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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들으시면서, 본인의 마음을, 과거도 생각해보면서 공감도 하고, 때로는 저것은 저렇게 극복했구나, 저것은 나와는 다르기도 하구나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원불교를 만나서 강연하신 은서 교우님 이야기를 합시다. 은서 교우님 할머니가 정말 신심이 장하신 분이셨어요. 그 집안에 전무출신도 있고요. 둘째가라면 서러운 신심이셨습니다. 그런 할머니 덕분에 은서교우님이 혜택을 많이 보셨습니다. 매년 교당에서 제사를 지내니까 원불교와의 인연도 끊어지지 않고요. 또, 은서 교우님 같이 교당을 나갔다가 다시 찾아오기가 어렵습니다. 출가하기와 같아요. 마음공부를 통해서 업장을 비우는데, 자칫 공부를 잘못하면 탐진치를 축적하고 자존심을 축적합니다. 또 업장을 축적합니다. 오히려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쌓아가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릴 때 똥 안 싸는 사람 없고, 실수 안하는 사람 없지요. 자기 업장이 쌓여서 자존감이 쌓이다보면, 자존감이 비뚤어져요. 텅 빈 가운데 있는 자존감이 참 자존감입니다.
은서교우가 할머니의 신심 어릴 때의 인연 집안의 호의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지금도 밖에서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그 타력의 인연이지요. 본인이 자력이 없을 때는 타력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중 특히 인연의 힘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원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후손을 위해서나 가족교화나 일반교화를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원불교 주인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원불교의 의식으로서 진행이 되는가, 입니다. 결혼식을 할 때, 회갑일 때, 생일일 때, 또는 명절을 맞이할 때, 제사를 지낼 때도요. 원불교의 진리성을 내 안에서 얼마나 받아들이느냐가 원불교 주인인지를 판단하는 잣대입니다. 본인에게 손해를 주지 않습니다.
안암교당에 처음 오면 법회가 길다고 합니다. 긴 거 알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비싼 식당가면 금방 먹고 나와요? 안암교당은 메뉴가 많은 식당입니다. 그래서 법회가 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먹을 것 없는데 괜히 오래하는 식당은 망합니다. 먹을 것이 있으니까 오래 하지요.
제가 은서 교우님 생각이 나는 게, 몇 년 전에 제가 고의적으로 흥분을 해서, 교당 내에서 나 모르게 연애하는 사람들은 떠나라, 대신 멀리가지 말고 다른 교당으로 가라고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은서교우님이 안 나오시더라고요. 그래놓고, 강연 원고 보면 교무님이 밉고 단장님도 밉대요. 본인이 판단하고 연애도 본인이 했는데,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내 판단이 다 옳은 것은 아니잖아요. 저도 판단이 틀릴 수 있거늘, 여러분 판단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지요. 제일 외로운 사람은, 충고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왜? 충고를 하는데 받아들이지를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그래도 충고를 해준다는 것은 나를 신뢰한다는 것이고, 내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충고는 씁니다. 좋은 약도 입에 씁니다. 그러나 몸에 좋습니다. 충고를 달게 받기만 해도 그 사람의 공부는 일취월장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려워요.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칭찬해주는 사람 때문에 강급 하기도 합니다. 칭찬이 독약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은서 교우님이 교당에서 나갔을 때 종운 교우님, 법준 교우님께서 은서교우님을 계속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은서 교우님 교당에 다시 온다고 했을 때 얼마든지 오라고 했어요. 교당은 힘들 때, 외로울 때, 괴로울 때 해결하는 곳입니다. 어두울 때 밝음을 얻으러 오는 곳이 교당입니다. 자랑하러 오는 곳이 아니에요. 예쁨 받으러 오는 곳이 아니에요.
무형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은서 교우님과 출가 감상담 들려주신 설영우 교우님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교당을 중간에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옵니다.
어중간하게 자존심이 센 사람은 교당에 다시 못 옵니다. 원불교 공부는 업장을 축적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존심을 비우는 공부입니다. 비워서 자존심이 살아나는 공부입니다. 변화되는 자존심이 아니고, 누가 세워주는 자존심도 아니고, 누가 짓밟을 수도 없는 참 자존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일원상 같은 자존심; 진공묘유의 자존심입니다. 원불교 다니면서 업장을 쌓는 자존심, 못난 자존심 때문에 이 회상을 버린다는 것은, 그 자존심이 얼마나 큰 독약인지요. 자존심 센 사람은 자존심을 선용해야하고, 그 센 자존심을 진리적 자존심으로 변화시켜야합니다. 그 자존심이 자기를 망조를 들게 만들거든요. 잘하다가도 자존심을 해치면 멀어지거든요.
여러분, 자존심은 누가 세워줍니까? 불공의 핵심은 자기불공입니다. 남에게 잘할 것 없어요. 먼저 자기한테 잘해야 해요. 우주에서 잘되고 안 되고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이 잘살고 못살고, 칭찬을 받느냐, 무시를 받느냐도 여러분이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남 욕하려고 대기하겠어요? 다 바빠요. 자기 코가 석자지요. 자기가 하는 짓이 그러니까 욕을 먹지요. 누가 밥 먹고 할 일없이 욕하러 다니겠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욕을 얻어먹을 일이니까 욕먹고, 환영받을 일이니까 환영받는 거예요.
은서 교우님이 회의를 해보고, 부장을 맡으면서 나는 열심히 산다, 나는 교당에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오해를 벗어났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경험이 참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이 착각하는데, 수양연구를 한 다음에 취사는 한 번에 끝내려고 해요. 그렇지 않아요. 취사가 80프로 이상입니다. 취사를 통해서 수양연구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핸드폰이 처음부터 이랬어요? 얼마나 많은 실행을 통해 업그레이드되면서 지금의 핸드폰이 된 것인가요. 어떻게 이렇게 되겠어요? 경험, 실천이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게 만들고 주인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해보지 않으면 관념입니다. 느낌이 적어요.
집을 한 번 지어보세요. 100만원으로 짓겠다고 하다가 200만원이 듭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그래요. 실제로 해보지도 않고 생각으로만 판단하면 그렇게 미스가 많아요. 해봐야 압니다. 어디에 가서나 주인으로 사세요. 대접받지 마세요.
여러분 어디에 가서 대접받으려 하지 마세요. 하인같이 못난이처럼 있지 마세요. 어디 가서나 도와주려하세요. 그게 원불교 법입니다. 손님 대접 즐기면 환영받지 못해요.
제가 은서교우님께 놀란 것이 많습니다. 은서교우님 중앙 하실 때, 교우분들 먹을 것 드린다고 집에서 메뉴를 준비해서 교당에 들고 오시더라고요. 그 정성에, 은서 교우님이 나보다 주인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영우와 은서 교우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성이 맑습니다. 힘들면 괴롭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니까, 영우 교우님은 힘든 것 같은 일도 재미있다고 말했지요. 영혼이 맑으면 그렇습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은 영혼이 맑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영혼이 맑으면 대종사님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토요일 이 시간에 어떤 미친놈이 법당에 앉아있습니까? 영성에 대한 추구, 영혼의 맑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여기 앉아있습니다. 돈만 알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 토요일 법회에 무엇 하러 옵니까. 영혼에 대한 갈구가 있기 때문에 옵니다.
은서 교우님, 영우 교우님은 영혼에 대한 갈구가 남들보다 더 강합니다. 어떤 사람은 먹다가 가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누구를 주려고 하고요. 제가 교무를 하니까 좋은 점이 많습니다. 좋은 사람은 인연을 많이 짓습니다. 은서교우님이 불공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영우 교우님은 6년간 피아노를 법당에서 치는데, 저한테 단 한 번도 튕긴 적이 없어요. 장난으로라도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어떻게 교당을 한주에 3,4번 나오나, 싶죠? 영우 교우님은 15년 동안 일주일에 3,4번 교당 나왔습니다. 사실 내 법문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 설영우교우입니다. 반주 때문에 일반법회까지 들었으니까요. 그럼 저를 제일 질리고 제일 원망할 사람이 설영우 교우님이지 않겠어요? 제일 오래 만났고 가장 많이 있고.
아마 그 다음으로 오래된 분은 법준교우님 일 것입니다.
설법 타이핑 하는 것 말씀 하셨는데, 제가 이 자리를 빌어서 타이핑 해주시는 분들 고맙게 생각합니다. 얼굴도 드러나지 않고, 나타나는 것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시간이 엄청 투여됩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타교당 교무님들과 예비 교무님들이 많이 덕을 봅니다.
제가 자료를 올릴 때 꼭 연도를 올리라고 합니다. 아마 제가 죽고 나서 원기 200년쯤에는, 안암교당 교화사례에 대해서 박사학위가 나올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올린 자료가 중요한 자료가 되겠죠.
은서, 영우 교우님 두 분 다 부서, 회장단 회의의 중요성에 대해 공통적으로 하셨습니다. 회의가 무엇일까요? 따분한 겁니까? 회의는 일방적으로 듣는 것입니까?
원불교적 시각으로 회의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의는 미리불공이 핵심입니다. 단체 불공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조직불공입니다. 이 조직을 살려내는 불공입니다. 개인이 아니고, 단체 안에 개인이 있고요. 조직 안에 개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혜두단련입니다. 그 안에서 지자본위가 됩니다. 회의를 해보면 그 집단의 수준,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회의 시간이 (물론 회의를 준비하는 사람은 회의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지만) 헛일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 사회에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회의야말로 엄청난 공적인 집단, 공적인 공의 꽃입니다. 즉, 사적 시각을 가진 사람, 개인적 시각에 머문 사람은 회의를 우습게 알고요, 회의에 빠지고 늦습니다.
아까 설영우 교우님도 말씀하셨는데, 일이 많을 때 두 가지 선택이 나오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버거우니까, 그런 버거운 것이 싫지요. 그렇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그때가 좋았구나, 싶은 사람도 있어요. 버거울 때 도망하거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고난은 축복입니다. 아프지만 않으면 됩니다. 고통은 젊을 때 사서도 하는 겁니다. 고통은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게 하고 일에 대해 분석력을 갖게 하며, 체계를 잡게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생을 마감할 때,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가, 생각하면 일이 많았을 때 일 것입니다. 일이 가장 많을 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때 내가 이 사회에 유익을 주고, 그때 성장합니다. 그때 경계 속에서, 일속에서 힘이 쌓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도망하느냐, 내 힘을 쌓는 기회로 삼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도 습관이에요. 어떤 사람은 힘들면 갑자기 도망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경험이 한 번이 아닐 겁니다. 여러분, 이 생에 이때까지 괴로웠으면 앞으로도 괴로울 겁니다. 행복했다면 앞으로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 습관을 바꾸는 방법은 수행뿐입니다. 수행 없이는 괴로운 사람은 앞으로도 괴롭습니다. 사고의 패턴 때문입니다. 업이고 카르마(karma)입니다.
종교는 how와 what , 철학은 why가 주인데요.
하나만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大 小 有 無
성품은 무선무악이고, 경계 따라 능선능악입니다. 그런데 그 선과 악이 바뀝니다.
이것이 대소유무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본디 선할까요, 악할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이 본래 악하다고 생각한대요. 상처받으면 그런 소리하지요. 사기 한번 당하면 사람은 악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인간은 본디 악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본디 악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본디 선한 사람도 없습니다.
선도 악도 본래 없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한 번 줘보세요. 가장 민감한 사안들 ㅡ 그것이 주착한 사안들입니다. 자존심이라든지, 경계 따라 민감한 것에 걸려들면 무너집니다.
그 사람이 계속 그렇지는 않잖아요. 유무로 변화를 합니다. 우리 유은서 교우님이 어릴 때 교당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또 나왔어요. 다음에도 계속 나올까요?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경계 따라, 마음 따라요.
설영우 교우님도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나왔다가 ㅡ 언젠가는 저한테 화나서 안 나올 수도 있어요. 변화하는 겁니다. 변화에 진리가 있습니다.
대소유무의 진리를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보세요.
대종사님이 진리를 대소유무의 공식을 푸셨는지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공부 안하면 어디서 하겠습니까?
첫댓글 현장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네요^^ 감사합니다 지훈교우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캄사캄사합니다
지훈교우님 애많이 쓰셨어용 감사해요♥ 초벌해주신 성해교우님도 감사합니당^^
초벌은 성해교우님이 해주셨어요ㅎㅎ^^
@한지훈 아하 ㅋㅋㅋㅋ 공지와다르군요 네 수정완료요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