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묻고
35: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35:6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하나님은 성도를 한 곳에 정착시키고자 합니다. 그곳은 거룩한 세상입니다. 거룩한 세계의 한 일환으로 삼으시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거룩과 점점 거리가 먼 모습이 될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보통 순수하다는 말은 어른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사람이란 어린이에서 점차 어른이 되어 갑니다. 동시에 순수의 모습은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시키면 시킨대로 자발적인 순수함으로 실천에 옮기려고 합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거짓말 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그 어른들은 틈만 나면 거짓말을 남발합니다.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 재미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생존에 대한 위협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거짓말해서라도 그 위협을 극복하려고 애를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모습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도 점차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들의 성인들의 세계에 동화되어 갑니다. 순수함보다 자아의 생존이 더 시급한 문제인 것을 알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비록 하늘 나라가 좋은 나라이며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할지라도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다는 것은 참으로 요원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천국의 요건을 완화시켜줄까요? 그러니까 좀 덜 거룩하고 좀 덜 순수해도 마음대로 천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거룩의 기준을 대폭 낮추어줄까요? 이런 경우는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됨을 그 어떤 경우에도 뒤로 미루거나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순수치 못한 우리가 어떻게 순수한 것만 요구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끼? 하나님의 방법은 이러합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친히 방문하셔서 그 상대를 통해서 새로운 거룩의 모습을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봐서 거룩이란 깨끗하고 흠없고 띠없이 맑고 순수한 것을 염두에 두겠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준 하나님의 거룩은 그런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격차입니다. 즉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내지 못하시는 것을 행하심으로서 인간과 대비해봐서 거룩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이 인간들과 비교할 때 염두에 두는 선행이나 착함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능력 범위안에서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론 짓기를 "우리 둘 중에는 역시 내가 너보다 더 훌륭한 존재이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 끼리의 비교에서 만들어낸 거룩이라는 뜻을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훌륭하다고 소문난 인간 보다 몇 배나 더 훌륭할까?"라는 물음 조차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의 구원 작업은, 사람에 대해 아직 태어난 적도 없기에 선이나 악을 행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자를 가지고서 해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0-13에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도 인간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불합리한 점을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가 제대로 성립하려면 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그 대상에 대해서 사랑과 미움을 결정지어야 할 텐데,
분명히 이 로마서 9장의 말씀에서는 아직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결정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상도 없이 단지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부터 먼저 시작한 셈이 됩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삼기 위해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셨고, 자신의 미움의 마음에 합당하게 부합되도록 즉 내 미움을 마음껏 받아보라고 미움의 대상자를 창조한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입장에서 봅시다. 미움받기로 작정된 에서가 바라본 하나님에게서 거룩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비치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리 없을 것입니다. 에서 자신의 의지나 행위나 선을 향한 집념같은 것은 완전히 무시당한채 오로지 저주의 대상이 되기 위해 태어나야만 하는 자기 입장을 에서는 어떤 것으로 방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을 저주스러운 지옥 일원의 일부로 만드신 그 하나님을 과연 합당하고 거룩이 충만하고 정당한 하나님으로 여기겠습니까? 도저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야곱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를 접하게 됩니다. 자비의 극치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전혀 무관하게 사랑을 받게 된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대해 찬동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같은 인간이면서도 단지 저주받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에서의 처지와 비교하면서 야곱은 하나님의 그 원대하고 특수한 계획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감히 인간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거룩하신 행위를 실행에 옮겼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결코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사랑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다마는,
제 형 에서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편치못합니다. 따라서 제 마음의 소원이 있는데 제발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수준의 자비와 거룩을 행사하셔서 비록 형 에서는 택하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제 청을 들어주셔서 그도 나처럼 구원받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야곱이 나온다면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차원에서 거룩을 이해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수준에 머무는 셈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벧엘이 바로 그런 곳을 지적해주는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이라는 장소를 야곱과 에서 사이를 따로 분할 관리하겠다는 거룩한 의지를 드러낸 장소로 보시고 그 일에 대해서 확고히 하겠다고 사랑을 받은 당사자인 야곱보고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의 의미를 지속케 하기 위해 계속 야곱을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벧엘은 바로 야곱의 야곱됨과 에서의 에서됨이 확연하게 분리되었음을 보여준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영원히 야곱 곁에서 떨어져 나가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의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즉 하나님은 결코 에서와 야곱의 공동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점을 바로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겁니다. 이것을 알 때만, "벧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취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되고 또한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 불렀던 야곱의 선언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36:10-15에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 때에는 형 에서와 따로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알게 된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문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야곱 식의 생각은 이스라엘 식의 생각으로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이 바뀜이 벧엘이라는 장소에서 새로운 계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바뀔까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바뀐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의 문으로 달라졌습니다. 즉 축복된 민족이 야곱의 허리가 아닌 이스라엘의 허리에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 사실이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하심의 효력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이름으로 바뀌어야 할까요? 우리 성도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소유'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복의 후손들이 나오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허리에서 예수님께 속한 백성들이 하늘의 별같게 바다갓의 모래 같게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받는 백성들의 등장은 전부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마치 야곱에게 찾아오신 벧엘의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그동안 세상 알고 있는 인간적인 사랑이나 거룩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로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이 구별됨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요 작품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