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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金燾鉉 (1852 ~ 1914) 】 "선성의진 중군장, 강릉의진 선봉장”
김도현은 1852년 7월 14일 경상북도 영양군 청초면 소청리에서 부친 김성하(金性河) 모친 한양 조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김녕 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의 23세손이고,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사육신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이며, 선조 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김응상(金應祥)의 11세손이다. 그의 가문은 정 3품 벼슬을 지낸 김응상 이후로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학을 중시하는 사대부 집안의 전통을 계속 이어갔으며, 부친 김성하에 이르러 통사랑(通仕郎)으로 소경원(昭慶園) 참봉을 지냈고 영양군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인 한양 조씨 조언호(趙彦豪)의 여식과 결혼하면서 영양군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김도현은 유년기에 조부 김하술(金夏述)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부 김하술은 생가 근처에 괴암서당(槐巖書堂)을 열었고, 김도현은 이곳에서 글을 배웠다. 김도현은 후에 <괴암서당>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조부의 뜻을 기렸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도 의병을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 1895년 음력 11월 30일 종제 감한현이 영양읍에서 돌아와 "각 고을의 수령들이 단발령에 의해 머리를 강제로 깎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의병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그는 1895년 음력 12월 1일 안동으로 가서 유원엽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을 만나 시국에 대해 논의한 뒤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이후 12월 3일 이웃 마을인 입암면 신사리에 살고 있던 친구 권한모를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했다. 권한모는 급박한 형세를 들어 어려운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뜻을 밝혔지만 김도현이 뜻을 꺾지 않자 마침내 받아들였다.
12월 9일 영양읍에서 통문을 띄워 의병들을 불러모은 그는 고을 선비들과 한 자리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12월 11일, 영양 일대의 유생들이 향회를 열었고, 김도현과 오석인, 조병희, 조영기 등 유생 4명이 선발되어 안동과 예안 일대의 정황을 둘러본 후 의병을 일으키기로 최종 합의했다. 12월 14일 김도현과 조영기가 안동으로 떠나 권세연과 안동의진을 둘러봤다. 김도현은 진영을 살펴보고는 탄식했다.
다음날 이만도의 선성의진을 둘러본 그는 다음과 같이 호평했다.
12월 16일, 김도현은 조영기와 함께 영양으로 돌아오면서 다음날 열리는 대향회를 기해 의병진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2월 15일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안동의진이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도현은 곧 격고문을 돌리고 창의할 뜻을 굳혔지만 부친의 만류로 중단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영양 일대 유생들을 만나고 장정들을 규합하는 등 창의를 모색했다.
1896년 정월 초하루, 김도현은 안동의진의 소모장 유시연의 권고를 받아들여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벽산선생창의전말>에서 자신이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렇게 해서 1896년 1월 6일에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은 조직을 정비한 뒤 곧이어 봉화로 들어갔다. 이튿날 봉화에 도착한 그는 봉성을 점령하고 군수 안모(安某)로부터 총과 탄환을 지원받았다. 그는 봉성에서 의병을 끌어모은 뒤 1월 7일 영주로 진군해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영주에서도 의병을 모으고자 했지만 현지 유생들이 이미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있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월 8일 입석, 온혜, 서고서재 등지에서 각기 하룻밤을 지냈고, 1월 11일 예안으로 회진한 뒤 이틀 밤은 예안에서 머물고 1월 13일 안동부로 출진했다.
1월 15일 안동부에 도착한 김도현은 영주의진이 안기에 진을 치고 있고 안동의진이 향교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두 의진에게 합칠 것을 청했지만 거부당했으며 그의 문벌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김도현은 독학으로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뚜렷한 학통이나 학맥을 가지지 못해서 이런 취급을 당한 것이다. 이후 안동을 떠난 그는 영양, 진보, 청송 등지를 돌며 뜻을 함께 할 의진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시 의성, 영덕, 영해 등지를 전전하다가 울령을 넘어 1월 20일 청기로 돌아왔다. 그는 청기에서 하루를 쉰 후 1월 22일 소청에서 예안으로 가는 갈령을 넘어 부포서재에서 소를 잡아 군사를 먹였다. 그리고 1월 23일 예안으로 들어간 뒤 선성의진에 참여해 2월 13일 중군을 맡았다.
1896년 2월 16일, 김도현은 선성의진의 중군장으로서 태봉전투에 참여했지만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그와 함께 퇴각한 장졸은 15~16명 뿐이었다. 2월 18일 예안에 도착한 그는 중군장을 사퇴하기 위해 사면장을 올렸지만, 다음날 안동의진에서 구원을 요청해오자 군사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안동에 도착했을 때, 안동부는 이미 일본군이 불을 지른 뒤였다. 이에 예안으로 회군한 후 예안의 성을 고쳐 쌓고 방어책을 세우는 등 진용을 정비했다. 그러면서도 사면장을 3번이나 올렸고, 결국 2월 22일 대장 이중린으로부터 해임령을 받고 사직했다.
김도현은 사직 후 수기를 거두어 돌려보내고 상청리로 돌아왔다. 이후 안동도총 유난영의 초청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진보의진의 대장 허훈이 초청을 해오자 "어찌 이를 물리치고 나가지 않을 수 있으랴"하고 혼자서 말을 몰아 진보유진소로 찾아갔다. 그는 허훈과 논의를 한 끝에 안동의진의 군사 일부를 나눠서 얻어오기로 했다. 그는 군사 4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가서 안동의진의 도총 유난영을 만나 그의 부장이 된 후 김도화 대장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이었던 군사를 얻어오지는 못했다. 이때 관동창의장 민용호가 강릉에서 소모장 이호성을 보내 그를 초청했다. 이호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김도현은 <창의전말>에서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으로 임명하고 군사들에게 당포를 주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고, 또 돈을 각각 2냥씩 주었다. 이후 김도현은 4월 10일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이 우세한 관군에 밀려 구산역으로 퇴각했고, 그의 아우 김경옥과 김동현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후 민용호의 관동의진은 진영을 재정비하고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현산성에서 다시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또 패하고 정선, 임계 방면으로 후퇴했다. 거듭된 패전으로 전투력이 약화된 데다 장마철이 되면서 의병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민용호와 김도현은 삼척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1896년 4월 12일, 강릉의진은 백복령을 넘어 삼척으로 이동하여 삼척 의병대와 합세했다. 민용호는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울릉도시찰사 염석하를 죽이고 서울에서 파견된 관군에 맞설 수 있도록 진용을 갖췄다. 이후 4월 19일에 삼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인다. 민용호는 삼면에 의병을 배치해뒀다가 관군이 접근해오면 포위해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선봉장 김도현과 수성장 민동식은 성안에 매복하고, 유진장 김헌경은 죽서루 동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민용호 자신은 중군 최중봉, 강우서, 이영찬, 전치운, 신무섭 등과 함께 삼척 뒾녀의 삼봉산 위에 참호를 파서 미리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관군을 기다렸다.
관군이 삼척에 들어오자, 강릉의진은 일시에 포를 쏘면서 좌우에서 협공했다. 이날 아침 5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5시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의병은 처음에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기습공격을 가해 주도권을 잡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탄약이 떨어지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이때 변복을 한 관군이 성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고, 전세는 더욱 급격히 기울어졌다. 결국 민용호는 울진의 오십천변을오 퇴각하고 말았다. 이날 관군은 "강릉으로 생환한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의병도 큰 피해를 입었다. 김도현은 성내에서 적과 격렬하게 싸웠지만 탄약이 떨어지자 할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삼척 전투에서 패한 뒤, 김도현은 민용호와 결별하고 울진의 십이령과 일월산을 넘어 영양에 도착했다. 그는 다시 친척과 면민들을 모아 읍내로 들어가 진영을 세우고 재기를 도모했다. 그가 처음 영양에 도착했을 때 그를 따라온 군사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이 10여 명을 불러 모아서 괴암서재에서 재차 창의하고, 소청의 검각산성에 본진을 두고 면내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을 모아 진영을 편성했다. 이후 동생 김경옥, 김동현을 청송 덕천에 보내 청송의진의 거의를 촉구했으며, 자신도 각처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집했다.
5월 6일 관군이 소청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급히 소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본진이 관군에게 약탈된 뒤였다. 이에 검각산성의 성벽을 수리하고 진영을 재편성했으며, 이후 검각산성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이끄는 의병진의 무기는 화승총으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사격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정거리도 30보를 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무기 수준이 월등한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유리한 지점에서 기습 공격을 했음에도 무기의 열세로 인해 패퇴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거듭된 패배에도 포기하지 않고 영양, 예안 등지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지속했다. 6월 2일에 수비를 거쳐 옥령을 넘고 외선미, 내선미 등지를 전전하며 군수품을 거뒀으며, 관동의진, 예안의진 등과 협력했다. 그러던 중 김하락이 이끄는 의병대가 영덕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김하락이 강물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김하락 의병대에 속했던 잔여 병사들을 수습한 후 영양으로 회군했다. 그는 이들과 힘을 합쳐 영양읍에 있는 관군을 사로잡고자 했지만, 잔여 의병들은 이를 거부하고 청송 방면으로 갔다. 이에 김도현도 석보, 창암, 중노곡, 신기, 감곡, 중평 등지를 거쳐 청송의 상덕천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1896년 6월 10일, 김도현은 덕천에서 마평을 거쳐 대전으로 향하던 중 일본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으로 회군했다.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집하던 그는 7월 14일 대천, 송점 등지를 거쳐 영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안동의진과 이천의진으로부터 연합하자는 요청을 받은 그는 안동의진과 합세하기로 결정하고 안동도총 김하림, 선봉장 유시연 등을 만나 몇차례의 논의를 거쳐 안동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관군의 추격을 받아 실행하지 못했고, 그는 관군의 추격을 피해 산지를 전전해야 했다.
8월 말, 김도현은 관군 병대장 김장옥으로부터 의병 해산을 권유하는 서신을 받았다. 이에 그는 <답병대장>을 보내 의병 활동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1896년 8월 말, 김도현은 일월산 조록동으로 들어가 6일을 머물며 재기를 모색하고 영남 각처로 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은 장기간의 전투로 피로가 쌓인 데다 관군의 토벌 작전과 해산 종용으로 동요했다. 결국 각처의 의병진이 해산하기 시작했다. 선성의진은 8월 14일 향회를 열어 의병을 해산했고, 안동의진도 8월 말부터 해산을 시작했다. 김도현도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총 113자루를 갈령의 인가에 은닉하게 한 뒤 해산을 준비하면서 영양 지역 각처를 전전하다 일월산으로 들어가 양수정에 머물렀다. 9월 초 선유어사의 글을 받고 회신한 뒤, 9월 9윌 따르던 포졸 10여 명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의병진을 해산했다. 그는 을미의병 때 마지막으로 의병을 해산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1910년 12월 22일 석양에 영해 상대산 관어대에 도착한 그는 산수암에 높이 올라가서 유시를 짓고 장손 여래와 삼종제 태현에게 큰 소리로 읽게 했다.
그 직후, 김도현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향년 63세. 자손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날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앞 산수암에는 그를 기리는 '도해단'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도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