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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7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다니 9,4ㄴ-10
복 음 : 루카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움을 실천하려면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차리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는 데 바오로 사도가 회심하는 과정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하기 전까지 십자가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바오로는 죄인인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으로 배반자 이스라엘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던 하느님의 자비(예레 3,12-13 참조)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로마 11,32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잘못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보려는 우리의 한계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자 노력합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마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계속된 가뭄에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성당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성당 한가운데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너희의 기도가 닿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이가 제단에 초를 봉헌하면 곧바로 비를 내려주겠다.”
사람들은 서로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를 봉헌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도 수녀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차마 신부, 수녀에게 초를 켜라고 하기 힘들어서,
신자들의 대표이며 믿음이 크다고 알려진 사목회장님이
등 떠밀려서 제대 초를 켜서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제대 초를 켜서 봉헌해야 하는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밖에 없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을 때,
성당 한가운데로 한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를 켜서 제단에 봉헌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복장에서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또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비가 내리길 기도하면서도
비 올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를 하느님께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시면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있으며, 용서를 가장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온전한 신뢰는 지키기 힘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 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된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가톨릭 연구소에서 교우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당에 다니는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성당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성당에 다니는 이유입니다. 이유는 다섯 가지 정도 되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필요한 위로입니다.
둘째는 ‘삶의 의미와 목적 발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와의 유대감 형성’입니다.
여행을 가도 혼자 가는 것도 좋지만 함께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찬양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가톨릭은 세계 어디에 가도 같은 전례를 하기에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넷째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거든 꼴찌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겸손, 희생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다섯째는 ‘전례와 의식 참여로 영적인 충만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합당하게 모실 준비를 합니다.
성당을 떠나는 이유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삶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넷째는 성당 내에서의 소속감, 교제,
혹은 따뜻한 공동체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교회 조직의 경직된 구조나 변화에 대한 저항,
혹은 내부 정책과 결정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성당에 바라는 것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앙 교육 강화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입니다.
셋째는 신자들의 재교육입니다.
넷째는 성당의 시설개선입니다.
다섯째는 청년 사목의 확대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축복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과 깊은 만남’입니다.
모세는 거룩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성당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셋째는 ‘죄의 용서와 영혼의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넷째는 ‘공동체로서의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교회가 모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의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
다섯째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현세에서 축복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현세에서 비록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진정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진실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의 준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재들이 아니라 저희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에서 저희는 죄를 지었다는 고백이 몇 차례 반복되는데
이 고백에서 저는 ‘저희는’이라는 표현이 유독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쟤들이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지 않고,
‘저희는’ 죄를 지었다고 공동의 죄를 공동 고백하는 겁니다.
이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래야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공멸하는 공동체를 보면 서로 쟤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고 있고 그래서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공멸의 길을 끝까지 가려는 그들이 가엾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서로 너를 눌러 이기고 자기만 살려고 하다 결과적으로 공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몇 가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는데
먼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제 생각에 여기에는 ‘함부로’라는 부사 하나가 빠져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판단은 그 자체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육신으로나 정신으로 병이 있으면
그 병이 무엇인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고 그래야 정확한 치료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치 말고 신중히 그리고 정확히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판단은 사랑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나 사람의 상황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판단이 문제이고 그것도 단죄가 목적인 판단이 문제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다음
남을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단죄하지 말라는 말보다 용서하라는 더 적극적인 사랑,
또는 더 적극적인 자비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종합하면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인데
이와 관련하여 저는 옛날의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저는 단죄한 다음 용서하느라 애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경우 멀쩡한 사람을 단죄하여 죄인 만들고,
그런 다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을 용서하느라 애를 썼습니다.
애초에 단죄하지 않았으면 용서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는데
교만했기에 감히 단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고 죄지었던 것이며,
교만을 제거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했기에 용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이 밑바탕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이 밑바탕 되었을 때야
우리는 다니엘서의 예언자처럼 쟤들이 죄지었다고 고발치 않고
저희가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을 심판할 권한은 없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남을 심판하는 일은 심판받을 죄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을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여기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는 말은,
“성경을 모르는 저 무식한 놈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또는 “이 무식한 놈들아, 저주나 받아라.(지옥에나 가라.)”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바로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인데,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기도 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구약성경 에제키엘서에,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인데,
사탄은 그 구원 사업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애를 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사탄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과 같고,
사실상 사탄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3)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라는 말씀은 모순되지 않은가?”
루카복음 17장에,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라는 말씀이 있고,
마태오복음 18장에는 더 길고 자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형제가 죄가 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이 죄라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심판일까, 아닐까?
또 그 형제에게 가서 ‘너, 그런 짓을 하지 마라.’라고 꾸짖는 것은
단죄일까, 아닐까?
‘죄짓는 형제를 꾸짖는 일’과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이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같은 일이 아닙니다.
죄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회개와 구원 가능성을 믿지 않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지옥에 갈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천국에 가 있고,
당연히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연옥이나 지옥에 가 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4)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사도들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제도는 원래 ‘정의와 선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또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은 심판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권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뜻 실현’을 위해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입니다.
황금률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구카복음이 전하는 황금률이다.(38절)
이는 마태복음이 산상설교(5장-7장)의 결론에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제시하는 황금률(7,12)과 같은 것이다.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가 루카복음에서는
평지설교(6,20-49 참조)에 해당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루카복음의 황금률도 평지설교의결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피력하시는 산상설교나 평지설교에서 그 가르침을 꿰뚫는 정신은 황금률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므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것이다.
사실은 황금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에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마태오 복음: 마음, 목숨, 뜻; 마르코 복음: 목숨, 생각, 힘; 루카복음: 마음, 목숨, 힘, 생각)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신명 6,5)는
하느님 사랑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아껴라”(레위 19,18)는 이웃사랑, 즉 사랑의 이중 계명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으로 제시하고 있으나(마태 22,36-40; 마르 12,28-33)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10,25-28) 제시하고 있다.
요한도 하느님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 계명‘으로(13,34) 제시한다.
물론 모두 다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황금률의 정신을 가지고 첫째가는 계명인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한다면,
신약의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늘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표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남을 용서하는 것,
남에게 주는 것‘ 등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황금률의 정신을 지키는 수준에 머물거나
단순한 사랑 실천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거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준 만큼 받게 되고, 받은 만큼 주게 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칙은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38절)
우리에게 안겨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한 처사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예수님의 요구가 평지설교의 새로운 핵심으로 부각된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새 계명과도 같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 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오늘은 하느님의 厚德한 자비로움에 받은 것보다 적게 돌려주려 하고,
준 것보다 은근히 더 받으려는 우리의 간사한 마음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