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김정태
길을 걷는다. 걸어가며 더 많은 다른 길들을 생각한다. 지금 걷고 있는 길과 이웃한 길들은 걸어본 길도 있고 걸어보지 못한 길들도 있다. 살아오면서 가고자했던 길들도 걸어보지 못한 길이 더 많다.
적잖게 살아온 여정에 길들은 많았다. 가지 못한 길은 아쉽고 가지 않은 길은 아깝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든 아깝게 생각하든 어차피 다 가볼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누구든 삶에서 가보지 못한 길 한둘쯤은 있다. 걸어야 할 길을 걷지 못하고 그저 가슴에 길을 안고 길을 걸으며 산다.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라고 말한 이는 시인 함민복이다. 지상에 난 길을 말함일 것이다. 지상의 길이란 것이 허허벌판 중간에서 갑자기 생겼다가 뚝 끊겨 소멸되는 길은 없다. 폭이 넓든 좁든, 가파르든 순하든 그들은 서로 붙잡고 얽혀서 피붙이처럼 누워있다. 길은 혼자서 끝까지 가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 끝인 것 같은 길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시작하는 길일 수 있고, 길의 중간쯤이 어떤 이에게는 끝인 경우가 있다. 혼자인 듯싶다가 어디쯤에서 다른 길과 합쳐지고, 또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그 위를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걷는다. 그러기에 길은 처음부터 임자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지금 그 길을 걷고 있으면 그 길은 걷는 자가 주인이다. 앞으로 갈 길을 생각하며 땅을 밟는 이가 있다면 그 길은 그이의 길이요, 고라니가 걷고 있다면 그 길은 지금 고라니의 길이다.
살아내며 일가친척이라고 모두 다정하게만 살진 않는다. 길들도 서로 손과 발을, 옆구리까지 내어주기도 하지만 모두 순하게 뻗어있는 것은 아니다. 평탄하던 길이 옆길로 접어들며 가파른 언덕을 내보이거나 거친 바닥을 보이기도 한다. 어깨를 맞대고 있지만 이들이 일가친척일까 싶게 전혀 다른 질감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길은 땅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도 하늘길이 있고 바다에도 바닷길이 있다. 구름 속의 하늘길을 비행기는 날아다닌다. 그 아래에서 하늘을 나는 철새들도 지난해 지났던 그 길로 철을 따라 이동한다. 망망대해를 떠가는 배들도 기계의 도움을 받아가며 제가 갈 길을 찾아다닌다. 자칫 길을 잘못 들면 암초에 부딪치고, 그 넓은 바다에서도 충돌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기에 바다로 향하는 길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바닷길뿐 아니라 모든 길은 움직이고 탄생했다가 지워지기도 한다. 어떤 길의 그 끝이 물에 닿아 있어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모두 죽은 길이 아닐 수 있다. 죽지 않고 다만 누워있는 길이다.
시인이 말했던 길은 땅과 바다와 하늘에만 있을지 모르나 길이 어디 그뿐이랴
인생의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길들을 만나곤 한다. 그 길은 서로 살을 대고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닐지 모르더라도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뻗어나갔으니 이들도 일가이고 친척일까.
별 볼 일 없는 내 삶의 여정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어떤 길은 길이 나를 제 땅에 들어서는 것을 거부했고, 어떤 길은 내가 들어서기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그 길이 순결하기만 한 것도 아닐 것이고, 내가 밟고 지나왔다고 더럽혀지기만 한 것은 아닐 터, 지나고나니 아깝고 아쉬움이 스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연민을 얹자니 아직은 삶의 길이 내 어머니의 살아온 길에 비해 터무니없으니 염치없다. 길을 걸으며 길을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어머니의 삶의 길이 겹쳐지니 뼈마디에서 소름이 돋는다.
며칠 전 어머니는 길을 잃었다. 현관문 잠그는 일을 그날 밤 깜박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은 반쯤 열려있고 봄비가 여름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밤길은 나선 건지, 새벽 비바람 길을 나선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부축받지 않고는 현관에서 마당을 지나는 것조차 버거워하신 지 오래다. 추측되는 상황 논리만으로 억지 대본을 만들어 봐도 노인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삽짝만 나서면 길은 세 갈래요,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여섯 갈래다.
경찰, 119대원이 동원되고, 노인들만 20여 명 사는 동네에 옆 마을 노인들까지 길 위에 섰다. 우산을 받칠 힘조차 없는 노인은 그냥 비를 맞으며 6, 7십여 년 눈 마주치며 살았던 동무를 찾겠다고 아무 길이나 걷고 있었다. 정신이 온전하다 해도 이 빗길에서 노인이 다른 노인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것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법석을 떨며 두어 시간이 지나 이웃마을 창고 바닥에 축축해진 어머니는 누워계셨다. 봄풀이 빗물에 젖어있었다. 해독되지 않는 현실의 길 위에 서서, 얼어 굳어진 어머니를 안고 나는 무참했다. 이 단순 명료한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내 글이 가엾다. 병원으로 달리는 응급차는 더뎠고, 차안은 바빴다.
병원에 도착하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 온기가 어렵게 찾아왔다.
어머니 머릿속의 길들을 나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지상의 길을 밟으며 당신의 머릿속에 어떤 길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아랫돌이 더 크고 윗돌이 작은 이치는 건물에서는 당연한 물리적 구조일 수 있다. 어머니가 밟는 물리적 길들도 윗길 아랫길이 있을 터이지만 이미 얽혀 지향점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러면 머릿속에 떠도는 어떤 길을 찾아, 밤 중 어느 시간에 비를 맞으며 나섰을 것인데 어머니에게 그 길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르긴 하되 어머니의 길은 90여 년이 뒤엉켜 움직이고 탄생했다 소멸하는 과정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지상의 길이란 것은 걷고 있는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만 길이다. 보이지 않는 곳은 보이지 않으니 길이 있다 한들 바라보는 이에게 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날 밤, 어머니가 바라볼 수 있었던 길은 몇 미터 앞의 지상에 뻗어 있는 길은 아닐 것이다. 당신의 순결한 노동만으로 살아낸 지나온 길을 더듬다 문득 어떤 길이 생각난 것일 수 있다. 불민한 자식은 길 위에서 그 길이 무언지 끙끙댈 뿐, 선뜻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 것이 갑자기 생긴 걸까. 어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무언가 알기를 더 원하여 살아가는 것이 삶의 길이라면, 아는 날까지 꾸역꾸역 걸어볼 도리밖에 없다.
지상의 길도 누군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걷기 시작한 것이 길이 된다. 한 사람의 여정에서 그 사람이 처음 걷기 시작한 길을 다른 사람이 따라 걷기도 한다. 이런 경우가 여러 사람에게서 일어나고 또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 생겨날 때 그런 길들이 모여 그 시대의 문화가 되기도 한다. 한 시대에 펼쳐지는 문화의 흐름은 역사를 이루는 뼈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길은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요, 길들이 얽히고 포개져 역사의 요긴한 소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이 빈약한 논리는 어쩌다 생겨난 억지 주장만은 아닐 터이다. 온전한 정신으로 어린 내게 일러주던 ‘옳은 길’을 걷고자 애를 썼다. 이젠 당신이 밟던 길도 내게 일러주던 그 길도 어머니는 모두 잃었다.
길은 뻗어 있고 그 위로 우리네 삶의 길이 흐른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혹여 누군가가 되짚고 올 수 있는 길이라면 한 인생의 삶 속에 최고의 찬사가 될 수도 있을 터다. 대중없이 길을 나선 어머니의 그날 밤 길도 오래전 당신이 걷던, 아니면 걷고자 했던 길일는지 모른다.
누워 있는 길 위에서 지나온 어머니의 길들과 가보지 못한 내 길들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