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1711년에 축성한 북한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산성은 중흥산성(中興山城, 혹은 重興山城)의 옛 터에 건설된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산성을 알기 전에 중흥산성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1596년 선조의 명으로 받아 삼각산에 폐허가 된 성으로 남아있던 중흥산성의 현황을 파악하고 보고한 이덕형의 ‘중흥산성(中興山城) 간심서계(看審書啟)’에 다음 기록이 있습니다.
“중흥동에 서북쪽에 외성이 있고, 성자는 끝봉우리의 허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시내의 어구 언덕에 이르러 끝났고, 남쪽 외성은 시내의 암벽에서 시작되어 위로 서남쪽 최고봉에 이르러 끝났으며, 성에 돌문의 옛 터가 있는데, 이는 이른바 서문으로서 중간에 한 가닥 길이 있어 곧바로 중흥사에 이르게 된다.”
“길은 산비탈로 나 있는데, 계곡은 굴곡이 졌으며 길가에 운암사의 옛 터(현 노적사?)가 있다. 오솔길로 나뉘어 벽하동으로 들어가는데, 벽하동은 중흥사가 있는 산 뒤에 있고, 길은 백운봉에 이르러 끊어진다. 내성으로 들어가니 성에는 돌문이 있는데, 절과 거리는 수백 보(步) 가량 된다.”
이 기록을 통해서 중흥산성은 2중성으로 되어 있고, 서문에 해당하는 돌문이 있으며, 노적봉에서 증취봉까지 외성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성의 서문의 지금의 중성문 자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흥산성은 지금의 중성문 자리와 북한산성 지구의 주능선 쪽을 중시하여 성벽을 상대적으로 견고하게 축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덕형이 답사할 때 중흥산성은 이미 폐성이 되어 전체 성벽의 70~80%가 무너진 상황이었습니다.
내성의 석문은 중흥사에서 백보 거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볼 때, 부왕사를 거쳐 부암동암문으로 가는 갈림길 부분에 존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에는 우왕 13년(1387년) 2월에 한양에 산성을 쌓는 문제와 전함을 수리하는 문제를 논한 후, 중흥산성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도록 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다음해 2월에는 우왕과 최영이 요동을 공격할 것을 논의하고, 경성의 방리군(坊里軍)을 일으켜 한양의 중흥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3월에 우왕이 세자와 왕비들을 한양의 산성으로 옮겼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4월에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실행한 사실을 감안하면 축성 기간은 2개월 미만일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수리했다는 기록을 통해 중흥산성은 우왕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비고』 <한성부>조에는 “중흥동중성은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척(약 2.8㎞)이며, 내성, 외성, 석문, 석비(石扉)가 있는데, 민간에서 전해 오는 말이 “백제 중엽에 여기에 도읍하였는데, 석문이 곧 그대 중문이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폐성이 되었다. 노적봉이 그 성 안에 있다. 산성의 수구는 낮고 넓으므로 석성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중흥산성의 길이가 2.8㎞라는 기록은 북한산성의 길이 11.6㎞에 비하면 매우 짧습니다. 북한산성 축성 당시 온전하게 축성한 높게 축성한 곳은 36%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이 기록은 실제 성벽을 축성한 구간만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노적봉 상부의 백운봉, 만경봉, 용암봉 등 구간에는 성벽이 제대로 축성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영루(山映樓) 좌우편에 중흥동고성 유적이 있다고 했으며, 최영 장군이 왜적을 피하고자 성을 수리했다고 합니다. 최영이 이곳에 온 것과 관련해 중흥사 서쪽 봉우리인 장군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이는 설화에 가깝습니다.
『원사(元史)』에 1253년 몽골군이 고려를 정벌할 때에 삼각산, 양근, 천룡 등을 함락했다고 했습니다. 『해동역사』 「속편」을 저술한 한치윤의 조카 한진서는 이때 삼각산의 성을 중흥산성으로 보았습니다. 『고려사』에는 1253년 몽골군의 5차 침입 시 삼각산성 점령 기사는 없지만, 당시 몽골군이 서해도를 지나, 내륙으로 종단해 철원, 춘천 등을 공략한 것으로 볼 때, 삼각산성을 공략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중흥산성의 축성 연대는 1253년 이전에 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조실록』 29년(1596년) 1월 28일자에는 “삼각산 밑에 중흥동이 있는데, 고려 현종이 피난한 곳이다.”고 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1010년 거란 2차 침입을 당하자, 개경에서 출발해 적성(積城)-창화현(昌化縣)-광주를 거쳐 나주까지 피신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창화현은 양주의 속현으로, 서울 도봉구, 경기도 의정부 등으로 파악됩니다. 『고려사』 <지채문> 열전에는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새벽에 두 왕후를 북문으로 나가게 하고, 현종은 적을 피해 말을 타고 샛길로 도봉사(道峰寺)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도봉사는 2014년 도봉산에 자리한 도봉서원 발굴조사 과정에서 도봉서원이 도봉사 터에 세워졌음이 밝혀졌습니다. 도봉사 남쪽 우이령을 경계로 삼각산이 있고, 삼각산 성곽은 중흥산성이 유일합니다. 따라서 현종이 하룻밤을 묵었던 곳에서 북문을 나와 도봉사로 갔다고 한다면, 현종이 머문 곳은 중흥산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북문은 현재의 용암문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용암문을 나와 우이천을 따라 도봉계곡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흥산성은 적어도 1010년 이전에 축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백제 시대에 북한산성이 중흥산성이라는 것은 현재로서는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2012년~2013년 북한산성 정밀지표조사에서 중흥사 뒤쪽 능선인 장군봉과 등안봉을 잇는 능선에서 중흥산성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성벽은 다듬지 않은 막돌로 쌓았고, 하단부는 비교적 장방현 석재를 놓아 수평줄눈을 맞추었으나, 위로 가면서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쐐기돌을 사용한 허튼층 쌓기 수법이 확인되었습니다. 빈틈에는 크기 10㎝ 내외의 쐐기돌을 사용했으며, 잔존 성벽 최대 높이는 1.25m, 6~7단이며, 성벽 기단부가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실제 성벽은 더 높게 남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벽은 자연능선을 따라 내외협축으로 쌓았는데, 성돌의 크기는 북한산성과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이러한 축조 방식은 신라, 조선의 성벽과는 차이가 나며, 고려 때 처츰 축조된 양평 함왕성의 성벽구조와 비슷합니다.
2014년 실시한 북한산성 성벽 발굴조사에서 증취봉 바로 아래에서 고려시대 성벽이 발견되었습니다. 부왕동암문 구간에서 높이 1.2m, 폭 4.1m 정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즉 북한산성 성벽과 달리 규격화된 성돌을 사용하지 않고, 쐐기돌을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했으며, 북한산성 성벽과 축선을 달리한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출토유물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기와의 형식과 편년으로 볼 때 고려시대 전기에 성벽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북장대지가 있는 기린봉과 노적봉 사이의 안장부(훈련도감 유영지 서쪽 구릉)에서도 고려시대 성벽이 확인되었습니다. 또 보국문과 석가봉 치성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중흥산성 성문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아, 중성문이 서문, 용암문이 동문(또는 북문), 보국문이 동남문, 부왕동암문에 남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가사당암문에도 중흥산성 부속시설로 석문을 만들고 돌문짝을 달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 지도는 중흥산성의 범위를 김성태 선생이 추정한 것입니다. (김성태, <삼각산 중흥산성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고찰>, [서울학연구 ] 95집, 2017년, 234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