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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6일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 창세 15,5-12.17-18
제2독서 : 필리 3,17―4,1
복 음 : 루카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말합니다.
이 떠나심은 ‘영광’을 위한 ‘넘어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예루살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9,22 참조)
영광 가운데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영광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만 자신이 본 그 영광이 계속되기만을 바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사명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수난 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두고 떠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사명의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님! 이런 책도 읽으세요?”
가톨릭 신부이니 종교 서적만 읽는 줄 아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시, 소설, 에세이, 철학, 정치사회, 종교, 예술, 과학, 역사 등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면 책을 사서 읽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만큼 저의 시야를 넓혀준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전에는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었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는 지인이 중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상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열려 있는 분이었습니다.
비난보다는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변하셨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셨고,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가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면서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활동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넘쳐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서 지내자고 말합니다.
워낙 힘든 전교 여행 중이었으니 이런 제안을 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닫힌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 갇혀 사는 닫힌 마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 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산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이,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루카 9,30).
이 '두 사람'에 대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루카복음 24장 4절의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 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 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빈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22; 마르 1,12; 마태 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는 메시아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표현은
“고통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는 예수님을 인류 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 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 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조욱현 토마 신부
사순 제2주일: 다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용히 참회와 보속을 하는 시기에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루카 복음은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하도록 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약이 먼 훗날에 이루어지리라는 그 말씀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자신을 변모시켰던 믿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후손들까지 변모시키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도 그렇지만 우리도 사순절의 기다림과 앞당겨진 파스카의 빛으로
신비스럽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매 순간 이 변모의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끄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기도’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여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기도가 그 영광스러운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루카 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도의 주제가
바로 이 사순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에서는 단순하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카 복음은 두 인물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여기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한 말은 원문으로 ‘exodos: 출애굽, 대탈출이다.
즉 결정적인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출애굽의 모든 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은 출애굽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고달픈 여정이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사도의 졸린 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32절).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34절)고 한다.
이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즉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겠지만,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택한 아들’(35절)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하시지만,
그분은 산에서 보여 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빛을 위한 것으로써,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그의 자손들이 은총을 입었듯이 그처럼 변모되어 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그 영광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35절) 즉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그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광야와 같은 이 사순절은 어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에 미리 도착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신비를, 영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 진정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다(필립 3,18-19).
갈바리오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파스카의 기쁨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필립 3,20)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가는 삶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춤으로써 신앙 안에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합당하게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 변모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필립 3,20-21).
나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에는 없는데, 한국에 있는 주거 방식이 있습니다. ‘전세(傳貰)’ 제도입니다.
임대인은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임차인의 주택을 계약기간 동안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대인은 임차인의 결정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임차인이 전세 금액을 올리면
임대인은 올린 금액을 더 지급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내 집 마련’은 서민들에게는 ‘꿈’과 같았습니다.
제 기억에 어린 날 이사를 자주 가야 했습니다.
‘쌀가게, 미진이네, 담배 가게, 재웅이네, 쌍둥이네, 할머니 집’까지 6번을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6학년이 될 무렵 비로소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인집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던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매주 ‘주택복권 추첨’이 있었습니다.
1등에 당첨되면 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당첨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2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지금 성당이 3번째 성당입니다.
첫 번째 성당은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독일인 이민 공동체가 세운 성당인데 독일인 이민이 줄면서
한인 공동체가 다운타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다운타운 성당이 좁고, 주차장이 협소하여서 교우들은 더 넓고 큰 성당을 원했습니다.
다운타운 성당에서 지내면서 교우들은 지금의 자리에 성전 대지를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임시로 옮겨간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건물이었기에 교우들은 그 성전을 ‘창고 성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새로 마련한 땅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지금의 성전 위치가 달라스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이민 오는 분들이 북쪽에 세워지는 새로운 도시로 오기에,
북쪽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진통 끝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전입니다.
2017년 3월에 새 성전이 완공되었고, 축성식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어렵게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도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40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고 축성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입니다.
넓고 큰 집에 살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집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6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이사를 할지라도
그 집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신축된 아름다운 성당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에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성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수 없습니다.
다운타운에서 힘들게 미사를 봉헌했어도, 창고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어도
그 성당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과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과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 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 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 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 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 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입니다.
(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28ㄴ-3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사도들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서간문에서 다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이 직접 보았고, 직접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옛날이야기들을 짜깁기 하는 식으로 잘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학문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삶 안에서’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이고,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이고,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계시하신) 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은,
율법의 대표자와 예언자들의 대표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과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들이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시고 보증하신 말씀입니다.
3) 33절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면서
‘황홀경’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헛소리도 아니고, 아무 말이나 막 한 것도 아닙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너무 황홀해서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라고
소망하게 되었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소망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바로 앞의 23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무리 좋아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중단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은 원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대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스스로 침묵을 지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어떻든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부터 믿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4)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은,
또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이 해석에 대해서,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 수난 때에 모두 달아나 버렸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수난 전에는
사도들이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
염철호 요한 신부
고대 중동에서는 임금들 간에 서로 계약을 맺을 때
희생제물을 가져와 반으로 쪼갠 뒤 계약 조건을 말하며
쪼개어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둘 가운데 누구라도 계약을 어기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는 장면도 이와 유사한데,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주님께 가져와 반으로 자른 뒤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습니다.
그리고는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여기서 화덕과 횃불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화덕과 횃불 모습으로 쪼개 놓은 짐승 사이를 지나가면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점이 발견됩니다.
계약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갈라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면서 계약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5장은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라기보다
하느님이 일방적인 약속, 곧 하느님의 언약에 관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는 것도 아브라함이 청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계약에 당신 스스로를 옭아매시는 하느님.
여기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마지막까지 책임지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 아드님의 피로 계약을 맺게 되었고,
그분 덕분에 구원을 얻게 되었씁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충실하심, 덕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모습을 두고
하느님의 의로움이라고 표현합니다.
대개 세상의 의로움은 착한 일 하면 상주고, 나쁜 일 하면 벌주는 그런 의로움이지만,
하느님의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것,
곧 우리의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당신 약속을 기필코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런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죄마저도 용서해 주십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니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예수님 덕분에 누리게 될 영광만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는 항상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아버지의 의로움을 본받아서
항상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의롭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은 언제나처럼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우리가 당신처럼 의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기억하고,
그분의 의로움에 우리를 내어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갑시다.
그러면 2독서가 이야기하듯이 예수님께서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
곧 오늘 복음에서 보았던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게 된 過程을 알립니다.
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말은
「구약성서」에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본 그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交感을 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오늘 복음이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것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알아듣는 데에 그분들의 역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으로 發足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 함께 계시는 양식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세상에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인류역사 안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善한 실천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계약을 맺었다고 「구약성서」는 말합니다.
모세의 가르침이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契約은 두 당사자가 앞으로 해야 할 행동 양식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실천하지 못했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王이나 司祭들이 그들의 기득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할 때,
예언자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 기득권자들로부터 박해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살아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가르치거나 당신의 권위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간질환자나 정신 분열환자들을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연장한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일부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군중이 그분을 “나자렛 출신 예언자”(마태 21,11)라고 환호하였다고 전합니다.
에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모세로부터 시작된 믿음,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삶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삶의 공간이 하느님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가 생명을 잃었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의 일에 충실하다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산에서 그분과 交感하는 예수님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들과 뜻이 통하는 분이십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구약 신앙의 傳承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엉뚱한 제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혼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서 들렸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알려면,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깨달은 바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었습니다.
하늘나라의 호적을 보았거나,
遺傳子 鑑識으로 親子 확인을 하였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병을 고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며 사람들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종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
나는 여러분을 친구라 불렀습니다.”(요한 15,1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이 되어, 미성숙하게 살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친구는 친구로부터 받은 우리도 자유롭게 실천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있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분의 죽음이 그분을 결정적으로 알아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을 실천하며 삽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빌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돌 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일을 합니다.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늘의 선언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