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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갑오리〉, 2014년, 수묵산수화.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김지하는 시를 너무 잘 써서 그림과 글씨가 저평가된 사람"이라며
"후기의 수묵산수화는 추상 미술의 경지인데,
현대 한국화가 중 이런 경지는 잘 보지 못했다"고 극찬했다.
[사진 유홍준 이사장 제공, 개인소장]
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으로 잘 알려진 시인 김지하.
시인 김지하는 글씨와 그림도 특별했다. 1980년 출소 이후부터 난초를 그리기 시작한 시인은 이후 매화, 달마, 모란으로 옮겨갔다.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김지하의 그림은 단순한 먹장난이 아니었다”며 “김지하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성이 있는 그림”이라고 시인의 그림을 평가했다.
또 “후기에 그린 수묵산수화도 정말 아름답고, 추상 미술로 나아가는 경지”라며 “현대 동양 한국화가 중에 이런 경지는 못 봤고, 추사 김정희는 글씨를 잘 써서 그가 시의 대가라는 걸 잊었다고 하는데 지하는 시를 잘 써서 그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게 과소평가됐다”고 극찬했다.
취기(醉氣)에 인사동 카페 벽지에 쓴 시… 뜯어 보관한 도배지는 1000만원 낙찰
김지하가 자필로 쓴 '황톳길' 원고의 일부. [사진 유홍준 이사장 제공, 개인소장]
□ 황톳길/ 김지하(金芝河, 1941~2022)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유홍준 이사장은 "김지하 시인의 글씨는 강약의 변화가 있고,
한 글씨 안에서도 변화하는 글씨"라고 설명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고 해석했다.
[사진 유홍준 이사장 제공, 개인소장]
□ 불귀(不歸: 못 돌아가리)/ 김지하
못 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 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국 소리 밤새워
천정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짓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 번 다시는.
유 이사장은 시인의 글씨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글씨의 유사점도 짚었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인데, 김지하의 글씨는 아주 예쁘고 힘 있는 글씨”라며 “강약의 변화가 있고 한 글씨 안에서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최고의 글씨, 추사 김정희의 영향이 아주 강하게 묻어난다”고 설명했다.
시인은 1991년께 만취한 상태에서 인사동 술집 ‘평화만들기' 벽지에 평소 좋아하는 이용악(李庸岳, 1914∼1971)의 시 '그리움' 전문을 적었다고 한다. 유 이사장은 “만취해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내려썼는데, 어떤 꾸밈도 없는 글씨체에서 기백(氣魄)을 느낄 수 있다”며 “카페가 폐업한 뒤 이 시가 적힌 벽지를 누군가가 뜯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2년 전 서울옥션에서 서예박물관을 구상 중인 사람이 1000만원에 낙찰받았으니, 영원히 보존될 것 같다”고 전했다.
□ 그리움/ 이용악(李庸岳, 1914∼1971)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유홍준에 "'하로동선(夏爐冬扇)'쓰고 '너 나중에 크게 될 거다'"한 시인
유홍준 이사장은 시인이 자신에게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라는 화제를 써줬다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뜻의 문구를 써줬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여름 화로도 겨울엔 쓸모가 있고 겨울 부채도 여름엔 쓸모가 있다.
너는 나중에 크게 될 거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사진 유홍준 이사장 제공, 개인소장]
유 이사장에 따르면, 시인의 초창기 난초는 아리따운 춘란(春蘭:報春花)의 형태였다. “‘난을 칠 때 세 번 굽어가는 것이 좋다’는 추사의 말을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세 번 굽는 리듬을 준 것을 볼 수 있다”며 “이때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난을 그렸고, 이 작품들은 수많은 기부 모금전에서 팔리며 민주화 운동에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시인은 난을 받는 사람에게 딱 맞는 화제(畵題)를 써서 전했다. 유 이사장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멋진 화제는 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장) 선생에게 준 ‘털 빠진 꿩이 하늘로 훨훨 날아가듯이’였다. 임진택 명창에게는 ‘기축이 흔들린 후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다 담아내라’고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게는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 화로에 겨울 부채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물을 지칭하는 문구를 써줬길래 지하형한테 한소리 했더니, ‘여름 화로도 겨울이 되면 쓸모가 있고, 겨울 부채도 여름이면 쓸모가 있다. 너는 나중에 크게 될 거다’라고 했는데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크게 됐나 싶다”며 농을 덧붙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난만 그리다 매화로…"난은 선비문화, 나와 맞지 않아"
김지하 시인은 똑바로 서있는 난은 그리지 않고,
바람에 흩날리거나 요동치는 난을 그렸다.
후기로 갈수록 더 필치가 거칠어진다. [사진 유홍준 이사장 제공, 개인 소장]
김지하는 똑바로 선 ‘정난(正蘭)’은 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 늘 기우뚱하게 바람에 흩날리는 난을 그렸다. 유 이사장은 “김지하 난의 획은 오묘하고 가녀리고 심지어 에로틱하게 뻗어 나간다. 본인은 ‘묘연(妙延)’이라고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묘하게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2003년 이후 매화가 등장한다. 유 이사장은 “시인은 ‘난초는 선비 문화에서 난 거라, 나한테 본래 맞지 않고 감정이 실리지 않는데 매화는 기굴한 줄기에 가녀린 꽃이 핀 형상이라 감정이 잘 표현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미대 가고 싶었던 어린 김지하, 마지막 그린 그림도 뒤뜰 목단
김지하 시인은 말년엔 해학적인 모습의 달마(達磨)를 그렸다.
오른쪽은 2014년에 그린 달마 형상의 자화상이다.
실제 시인의 모습처럼 진한 눈썹을 하고 있다.
유홍준 이사장이 “눈썹만 크네요”라고 평했더니,
시인은 “어떤 관상쟁이가 내가 눈썹이 잘생겨서
이만큼 먹고 살았다고 하더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진 유홍준 이사장 제공, 개인소장]
시인이 동학(東學)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2004년 이후 달마가 등장한다. 유 이사장은 “동학, 천도교가 시각적 이미지가 없어 민중에 퍼져나가기 어려운 종교인데, 시인은 ‘인식의 바탕은 불교의 망막으로, 실천은 동학의 눈으로 한다’고 하며 코믹한 생김새의 달마(達磨)를 그렸다”고 설명했다.
김지하, 〈목단(牧丹:모란꽃)〉, 2014.
그가 어린 시절 미대가 가고 싶어했던 소년이었을 때
가장 그리고 싶었던 대상이 집 뒤뜰의 목단이었다고 한다.
시인의 마지막 그림도 그 목단이다. [사진 유홍준 이사장 제공, 개인소장]
유 이사장은 "시인의 마지막 그림은 목단(牧丹:모란꽃)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림을 그려 미대에 가고 싶어했는데, 집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어깨너머로라도 그림을 배우자는 생각에 미대 옆 미학과를 선택했다”며 “집에서 그림을 못 그리게 손을 묶으면 발가락으로 숯을 집어서라도 그림을 그렸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리고 싶었던 대상이 집 뒤뜰에 있는 목단꽃이었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시인의 2014년(73세)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김지하의 빈산' 수묵전의 〈모란도, '꽃 19'〉. 39×35.5㎝.
네댓 살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그는
"외가 뒤뜰에 피어 있는 모란이 제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환쟁이 되면 배고프다고 질색했어.
아예 내 손을 묶어 놓았지.
그렇게 그리고 싶었던 모란을 이제서야 그렸어요.
" 탐스러운 모란 송이 옆에 휘갈기듯 써내려간 짧은 시구가 재미나다.
'모란도 갈 길 간다네'. 그림 끝 낙관에는 '모심'이라고 적었다.
공경하는 마음, 모시는 마음으로 임하겠다는 뜻이다.
▒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오적(五賊)」 전문이 실린 〈사상계(思想界)〉 1970년 5월호에는 김지하가 직접 그린 삽화도 실렸다.
✺ 오적(五賊)
1. 개요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겄다.
김지하가 1970년 사상계(思想界)에 발표한 풍자시(諷刺詩).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어 1970년대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비리를 해학적으로 풍자하였다. 당연히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그 후폭풍은 엄청나서, 김지하를 필두로 사상계의 편집진들이 줄줄이 고문을 당했으며 결국 사상계는 이 사건을 빌미로 강제로 폐간(廢刊)되었다.
2. 오적(五賊)
2. 1, 재벌(狾䋢)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狾䋢)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해 입고 돈으로 모자해 쓰고 돈으로 구두해 신고 돈으로 장갑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지, 금단추, 금넥타이 핀, 금카후스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이,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봐라 저 재벌놈 재조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치고 간장치고 계자치고 고추장치고 미원까지 톡톡쳐서 실고추 파 마늘 곁들여 날름
세금 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까기 여념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쥔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띔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샀다가 길 뚫리면 한몫 잡고
천(千) 원 공사(工事) 오 원에 쓱싹, 노동자임금은 언제나 외상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숙수 빰치겄다.
2. 2, 국회의원(匊獪狋猿)
또 한 놈이 나온다.
국회의원(匊獪狋猿)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약 휘휘감고
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들고 대갈일성, 쪽 째진 배암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이농(離農)으로!
건설이닷, 모든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정화(社會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정인숙을 철두철미하게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궐기하랏!
손자(孫子)에도 병불염사(兵不厭邪), 치자즉(治者卽) 도자(盜者)요 공약즉(公約卽) 공약(空約)이니
우매(遇昧)국민 그리알고 저리멀찍 비켜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겄다.
2. 3,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나온다.
풍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콱다문 입꼬라지 청백리(淸白吏) 분명쿠나
단 것을 갖다주니 쩔레쩔레 고개저어 우린 단것 좋아 않소,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어허 저놈 뒤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이쪽보고 히뜩히뜩 저쪽보고 헤끗헤끗, 피둥피둥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이빨꼴이 가관이다.
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 썩다 못해 문드러져 汚吏(오리)가 분명쿠나
산같이 높은 책상 바다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功(공)은 쥐뿔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없어, 책상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請)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요정(料亭)마담 위아래로 모두 별 탈 없다더냐.
2. 4, 장성(長猩)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長猩)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장성, 제밑에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이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공단 울긋불긋, 천근만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차고 저기차고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한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먹고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 죽는 쫄병들을
일만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지을 재목갖다 제집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판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쉬엇 열중열중열중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어수(雲雨魚水) 공방전(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2. 5, 장차관(瞕搓矔)
마지막놈 나온다
장차관(瞕搓矔)이 나온다
허옇게 백태끼어 삐적삐적 술지게미 가득고여 삐져나와
추접무비(無比) 눈꼽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호호 아이 간지럽사와요
이런 무식한 년, 국사(國事)가 간지러워?
굶더라도 수출이닷, 안 팔려도 증산이닷, 아사(餓死)한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 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
째진 북소리 깨진 나팔소리 삐삐빼빼 불어대며 속셈은 먹을 궁리
검정세단 있는데도 벤쯔를 사다놓고 청렴결백 시위코자 코로나만 타는구나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행여나 냄새날라 질근질근 껌씹으며
켄트를 피워 물고 외래품 철저단속 공문을 휙휙휙휙 내갈겨 쓰고 나서 어허 거참 달필(達筆)이다.
추문 듣고 뒤쫓아 온 말 잘하는 반벙어리 신문기자 앞에 놓고
일국(一國)의 재상더러 부정(不正)이 웬 말인가 귀거래사 꿍얼꿍얼, 자네 핸디 몇이더라?
3. 줄거리
판소리의 형태를 계승한 서사시의 일종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3. 1, 오적 소개
옛날도 먼옛날 상달 초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 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1963년의 10월 19일 고재봉 일가족 살인사건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당시 고재봉은 박모 중령의 공관병이었는데, 물건 하나를 훔쳐 나오다가 식모에게 걸려 7개월의 감옥 살이를 했다. 이에 앙심을 품고 관사로 찾아가 일가족을 모조리 살해했는데 정작 박모 중령이 아니라 당시 관사로 새로 이사를 왔던 이득주 중령 가주와 식모를 죽여버린 것. 체포 후 사형을 선고받고 1년 뒤 집행되었다.]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盜跖 혹은 盜蹠. 공자 당시 유명한 도적. 하필 선인으로 유명했던 유하혜라는 동생이 있어 지금까지도 심심하면 두 배로 까인다. 시대 잘못 타고나서 한 번, 형제 잘못 타고나서 한 번. 다만 이름의 한자가 훔칠 도, 발바닥 척(跖) 혹은 밟을 척(蹠)인 것을 근거로 가상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 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3. 2, 포도대장에게 오적을 체포할 것을 지시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을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어명이 쾅,
청천 하늘에 날벼락 치듯 쾅쾅쾅 연거푸 떨어져 내려 쏟아져 퍼부어싸니
네이— 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대답하고 물러선다
3. 3, 꾀수가 오적으로 오인받아 고문을 받음
애고 애고 난 아니요, 오적(五賊)만은 아니어라우. 나는 본시 갯땅쇠로
농사로는 밥 못 먹어 돈벌라고 서울 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은
어젯밤에 배고파서 국화빵 한 개 훔쳐먹은 그 죄밖엔 없습넨다.
이리 바짝 저리 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 태워 공중잡이
고춧가루 비눗물에 식초까지 퍼부어도 싹아지없이 쏙쏙 기어나오는건 아니랑께롱
3. 4, 꾀수가 오적들의 거처를 밝힘
꾀수놈 이 말듣고 옳다꾸나 대답한다.
오적(五賊)이라 하는 것은
재벌, 국회의원(匊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장성(長猩), 장차관(瞕搓矔)이란
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 시합 열고 있오.
[보면 알겠지만 해당 단어를 지칭하기 위해
원래 쓰이는 한자 대신에 부수로 개 견(犬)이 들어간
한자들을 집어넣어서 비꼬고 있다. 즉 인간에 탈을 쓴 짐승이란 뜻이다.]
3. 5, 오적을 체포하기 위해 포도대장이 출동
오적(五賊) 잡으러 내가 간다
남산을 훌렁 넘어 한강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
우뢰 같은 저 함성 범같은 늠름 기상 이완 대장(李浣大將) 재래(再來)로다
시합장에 뛰어들어 포도대장 대갈일성,
이놈들 오적(五賊)은 듣거라
너희 한같 비천한 축생의 몸으로
방자하게 백성의 고혈 빨아 주지육림
[酒池肉林:술로 만든 못과 고기로 이룬 숲.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비유하는 말] 가소롭다
대역무도 국위손상, 백성 원성 분분하매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렷다
3. 6, 포도대장이 매수
[당연하지만 이건 당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 경찰과 사법부에 대한 통렬한 야유이다.]
당해 오적의 주구가 되고 엉뚱한 꾀수가 체포
이리 속으로 자탄망조하는 터에
한 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
보도 듣도 맛보도 못한 술인지라
허겁지겁 한잔 두잔 헐레벌떡 석잔 넉잔 (중략)
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놈 낚궈채어 오라 묶어 세운 뒤에
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
3. 7, 오적과 포도대장이 벼락을 맞고 급사
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五賊)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4. 특징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다보니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점이지만 오적은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쓱 읽어만 봐도 일반적인 현대시와 다른 몇가지 독특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데
◦ 함축적인 운율미가 대부분인 현대시와는 달리 한국 고유의 전통 시가인 가사, 판소리, 타령의 형식을 빌렸다는 점내용적으로 보자면 이 시는 군부 독재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쓰여졌지만 형식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일제감점기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긴 한국의 고유 시가를 부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연구자들의 견해도 존재한다.
◦ 액자구성
오적 전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화자 본인은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전달자'이다. 아예 구절 중간에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건 구전된 이야기'라고 못박고 있을 정도.
◦ 풍자와 조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화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 대표적인 게 한문을 이용한 언어유희
재벌(狾䋢)/국회의원(匊獪狋猿)/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장성(長猩)/장차관(瞕搓矔)
이 시에 등장하는 다섯 풍자 대상을 한자로 적은 것을 보면 알겠지만 전부 한자에 '개 견(犬)'과 원숭이 부수가 들어간 한자로 바꾸어 놓았다.
김지하는 오적을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의도적으로 ‘개 견(犬)’을 변(犭)으로 하여 ‘개’를 연상하게 하고 또 ‘원숭이(오랑우탄)’를 뜻하는 단어를 만들어 조어(造語))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재벌의 재(財)는 미친개 제(狾), 국회의원의 회(會)는 간교할[간사하고 교활할.] 회(獪), 의(義)[국회의원의 의는 본래 의논할 의(議)가 옳다.]는 개 으르렁거릴 의(狋), 원(員)은 원숭이 원(猿), 고급 공무원의 원(員)은 돼지 원(獂), 장성의 성(星)은 성성이(오랑우탄) 성(猩), 차관의 차(次)는 개미칠 차(犭差)를 차용하는 식이다(송영순, 2007)
◦ 잦은 의성/의태어 및 비속어 사용.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 축재는 축재 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 선거는 선거 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잡농(雜農)으로!
...
손자(孫子)에도 병불염사(兵不厭邪)[병사를 움직여 전쟁을 할 때는 적군을 속이는 것을 싫어해서는 아니 된다. 전쟁에서는 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뜻.], 치자즉도자(治者卽盜者)[다스리는 자(治者)는 도둑놈(盜者)이다.]요 공약즉 공약(公約卽空約)[선거 공약(公約)은 공염불(空約, 직역하면 '텅 빈 공약')이다.]이니 [후략]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오적은 '새로운 운문 양식을 개척했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김지하 시인의 그림 오적(五賊) 그림
[출처 및 잠고문헌: 중앙일보 2022년 06년 26일(일) 문화/ Daum 나무위키]
첫댓글 감사합니다 ^^😀
건강하세요 ~
고봉산 정현욱 님
알고보니 제가 김지하 시인에 대해 알고있는것은 극히 제한적이였음을 오늘에야 알았네요
붓 가는대로 일필휘지로 그린 추상적 동양화에 추사체 같은 글씨하며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든 시를 보고 그동안 내 머릿속이 텅 비어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기까지 하네요
들풀님의
'붓 가는대로' 작품도 김지하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