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바다 위에 그물망처럼 펼쳐졌다. 금빛 그물이 내 발목을 감았다. 넓게 펼쳐진 그 그물은 성겼지만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물살에 끊임없이 흔들리며 다 흘려보낼 듯 싶지만 그 그물코는 끊어질 듯 다시 이어져 놓침이 없었다.
만약 삶에 두 개의 철칙만 있다면 하나는 죽음의 철칙이요, 두번 째는 인과응보다. 삶은 너무나 당연하고 완벽하여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 같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의 그물은 피할 수 없다. 몇 달 전에는 한 분 뿐인 형님이 돌아가셨고 오늘 아침 데크 위에는 지바뀌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죽음의 그물은 예외가 없었다. 인과응보라는 그물도 마찬가지다. 이 인과론은 물질만 아니라 모든 정신적인 측면에도 적용된다. 내가 저지른 모든 행위는 반드시 업보로 되돌아왔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실수, 나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부주의한 악행들은 반드시 되갚음의 형태로 돌아왔다. 당사자들은 다 잊고 있을 사소한 것들 마저도 악몽같은 기억으로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내가 특별히 민감한 체질이라 그러할까? 과연 그럴까?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기억 때문에 끊임없이 물결처럼 흔들려도 인과응보의 법칙은 빛그물로 짜여진 천망처럼 그물코 하나 풀어짐 없이 세상을 지배한다. 삶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 또한 인과의 그물이니 크게 보아 모두 한 그물인 것이다.
삶이 신의 법칙이라면 죽음 또한 신의 법칙이다. 삶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이라면 죽음 또한 전 우주적 시뮬레이션일 것이다. 신이 지배하든 시뮬레이터가 지배하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법칙에 의해 지배 당한다. 의지가 통용되지 않는 삶은 가상 현실에 불과하다. 나는 지금 물살을 헤치며 바닷가를 걷고 있다. 얕은 바다에 펼쳐진 빛의 그물이 내 발목을 감고, 내 한 걸음 한 걸음을 감는다. 뚫고 나가도 또 감고 뚫고 나가도 또 감는다.
모래밭 위를 청제비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순비기꽃을 탐하는 것일까. 네가 내 꿈을 꾸든 내가 네 꿈을 꾸든, 너와 나 모두 천망에 걸려 꼼짝못하는 존재들이다. 머지않아 썩어갈 죽음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나비야, 우리 모두 삶에서 죽음을 관조하듯, 죽음 쪽에서 삶을 직관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 또는 삶은 죽음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일렁이는 물결은 흰 모래 위에서 촘촘히 빛과 그림자의 그물을 깁는다. 그러나 온 바다를 덮고 있는 빛의 그물도 더 큰 그물의 그물코 하나에 불과하니 과연 나는 붙잡혔다 할 것인가, 자유롭다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