petrovic)로 이들은 자신들의 저서를 통해 전설을 민족적인 이념과 신화로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 이후 코소보에 관한 연극과 소설들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고 전투가 일어난 날을 기념일로 삼아 아직까지도 기념되고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더욱 반영하는 것은 일명 "코소보의 맹세"로 알려지는 전설인데 이것은 라자르가 지상의 왕국과 천상의 왕국 두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매의 모습을 한 엘리야의 말을 듣고는 천상을 선택했고 이것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세르비아는 천상의 왕국이며 세르비아인들은 천상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전설은 19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19세기에 일어난 민족주의 열풍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코소보에 관한 여러 전승들을 살펴보면 전투는 점점 미화되고 영웅화되어가다 19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신화로 승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코소보 전투에 관한 위의 논쟁들과 학설들을 보면 알겠지만 코소보는 미스테리에 싸여있다. 이 전투를 정확히 기록한 사가들은 하나도 없었고 현재 전해내려오는 기록들은 모두 종교적, 문학적, 정치적인 영향을 안받은 것이 없을 정도로 코소보의 진실은 감추어져 있다. 이 기록들을 철저히 분석하고 검토하여 진실을 캐내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역할일 것이다.
슈타인호프 저도 코소보폴제 전투에 관한 궁금증은 많았는데 그동안 어디서도 이만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신 이두선님께 감사드립니다. 2005-07-18 22:44:29
steinhof
프랑켄슈타인 휴 그당시 유럽에는 아직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역사서가 아직 없었는 모양이죠? 글 읽다 보니 참 기가 막힙니다. 과정은 그렇다 치고 승패도 모르니...확실히 이때까지만 해도 동양이 훨 나았군요 2005-07-19 18:31:51
218.49.229.238
ㅁㄴㅇㄹ 다 그런건 아니죠. 비 주류의 국가나 약소국은 역사서를 만들었다해도 현대에 까지 보존되게 내버려 두질 않았을테니. 아무튼 로마시대 처럼 훌륭한 기록을 기대하긴 어렵겠죠. 동양도 흥망을 했듯이 서양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2005-07-20 13:26:03
69.140.133.40
ㅁㄴㅇㄹ 역사 기록면에선 조선이 특별난 경우로 볼수있겠습니다. 당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였으니. 근데 아시아 에서도 이건 좀 특출났던 경우지요. 2005-07-20 13:29:49
69.140.133.40
프랑켄슈타 음 중국보다 더한 유교국가여서 그런가? 유교 자체가 역사를 중요시하는 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