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언제 인천에 같이 갈 거냐며, 이라크 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기차길옆작은학교의 아이들을 만나러 언제 갈 거냐며 묻는 전화였다. 지난 번 아저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때 그 얘기를 잠깐 하기는 했었다. 그 때도 아저씨가 먼저. 그 얼마 전 회사 일로 해서 인천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를 갔다가도 어떤 방과후 교실을 보면서 기차길을 떠올려 친구에게 얘기를 해주었다며 말이다. 그 말에 잠깐 기차길옆 작은학교 소식을 전하면서 아이들이 아저씨를 보고싶어할 거라고, 시간이 맞으면 함께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살짝 하고 지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함께 움직여 다녀가기 어렵지 않겠나 하고만 있었다. 아이들 편지 나눔 일을 맡아 해오기도 했고, 언제나 그런 움직임에서 통역을 맡아 해오던 사바가 회사 일로 함께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가 않고, 아저씨 일이라는 것도 저녁이나 되어야 마칠 테니 사정은 여러 모로 쉽지가 않아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저씨에게 전화. 다음 날 일이 없어 쉬게 되었다면서 신이 난 목소리로 전화를 해오신 것이다. 사실 나는 영어를 잘 하질 못해 아저씨랑 단 둘이 나누는 대화가 어렵기만 한데, 어쨌든 그 목소리의 표정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When we go to Inchon, When we go to the gichagil, What time you come to me…… 를 묻는데 앙, 이걸 어째. 어떻게든 서울로 다시 올라가 아저씨를 모시고 함께 가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으려면 아저씨 얘기나 아이들 이야기를 섬세하게 잘 전할 통역도 있어야 할 테고, 이런저런 의논을 좀 더 자세히 해야 하겠건만, 진땀을 뻘뻘 발영어를 해가면서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어떻게 되건간에 약속도 해버렸어. 오케이, 아이윌고우투유어오피스, 투모로우쓰리어클락.
다음 날 아저씨를 모시고 인천으로 가기 위해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가 아저씨 숙소로 찾아갔다. 아저씨까지 하여 다섯 사람의 이라크인이 함께 머물고 있는 곳. 어머나!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이라크 음식을 요리하며 준비하고 있어. 호베즈라는 얇게 구운 밀가루 빵과 그것으로 싸먹는 토마토와 양파, 닭고기로 만든 속요리. 세상에나, 그 때 그 맛. 맛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기도 하지, 마치 그 때 그 어느 날로 돌아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해주었어. 나는 입맛이 워낙 후진데다 보수적이어서 외국 어디에서도 좀처럼 음식을 먹질 못해 고생을 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호베즈라는 그 이라크 음식만큼은 입에 잘 맞아 좋아했더랬다. 지난 번 만났을 때 아저씨에게 숙소에 가서 호베즈를 먹고 싶단 말을 했었는데, 이렇게 아저씨가 깜짝 선물을 준비해주었어.
아저씨 숙소가 있는 답십리 역에서 동인천까지 가자면 마흔 개도 넘는 구간을 지나야 해. 아저씨에게 그렇다 했더니 입이 쫙 벌어지며 오늘 내로 도착할 수 있느냐고, 왜 그렇게 머냐고, 혹시 중국까지 가는 건 아니냐고…… 하여간 아저씨는 재미있는 얘기도 참 잘 한다. 지하철 역 앞에 닿아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담배 한 대씩을 더 피우자 하시네. 저 밑으로 들어가면 노스모킹일 텐데 최대한 킵을 해둬야 한다나 뭐라나.
지하철에 타고보니 아저씨가 심심할 것 같아. 둘이만 있을 때는 되든안되든 콩글리쉬 발영어를 구사하며 거리낌없이 얘기를 하게도 되고 그러더만, 사람 많은 곳에 가게 되니까 다시 입이 얼어붙는 것이다. 그래서 아저씨 귀에 꽂아드린 게 지난 번 만나 아저씨와 이야기 나누며 녹음했던 그 녹음기. 그래서 다음 환승역에 내릴 때까지 아저씨는 아저씨가 들려주던 이라크 이야기를 들으며 갔다.
신길역에 내려 1호선 전철로 바꿔탔을 땐가 보다.
조카이자 동생인 바람이가 통역을 도와주겠다 하여 신도림역에서 만났다. 그래서 바람이도, 해원이도 함께 가게 되어.
기차길옆작은학교에 도착. 신기하게도 아저씨는 그 골목이며, 건물 바깥의 벽그림, 그리고 1층에 있는 모임방이며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들까지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야, 나중에 아이들하고 얘기를 나누는데 그 아이가 했던 말이며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공부방 삼촌은 그 때 이라크 어린이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아이들의 사진을 아저씨에게 전해드렸다. 아이들이 편지를 나누던 건 벌써 다섯 해 전, 그 때 초등학교 4학년이던 연수는 벌써 중학교 졸업을 앞두었고, 중학생이던 단비는 대학생이 되어 있다. 당시 내전이 더욱 심해지고 아저씨 개인에게도 위험이 더해지면서 편지를 전하는 일이 멈추었지만, 이제라도 다시 그 때 편지를 나누던 그곳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이곳 아이들의 사진을 전해달라며 아저씨에게 건넸다. 그리고 아이들 사진마다 그 때 짝을 맺어 편지를 주고 받던 아이들 이름을 적어.
마침 동훈 삼촌이 얼마 전 그곳 마을과 마을 사람들,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을 사진과 글로 담아온 책을 펴냈더랬다. 그 책을 아저씨에게 선물하며 함께 보는데, 아저씨는 그 책에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도 정확하게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 나중에 공부방에서 나와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 전철 안에서 다시 한 번 그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정말 놀라울만큼 아저씨는 또렷이 기억해냈다. 심지어는 십수 년 전에 찍은 아이들의 그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도 정확하게 알아내. 보통 우리끼리야 확연히 다른 얼굴이어도 저 건너 사람들이 동양 사람을 볼 때면 다 비슷비슷하게 여기곤 한다던데, 아저씨는 아이들과 두어 번 만났을 뿐인데도 어쩜 그럴 수 있을까 싶을만큼. 오히려 그렇게나 자주 만나오면서도 헷갈리기를 잘 하는 내가 창피할 정도. 아저씨 마음에는 그야말로 한 아이 한 아이를 특별하게 담고 있었다.
마침 아저씨와 공부방을 찾은 날은 중고등부 송년모임을 하기로 했다는 날. 그 때 초등부이던 아이들은 벌써 이렇게들 훌쩍 자라 속깊은 언니오빠들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 또한 아저씨를 몹시도 반가워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편지를 나누던 그 때 그 아이 소식을 물었지만, 아저씨는 차마 다 대답해주지는 못해. 그 아이들 중 어떤 아이는 그만 불행한 일을 당해야 했고, 또 어떤 아이는 소식을 모르게 되었으며, 또 어떤 아이는 부모를 잃어 멀리 떠나야했으니.
그치만 이 자리에서 아저씨와 아이들은 새로운 약속을 했다. 아저씨가 앞으로 언제 또 한국에 다녀가게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때까지 이라크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놓은 것을 모아둔다면 꼭 건너가 다시 편지를 전하겠다고. 그리고 희망했다. 언젠가는 그곳 친구들과 이곳 아이들이 직접 만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머지않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아저씨는 끝내 받치는 감정을 진정치 못하고 눈물을 닦았다. 울보 살람.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안주머니에 넣고 있던 아이들 사진을 몇 번이나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이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된 일이 아저씨 삶에 기적이 되었다고. 또한 아저씨는 기차길 아이들 뿐 아니라 한국에 와서 만난 울진 바닷가에서 만난 아이들, 강원도 양양 산골에서 만난 아이들을 차례로 또렷이 떠올려 안부를 물었다.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겠는지, 한국에 와서 아이들과 인연을 맺어 그 마음을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전하는 일이야말로 아저씨가 할 수 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이었다며 말이다. 그런 말을 한 끝에 한참을 눈을 감았다.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이라크에 있을 아저씨 자식들을 떠올렸을지 모르고, 불행을 맞았거나 더는 소식을 알지 못하는 그곳의 아이들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저씨는 희망을 얘기했다. 우리가 친구가 되었듯,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간다면 상상보다 더 큰 아름다움과 평화를 가꾸어가는 것이 될 거라면서.
첫댓글 수고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