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왕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일로 수치스러움을 겪을 이유가 없도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왕의 경우 그 어떤 부끄러운 짓을 얼마나 많이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처럼 남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숨기고 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이는 서양 여러 나라에서도 결코 다를 바가 없었던바 (하긴 요 며칠 전 유럽 어느 섬나라의 왕세자께오서도 그러한 사실을 다시금 보여주신 바 있지만), 특히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크게 이름을 날리신 호색지왕(好色之王)이 계셨으니, 이 분이 바로 ‘프랑수아 1세’다.
훗날 ‘앙리 2세 국왕’과 ‘카트린느 드 메디치 왕비’로 불리시게 되는 두 부부의 아버지이고 시아버님이기도 한 이 국왕께서는 몸도 마음도 모두 힘이 넘치셔서 학문과 예술에 심취, 북유럽에서의 르네상스와 관련해서 적잖은 업적을 남기시기도 하셨으며, 또한 프랑스어가 라틴어를 대신하여 유럽의 공용어가 되도록 하는 큰일을 하시기도 하였다. 더욱이, 서유럽 대륙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스페인 본토 외에도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신대륙까지 장악하여 가히 해가지지 않던 나라의 군주였던 카를로스1세(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황제로서는 카를5세)와 자웅을 겨루기까지 하여 전쟁사 연구가들을 기쁘게 해주기도 하였는데…. 문제는 이로 인해 그는 1525년에 이탈리아의 ‘파비아’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서, 그야말로 1943년 2월 초하루의 독일 장군 파울루스 원수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처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뭐~, 아직 제네바협약이니 포로의 처우관련 국제법규정이니 하는 것이 없었던 아주 속편했던 시대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고귀하신 양반이 포로가 될 경우, 최대한 정중하게 대우하는 것이 당시 전쟁에서의 불문율(不文律)이었던지라, 파울루스 원수가 소련군 최고사령관에 의해 (그의 부하들은 걸어서 시베리아까지 가던 동안) 별장에 모셔졌듯이, 스페인의 국왕도 그를 어느 이름난 성관(城館)의 한 방에 모셔두었던 바이다.
그러나, 역시 그가 잡은 이는 이웃나라의 왕이 아니라 명백한 ‘포로’인지라, 이에 그에게 가히 격렬한 가혹행위를 가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이 서유럽에서 으뜸가는 스캔들의 제왕으로 하여금 여자란 여자는 그 누구도 (심지어 그 왕비까지도) 만나지 못하게끔 조치하신 일이었다.
당연히, 평상시 마음껏 하던 그 일을 못하시게 되었으니, 거즘 폐인이 되신 프랑수아 1세에 대한 소식에 온 프랑스가 (특히 프랑스의 여인들이) 비통해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던 바, 이에 스스로 후세 사관(史官)들에 의하여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하신 카를로스 1세는 친히 자신의 고귀한 포로를 감시중인 간수를 몰래 불러 지시하시길, “적당한 스페인 여인 한두 명과 다리를 놓아드려라”하였던 바, 이에 간수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스페인군 대위(이름이 ‘라라 이 로페즈 바라 디 핑토’였는데, 그의 이름이 어쩌다가 이렇듯 길게 되었을 지에 대해서는 독자제위가 알아서 생각해보실 지이다) 한명이 이를 자신의 출세길로 이용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19세기 중엽이 되지 않았기에, ‘민족’이니 ‘애국’이니 하는 것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본 사람이 그 누구도 없었던 시절. 이 스페인군 대위는 자신의 군주가 자신을 겨우 대위 자리에 앉혀놓은 것에 불만을 품었던 바, 만약 일이 잘되면 프랑스군대의 대장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당시 스페인에서 이름났던 귀부인 한분과 다리를 놓아드렸다. 하지만, 그 동안 돈 많고 나이든 귀족들만 만나왔던 그녀가 갓 30대에 들어선 데다 스캔들의 대왕으로 통했던 양반과 전투를 벌였으니, 이로서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데 큰 도움을 받는 결과만 낳았을 따름이었다.
이에 “짐은 심히 불만족스럽도다. 내 조국 프랑스의 여인들은 이렇지 않는데…”라는 답을 받아야 했던 대위는 비장의 카드로 자신의 아내를 다시금 프랑수아 1세와의 전투에 투입했었는데…, 아마도 그 남편 되는 작자가 “우리 부부의 흥망이 당신이 벌일 하룻밤의 전투에 달렸소! 부디 용전분투(勇戰奮鬪) 해주시오!”라고 1905년의 러시아 발트함대와의 전투 직전에 나왔던 일본 연합함대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지령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탓인가! 다음날이 되니 프랑수아 1세는 이 스페인군 대위에게 프랑스 귀족의 작위와 영지(領地)를 하사하시겠다면서 그를 그의 신하로 스카웃하시기로 결정하셨음을 통보하셨다.
이로서 프랑수아 1세는 그의 스캔들 경력에 또 하나의 이력을 추가하셨고, 그 대위 부부는 이후 프랑스의 귀족과 귀부인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던데….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다음 해에 이르러, 자신의 두 왕자들을 ‘보증인 : 인질’로 잡아두도록 허가하는 조건으로 프랑스로 돌아온 프랑수아 1세는 역시 ‘제 버릇 개에게도 못 준다’라는… 지구 반대쪽에 있는 어느 나라의 속담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시키기 위해, 당시 파리에서 으뜸가는 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있었던 바, 수도 파리의 ‘샹주’라는 이름의 다리 일대에 있는 수공업 공장 지대에 위치한 금은방의 아가씨가 예쁘다는 소문이 있어, 온 동네 청년들이 그녀에게 수천 금을 들고 다가가 기웃기웃 거리다 모조리 딱지를 맡았더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몸소 만나보리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를 만나 그녀에 대한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고백하니, 이에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길, “전하. 저는 내일이면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옵니다. 헌데, 그자는 저의 아버지에게 멋진 집 한 채를 드리는 조건으로 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사온데, 저는 그자가 너무나도 싫사옵나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 당시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었던 어느 나라에서였더라면, 왕이 그자를 의금부(義禁府)에 하옥시킬 수도 있었겠으나, 하필이면 프랑수아 1세가 왕으로 있던 나라는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지어다’라는 계율과 함께 그 계율을 어기고 남의 아내를 탐하였던 ‘골리앗 킬러’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를 어린 시절부터 학습 받는 그러한 나라였던지라. 이에 그가 전전긍긍 하던 차, 군주의 이러한 심난한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말하길, “전하. 만약 전하께오서 차고 계신 보검을 제게 빌려주신다면, 제가 전하를 대신하여 그자를 쫓아버리겠나이다!”라고 말하였던 바, 이에 프랑수아 1세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보검을 하사하셨던 바이다.
이에 그녀는 첫날밤 말 그대로 (그녀의 아버님께 드린 집 한 채에 대한 대가로) 그녀를 범하려한 ‘남편’을 칼로 쫓아낸 다음,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신방을 탈출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왕의 시종과 접선하는데 성공, 드디어 프랑수아 1세의 여러 애첩들 중 하나가 되는데 성공하였던 바, 후세 사람들은 그녀를 ‘페로니에르 부인’(Maddam Feronniere)라고 부른다.
물론, 그 페로니에르 부인의 남편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보았을 리는 없었을 것인데….
이 당시, 치사하고 음험하며 돈을 밝히고 잔꾀가 많으며 거짓말도 잘하기로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변호사들보다도 더 뛰어났던 (프랑수아 1세의 며느리가 대비마마로 있던 시절에 벌어진 그 유명한 ‘앙부아즈 사건’과 관련해서 이름을 날린 변호사 ‘아브넬’이 이자의 후계자였다는… 믿거나 말거나 할 이야기도 전해진다만… ㅡㅡ;) 그 남편이라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심지어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아서라도) 자신의 아내를 빼앗아간 (그의 아내와 달리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만…) 국왕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며 살아왔을 그가 (비록 스페인 국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적은 있었지만) 그가 공부한 기간만큼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던 국왕과 그의 호위병들을 상대로 격투하여 암살을 할 수도 없는 이상,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았던 바…. 그것은 바로 ‘전염병을 이용하여 국왕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중세를 지나 근세로 넘어가던 르네상스기에 페스트와 함께 (프랑스를 비롯하여) 온 유럽을 떨게 한 또 하나의 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매독’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다녀오면서 신대륙의 여러 산물들과 함께 (그가 절대 의도하지 않았을 것임에도) 들어온 매독균은 성병(性病)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균으로서 오늘날에는 페니실린으로 치료가 가능하기에 별로 크게 문제가 될 병은 아니지만, 이 당시에는 AIDS만큼이나 무서운 병이었으니…. 이는 아마도 신대륙 원주민 여인들과 성관계를 가졌던 콜럼버스의 부하선원들이 그 균에 감염 된 상태로 스페인에 돌아왔고, 그렇게 해서 고국의 여자들과도 관계를 가진 그들에 의해 각각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도 퍼지기 시작했던 바! 이로 인해 한동안 온 유럽의 남녀들이 부정한 행위를 가급적 자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뭐, 그 정도로 센 균이지만, 그러면서도 사람의 몸속에 잠복하는 기간은 무려 십 여 년 세월에 더해서 그 후 잠복해있다 깨어나면 사람을 완전히 갉아먹게 되는 바, 이에 뇌를 포함한 몸 속 곳곳이 갉아 먹힌 희생자는 말 그대로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다가 저승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즉, 그 변호사는 자신의 아내를 프랑수아 1세에게 빼앗긴 것에 대한 앙갚음의 일환으로 자신도 죽고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자기 아내도 죽이고 또한 프랑수아 1세도 죽이기로 결심했던 바, 마침 ‘잘 생기고 돈 많은 귀족이라면 그 누구와도 관계를 가진다’는 소문이 퍼진 그러면서도 여전히 왕의 애첩이었던 (바로 이 점이 비슷한 시기의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그 위치만큼이나 정반대인 것 중 하나였는데… ㅡㅡ) 자기 아내를 어느 다른 귀족과 어두울 적에 몸을 바꿔치기 하도록 도와주는 조건으로 그녀의 시녀를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매수한 다음, 매독균에 감염 된 몸으로 자신의 아내와 관계를 가졌고, 그 결과 그녀 또한 매독균에 감염된 상태에서 프랑수아 1세와 관계를 가졌던 바!
뭐, 앞서도 말했듯이 다른 독과 달라서 꽤 기나긴 잠복기가 있는 이 균에 감염된 프랑수아 1세는 그 후에도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하다가, 결국 쉰 다섯 살(진시황제보다 5년 더 살았던 셈)이 되어 잠복기에서 벗어나 활동을 시작한 매독균에 의해 병상에 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의 AIDS가 그렇듯이) 그 누구도 가급적 가까이 하지 않는 무서운 질병에 걸린 이 딱한 양반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있을 때, 그의 며느리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 왕세자비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가장 대표적인 후원자였기에 그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화가였던 티치아노가 그린 ‘아담과 하와(이브)’의 그림을 가지고 있었던 바, 이에 친정에 부탁하여 그 그림을 받아다 시아버님의 방에 걸어 두어 감상하실 수 있게 해드렸다.

말 그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태초의 두 남녀’의 그림인지라, 그렇기에 한때 스캔들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셨고 또한 그렇기에 그런 지경이 이르게 되셨던 프랑수아 1세의 마음에 너무나도 들만한 그림이었던 바, 이에 침대에 누워 그 그림을 감상하시며 ‘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시던 중, 마침 병상에 누워계시던 할아버지를 뵙기 위하여 어머니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 왕세자비와 함께 들어온 (당시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던) ‘프랑수아 왕자’(후일 프랑수아 2세. ‘앙부아즈의 음모’ 및 ‘바스톨로뮤의 대학살’ 등의 프랑스에서의 종교전쟁 관련 굵직한 사건들과 연관되며, 대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와 마음이 통했다고 함)와 ‘마르고트 공주’가 할아버지께서 감상하시던 그 그림을 보았던 바!
이에 어린 왕자가 그의 누이동생인 어린 공주에게 묻기를, “야, 재네들 중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냐?”하니, 어린 공주 대답하시기를 “오빤 그것도 모르나! 아, 옷을 입혀보면 될 거 아이가!”(말 그대로,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무슨 옷을 입었는가로 구분된다는 이야기인데… *^^;)라고 말하니…, 이에 프랑수아 1세가 마지막으로 크게 웃으셨다는데….
과연 그는 그의 어린 손녀의 말에서 무엇을 느끼셨기에 그렇게 크게 웃으셨는지 또한 미스터리 하니, 아마도 이 미스터리는 독자제군들을 위해 남겨두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