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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8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1,10.16-20
복 음 :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스승의 구실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듣고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고 실행하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가르침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유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환호하자,
나귀가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는 줄 알고 우쭐해하였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스승이나 선생, 또는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하면,
의도적으로라도 자신을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바로 겸손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스스로 겸손해야 할 때를 알아차렸다면,
그토록 오만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오만해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마태 18,4)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해지려는 태도는
다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순시기에 본당에서는 금요일마다 십자가의 길을 합니다.
지난주, 십자가의 길을 신자들과 함께 할 때였습니다.
5처에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5처는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된 것이지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형수인 예수님을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지를 세워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 안에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 삶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형제 중 부모님 돌봄을 전담하게 될 때,
직장에서 사람들이 내게 자기가 할 일을 넘길 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하게 될 때,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나의 꿈이나 계획을 희생해야 할 때….
이런 상황일 때 “억울하다”라고 말합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동하면 그 모든 보상을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억울함을 잘 보지 못합니다.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보상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억울함에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의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주님의 위로와 놀라운 힘이라는
보상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순되는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께 불충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는 말과 행동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무조건 실천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데, 그들은 아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자기 맘에 들어야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불편한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뜻 안에 머무르고
또 실천할 때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갚아주십니다.
그러나 순간의 만족만을 그리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드러내려고 할 때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내게서 멀리 밀어놓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 하시면서
그들의 죄상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잔치집에서는 윗자리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 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하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는
말씀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 한다 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다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조욱현 토마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절).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절)
나쁘게 처신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훌륭한 지도자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타락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8-9절).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절)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온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그리하여 사순시기가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월 26일 토요일에 황창연 신부님이
‘선교 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수녀님이 포스터를 2장 만들었습니다.
사목 회의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사목 위원들은 대부분 파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를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을 전공한 주일학교 선생님과 홍보분과장은
하얀색 바탕에 만들어진 포스터가 좋다고 했습니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신문 광고에서도 파란색 바탕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장 눈에는 파란색 바탕이 좋아 보이지만 홍보용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파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던 사목 위원들도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하얀색 바탕의 포스터를 선택했습니다.
구역을 나누는 것은 구역분과에서 하고, 사제관 신축은 건축 위원회에서 하고,
본당 설립 50주년 행사는 준비 위원회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사회는 다수결이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은 결코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길, 생명 또한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한 환경파괴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는 우주에 여러 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고,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소중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자원을 재활용하고,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켜야 할 의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고난받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지은 나를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결단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 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울 수 있다면,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핀다면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전삼용 요셉 신부
나폴레옹은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가지고는
보통 왕관을 씌우는 의식은 교황이 주례를 맡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자신이 모든 권력의 근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황제란 자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노력을 이룬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의 황제 즉위 후,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의 황제 권위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패배와 몰락을 초래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가 칭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결과로,
그의 군은 대패했고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엘바섬으로 유배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죽기까지 가톨릭 신앙을 주장했지만,
자아를 누르지 못하는, 그냥 종교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그 사람을 바로 잡아 주었던 예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본래 깊은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링컨은 오히려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아갔고,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 여러 번 실패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가족의 죽음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으며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이후,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리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쟁으로 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가 분열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링컨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은
그의 내면에 깊은 신앙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기간 동안 시편과 복음서의 구절들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전쟁의 무게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겸손해지고,
"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섭리를 정치적 결단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또 이 같은 신앙으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는
“하느님 아래 새로운 자유가 탄생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라는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링컨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위안이나 심리적 안정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때
도덕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링컨이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었다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깊어 진 관계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자,
노예제 폐지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있을 때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가장 앞장서서 적과 맞서는
용맹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지만,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점점 독재자의 모습을 띠었고 공화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국민 영웅인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칭호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은 모습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악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지에 대한 그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 사람이 섬기는 ‘신’ 때문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자아가 원하는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선한 신을 믿고 지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되어갑니다.
사울 왕이, 왕이 되고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자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겸손해진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부르시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불려지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불리셨고,
또 제자들을 “아이들아!”(요한 13,33: 21,5)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 겸손하셨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치가 바뀌더라도
그것들은 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섬기기에
자리에 따라 자기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인을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겉모양의 종교가 아닌 참으로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직 신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신이 되려는 존재기 때문에 자아를 누를 수 있는 분은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를 누르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신은 그 사람 안에서 아직 신은 아닙니다.
은총의 담지자(擔持者)? 낭비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겸손하게 되면 다른 사람 위에 있으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눔을 어제 저는 했지요.
겸손하지 못한 제가 다시 말해서 교만한 제가
저를 경계하는 뜻으로 겸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다음 말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희는 선행을 배워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을 합치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선생이라고 불리길 좋아하며
가르치려고만 들지 말고 배우는 자세를 가지라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진 점은 옛날보다는 좀 겸손해진 점이 있고,
어디서나 남을 가르치려 드는 훈장 기질은 좀 나아졌지만
배우려는 자세는 아직 너무 부족하기에 아직 저의 겸손은 멀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겸손하다고 할 수 없고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그래도 겸손하다고 할 수 있지요.
어디서나 배우고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진정 겸손하다고 할 수 있고 성숙한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면에서 저는 교묘한 교만이 있습니다.
삼십 대 후반부터 저는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 외에
다른 책은 거의 책을 읽지 않습니다.
참고하는 차원에서는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지만
내 인생의 답과 지침이 되는 것은 성경과 프란치스코의 글에서 얻지
다른 책에서는 얻을 것도 없고 그래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만 이것이 교묘하게 저를 영적으로 교만케 합니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며 은근히 남을 낮추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배우고 모든 것에서 배우려는 자세일 때
그때 모든 사람 밑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 겸손일 것이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스승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에서
더 나아가 섬기기까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되지는 못해도 은총의 담지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담지자(擔持者)란 맡아 지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누가 은총의 담지자가 되느냐 하면 겸손한 자가 되는 법이지요.
그것은 비를 제일 먼저 맞는 것은 산꼭대기지만 다 흘려버리고
제일 낮은 계곡에 빗물이 고이는 것과 같고,
바다가 제일 낮지만 제일 넓고 모든 물이 고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의 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총을 다 흘려버리는 낭비자지만
겸손한 사람은 은총의 가장 훌륭한 담지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가르친다며 입으로 다 흘려버리지만
겸손한 사람은 그 말씀을 다 마음에 간직하고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나는 담지자인지 낭비자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말과 행실이 다르면, 그 말은 ‘빈말’이 될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2-12)
1) 3절의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가 아니고,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실행하고 지켜야 할 말을 해도,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가 본래의 뜻입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과 거룩한 말을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행실이(삶이) 전혀 좋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면, 그 말 자체를 귀담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 위선자들의 말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마르 1,22).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앞의 4장에 있는,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이야기에도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사탄이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성경은 성경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말은 사탄의 말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고 해도......
<나쁜 의도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위선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전하는 말씀은 거룩한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의 말과 행실이 다르다면,
그 위선자는 성경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사람이 될 뿐이고,
그들의 말은 전부 다 ‘빈말’이 될 뿐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지 간에,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과 가르치신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금하신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ㄱ)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무도,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을 능가하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수님의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을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겪었던 일들은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5) 12절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교만한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뜻인데,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기만을 희망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파기하고 그 관계자를 제거하는 작업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복음 21장부터는 에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갈릴래아 활동(4,12-18,35)을 접고,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를 거쳐,
수많은 군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을 정화하셨다.(21,12-17)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화려한 입성과 성전 정화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제공한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님 生과 가르침(복음선포)의 마감을 의미하며,
구약에 대한 궁극적인 종지부를 의미한다.
특히 성전 정화 사건은 구약의 모든 제사,
즉 구약의 제관과 제물을 파기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 제사의 파기를 통하여 신약의 제사를,
즉 예수님 스스로가 제관이요 제단이요 제물이 되시는
새로운 제사의 제정을 목전에 두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께서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고
새로운 신약의 제사를 제정하시려는 의도에 따라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약의 祭儀를 파기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대사제와 제관, 율법학자와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든 조직과 기능과 사상 등을 전체적으로 瓦解시켜야 하며,
나아가 그 사람들까지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활동기 안에는
예수님의 과감한 파기와 제거 작업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지금껏 서서히 준비되어 온 이 작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셈이다.
파기와 제거 작업에는 심한 반대와 갈등과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며,
파기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스스로 파기되고 제거되는 법이다.
이 법칙을 예수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허나 그분은 당신의 길을 포기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성전 정화 사건 때문에 예수의 이러한 권한을 놓고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심한 논쟁이 있었다.(21,23-27)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들(21,28-22,14)과
세금 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은 모두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급하신 것들이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 계명을 새롭게 선포하여(22,34-40)
신약의 유일한 계명으로 제시하셨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이 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靈으로는 다윗의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6)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 계시이다.
구약의 파기와 제거 작업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대사제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질책으로 전개된다.
그들이 총체적으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동은 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은 저버리고 태만하였으며
권위를 과시하고 남에게 과도한 짐만 지우는 “위선자”들이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23-33)
사실 마태오복음 23장은 이들에 대한 책망과 불행 선언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의 파기와 그 관계자들의 제거를 위한 작업으로 제시되는 책망은
거꾸로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을 포함한 군중과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지만
유다교의 지도층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우리 교회의 지도층에 만연한
바리사이적 조직과 기능과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좌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이마나 팔에 聖句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았고,
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하지도 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 뿐이며,
믿는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이다.
으뜸가는 사람일수록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섬길 때야 비로소 참으로 높은 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에는 그리스도 외에 어떤 스승도 지도자도 없다.
있다면 오로지 職分과 섬김과 봉사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은 늘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는 聖句를 자신에게 매어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