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8CW6S4gRahY?si=ictGSM9HW6d56JgE
Schubert - Arpeggione Sonata D 821 / Presentation + New Mastering (Ct. rec.: Rostropovich / Britten)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a 단조, 4/4박자.
매우 서정적인 피아노 전주에 이어 감미롭고 우아한 주제가 첼로로 연주된다. 이 제1주제에 이어 명랑하고 경쾌한 제2주제가 전개되며, 이런 밝은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제 1주제와 제 2주제의 재현이 있은 다음 서정적인 코다가 이어지는데, 첼로의 호소하는 듯한 연주는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2악장 아다지오, E장조, 3/4박자.
피아노의 서주가 있은 다음, 애수와 동경을 지닌 주제가 육중하게 첼로로 연주되는데, 첼로와 피아노의 대조가 두드러진 아름다운 악장이다.
3악장 알레그레토, A장조, 2/4박자.
제2악장의 가요풍의 특징을 그대로 론도에 옮긴 형식으로서, 갑자기 첼로로 시작되는 론도 주제는, 순조롭게 전(前) 악장의 주제와 융합되고 있다. 활함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만 끝에서 다시 우수 속에 잠기는 첼로의 탄식은 깊은 인상을 아로새겨 준다.
로스트로포비치 (Mstislav Leopol'dovich Rostropovich 1927.3.27~ )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비추 출생.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우고 1946년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하였다. 1945년 전 소비에트연방 음악콩쿠르에서, 1947년 프라하, 1948년 부다페스트의 세계청년우호제(世界靑年友好祭), 1950년 프라하의 국제 첼로콩쿠르에서 각각 1위를 하였다. 졸업 후 곧 모교의 교수가 되고, 1968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지휘자 데뷔 명성을 높였다. 1974년에 출국한 후는 귀국하지 않았으며, 다음해에 미국망명을 발표했다. 1977년 워싱턴내셔널교향악단 음악감독이 되어 활동 했으며 1978년 소련에 대한 비판적 행동으로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현재 로스트로포비치는 살아있는 첼로계의 전설이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실로 굉장한 첼리스트이다. 그의 테크닉은 유례가 없을만큼 힘차고 격정적이며 완벽하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테크니컬한 쪽으로만 흐르지 않고 장대한 스케일과 품격높은 지성미를 부여받았고 따뜻한 감성마저 담아내고 있다는 데에서 그저 놀랍기만 하다.
https://youtu.be/A1Y9-ajhMGw?si=8glJC2NSXsx_Cn_j
F. Schubert - Sonata D 821 "Arpeggione" - Martha Argerich - Mischa Maisky
파블로 카잘스마저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를 가르켜 ‘첼로 연주의 개념을 뒤엎어버린 인물’이라고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실로 방대한 양의 레코딩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비록 지휘자로서는 최고의 첼리스트다운 역량이 다소 못미치는 감이 있으나 그래도 무리없는 지휘실력을 펼쳐보이고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 첼리스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3월 27일 러시아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수도 바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국가에서 ‘공로예술가’라는 칭호를 줄만큼 인정받는 명 첼리스트이자 바쿠 음악원 교수였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페도토바 역시 알아주는 피아니스트이자 바쿠 음악원의 교수였다. 이처럼 음악적인 명문가에서 자란 덕분에 그는 4살때부터 피아노 작품을 작곡하는 등 천재적인 역량을 보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어릴때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로 자리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그역시 모스크바로 이주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는 이곳에서 7살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첼로의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워낙 선천적으로 음악적인 능력이 있었던 그인지라 첼로를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10살경 생상스의 협주곡을 연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4살 때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가 과정에 등록하고 열심히 공부해, 이듬해 4월 ‘소련 작곡가의 밤’에 출전해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다.
명연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중 프라하 세계 청년 콩쿨에 참가해 우승해 다시한번 그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48년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모교 교수로 발탁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유럽의 주요 콩쿨들, 예를들어 부다페스트의 평화 우호제 콩쿨, 1950년 ‘프라하의 봄’ 첼로 콩쿨 등등 여러 곳에 출전해 모두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여러 활동으로 그는 1951년 ‘러시아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56년경에는 최초로 러시아를 떠나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구미 30여개국을 돌며 연주회를 펼쳐 세계적인 시선을 모았다.
솔로 첼리스트 및 레오니드 코간이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등 여러 연주자들과 인상적인 실내악의 세계를 들려주기도 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결국 그는 이런 맹활약으로 지난 51년의 ‘러시아 인민예술가’라는 호칭 이후 1963년에는 ‘레닌상’을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자로 등장한 것은 1968년의 일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을 지휘한 것이 그것인데, 이것이 호평을 얻어 그는 여기저기에서 객원지휘 의뢰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한창 잘나가던 그였지만 휴머니스트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1968년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자기 별장에 숨겨 두고 보호해 주어 결국 당국으로부터 큰 미움을 받게 된다. 결국 그는 외국 여행이 금지되고 갖가지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1974년이 되어서야 국외 여행 제제가 풀릴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보다 자유롭게 음악을 하기 위해 1975년 미국 워싱턴에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곤 2년후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러시아 당국과 마찰을 빛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80년부터 몇차례에 걸쳐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글: 수진
https://youtu.be/NNcQuY1isEI?si=S5_UZJQ72UtHNrMa
Schubert (Perenyi, Schiff) - Sonata en a minor Arpeggione D821.avi
해설
'아르페지오네'(Arpeggione)는, 한편으로 <기타 첼로>(Guitar Violoncello)라고도 한다. 1823년에 비인의 슈타우퍼(G. Staufer)가 발명한 악기였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어느덧 그 악기 이름조차 역사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아마 이 악기를 위하여 작곡된 곡이라면 이 슈베르트의 <소나타 a단조> 뿐일 것이다. 악기 아르페지오네는 소형의 첼로, 바하 시대에 사용되었던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와 흡사한 모양을 했으며 전반적으로 오늘날의 기타를 연상시키는 악기였다.
현재에 와서는 많은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되나, 이 악기는, 지금의 첼로보다 피치가 높기 대문에, 아르페지오네를 위해 작곡된 작품을, 오늘날의 첼로로 연주할 경우에는 높은음부의 빠른 패세지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또한 리듬에 변화를 준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곡에는 카사도의 편곡에 의한, 첼로와 관현악과의 협주곡풍의 형태나 또는 도브링거 편곡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2중주의 형태로도 연주되고 있다.
[작곡의 경과]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오직 어제의 슬픈 생각만이 다시 나를 찾아옵니다. 이처럼 나는 즐거움이나 다정스러움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27세인 1824년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또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의 슬픔의 표현입니다. 슬픔으로서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굳세게 해줍니다." 라고 쓰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아무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던 자기의 허약한 건강을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유명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의 가곡집이라든가,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a단조>(작품 143) 등의 걸작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해인 1824년 여름에 슈베르트는, 에스테르하찌 일가와 함께, 쩨레스로 갔었다. 그는 여기서 오래간만에 상쾌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마 슈베르트의 실내악곡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한 가장 다정스러운 정취가 풍부한 <현악 4중주곡 a단조>가 만들어진 것도, 이 해 여름의 일이었다. 백작의 딸인 "카롤리네와"의 사이에 로맨스가 싹튼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슈베르트는 여섯살 쯤 젊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쩨레스는 헝가리의 향토색이 짙었으며, 그래서 슈베르트는 슬라브나 마쟈르의 요소를 풍부하게 채택하여 몇 개의 실내악곡을 작곡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르페지오네라는 새로운 악기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나, 한편 이 기타에 첼로를 더한 듯한 성질의 음에 헝가리풍의 특징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혹되어 작곡하기도 했던 것이리라. 따라서 이 소나타에는 슬라브풍이나 마쟈르풍의 힘차고 개성적인 성격이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https://youtu.be/jaj1XJTMWQE?si=firEXHFKNA0oyK4E
Daniil Shafran - Arpeggione Sonata by Franz Schubert
Daniil Shafran ( 1924 - 1997 )
다닐 샤프란(1924-1997)은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음악가의 가정 (아버지-첼리스트,어머니-피아니스트)에서 태어나 14살인 1937년 전 소비에트 러시아 음악 경연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한 음악의 천재이다. (그 상으로 1630년제인 아마티를 받아 그 이후 평생 사용하게 되었다.)
1949년 부다페스트에서 있었던 전 공산권 세계 청소년 페스티발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 공동우승하고 프라하에서 있었던 하누스 비한 추모 국제 음악 경연대회에서도 로스트로포비치와 공동우승한 이래 클래식 애호가들은 다닐 샤프란을 로스트로포비치와 즐겨 비교해서 거론하게 되는데 로스트로포비치가 일찍부터 서방에 알려져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데 비해 샤프란은 주로 러시아 국내에서 활동하여 서방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닐 샤프란은 비르투오소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 로스트로포비치와 달리 깊은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진지한 연주자의 길을 걸은 철학적인 연주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사후에 다닐 샤프란을 높이 평가하는 많은 매니아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첼로의 황제인 카잘스에만 비교될 수 있는 위대한 첼리스트였다는 분이 많이있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RGdJub1nx1U?si=fHYWI-fQPyFTs_Ww
Schubert - Arpeggione Sonata D 821 in A minor / 2021 Remastered (reference record.: Daniil Shaf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