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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장 7월 12일
숲.
츠츠르--츠츳!
새벽의 여명 속을 한 그림자가 헤쳐 가고 있었다.
소리로 보아서는 작고 빠른 풀뱀 정도가 내는 소리였지만 눈
이 있어 그림자를 본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
다. 거대한 술단지같이 위와 아래는 좁고 가운데가 불룩한, 원
통형의 물체가 수직으로 선 채 풀섶을 헤치며 달려가고 있는 것
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좁은 아래 부분이 두 개의 다리에 달린
두 개의 발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다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술단지처럼 생긴 이 사람은 지금 발을 움직이지도 않고, 공중
에 약간 뜬 채 미끄러지듯 날아가고 있었다. 작은 소리는 그 발
이 길게 자란 풀을 스치며 내는 소리.
직접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절정의 경
공이엇다.
그러나 그런 그도 누군가에게 쫓기는지 다급한 표정어! 머리적
얹은 작은 모자 아래로는 굵은 땀방울을 홀리고 있었다.
츠르르릇!
풀섶 헤치는 소리가 요란해지고, 풀잎이 우수수 뽑혀 공중에
홑어졌다.
그의 신형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 옆
으로 울창히 자갈 나무숲을 향해서였다.
거기에는 키가 오 장을 넘어서는 백양(白楊)나무들이 빽빽하
게 들어서 있었다. 술단지는 그 중 하나를 향해 부딪쳐 갔다.
금세라도 충돌할 순간, 그의 몸이 팽이처럼 나무의 밑둥치를
타고 돌아 나무 뒤로 쏘아져 갔다. 누군가가 그를 그대로 따라
붙었다면 나무에 부딪치지는 않는다고 해도 따라붙는 속도에는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술단지는 그의 가장 굵은 부분보다도 좁은 나무 사이를 신기
하게도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꺾이고, 돌며, 어떤
곳에서는 완전히 한바퀴를 돌아 온 곳으로 시 달려가기도 하
면서도 그의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숲의 가운데쯤까지 달려왔을 때, 머리 위 나뭇잎 사이로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아아!
나뭇잎들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였다. 마치 폭픗에 휘말린
듯한 소리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불지 않던 바람이 갑자기 폭풍으로 바뀌
었을 리는 없었다. 그보다도 술단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떼어놓으려고 노력했던 '3' 가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도주는 실패한 것이다.
술단지는 더 이상 도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제자리
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며 팔을 벌렸다.
콰콰콰콰콰!
술단지의 온몸에서 사나운 경기가 쏟아져 나왔다. 나무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나무의 하얀 속살이 뜯어져 날렸다.
끼기기기잉!
한 아름씩이나 되는 백양나무들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반쯤
부러겨 쓰러져 갔다. 분분히 날리는 홅먼지와 나무껍질들은 술
단지의 회전을 둘러싸고 회오리바람처럼 공중으로 올라갔다.
"대와선류(大渦旋流)! 대막 비사도(飛沙島)의 무공 아닌가!
그걸 어떻게 할 줄 알지?"
급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더없이 한가로운 목소리였다.
"대막 비사도는 원 왕조 중기까지 절정기를 구가하다가 사라
진 문파, 이제는 그 무공은 황궁에만 비밀리에 전해진다는 소문
을 들었지."
파파파앗!
회오리바람의 중심으로부터 허공을 향해 은빛 광채들이 터져
올라갔다. 목소리의 주인을 노리는 은빛 비수들의 폭풍이었다.
"대와선류에 은투살비(銀透殺匕)라……! 은투살비는 전진교
비전이지? 제법 적절한 조화야. 이것으로 확실해졌군!"
허공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한 순간 은빛 광채가 그를 뚫고 지나가는 듯 보였을 때 그림
자의 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파아아앙!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폭발음이 한 줄기 소음처럼 이어져
들렸다. 그의 발은 그렇게 빠르고 강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은
라 비수들이 그 발그림자에 맞아 하나씩 튕겨 나갔다.
"너 황궁에서 나왔지?"
회오리바람이 갈가리 찢겨졌다. 술단지의 회전이 주춤 옆으로
경사를 이루며 기울어졌다. 발그림자는 이제 그의 상반신을 때
리고 있었다.
빠바바방!
가죽신 뒤꿈치가 어깨를 찍고, 앞꿈치가 목덜미를 쳤다. 그것
이 한 순간에 서른여덟 번이나 반복해 행해졌다.
그 정도 실력이면 발길질 한번으로도 술단지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연속적인 발길질. 발그림자의
주인은 술단지를 상대로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술단지의 회전은 멈추었다.
청색의 작은 모자에 온통 청색 비단옷을 감은 술단지처럼 둥
글게 생긴 사내. 그는 폐허가 된 숲속에 동그마니 누워 있게 되
었다.
그 위로 밝아 오는 태양라을 뒤로 하고 선 사내의 긴 그림자
가 드리워졌다.
술단지를 눕게 만든 그 가죽신이 술단지의 부풀어오른 뺨을
건드렸다.
"수염이 없다? 내시란 얘긴가? 재미있군!"
* * *
흑수당 총당(總堂).
"아, 그래서 내가 말일세!"
진운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담뿍 담고 무용담을 풀어 놓고 있
었다. 그의 앞에는 이번에 확대, 보강되어 새로 꾸며진 총당의
소속원들이 일손을 놓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보를 수집, 취합(娶合)하고 기타 혹수당의 대소사를 챙기
는, 타방파와 마찬가지의 총당 역할을 하는 조직이 드디어 만들
어진 것이다. 바로 진운을 총사로 해서 말이다.
'내가 이제는 허탁, 그놈보다 못할 게 없지?'
그는 가괴자 밑에서 총사랍시고 죽을 고생을 하는 귀제갈 허
탁을 떠올리곤 흐뭇하게 웃었다.
'같은 괴물이지만 그래도 돼지보단 벌레가 낫지……?'
문득 그는 벌레보단 돼지가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피를 빠는 벌레보다는 돼지가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내 피를 빠는 것도 아니고……, 그 변덕보다는 이쪽
이 낫……나?'
그것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변덕스러운 주인 밑에 있는 것이
볼 때마다 공포스러워 움츠리게 만드는 주인 밑에 있는 것보단
나을까?
그는 변덕스러운 주인 밑에는 있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두
려운 주인 밑에는 지금 당장도 있는 처지이고, 그리 좋은 것만
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는 입맛이 약간 썼다.
"계속 말씀해 보세요!"
서기 일을 맡아보는 유생 하나가 그를 재촉했다. 진운은 다시
웃음기를 띠고는 말을 시작했다.
'내 얘기가 재미는 있지.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
하는 저 녀석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방 한구석에는 흑웅도 앉아서 바보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묵궁인지 뭔지 하는 그 쇠꼬챙이를 든
채였다.
"금도훙안호 가괴자라는 작자가 말이야. 꼴같잖게도 당금 천
하 삼대고수로 꼽히는 검도권(劍刀拳) 중에 도(刀) 아니겠나?
그러니까 검성(劍聖) , 납탑도인 장삼봉과 권요(拳妖), 환영권
(幻影拳) 신도불비(申屠不比)와 더불어 도마(刀魔)로 한몫 차지
한단 말이지. 그래서인지 보도(寶刀) 나 신도(神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이용했지."
"어떻게요?"
이통천이 끼여들어 물었다. 그도 총당 소속이었다.
'머리도 나쁜 것이 기억력은 좋아서……!'
어쩐지 생트집 같긴 했지만 횡상시 그를 볼 때마다 진운은 그
렇게 속으로 욕을 하곤 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보다도 오히
려 아는 것이 많다는 것 때문인데,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를
자처하는 그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통천은 그가 흑수당에서 가장 싫어하는 두 사람 중
의 하나였다.
오늘은 이통천도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아
는 척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진운은 기분좋게 대답해 주었다.
"이제 막 그 이야기를 할 참이었네! 그러니까……!"
첫 단계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진운은 오랜 사기 행각으로 모아 둔 돈을 거의 털다시피 해서
북경(北京)에서 큰 토목공사를 벌였다. 물론 북경의 대부호로
신분을 위장하고 하는 일이었다.
소문이 날 정도로, 그리고 나중에 조사해 봐도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 해야 했기 때문에 거액을 투자해서 실제로 거대한
장원을 짓는 초기 과정을 다해야 했었다.
제이 단계는 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북경의 대부호가 대규모, 초호화판의 장원을 근교에 짓는다더
라, 라는 소문이 날 정도의 시일이 흐른 후, 그는 그 소문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고대 왕족의 왕릉(王陵)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춘주
시대 이전 하(夏), 은(殷), 주(周), 흑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
라가는 오랜 고대의 왕릉이 장원을 짓기 위해 산을 파헤치던 중
에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은 사
실이었다. 단지 그것이 진운이 일 년이나 전에 몰래 만든 것이
라는 점만 제승하면 말이다.
소문은 자기자신을 복제(複製)하고, 새로운 소문을 스스로 만
들어 내기도 한다. 그것도 처음보다 훨씬 확대된 소문을 말이다,
일단 소문이 나자 그 다음은 쉬욋다. 진운이 한 일이라고는
사실과 터무니없는 소문들 속에 그가 의도한 몇 가지를 덧붙이
는 것이었다.
얼마 후 강호무림에는 은밀히 귀에서 귀로 전파되는 소문 하
나가 돌았다.
--북경에서 발견된 고대 왕릉에는 보물이 셀 수 없이 많다
더라.
--신병이기(神兵利器)도 무진장이라던데.
--고대 전설 속의 무림고수가 쓰던 무공비급과 병기도 있다
더라.
--그 병기가 칼이라던데?
--그런데 공사를 하던 주인이 왕릉을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다시 막아 버려서 입구를 찾을 수가 없데.
--잘못 건들면 몽땅 주저앉아서 보물이고 뭐고 흔적도 찾을
수 없도록 기관장치가 되어 있더라지, 아마?
이 소문 중 칼에 관한 부분이 가괴자의 흥미를 끌었다.
그 부분이 진운이 특히 역점을 두고 끼워 넣은 것이며, 소문
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것 같지만 사실은 가괴자의 귀라는 한
방향을 향해 흐르도록 의도된 것이라는 것은 진운만이 알았다.
결국 진운의 모든 공작은 가괴자가 어느 날 밤, 심복 몇 명만
데리고 북경의 대부호로 위장한 그를 찾아온 것으로 성공 단계
에 이르렀다.
가괴자는 신분을 밝히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문이 사실이냐?
진운이 확실하게 대답했다.
--거의가 엉터리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게 뭐냐?
--칼에 관한 부분이다.
--어떤 칼인가?
--고대의 무기이고, 삼천 년이 지난 지금도 원형(原形)을 보
존하고 있었다.
가괴자의 눈이 뒤집혔다.
삼천 년 동안 원형을 보존하면서 내려온 칼이라는 것이 세상
에 있을까?
만약 있다면 도대체 얼마나 신령스러운 칼일 것인가?
보통 칼은 한 달을 두면 녹이 슬어 못 쓰게 되고 한철로 만
든 칼도 백 년만 넘으면 고철이 되는데 삼천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현세에 나타난 칼이라니!
가괴자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실이냐?
--단 한 자도 틀림이 없다.
가괴자는 흔쾌히 만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진운
은 도주해 버렸다.
칼은 진운이 말한 대로 거기 있었다. 만금을 지불하고 산 지
도에 그려져 있는 대로 찾아간 곳에.
그리고 진운의 말 그대로의 조건에 정확히 들어맞는 칼이었
다. 단 한 자도 틀림없이 그대로였다.
"도대체 어떤 칼이었습니까?"
이통천이 궁금해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채근해 물었다.
맞춰 보게!
진운은 빙글거리며 대답을 미루었다.
종당의 소속원들이 머리를 감아 쥐었다. 나름대로 다들 한다
하는 머리들인데 한참이 지나도록 그 칼의 정체를 맞추는 사람
이 없었다.
진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벌렸다.
"그게 말이지……!"
"돌칼!"
"엥?"
사람들은 답을 맞춘 소리가 나온 곳의 의외성에 돌칼이 진운
이 말한 조건에 맞는 것인지 따져 보는 것도 잠시 잊었다.
대답한 사람은 방문 가에 기대어 서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마원이었던 것이다.
좌검자가 입당을 시킨 관계로 분수에 맞지 않게 황(黃) 자배
의 사십칠(四十七)이라는 숫자를 암호로 받은 행운아. 언제 봐
도 촌무지랭이라서 그 번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였다.
실제 하고 있는 일도 황 자배면서 고작 총당 내에서 심부름이
나 하는 연락원(連絡員)이었다.
그러나 진운은 그를 보면 켕기는 것이 있었다. 좌검자가 입당
을 추천했으니 거절도 못하고 받아들였지만 문제가 없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기분 나쁜 일에 기분 나쁜 방식으로만
등장하다니!
진운은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고, 그보다는 그가 문제를
맞춘 것에 더욱 놀랐다.
"언제 왔나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맞췄나?"
마원은 피식 기분 나쁜 미소를 홀렸다.
"통천방에서 전갈이 왔습죠. 그 속에 든 물건이……!"
진운은 불길한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어쩌면 마원의 웃음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했을 수도 있었지
만 이번은 그보다는 근원적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그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렸다.
"통천방? 전갈? 웃기는 얘기군! 근데 물건이 뭐라는 거야?"
"돌칼!"
장내의 여러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진운
의 안색은 붉어졌다가 천천히 창백해지더니 나중에는 파랗게 질
려 갔다.
마원은 그 낯빛의 변화를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자신의 기쁨으로 생각하는 자의 밉살스러운 눈이었다.
그는 그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마원이 말했다.
"가괴자가 상자에 그 돌칼을 넣어 우리에게 보냈습니다. 삼
천 년을 내려온 보도를 보내니 답례로는 머리 하나를 원하노
라.'라면서……!"
"머리……?"
진운이 식은땀을 홀리며 되물었다.
마원이 그를 가리켰다.
"당신 어깨 위에 달린 것!"
진운은 그 순간 얼굴이 하얗게 되어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
았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웃고 있는 마원의 얼굴이 지금 그에게는 저승사자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는 갑자기 한 생각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도망가야 해!'
급할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 있어서의
상식이었다. 진운은 우선 자리에 앉은 채 웃었다.
"재미있는 요구군! 어디 전리품을 확인하러 가 볼까?"
그는 한가로운 태도로 일어나서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 가운데에는 마원이 서 있었다.
진운은 그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애물단지는 봬 여기 들어와서……!'
장난삼아 한 짓 때문에 이렇게 오래 귀찮음을 당하는 것도 그
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오늘 이것까지 죽여 버려……? 어차피 도망가는 터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마원의 어깨를 밀었다.
"앞장서게! 같이 가 보세!"
문밖으로 한걸음을 나서던 진운이 갑자기 굳었다. 복도에는 그
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서 있는 것이다.
방각이었다.
그가 물었다.
"어디 가나?"
진운이 짧게 대답했다_
"취의청!"
"잘됐군! 나도 마침 거기 가던 길일세."
방각은 진운의 앞을 비켜 주었다. 앞장서라는 뜻이었다.
진운은 웃었다.
"그래, 잘됐군! 부르러 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일세!"
아마 그가 극도로 수양을 쌓아 자신의 내면을 감추는 데에 따
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통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의 인상은 흉
하게 일그러져 있었을 것이다.
방각이 취의청으로 가는데 이 앞을 지날 이유가 어디 있단 말
인가?
그를 의심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한 것에는 마원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이 촌무지랭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진운은 속으로는 저주를 퍼부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이 취의
청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이통천과 혹웅이 그 뒤를 따랐다.
* * *
양가장(楊家莊).
그는 청어(靑魚)를 반쯤 익힌 자( ) 한 마리를 먹고, 반주
(飯酒)로는 독한 애주(愛酒)를 두 잔 마셨다. 늦은 점심식사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항상 중반(中飯), 즉 점심식사를 이렇게 물고기 한 마리
에 술 두 잔으로 마쳤다. 양이 많거나 값이 비싼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가 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거의 항상 자신이 너무 사치하게 생활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곤 했다.
좋아하는 것만을 하면 나중에 혹시 싫어도 하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오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쩌지 못하고 매점심마다 그렇게 차려 오는 것을 못
본 척 하는 것은 물고기는 오랫동안 못 먹어 보던 것이고, 술은
반대로 오랫동안 마셔 오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매일 느껴야 하는 그 가책에서 단지 하루뿐
일지라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좀더 중요한 어떤 것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후에 항상 마시는 녹차(綠茶)를 담은 찻잔을 두 손으
로 잡고 그 온기를 즐기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통천방이 드디어 나섰다고"
그의 앞에 앉은 사내, 양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 방금 가괴자로부터 천리파발(千里擺撥)을 통해 보
내어진 물건이 흑수당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돌칼이 든 그 상자
하나만……."
"그들이 흑수당에 직접?"
양유덕은 자신의 보고가 부실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의 형
님, 양가장의 당대 주인인 양유락(楊有樂)은 대단히 세심해서
단 한 가지의 의흑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통천방의 정보도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며칠 전에 비밀리에 세워진 흑수당 총당으로 물건을 바
로 보내었습너다. 전달은 통천방 강소분방(江蘇分幇)의 사자가
했습니다."
"흐음……!"
양유락은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찻잔의 옆을 가
볍게 두드렸다.
양유덕은 그것이 뭔가 기분좋은 일을 생각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임을 잘 알고 있었다.
'뭘 생각하시는 걸까?'
양유락이 물었다.
"너는 흑수당과 통천방이 결국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양유덕은 잠시 침음하며 생각에 잠겼다. 양가장 정도의 기업
을 지키려면 대충대충 넘기는 식으로는 절대로 안된다. 그는 지
금 자신이 가진 정보를 총동원해서 흑수당과 통천방의 관계정립
을 예즉해 보았다.
"현재의, 상태로는 흑수당이 진운의 머리를 넘기고, 대충 예의
만 갖추면 당분간은 별일이 없으리라고 봅니다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괴자의 괴팍한 성미란 강호에 유명하고, 흑수당주의 속은 저
로서는 더욱 짐작 불가능해서 어떻다는 추측을 할 수가 없군요!"
"내 예상으로는……."
양유락은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더니 어떻다는 평가 없이
바로 자신의 예상을 이야기했다.
"한 달 안에 두 파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다."
"한 달입니까?"
양유덕은 놀란 빛이었다.
"그래, 한 달! 혹수당이 진운의 목을 넘겨 주더라도 통천방이
먼저 도발할 것이야."
"형님의 예상이 신기막측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날짜까지 그어
놓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네가 모르는 것은 그것말고도 많지!"
양유덕은 점점 식어 가는 녹차가 양유락의 손 안에서 찻잔과
함께 돌아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런 모습을 보일 때는 양유락의 머릿속 생각도 함께 돌아가
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양유락은 한참 만에야 양유덕을 다시 불렀다.
"흑수당주를 오는 팔월 보름에 초대해라!"
"팔월 보름입니까?"
팔월 보름이면 앞으로 한 달 남았다. 예상대로라면 그 안에
전면전이 벌어진다는데 초대에 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신 것인가?'
통천방은 목하 중원 혹도 최강의 세력인 것이다. 그 비정상적
으로 강한 가괴자를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렇다. 팔월 보름!"
양유락은 다시 한번 확언했다. 그의 눈빛이 맑게 빛나고 있
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양유덕이 돌아보며 물었다.
"불비(不比)인가? 어서 들어오게!"
누가 왔는지는 뻔했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 특히 이 방의 문
을 두드리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한 것이다.
당금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으로 이름난 권요 신도불비가
바로 그였다.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키가 훤칠한 중년의 유생이 나타났다.
그의 코밑에 자란 두 가닥 교룡수염이 특이한 인상을 만들고 있
는 사내였다.
"재미있는 침입자가 잡혔습니다.
양유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침입자?"
"술단지처럼 생긴 청색 옷의 사내인데……!"
신도불비가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코 아래의 교룡수염이 꿈
틀거렸다.
"환관이었습니다."
* * *
피진장(避塵莊).
"초대한다고 올 것 같으냐?"
노인, 피진장주 철권 마종의는 눈가에 주름을 가득 잡으며 손
녀딸을 바라보았다. 귀엽고 예뻐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둣한 눈
빛이었다.
그의 귀여운 손녀, 마상란은 문제없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오지요. 흑도인이라고 초대하는 것을 저어하지만 않으
시면 꼭 온다고 소녀가 확언드리겠어요."
그녀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검은 눈을 반짝였다.
"소녀가 반드시 오도록 만들 테니까요!"
마종의는 그녀의 볼을 가볍게 건드렸다.
"이미 오래 전에 강호에서 은퇴한 몸이 흑도인이면 어떻고 백
도인이면 어떠랴? 오래 전에 그런 구분은 잊었으니 초대하려무
나. 오면 반가이 맞아 주마."
두 조손이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만 있는 중년 사내와 여
인, 바로 마상란의 부모들은 기묘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말이라곤 들은 척도 않는 딸과 당신에게는 손녀가 되는 그 딸
의 이야기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늙은 할아버지, 마종의의 이야
기에는 그들 부부도 참견을 못하는 것이다.
오늘의 결정도 그래서 그들은 국외자일 수밖에 없었다.
흑수당의 당주라는 은발의 사내는 결국 그들 피진장의 중추절
만찬(晩餐)에 초대되고 말 것이었다.
* * *
흑수당 총당.
"양주면 당금 천하에서 몇 안 가는 대도(大都)인데 왜 장락방
따위의 하오문이 지부로 있었는 줄 아시오?"
"왜 그러오?"
"총단이 가까우니까 그리 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지요."
진운은 어쩐지 심드렁한 대취옹의 반문에 대답하면서도 내내
불편한 표정이었다. 중원 제일마 금도홍안호 가괴자가 머리를
내놓으라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자리에 같이 있으니 불편하지 앉
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런 기분을 떨치기 위해 아는 대로 주절거릴 수밖에 없
었다.
"통천방은 백장령(白丈嶺) 아치산(牙稚山)에 있습니다. 여기
양주와는 빠른 말로 엿새 거리라고나 할까요? 통천방의 천 리
파발은 매나 독수리를 전서응(傳書鷹)으로 길들여 이용하는 것
이니 아마 이삼 일 전에 보낸 것일 겁니다."
돌칼을 말하는 것이었다.
방각이 물었다.
"백장령은 어디에 있는지 아나?"
드넓은 중원에서 백장령이라고만 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
이다.
이통천이 기회다 싶은지 나섰다. 그로서는 지금 같은 때가 아
니면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복건성(福建省)과 강서성(江西省)의 접경부에 위치해서 두
성을 나누는 무이산맥(武夷山脈)의 한 고개가 백장령입니다. 정
확하게는 복건성 건정현(建亭縣)과 강서성 광창현(廣昌縣)의 사
이에 있지요. 주변에는 흑심보(黑心堡) , 호구채(湖口寨), 안반
채(安返寨), 황공문(黃公門), 고성(古城), 석성(石城) 등의 군
소문파가 있습니다."
방각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제법 상세한 질문이었다.
"고성과 석성도 무림 문파인가? 그리고 통천방 같은 거대 문
파 주위에 왜 그렇게 군소 문파가 많은가? 하나의 거대 문파가
나타나면 군소 문파들은 물이 상은 곳으로 흘러가둣 거대 문파
에 합쳐지는 것이 정상 아닌가?"
"가괴자라는 작자가……!"
이통천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 다시 조용해지고, 진
운이 대답했다. 욕부터 나오는 대답이었다.
"성격이 더럽기 짝이 없어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자랑스럽게 하고는 합니다."
역시 욕이었다.
"고성이니 석성이니, 흑은 혹심보니 하는 데가 옛날부터 있어
왔던 군소 문파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지금은 통천방의 감시초소
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름만 그대로 붙여 두고서는 통천방은
각 문파의 독자성을 존중합네 어쩝네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방각이 말을 잘랐다.
"나는 통천방의 사자가 바로 여기로 찾아온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네. 그것은 그들이 우리 흑수당의 사정에 정통하다는 의
미이고……!"
"흑수당에 간자(間者)가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요."
정일이 던진 말이 방안에 싸늘한 공기를 몰고 왔다.
간자!
그들 흑수당의 형제 중에, 그것도 총당의 위치를 알 만한 핵
심인물 중에 통천방의 간자가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간자 따위는 어디에든 있는 것이니 흔히 두 파가 싸울 때에
는 그 정도는 감안하고 계획을 짜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이제
어떻게 대응하냐는 것일세. 지금은 당주도 없고……!"
방각이 다시 말했다.
이통천이 눈을 반짝이며 끼여들었다.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쉬운 해결책이 있는데……!"
그는 진운을 보더니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방각이 이통천이 채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되긴 하지."
진운의 눈이 커지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을 가득 담아 방각을
노려보았다.
해달라는 대로 한다면 그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보내자는 것
인데, 없는 자리라면 몰라도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농담이군."
방각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했을 뿐
이야. 가괴자는 괴팍하고, 무엇보다도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내일이라도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
진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와의 과거 교분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저런 말을 한단 말이
냐? 인정머리없는 놈……!'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
아보며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말을 기다렸다.
대취옹.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다.
정일. 그냥 시선을 돌린다.
이통천. 저놈은 아예 처음부터 그런 의견을 생각한 놈이니 볼
것도 없었다.
흑웅 아무 생각도 없는 녀석이다. 눈만 뒤룩거리다가 진운이
바라보니 웃는 것이다. 그가 방금 이 방에서 논의된 말들을 알
아듣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진운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정말 도움되는 놈은 하나도 없군!
"그러나……!"
방각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이지만……, 그래도 만족하지
않으면?"
진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말이 나오는군!'
방각은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가괴자가 만족하지 않으면 그때는 누구의 목을 바칠 거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방안은 조용한데 다만 방각의 말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당주라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
연히 거절이다. 그 거절의 대가가 통천방이라는 어마어마한 조
직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라도 그럴까? 그것도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 우리는 흑수당이고, 단 하나의 형제도 희생하기
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생명을 지옥에 버려 두고 왔
기 때문이다. 우리는 싸운다. 그것이 당주의 결론일 것이다."
진운이 감격에 겨워 그를 바라보았다.
대취옹 이통천의 눈에도 비슷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통천
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단 하나다. 싸울 준비를 하는 것
다. 형제들을 보호하고, 당주가 돌아올 때까지 맞서 싸울 준비
를……!"
방각은 말을 맺었다. 그것이 그날의 결론이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ㅈㄷㄱ~~~~~~~~~~~~``````````````````
즐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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