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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만에 총제 김정준(金廷儁) 공의 생애를 조명하다
1. 머리말 나주김씨 17세인 총제공 김정준(金廷儁)은 새 왕조 조선 개국초인 태조대 부터 출사1)(出仕)하여 정종, 태종을 거쳐 세종대왕대 까지 4대에 걸쳐 문무(文武) 내외직(內外職)을 두루 거치면서 1406년에 공신으로 책훈2)(策勳) 되었고, 1433년 졸(卒)하자 경기 포천에 예장3)(禮葬)을 받음으로서, 새시대 조선에서 우리나주 김문의 일족이 경화사족4)(京華士族)으로 위상을 세우고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훌륭한 선조이다. 뿐만 아니라 포천 천주산(天柱山·옛 기을산) 묘역에 모셔져 있는 공의 묘소(墓所)는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는 우리 나주김문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묘소이다. 공의 선계는 신라 마지막 56대 경순대왕의 계자(季子,마지막왕자) 황왕자(湟王子)의 장남 김운발(金雲發)공이 고려 초에 나주김씨 관조(貫祖)인 나주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책봉된 이래 고려조에서 대를 이어 조정의 요직인 문하시중, 평장사, 대제학(대학사),대사성, 상서(판서) 대장군 등 문무 겸비한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로 그 명성을 드날렸다. 조(祖)는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등과 창수5)(唱酬)하며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덕망이 높고 학문이 깊어 성균관 대사성, 보문각 대제학 등 청요직6)(淸要職)을 역임하였던 월당(月塘) 대경(臺卿) 인데, 문충(文忠)으로 시호7)(諡號)를 받으셨고 문집인 ‘월당집’을 남기셨다는데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부친은 충목왕 3년(1347)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지내시고 고려 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한 가구(可久)이며, 모친 안동 권씨(봉상대부 사재부령 승도의 따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시었다. 부친에 대한 기록은 나주김씨 세보와 고려 충렬록 등의 기록 이외에 아직 특별히 발견된 것은 없지만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왕조가 바뀌는 대변혁의 시기에 고려의 권문세가로 예의판서에 봉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적인 불사이군8)(不事二君)의 이념과 고려 조정에 대한 충성과 의리, 전통적인 충효에 대한 대의와 명분 때문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한 일부 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가 주도한 역성혁명9)(易姓革命)에 합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이 태어나 성장하고 출사할 당시 중원은 몽골족이 건설한 세계 최대 제국이었던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漢族)의 명나라가 발흥하여 동북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대격변의 시기인데다, 삼한10)(三韓)땅도 고려가 국운이 다하여 쇠망의 길을 걷다가 이성계(李成桂)가 주도한 역성혁명이 성공하여 조선을 개창하고 새 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격랑(激浪)의 시기였다. 총제 김정준공은 새 왕조 조선 개창에 힘을 보탠 개국공신도 아니었고, 제 1⦁2 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11)(定社功臣), 좌명공신12)(佐命功臣)도 아니지만 1402년에 일어난 동북면(東北面)의 난(亂)13)에서 공을 세워 공신에 책훈되어 조선조에 들어서도 우리 문중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공고히 확립하므로써 우리 문중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공고하게 한 훌륭한 선조님이다.
공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하다
2. 조선왕조실록(이하실록)에 기록된 김정준공의 삶과 관력(官歷)
총제 김정준공은 조선조 개창 당시인 태조 때부터 출사하여 실록에 총제공에 대한 기록이 총 26건이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태조 때 2건, 태종 때 17건, 세종 때 7건 등이다. 최초의 기록은 1399년(태조 7. 음 9. 1)으로 태조가 자식 간 골육상쟁인 제1차 왕자의 난을 겪으며 지극히 사랑했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세자 방석과 7왕자 방번이 참살 당하고 정도전 등 총신들이 도륙 당하는 등의 환란을 겪으며 극도의 분노와 상실감 등으로 심신이 쇠약해져 환후가 깊어 환관 조순(曺恂)을 통해 세자(정종)와 여러 왕자에게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영자14)(影子)를 그려서 사모하게 되는데 내가 비록 쇠약하나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너희들은 다행한 편이다. 지금 병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수정포도를 먹고자 한다.’ 라는 교지를 내렸다. 세자와 왕자들이 소리 높여 울면서 즉시 상림원사(上林園史) 한간(韓幹)에게 명하여 유후사15)(留後司)와 기내좌도16)(畿內左道)에 널리 구하라고 명하였는데 경력(經歷 종4품) 김정준(金廷雋)이 산포도가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것을 한 상자 가지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에 김정준을 승진시켜 전농판사(典農判事, 정3품)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농판사는 전농시(典農寺)의 최고 우두머리 장관(정3품)인데 농본주의를 국가의 건국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에서는 매우 비중이 높은 자리이다. 전농시는 고려조에 이어 조선 초기에 나라의 제사에 사용할 곡식과 적전17)(籍田)을 관장하는 관아 이다. 그 후 공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전농판사가 된 후 3년이 지난 태종 2년(1402년)에 다시 등장한다. “태상왕(태조 이성계)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다.”고 전한 회양부사에게 말 1필을 내주었다. 정준(廷雋)이 와서 고하기를 “태상왕의 거가(車駕)가 철령을 지났습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실록의 기록은 태상왕이 동북면의 난(조사의의 난)을 일으킨 조사의와 강현(신덕왕후 강비의 조카) 등과 교감하고 양해하고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지 않을까 조정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의주시 하고 있었는데, 태상왕이 철령을 넘어 동북면으로 향하는 것을 당시 철령 남쪽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인 회양도호부의 회양부사로 봉직하고 있던 공께서 알게 되자마자 직접 말을 타고 밤새 달려와 조정에 고함으로서 조정에서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여 동북면의 난이 조속히 평정되어 안정을 찾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로 인해 공은 1406년에 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면 위대한 인류문화 기록유산인 조선실록에 대하여 잠시 개관(槪觀)해 보겠다. 실록은 황제나 국왕 같은 제왕의 재위동안 일어나거나 보고되는 일들 중 중요한 내용을 연원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로서 일종의 연대기에 해당 한다. 실록의 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이지만 실록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6세기 중엽 중국의 양무제때 처음이며, 이 후 당⦁송을 거치면서 체재가 정비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사관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 하였으나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도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 하였는데 실록의 편찬은 임금이 붕어(崩御)한 후 춘추관에 실록편수청(實錄編修廳)을 설치하고 춘추관 관사인 영의정이나 추추관 감사인 좌⦁우의정을 총재관, 대제학 및 문장이 뛰어난 사람을 수찬관으로 임명하고 실록찬수범례(實錄纂修凡例)를 제정하고 실록을 편찬 하는데 실록의 편찬 자료인 사초(史草)는 시정기18)(時政記), 승정원일기, 의정부일기, (을묘왜변 후에는 비변사등록), 일성록, 왕과 왕족의 동정 등을 참고 초초(1차 원고), 중초(2차 원고), 정초(최종 원고) 과정을 거쳐 실록으로 확정하고 5부를 간행하여 1부는 춘추관에 4부는 병화를 피하고 안정적 보관을 위해 깊은 산중과 섬을 택해 사고를 짖고 보관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원일 순에 의하여 편년체로 기술한 사서인데, 총 1838권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다. 이 방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사 연구의 근본 사료가 될 뿐아니라 정치, 경제, 법률, 군사, 외교, 산업, 교통, 통신, 문학, 미술, 공예, 종교, 기타 부분을 연구하는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자료이며, 또한 중국, 일본, 유구, 만주 등 주변 국가와의 교섭기록이 많이 있어 동양사 연구에도 불가결한 사료로 평가된다. 그래서 조선실록은 그 가치의 중대함으로 대한민국 ‘국보 151호’로 지정되었음은 물론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 인류 기록문화유산으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조선실록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국고전번역원이 주관 한글로 번역되어 한글판이 출판되어 있다. 이러한 위대한 문화유산인 조선실록에 총제공의 기록이 26차례 등장하는 것은 총제공의 조선 초기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 봉공한 업적과 위상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총제공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계속하여 살펴보면 ∘ 태종 4년(1404년)에 ‘상호군 김정준에게 사신응대를 준비시키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상호군은 조선시대 정3품으로 2군5위의 최고 지휘관 이름인데 상호군 김정준과 호군 조가물 등을 동북면에 보내어 사신에게 응대할 사의를 일렀으니 왕가인이 장차 이르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총제공은 조정을 대신해 사신을 응대하는 외교적 수완과 능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 태종 6년(1406)의 기록에는 ‘동북면을 평정한 공로에 따라 전 광주목사(廣州牧使) 김정준 등은 마음을 다해 의(義)에 몸 바쳐 미리 준비하여 안녕을 도모 하였고... 하여 3등이 될만하니 전지 30결과 노비 3구(口)를 하사 한다’ 하고 공신에 책훈한다라고 기록 하였으며 ∘ 태종 9년(1409년) 김정준으로 제주도안무사(濟州都按撫使)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 태종 11년(1411년) 제주성(濟州城)을 수축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도안무사 겸 판목사(都按撫使 兼 判牧使)인 공께서 제주성 수축의 필요성을 조정에 보고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태종11년 7월 말의 양축(養畜)에 관한 사의(事宜)를 올려 그대로 채택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 태종 12년(1412년)의 제주도안무사(濟州都按撫使)에서 해임돼 올 때의 탄핵 기록이 있다
※ 제주목사로 봉직할 때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제주목사”, “제주사인명사전“, ”제주사연표”,“탐라지”,“선생안(제주,정의,대정)”,“제주도지”등의 사료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별도의 난을 만들어 기술고자 합니다 ※
∘ 태종 13년(1413년)에 호조참의 재임 시 제주에 경차관19)으로 파견 되어 양마(良馬) 100필을 추쇄20)하여 온 기록이 있으며 ∘ 태종 14년(141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 되었고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진도목장 문제로 조정과 논의 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고, 태종이 횡천(橫川)21)을 순행할 때 경력을 보내어 말 1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해에 죄수의 계본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이 되고, 외방으로 유배되는 고초를 겪게 되었으나 곧바로 유배형에서 감형되어 경외종편22)을 하게 되었다. 경외종편은 유배된 죄인을 적소에서 풀어 주어 서울 밖의 어디에서나 뜻대로 살게 하는 것인데 실록의 내용만 봐서는 무슨 사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유배된 혐의가 많이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 1415년(태종 15년)의 또 다른 실록 기록에는 총제공께서 해주목사에 제수(除授) 되었다가 파직된 기록도 보인다. 그러다가 1418년 (태종 18년)에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 받은 기록이 보인다. ∘ 1419(세종 1년) 의주목사에 임명 되었으며, 같은 해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겸 판 길주 목사에 임명 되었다. 1420(세종 2년)에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있으면서 지방특산물을 진상한 기록도 있다. ∘ 1421(세종 3년) 상왕의 생일을 기념하며 고신23)(告身)을 들려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 1422(세종 4년)에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 1426(세종 8년) 전주부윤 김정준 등이 늙고 혼매하여 직무수행에 어려움이 있으니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대사헌 권도의 상소가 있어 해임 되었다. ∘ 1433(세종 15년) ‘총제 김정준이 졸(卒)하니 부물(賻物)을 보내서 조상 하였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공의 조선실록에서의 기록은 끝을 맺는다. 이와 같이 공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태조, 태종, 세종대에 걸쳐 조선 초기에 조정의 중신으로 관찰사, 목사, 부윤 등 목민관으로 평생을 봉직한 기록이 26번에 이르고 공신으로 책훈된 기록이 있음은 가문의 영광이라 하겠다. 공의 관력을 요약하면 경력, 전농판사, 회양부사, 상호군, 광주목사, 제주목사, 호조참의, 경차관, 전라도관찰사, 해주목사, 함길도관찰사, 의주목사, 절제사, 전주부윤 등 조정과 지방을 넘나들며 문무 내외직을 역임하시었다. 공이 봉직한 경력, 전농판사, 부사, 목사, 호조참의, 관찰사, 부윤 등의 벼슬은 주로 문관이 맡는 자리이고, 상호군과 절제사의 자리는 무관으로 보임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공은 명실공히 문무겸전한 능력이 탁월한 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벼슬길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어렵고 험난한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은 실록의 내용만을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외방유배24)를 당하기도 하였고 경외종편도 당하기도 하였으며 탄핵과 파직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런 모든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마지막 벼슬길은 조선왕조 주인인 전주이씨 발상지이고 성역인 전주에서 부윤을 역임 하였고 전주부윤을 끝내신 후 8년 후에 졸(卒)했는데 조정에서 부물을 보내어 조상한 것으로 실록은 기록 하고 있다.
3. 제주도안무사 겸 판목사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다하다.
공이 태종 9년 11월 제주도안목사 겸 판목사로 임명되어 봉직했던 시기(1410. 1 ~ 1412. 4)는 조선 건국 초기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민생의 안정을 위한 필요한 시책을 많이 펼쳐야 했던 중차대한 시기였다. 제주는 육지 본토로부터 떨어진 섬으로 탐라국(耽羅國)이래 독자성을 유지하여 오다가 고려에 복속한 이후에도 조정의 형편에 따라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부정기적(不定期的)으로 파견하였기 때문에 어느정도 자주적으로 탐라국의 지배자 후예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하고 실질적인 군현제 실시를 위하여 중앙에서 왕권을 대리하는 안무사 겸 목사를 관리로 파견하게 되였다. 안무사는 왕권의 실효적인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변방 지역이나 일시적으로 재해나 변란이 있는 지역에 파견하여 백성을 위무하던 임시적인 외관직인데 도안무사는 여러 안무사중에서 우두머리 안무사로서 지역을 총괄, 지배하는 책임과 권한을 갖는 안무사이다. 실록 등 문헌을 고찰하면 1410년대 제주에는 도안무사 김정준 과 제주 성주(星州)의 후손인 안무사 고봉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도안무사는 제주지역의 최고위직으로 목사의 임무도 겸직하였는데 제주도안무사 겸 판목사는 타 지역의 목사와 달리 품계는 종3품이었지만 제주목사는 당상관인 통정대부 절충장군이고 타 지역은 당하관인 통훈대부 어모장군으로 실질적으로 대우와 권한이 달랐다. 제주목사는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행정적 기능은 물론 항상 군사적인 기능이 강조되어 반드시 군사적인 직책이 겸임 되었다. 군사적인 명칭의 변화에 따라 제주목사는 조선 초기의 경우에는 주로 만호 겸 목사, 목사 겸 절제사, 도안무사 겸 판목사, 안무사 겸 목사, 절제사 겸 방어사, 절제사, 방어사로 명칭의 변화를 가져 왔었다. 공의 8대손이며 나주군 25세 김흥운(金興運, 1622 ~ 1682)선조께서 138대 제주목사(1672 ~ 1675)를 역임했는데 이 분은 무관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절제사로 제주목사의 소임을 다하였다. 김흥운 선조께서는 1647년에 제주목의 부목사 격인 판관으로 도임 하였다가 1650년 이임 하였는데 백성들이 그의 공적을 기려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제주사 인명사전과 읍지류(제주목, 대정현,정의현) ‘선생안’에 기록이 되어 있어 우리 나주김문과 제주도의 각별한 인연을 되새겨 보게 한다. 공이 제주도 안무사 겸 목사로 봉직할 동안의 활약상이 조선실록과 제주향토사 사료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기술해 본다. 태종 9년 11월 8일 / 조연, 이종무, 이자실, 김정준 등을 군 지휘관에 임명하다... 생략 “김정준으로 제주도안무사(濟州道按撫使)로 삼았다.”고 기록되었으니 이것이 제주목사의 출발이다. 공이 제주도 안무사 겸 판목사로 1410년 1월로 도임한 후 보국안민과 국리민복을 위해 일반적인 통치행위와 군사적 기능외에 특별히 시행한 내용을 설명하면, 첫째로 제주읍성의 수축을 둘수 있다. 공이 부임하고난 이듬해인 1410년 공이 왜구 등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제주읍성 수축을 조정에 건의하여 수축하도록 명을 받아 시행한 일이다. 제주읍성은 행정기능과 군사목적을 갖춘 곳으로 탐라국 이래 제주지역 통치의 중심공간으로 역할을 해오다가 공이 도안무사 겸 판목사로 있을 때 수축하여 조선건국 초기의 제주도의 통치기능의 강화와 안정을 기하고 왜구 등 외적의 방어를 실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여 민생안정에 기여했다. 공이 제주성을 수축했을때의 성의 둘레는 4700척 높이 11척 이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구한말까지 존재하여 왔으나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제주읍성 철폐령과 제주항 신축에 성벽의 돌을 채취하여 사용하므로서 대부분 훼철되고 일부만 남아 있어 매우 안타깝기 그지 없다. 둘째는 마정(馬政)의 개선에 관한 일이다. 말은 근현대국가 이전에는 국력의 상징 이었고, 전쟁의 성패를 가룰 수 있는 군수물자였고 공문과 파발을 전달하는 통신수단 이었고, 말의 가죽과 털 등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많은 물품을 생산하는 원료였고, 고기는 식용으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였다. 세계 최대제국(最大帝國)을 건설한 몽골(원나라)은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기술을 갖고 있어서 세계제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몽골이 삼별초의 난25)을 평정하고 직할령인 탐라총관부26)를 설치한 것은 제주가 기후가 온난하여 사시사철 싱싱한 초지가 자라고 있고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말을 목축하기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입지적 조건 때문이었다. 이 후 제주도는 말의 목축지로 각광을 받고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이런 사유로“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낸다.”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제주에 부임하는 도안무사(都按撫使)와 목사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말을 양축하고 보급하는 일이었다. 제주목사는 이 일을 잘해내야만 자기의 직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데 제주목사 김정준(金廷雋)은 부임후 1년 6개월 후인 태종 11년 7월 말의 양축과 관련한 사의(事宜)를 상언(上言)하여 그대로 채택하였다. “제주에 동서 두 도가 있는데, 말을 기르는 자가 모두 둔(屯)을 지어서, 매둔에서 해마다 말1필을 바치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보건대 토성(土性)이 푸석하고 들떠서, 곡식을 파종하는 자가 반드시 말과 소를 모아 그 땅을 밟아서 땅이 반드시 단단하여진 뒤에 종자를 뿌리니, 공사의 소와 말이 이 때문에 골피27)(骨疲)하여 집니다. 공가(公家)에서 비록 금령(禁令)이 있으나 몰래 목자(牧子)와 짜고서 말을 병들게 합니다. 이제 부터는 1둔마다 상마28)(雄) 1필에 피마29)(雌) 9필을 남기고, 그 나머지 거세(去勢)한 말을 모두 조정에 바치는 것으로 상례(常禮)를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당시 목마와 관련하여 문제를 분석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상언하여 말의 목축과 관련한 문제점을 원만히 해결하여 백성들의 부담도 줄이고 국가에서 필요한 말의 공급에도 차질이 없게 하였다. 공께서 제주목사에서 호조참의로 자리를 옮긴 태종 13년(1413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제주에 파견되어 먼저 ‘양마 1백여 필을 추쇄하여 오게 하였다’라고 한 것도 제주도안무사로 봉직할 때 목마 행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험이 있어 제주 실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1414년 전라관찰사로 봉직할 때 진도 목장이 말 사육에 적당하지 않다는 사의를 아뢴 것도 제주목사로 있을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상언한 것 이었다. 공이 제주도안무사 겸 판목사로 있을 때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에게 자진(自盡 : 자살)하라는 왕명이 전달 되었다. 이들 형제는 전년에 제주로 유배 되었는데 이 때 승정원에서는 죽은 무구ㆍ무질의 종 1명씩을 뽑아 초상 치를 물품을 가지고 제주에 보내고, 제주목사에게는 무덤자리도 잡고 장례를 후하게 치러 주도록 명령하는 일이 있었다. 공이 목사 직무를 마치고 호조참의로 임명되어 귀경하던 중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사람과 마필이 많이 죽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전 낭장 안방현 등이 배에 지나치게 많은 말과 토산물을 실어 배가 전복된 것으로 형조에서 안방현에 책임을 물어 죄를 주었다. 공은 제주도안무사 겸 판목사로 봉직(1410. 1 ~ 1412. 4)하는 동안 조선 개국 초기의 안정과 보국안민을 위한 일반 통치행위를 원만히 수행 했을 뿐 아니라 왜구 등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제주읍성을 수축 하였고 마정의 개혁안을 조정에 상소하여 시행한 진정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한 목민과의 표상 이었다.
4. 공신(功臣)에 책훈(策勳)되었고 회맹연39)시(會盟宴詩)를 짓다. 공이 동북면의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내용은 1406년(태종 6년)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실록을 보면 태종 6년《동북면을 평정한 공로에 따라 좌군 총제 김계지 등에게 전지와 노비를 하사하다》라고 서두를 달았고 《설명》에 ...임오년 동북면의 공을 기록하였다...생략... “전 광주목사(廣州牧師) 김정준 등은 마음을 다해 의에 몸 바쳐 미리 준비하여 안녕을 도모하였고...생략...3등이 될만하니 전지 30결과 노비 3구를 하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나오는 임오년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강현 등이 태종(이방원)에 의해 참살된 세자 방석 등 의 원수를 갑겠다고 안변을 중심으로 동북면에서 반란을 책동하고 있을 때 태상왕(태조 이성계)이 머무르고 있던 양주 회암사를 떠나 조사의가 있는 안변을 가기 위해 철령(鐵嶺)을 넘어가는 것을 알고 밤을 새워 직접 말을 달려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조정에서 조사의의 난에 기민하게 대처하여 난을 조속히 평정할 수 있게 대비하도록 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당시(1402)의 실록의 기록은 {태상왕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다고 전한 회양부사에게 말 1필을 내려주다},회양부사 김정준에게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정준이 와서 고하기를, “태상왕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습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당시 태조가 동북면의 난의 주동자인 조사의와 암묵적으로 교감하고 비호하고 있지 않을까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있었다. 태조로부터 임금으로 정식 인준을 못 받고 있던 태종 이방원으로서는 이를 막지 못하면 부자간의 골육상쟁이고, 천륜을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에 대비하여 철령 아래쪽 회양도호부에 김정준 선조 같은 문무 겸비한 인물을 부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지만 조사의가 동북면 일대를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성공하려면 철령을 넘어 회양도호부를 석권하고 수도인 개성으로 진격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정도인데 공과 같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 부사로서 버티고 있어서 회양도호부를 도모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인지 평양 쪽으로 우회하였기 때문에 동북면의 난은 보름 만에 평정되었고 조사의 등은 체포되어 하룻 만에 사형이 집행 되었다. 일부 사학자들의 동북면의 난을 보는 견해는 실질적으로 태조와 태종 부자간의 골육상쟁으로 보고 있으며, 그래서 태종은 동북면의 난을 평정한 후 그 진상을 서둘러 축소, 은폐하고 언급을 금기시(禁忌視)했다는 견해도 상당히 있다 공은 동북면의 난의 공신으로 책훈되면서 전지 30결과 노비 3구(口)를 하사 받았는데, 실록의 기록인 전지 1결은 곡물의 소출량에 따라 3만평 내지 15만평을 1결로 했는데, 이렇게 환산하면 공께서 하사받은 30결은 90만평 내지 450만평에 이른다. 실록에는 하사 받은 전지의 소재지는 밝히고 있지 않으나 어쩌면 공의 예장3)묘가 소재한 포천지역 인근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공신으로 책훈되면 조정에서는 길일을 택해 공신회맹연을 열었고, 이 회맹연에서 공이 찬한 회맹연시가 공의 21세손 김산(전 국회의원)의 차운시와 함께 병인보, 대동보 문원부(文苑附)에 등재된 것을 2013년 6월에 발견하고 고전번역원에 번역을 의뢰하고, 이 회맹연시의 성격과 역사적인 가치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문화재위원인 이해준 박사에게 이 회맹연시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었다. 일반적으로 회맹연시는 왕조(王朝)때 국가에 공훈이 있는 공신을 책훈하면서 임금과 공신이 근정전 등에서 한자리에 회동하여 엄숙한 의식 절차를 밟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늘 변치 않고 진충보국 하겠다는 충성과 의지를 맹세할 때 지은시라는 점을 알려 왔다. 이 회맹연에는 세자(世子)는 물론 왕자들, 그리고 삼정승 등 중신도 참석하는데 이 회맹연에서 지은 총제공의 시는 600년 전에 공신으로 책훈되고 회맹연에서 지은 시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고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데서 놀랍고 자랑스럽다.
<會盟宴詩> 회맹연39)에서 지은시 -金廷雋-
奔走猶存犬馬誠30) 분주히 견마와 같은 정성을 지니고서 與人何事奉書牲 사람들과 함께 무슨 일이든 서생31)(書牲)을 받들었다 千年幸際風雲契 천년 만에 다행히도 풍운의 계합32) 열었으니 聖主賢臣復會盟 성주와 현신이 다시 회맹하였네
<차운시> 金山(21세손 전 국회의원)
從來家風忠孝誠 본래부터 가풍은 충효와 지성인데 君臣會盟結犧牲 군신의 회맹에서 희생하기를 결심했네 子孫相繼花樹會 자손들은 서로 화수회33)를 이어가고 千年斯道共守盟 천년토록 이 길을 함께 지키자 맹세하네
5. 送全羅監司 金廷雋 次人韻 (成石璘) 시가 발견되다. - 전라감사 김정준을 보내며, 다른 사람의 시에 차운함 - 총제공이 지은 회맹연시를 이해준 박사에게 보내어 성격이나 역사적 가치 등을 파악하고자 하였었는데 이박사의 회신에는 뜻밖에도 조선 개국 9공신 중 한분으로 좌ㆍ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을뿐 아니라 문장에 능하고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독곡(獨谷)성석린이 1414년 공이 전라관찰사로 부임할 때 지은 ‘送全羅監司金廷雋次人韻’을 발굴해 보내왔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전주부 역원조’에 관한 소중한 자료를 보내 주었다.
送全羅監司金廷雋。次人韻。 -成石璘- 전라감사 김정준을 보내며. 다른 사람의 시에 차운함.
우선 送全羅監司 金廷雋에 대하여 살펴보면 공에게는 1414년(태종 14년)에 전라도 관찰사(監司)에 제수 되었는데 이때에 送全羅監司 金廷儁 시가 지어 졌다. 그런데 이 시는 공이 전라감사에 제수 되어 부임하러 가는 것을 송별할 때 어떤 다른분이 지은시를 보고 독곡 성석린이 지은 차운시이다. 따라서 총제공의 전라감사 부임을 축하하고 송별하는 시가 당시에 여러 편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송별시 등을 짓는 경우의 예를 살펴보면 경직(京職)에 있다가 지방의 목민관으로 부임하러 떠날때는 과거시험 동방합격자나, 동료관원들이 잔치를 열어 축하하며 임지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훌륭한 목민관으로 성공하라는 염원을 담은 축하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예를 들면 관찰사로 부임 한다든지 목사, 부사는 물론 군수, 현령으로 나갈 때도 이러한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축하 송별시는 참석한 관원들이 모두 돌려가며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송시는 여러 편이 지어졌을 것이지만, 전해지고 있지 않아 애석하기 짝이 없다. 지금에 와서 한편이라도 발굴되었으니 아주 다행이지만 계속하여 많은 시문이 발견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그리고 송별연을 베풀어 시를 짓는 장소는 3군데이었다고 한다. 광나루와 압구정, 다락원37)에서 많이 열었는데 다락원은 명나라나 청나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번잡하여 주로 광나루와 압구정 쪽에서 송별연을 베풀며 송시를 짓고 장도를 축원했다고 한다.참으로 운치있고 멋있어 보이는 조선시대 상류사회 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어쨌든 600년 전 총제공과 관련된 사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어서 대단히 기쁘고 가문의 기운이 융성할 징조가 아닌가 하는 흐뭇한 생각이 든다. 어떤 가문에서는 이러한 송별시를 하나의 문집으로 엮어서 전승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문중에서도 이러한 자료가 어느 후손 집에 보관되어 있다가 출현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총제공이 전라감사로 부임할 때 송별시를 지은 독곡 성석린 선생은 조선 초기의 공경대부(公卿大夫)로 구리시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국가지정 보물 1803호)의 비문글씨를 쓰신 당대 조선 최고 명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일대기를 담아 무덤 동남쪽 길가에 세우는 석비(石碑)를 이른다. 총제공의 송별시를 이러한 연배도 높은 명신 명필이 지었다는 것은 총제공의 당시의 위상이나 명망이 어떠하였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6. 총제공의 얼과 효성(孝誠)이 서린 월당원(月塘院). 후손은 600년 동안 이를 잊고 있었다.... - 부윤 김정준이 월당원의 재호(齋號)를 세우다 -
회맹연시와 관련된 자료를 보내면서 이해준 박사가 보내준 자료에는 필자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자료가 또 있었으니 그것은 ‘신증동국여지승암 전라도 전주부 역원조’인데 월당원(月塘院)은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이 세우고 재호는 월당을 따서 이름 하였다. ◦ 정이오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읍에 전하니 월당의 맑음이여” 하였다, 피계원 부의 남쪽 11에 있다. 위의 동국여지승람 자료는 공께서 전주부윤(1418~1426)으로 봉직하고 계실 때 전주부 관할에 역원을 설치하고 역원의 재호(齋號 이름)를 명명할 때, 고려말에 보문각 대제학 등을 지내시고 문장과 시문이 당대에 독보적이라 명성이 높았으며 시편이 동문선에 기록되어 있는 조부인 문충공 월당 김대경(나주김씨 15세)의 호를 따서 ‘월당원’으로 지으신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보고 조선 초 문신으로 시문에 재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으며 세종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교은 정이오(1374~1434)가 이를 기념하여 지은시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어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 자료를 통해 보면 총제공께서는 당시에 영의정을 지낸 명필 성석린과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 등 공경대부들과 교유할 정도로 총제공의 덕망과 위상이 상당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조상에 대한 효성과 공경심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총제공은 우리 나주김문에게 전통적으로 전래 되어온 정신인 가전충효를 몸소 솔선 실천하신 훌륭한 선조이시다. 우리 나주김문은 출발 당시부터 비조이신 계자 황왕자 범공선사께서 충절과 효경심이 높은 분으로 평가되어 왔었다. 조선 중기 1778년에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 “신라가 귀려(歸麗)시에 季子가 충절을 지켜 기처자(棄妻子) 하고 범공스님이 되시어 종신하신 일은 중국의 촉한의 멸망시 북지왕 유심의 충절과 관련한 고사에 비견할 정도로 의기가 장렬하지만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참으로 애석하다.”고 했는데 조선 초에 처음으로 출사하신 총제공께서 국가에 공을 세워 공신의 반열에 오르시었고 추원보본(追遠報本)의 효심을 십분 발휘하여 훌륭하신 조부님의 호를 따서 전주부 역원 재호를 ‘월당원’으로 지으신 것은 대단한 효심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후손은 600년간 이러한 위대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 왔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한없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훌륭한 조상님과 관련한 자료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선양(宣揚)하는 일은 문중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일을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고증 발굴 할 수 있는 시스템구축과 인력 양성에 대하여 중앙종친회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7. 총제공이 졸(卒)한 후 예장(禮葬)을 사(賜)하다.
공께서는 세종 8년(1426년)에 5년간 봉직하던 전주부윤을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은퇴한 후의 구체적인 행적이 알려진 바가 없어 아쉬움이 크지만 은퇴한 후 7년만인 1433년(세종 15년) 4월 3일의 세종실록에 예장을 사(賜)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명시되어 있다. “총제 김정준이 졸하니 부물을 보내서 조상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실록에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주김씨세보’ 내용도 ‘공은 벼슬이 가정대부 중군총제이며 예장을 사하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는 1402년 ‘동북면의 난에 세운 공으로 공신에 책훈되고 공이 졸한 후 예장을 사했다’는 것을 이른다. 조선시대 예장은 종친, 공신, 종1품 이상의 관원이 서거하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주던 제도로 1405년(태종 5년)에 제정된 ‘예장증시법’에 종1품 이상의 관원은 예장 중시하고, 정2품 중시치부하며, 종2품은 치부만 한다. 공덕이 있으면서도 벼슬이 이에 해당하지 못한 자가 있을때는 사헌부에서 품신하여 의정부의 의논을 거쳐 왕명을 받아서 시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공께서는 동북면의 난의 공신이기 때문에 예장을 사한 것이다. 조정에서 공신이 졸하면 예장도감(禮葬都監)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일과 절차를 논의 하고 조묘(造墓)등 장례 일체를 맡아 하였다. 예장을 할 때는 인근지역의 수령방백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참석하여 고인의 생전의 공덕을 기리고 정중한 조문을 했다. 실록에 기록된 1433년 ‘총제 김정준이 졸하니’의 ‘졸(卒)’의 뜻은 봉건시대는 사람이 사망하면 신분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다름에 따른 것이다. 천자의 죽음을 붕어(崩御)라 부르고, 제후(諸侯)의 죽음을 훙(薨)이라 하고, 대부의 죽음은 졸(卒)이라 하고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죽음을 불록(不綠)이라 하였고, 서인의 죽음을 사망이라고 불렀다.
8. 실전 되었던 공의 묘소를 찾게 된 전말
조선실록 세종 15년 계축(1433년 선덕8) 4월3일(병술)의 기록에 따르면 ‘총제 김정준(金廷雋) 卒하니 부물을 보내 조상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보면 공의 묘소는 1433년에 예장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금년(2014)에서부터 환산하면 581년 전에 모셔진 현존하는 최고의 나주김문의 묘로서 우리 나주김문의 자랑이고 문화유산이다. 공의 산소는 500년 동안 굴곡진 모진 풍진 세상을 지내면서 일시 실전되어 한동안 자손들이 진배(進拜)하여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는 망극한 일도 있었으나 1926년 발간한 대동합보인 병인보 발간을 계기로 1925년 기환(32세 무안), 영구(34세 홍성), 승구(34세 공주) 등 3인의 문중 어른들께서 구보(舊譜)에 포천 기을산 서향이라고 표시된 묘도를 갖고 현지일대를 정밀 답사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찾게 되었다. 1926년 편찬된 병인보는 승구의 주관으로 전국 각 종중의 대표 유사 등이 참여하여 전18권으로 발간한 대동보인데 수많은 종친들의 명단이 수록된 값진 보책이다. 이 병인보 편찬을 주관한 승구는 구한말에 가선대부 품계에 올라 우리 나주김문을 빛낸 금당(金堂)용래(用來)33세)씨의 차남이다. 실전되었던 총제공의 묘소를 찾게 된 경위와 그 기쁨을 생생하게 기록한 기환의 글이 대동보에 기록되어 있어서 후손들에게 조상 애호하고 존중하는 귀감이 되고 있다. 총제공 묘소는 국가에서 장례해준 예장 묘인데다 우리 나주김문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묘소이고 묘소의 원형이 예장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 보존되고 있어서 우리 문중의 자랑일 뿐 아니라 민속학적으로 보나 문화사적으로 매우 값진 민족유산이기 때문에 우리 후손들은 이 묘소의 영구보존과 관리를 위해 특단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며 문화재행정 당국과도 교감을 갖고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9. 총제공의 묘역 상단에 나주김씨 조경단(肇慶壇)을 설단하다.
나주김씨 세보와 신라김씨 등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주김씨의 비조(鼻祖)이신 경순왕 계자 湟왕자와 관조이신 나주군 문하시중 운발공의 묘소가 개성 동북방 오룡산(五龍山)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45년 민족의 비극인 남북분단으로 우리 나주김문을 여신 황왕자와 나주군 두 분의 영위에 대한 향화(香火)를 봉행치 못하고 있어서 2004년부터 두분의 제향단을 설단하고자 고심 끝에 중앙종친회에서 총의를 모아 많은 종친들의 협조와 성원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세수가 높은 총제공 묘소 상단에 나주김씨 종인 모두가 소망하고 염원하던 조경단을 설단하게 되었다, 추진과정에서 입지를 선정할 때 설단 후 관리 문제, 세향을 봉행하러 오는 자손들의 접근성, 토지 소유권 문제, 조경단 설치시의 법적인 문제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도 있었지만 현 토지의 소유자인 청주양씨종친회(회장 양재창, 감사 양영찬) 측의 양해와 협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총제공 묘소가 있는 이 곳의 산 이름이 ‘하늘을 떠받히는 기둥’이란 뜻을 가진 천주산(天柱山)이고 옛날부터 이 묘역의 산기슭이 능(陵)마루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하여 하늘을 받치는 기둥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우리 나주김문에서 연이어 탄생하기를 고대하는 마음에서 조경단을 천주산 릉마루에 설단하게 되었고,
나주김씨조경단
羅州金氏 肇慶壇建壇記
천년을 향기롭고 튼실히 이어온 문중의 면면하고 빛남이여 湟王子와 羅州君의 가없이 은근하고 고귀한 蔭德과 恩澤이여 크나 큰 立志와 敎訓이여 感服하고 崇仰할 따름이다.
이 壇은 나주김씨 鼻祖이신 신라 敬順大王(妃 竹房朴氏)의 季子 湟王子(914~?) (梵空禪師 諡 懿英公)와 貫祖이신 나주군 문하시중 諱 雲發(932~?)의 祭享壇이다. 三國遺事 東史綱目 增補文獻備考등 사서와 신라김씨 문헌을 상고하면 나주김씨의 원래 뿌리인 신라김씨는 西紀六十五年 聖祖대보공 세조대왕 閼智께서 鷄林에 誕降하신 이래 신라 천년의 五十六王 중 三十八王이 즉위하여 三韓을 통합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만세융성할 倍達의 터전을 다졌지만 九三五年 五十六代 敬順大王에 이르러 천년사직을 高麗에 遜國하게 되자 太子鎰과 季子湟은 “어찌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는가”라고 불가함을 극간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자 통곡하며 太子는 妻子와 함께 금강산에 입산하여 麻衣 草食으로 종신하시었고 季子는 忠節과 義烈로 고려 태조가 제수한 평장사를 辭爵不受하고 王子嬪 (시중 沃沮河氏 元澔의 따님)과 雲發, 雨發 두 아들을 속세에 두고 父王의 影幀을 그려 모시고, 가야산 法水寺로 永辭入山 梵空 스님이 되어 海印寺를 왕래 주접하며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인양 참회하고 중생제도와 국태민안을 위해 발원 하다가 涅槃에 드니 조정에서는 湟王子의 아름답고 거룩한 행적과 덕망을 기려 懿英公의 諡號를 증시하고 개성 동북편 오룡산에 葬禮하였다. 湟王子가 사작불수 영사입산하자 長子 雲發에게 羅州를 食邑으로하는 羅州君에 책봉하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貫鄕을 나주로 하게 되었고, 次子 雨發은 慶州君에 封하여 경주김씨의 先系가 되었다. 羅州君께서는 시중 능성具氏 민구의 따님과 혼인하여 슬하에 重輪, 聖輪, 仁輪 三兄弟를 두었고, 평장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며 어질고 자애로운 姿稟으로 고려 초의 안정과 통합, 濟世安民에 크게 기여 하다 영면하시자 역시 개성 오룡산에 안장 하였다. 이 후 나주김씨는 고려와 조선조때 문하시중, 대제학, 대장군, 평장사, 판서 등 문무 내외 현관은 물론 충신열사를 배출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관법조계, 학예술계, 산업계 등 각계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삼한의 명문가로 그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그러나 一九四五年 남북한이 분단된 이래 우리 나주김문을 여신 湟王子와 羅州君의 香火를 봉행 할 수 없어 불경함에 예손들의 염원과 정성을 모아 天柱山의 十七世孫 摠制 廷儁의 묘역 상단에 나주김씨 조경단을 설단 하는 바이다. 一族의 繁昌에 보은하고 두 즈믄해를 이어온 정통성과 정체성을 다지며 문중의 기운이 대하장강,장대한 산맥과 같이 천추만대에 繼繼承承 이어지기를 염원하고, 永遠하여야 할 후세의 尊祖崇先을 다짐하면서 이 비문을 바친다. 二千十年 五月 日 羅州金氏 中央宗親會長 三六世 金謹鶴 謹撰 삼가짓다. 羅州金氏 三十八世 金壯峴 삼가쓰다.
동시에 청주양씨와의 아름다운 600년의 인연을 기리는 가연비도 입석하였다. 제향단을 설단하면서 단의 이름을 조경단이라 명명한 것은 조경이라는 말이 ‘시작됨을 경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이 말의 기원은 신라김씨 도시조인 대보공 세조대왕(추존) 알지의 묘전(廟殿)인 계림세묘(鷄林世廟) 내문 편액에 조경문으로 되어 있어 나주김씨 시조의 제향단을 포천 천주산에 설단하면서 조경단으로 이름 지었다. 조경단의 디자인은 문중의 번성과 화목을 기원하는 형상을 기본 원형으로 하였고 우리 나주김씨의 탄생을 황왕자와 나주군 운발공을 분리하여 생각 할 수 없으므로 함께 모시고 병향38)(竝香)하도록 하였으며 조경단의 형태는 받침석, 몸체, 갓석의 3단으로 하였는데 받침석은 8면 연화모양 통돌, 몸체는 8면 기둥 통돌, 갓석은 통돌 반원형으로 조성 하였다. 받침석의 연꽃은 생명의 창조, 다산, 풍요, 장수, 번영, 행운, 명예, 연성귀자의 뜻을 갖고 있어 연꽃처럼 번성 하였으면 하는 염원을 담고자 한 것이고 8면 기둥은 나주김씨의 羅(나)자가 팔방으로 번성하라는 염원을 담고자 한것이고, 갓석의 반원은 문중의 기운이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온누리를 비추는 것을 상징 하였다. 단소 바닥에는 선조님의 얼이 서린 경주, 성주, 개성, 나주와 자손들의 인연이 숨 쉬는 전국의 흙을 취합하여 혼합 살포함으로서 자손들의 염원과 단결을 다짐하며 설단 하였다. 단비의 전면은 황왕자와 나주군의 영위를 각자하고, 뒤 3면에는 당시 중앙회장 金謹鶴(김근학36세)이 짓고, 38세 장현이 글씨를 쓴 조경단 단비문을 음각하고 우측 첫 면에는 신라김씨의 적통임을 강조하여 신라김씨 도시조 김알지의 탄강도를, 바로 이어서 황왕자께서 범공스님이 되신 인연이 서린 법수사지 3층 석탑을 부조 하였으며, 좌측면에는 황왕자와 나주군의 묘도를 부조하고 이어서 단의 설명문을 각자 하였다. 조경단은 333명의 종친(회)들의 정성과 헌성으로 설단 하여 비로서 우리 나주김씨가 전통있는 명문가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이 묘역에 우리 문중에 현존하는 최고의 묘소인 총제공 묘소가 있는데다, 조경단까지 설단한 성스러운 곳인 만큼 잘 가꾸고 기리 보전하여야 할 것이다. 가연비는 나주김씨와 청주양씨 두가문의 600년 된 갸륵한 인연을 형상화 하였고 전면 비문은 당시 중앙종친회장(김근학)이 600년 된 아름다운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앞으로 세세연연 이 인연이 이어가자는 염원을 담아 비문을 지었고, 뒷면에는 청주양씨 병사공파 종친회 양재창 회장이 양 가문의 아름답고 뜻있는 인연을 한시로 축수하는 시를 지어 음각하여 그 뜻을 영원히 기리도록 하였다. 양재창 회장께서는 자서전 금암록에도 이 사실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셨다. 따라서 후손들은 청주양씨에 대해 항상 고맙게 생각하면서 포천 천주산의 조경단과 총제공 묘역을 우리 나주김문의 유일의 성역메카로 알고 흔들림 없이 수호하고 잘 가꾸고 선양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10. 총제공의 휘 金廷雋과 金廷儁에 대하여
총제공 김정준 선조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26번이나 나오는데 실록기록은 모두 雋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나주김씨 족보인 병오보(1786)는 물론 그 이후에 발간된 임진보(1832년), 정해보(1887년), 을묘보(1915년)에 모두 廷雋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병인보(1926년) 이후부터는 廷儁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의아한 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각적으로 검토 하였던바 이는 한때 총제공 묘소를 실전 하였다가 1925년 다시 찾았을 때 당시 땅속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굴하여 흙을 털어내고 살펴보니 비 전면에 가정대부 중군총제 금성 김정준묘(嘉靖大夫 中軍摠制 錦城 金廷儁墓)라 하고 음기(陰記)에 선덕 8년(1433) 계축 6월초 3일이라 되어 있고, 제 2행에 장자계공량......기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 후 부터는 이 묘비를 근거로 하여 공의 휘를 廷儁으로 고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공의 묘비문 전면에 보이는 금성 김정준(錦城 金廷儁)의 금성은 나주의 고호(古號)이며 나주김씨를 혹은 금성김씨라고도 한 예가 보책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즉 족보의 기록은 검토해 보면 나주군 10세 이신 득장(得章)을 공신으로 “금성 안로현주를 봉하다”라 하였고, 18세 도(堵) 선조는 “정난공신으로 대장군을 봉하고 금성군을 봉하다”라 기록되어 있다. 후손 중에 일부는 족보에는 나주김씨로 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금성김씨로 등재되어 있어 정정하는 사례가 종종 있어 왔다. 이로 보면 가장 오래되고 공이 돌아가신 직후에 건립된 1433년의 옛 묘석 기록이 더 맞을 듯 하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또 다른 유적이 있어 우리를 혼돈되게 하고 있다. 즉 공의 증손 봉서(鳳瑞, 19세 참의공 경근의 외아들, 행위호위호군 증 병조참판 1454-1533)의 묘비에는 공의 휘를 廷雋, 관직은 도총부 부총제로 적고 있는 것이다.(公諱鳳瑞 字著聖 羅州人 曾祖 諱廷雋 都摠府副摠制). 물론 증손의 비석이라 후대이기는 하지만, 이 묘비문을 1533년에 지은 분이 조선중기의 유명한 학자이며 경세가이고 영의정을 지낸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 비석은 현재 벽제 선영에 원형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경국대전에 의하면 3품관 이상은 고조부까지 4대 봉사하도록 한 제례규정으로 보아 제례를 직접 집례 했던 효증손(孝曾孫)이며, 총제공께서 관직이 바뀔 때 마다 받으신 수많은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또한 당시에는 후손들이 과거를 응시할 때는 물론이고, 특히 음서(蔭敍)로 출사할 경우 조상들의 사조단자(四祖單子, 친가 처가 쪽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과 외조부의 성명, 생년월일, 벼슬 등을 적던 단자)가 항용 되던 시기였음을 생각할 때 묘비에 휘를 잘못 기재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가 없다. 특히 이 기록과 같은 글자로 조선왕조실록, 최고(最古)의 나주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공의 휘를 廷雋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용단을 내리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일성 싶다. 다만 우리 후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더 정확한 기록의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검토해 보았으며, 공의 이름이 바뀐 경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어차피 추측일 수밖에 없지만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조예가 높은 분들과 성명학(姓名學)에 밝은 분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더니 자손의 번창과 부귀공명에 관련하여 부족한 기운을 보강하기 위하여 사후에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견을 말하고 있어서 참고로 적어본다.
11. 공의 가족 사항
공의 가족사항은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 와의 혼인 하였는데 장인은 조선 개국공신 조곤(趙琨)이며 포천 신북지역에 세거한 명문거족이다. 정부인 조씨와의 사이에 3남을 두셨는데 장자인 양(壤)은 관은 통훈대부 청주목 판관과 해주목 판관을 역임하고 졸한후 증직은 통례원 우통례를 받으셨고 양의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로 조선왕실의 일원인 완성군 유의 손녀 이다. 차남 증(增)은 음서로 사옹원 직장을 지내셨는데 장인은 6진을 개척하고 여러 관직을 거치고 좌의정을 지내시다 계유정난에 순절한 충익공 절제 김종서 장군이다. 셋째 도(堵)는 성균관 진사로 계유정난에 공을 세운 정난공신으로 대장에 봉하고 금성군을 군봉 받았다. 공의 장손인 해판공 양의 장자 경근은 좌군 섭사용을 지냈고 통정대부 형조참의로 증직 되었는데 배위는 숙부인 전주이씨로 태조의 4왕자 방의의 증손녀이다. 해판공의 차남 우운은 능성현령을 지냈고, 3남 이첨은 한성소윤을 역임 하였다. 공의 차남 중의 아들 취장은 통훈대부 춘추관 기주관사와 공조정랑을 지내셨다. 공의 3남 도의 장남 우문은 승선랑을 지냈고 차남 취형은 북평사를 지냈다. 조선 중기 대학자 동춘당 송준길은 공의 손녀의 후손이다.
12. 총제공 묘역과 분묘기지권(墳墓基地權)
공의묘소는 우리 문중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묘역이다, 공이 1433년(세종 15년) 졸(卒)하자 조정에서 예장을 사하였고 산소가 위치한 곳은 풍수지리상으로 천주산 능마루 옥녀직금형의 가장 요지로서 입지와 좌향이 주변에 있는 어떤 묘소보다도 빼어나고 훌륭한 풍수지리 조건을 갖춘 산소이고 명당으로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600년 가까이 된 우리 문중의 역사와 숨결이 살아 있는 선산으로 이 묘역에는 공의 예장묘 뿐 아니라 약 50보 아래에 공의 배위이신 정부인 평양조씨, 그리고 약간 떨어진 아래쪽에는 장자부인 해판공 양(壤)의 배위 숙부인 전주이씨가 모셔져 있고 그 아래 약30보 정도에 총제공 정부인의 여동생으로 청주양씨 병사공 배위 정부인 평양조씨가 모셔져 있는 전통있는 묘역으로 해마다 수백 명의 자손들이 모여 향화를 봉행하고 있는 묘소임에도 확실한 연대는 미상이나 구한말 조선이 멸망하고 근대화의 바람이 광풍같이 몰아치는 굴곡진 세월속에 이 묘역의 소유가 공의 손아래 동서 문중인 청주양씨 병사공파의 소유로 바뀌어 있다. 그 연유는 지금 밝히기도 쉽지않을뿐아니라 밝힌다 한들 실익이 없다. 때문에 우리 종친회에서는 이 총제공묘역이 문화사적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전통 있는 예장묘이지만 혹시 수호관리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근래에 들어 수차례 이 묘역을 매입하려고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이 묘역 아래쪽에 청주양씨 병사공(兵使公) 퇴은(退隱) 양치(楊治)의 정부인 평양조씨의 묘소가 모셔져 있고 청주양씨 병사공파 종친회가 수백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이해가 엇갈려 논의가 많아 성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상 묘소를 매우 중시하는 전통이 있음을 감안하여 분묘(墳墓)에 대하여는 비록 남의 땅에 있다 하더라도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현실을 감안한 엄격한 현상을 존중하는 관습법상 인정되는 분묘지상권이 적용되고 있어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 분묘기지권에 관해 법률가의 자문을 받은 바에 의하면
분묘기지권[ 墳墓基地權 ] 타인의 토지 위에 있는 분묘의 기지(基地)에 대하여 관습법상 인정되는 지상권에 유사한 일종의 물권.
분묘기지권은 ①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얻어 분묘를 설치한 경우, ②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받지 않았더라도 분묘를 설치하고 20년 동안 평온·공연하게 점유함으로써 시효로 인하여 취득한 경우, ③ 자기 소유의 토지에 분묘를 설치한 자가 분묘에 관해서는 별도의 특약이 없이 토지만을 타인에게 처분한 경우 가운데 한 가지 요건만 갖추면 성립한다.
그 범위는 그 분묘의 기지뿐 아니라 분묘의 설치 목적인 분묘의 수호 및 제사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 분묘기지 주변의 공지(空地)를 포함한 지역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본다(대법원 판례 85다카2496). 그 존속기간은 민법의 지상권 규정을 따를 것이 아니라, 당사자 사이에 약정이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그에 따른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에는 권리자가 분묘의 수호와 봉사를 계속하는 한 그 분묘가 존속하고 있는 동안은 분묘기지권이 존속한다고 해석한다(대법원 판례 81다1220).
분묘기지권은 종손(宗孫)에 속하는 것이나 분묘에 안치된 선조의 자손도 분묘의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대법원 판례 78다2117). 이상과 같이 분묘기지권이 성립하는 경우에는 그 분묘를 마음대로 이장(移葬)할 수 없으므로 임야 등을 경매할 때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다가 2010년 포천 천주산 총제공 묘역 상단에 우리 나주김씨 비조인 湟왕자와 관조인 나주군의 영위를 모신 조경단이 600년 된 두 가문의 아름다운 인연을 더욱 돈독히 하고 다지며 기리는 가연비(佳緣碑)를 동시에 입석하는 것으로 청주양씨 종친회에서 합의 하고 양해하여 설단 하였기 때문에 총제공 묘역에 대한 분묘기지권은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없다.
가 연 비 佳緣碑文(전면)
아, 이 세상에 이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인연이 어디 또 있으리요. 이곳 天柱山 기슭은 나주김씨와 청주양씨의 600년 각별한 인연이 숨쉬는 곳이다. 고려말 조선초 이곳에 世居하던 名門巨族인 平壤趙氏 開國功臣 漢城判尹 趙琨公의 長女가 新羅金氏 王孫인 羅州金氏 摠制公 金廷儁(?~1433)과 혼인하고, 三女는 淸州楊氏 兵使公 楊治에게 출가하므로써 나주김씨와 청주양씨의 뜻 깊고 아름다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총제공과 병사공은 태조, 정종, 태종, 세종조에 벼슬길에 나아가 南征北伐(남정북벌)과 輔國安民(보국안민)으로 혁혁한 업적을 쌓았으며, 同壻이자 同志로서 각별한 情理를 나누며 이름을 드날리셨다. 총제공 金廷儁은 영면 후 玉女織錦形의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이곳 天柱山에 禮葬을 하였고, 아래편에 총제공의 配位 貞夫人 平壤趙氏의 묘소가 있으며, 그리고 연이어 좌측 아래쪽에는 병사공 楊治의 配位 貞夫人 平壤趙氏의 묘소가 있다. 아! 세월은 아득하여 同氣(동기)와 同壻(동서)의 연을 맺은 지 육백여년이 지났음에도 총제공과 병사공 및 두 정부인 자매의 在世시는 물론 영면하신 후에도 같은 묘역에 계시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계시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이후 두 가문의 후손들은 이후 문무현관은 물론 충신열사와 정관계, 학계, 법조계, 예체능, 실업계 등 각계에 훌륭한 인재를 두루 배출하여 三韓의 名門家로 자리 매김하고 있으니 하나의 인연에서 비롯됨이 지극히 크다 할 것이다. 이에 각별하고 두터운 인연을 기리고, 世世孫孫 변함없이 그 인연이 이어져서 양 가문의 교류 화목은 물론 융성과 번영이 함께하기를 기원하고자 두가문의 협의로 이 비를 세운다.
2010년 6월 나주김씨 중앙종친 회장 金 謹 鶴 전면 비문을 삼가짓다. 청주양씨 병사공파 종친 회장 楊 載 昌 후면 헌시 삼가 짓다. 나주김씨 三十八世 金 壯 峴 삼가 쓰다.
佳緣碑(후면)
祝佳緣碑竪立 (축가연비수립) 淸州楊氏 兵使公派 宗親會長 楊載昌
居諸流水又陽天 (거제유수우양천) 세월은 물처럼 흘러서다시 오월이 되었는데 先祖佳緣問幾年 (선조가연문기년) 선조들의 아름다운 인연 묻노니 몇 해이던가 摠制王孫施善政 (총제왕손시선정) 왕손 총제공께서는 훌륭한 정치 베프셨고 兵使退隱盡忠虔 (병사퇴은진충건) 퇴은 병사공께서는 삼가 충성을 다하셨네 非凡後裔柯亭笛 (비범후예가정적) 비범한 후예들은 나라에 큰 인물 되었고 繁衍英材棟幹椽 (번연영재동간연) 뛰어난 영재들은 국가에 큰 재목 되었네 懿蹟燦然靑史載 (의적찬연청사재) 훌륭한 공적은 찬연하여 청사에 실려 있고 美談碑刻永遺傳 (미담비각영유전) 미담들은 비문에 새기어 영원히 전해지게 남기네
※분묘기지권이 있는 묘지를 이장해야 할 때는 공공사업으로 인한 토지수용을 당할 때는 예외가 될 수 있다. 13.맺음말 총제공에 관한 역사기록은 필자가 중앙종친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을때인 2007년11월 사학자 이해준박사의 자문을 받아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발굴정리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나주김씨대동세보에 기록된 “李朝에 들어 嘉靖大夫 중군도총부 副摠制이며, 예장을 사(賜)하다”가 유일한 기록이었다. ‘예장을 사하다’라는 기록에 주목하여 혹시 총제공께서 보국안민한 공을 세우시어 실록등 사서(史書)에 기록된 공신은 아니었을까?에 착안하여 자문을 구한것이 었는데 놀랍게도 실록에 26차례에 걸쳐 기록되어 있을뿐 아니라 기록내용에는 공께서 조선개국 초 태조대 부터 태종,세종대에 걸쳐 나라와 백성을 위한 보국안민과 국리민복을 위해 봉공헌신한 문무내외직의 관력(官歷)은 물론 1406년 동북면의난(조사의의난) 공신으로 책훈되고 사패지30결을 받은 기록과 졸하신후 부물(賻物)을보내서 조상하였다는 지금까지 자손들이 모르고 간과했던 그야말로 역사적인 아주 소중한 사료를 발굴하게 되었다. 이어서 공께서 찬한 회맹연시와 공이 전라관찰사로 배명되어 갈 때 조선개국 9공신중의 한분으로 태조 이성계의 신도비 글씨를 쓰신 성석린공의 송별시가 발견되었으며, 공이 전주부윤으로 재임하실 때 조부인 월당 김대경의 호를 따서 역원의 재호를 월당원으로 명명한 사료가 발굴되어 후손들에게 크나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실록등 일련의 자료의 발굴에 결정적 역할을 해준 본인의 청주고등학교후배인 이해준 문화재위원의 적극적인 협조와 관심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공의 자료를 찾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공께서 면면히 천년을 이어온 우리 나주김문의 자랑스런 훌륭한 선조님 중의 한분이라는데 무한한 자랑과 긍지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자랑스러운 선조님의 실록 등의 사료들을 근600년 동안 모르고 살아온 불민 불찰에 참괴함을 금할 수 없다. 이번 공의 생애에 대한 조명을 통해 공에 관한 근간이 되는 기록은 어느 정도는 발굴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도 미진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공의 자(字)와 호(號)는 어떻게 쓰여졌으며, 공신인데 시호(諡號)나 졸한 후 추증(追贈)은 없었는지, 관직이 이동될 때 공을 위해 지은 송별시나 송축시 등이 더 많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든 발굴 정리하여 후세에 전해주는 보람과 기쁨을 갖을 수 있도록 많은 종친들의 참여와 협조, 더큰 노력을 경주하길 간절히 기대해본다. 용어 설명
1)출사 : 선비가 벼슬아치가 되어 관아에 나감 2)책훈 : 공훈이 있는 사람의 공신록 등 문서에 기록함 3)예장 : 왕족 공신의 장례를 국가가 예도를 갖추어 치르는 장례 4)경화사족 : 서울에 거주하며 조정에 진출한 문벌이 좋은 선비 집안 5)창수 : 시가나 문장을 지어서 서로 주고받음 6)청요직 : 학식과 덕망, 문벌이 높은 사람이 받는 중요 관직 7)시호 : 현신이나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임금이 추증하던 이름 8)불사이군 : 신하가 절개를 지켜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 9)역성혁명 : 이전의 왕조를 뒤집고 새로운 성씨의 왕조가 들어서는 일 10)삼한 : 우리나라의 별칭, 한반도를 말함 11)정사공신 :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에게 준 공신 칭호 12)좌명공신 :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에게 준 공신 칭호 13) 동북면의 난 : 조사의, 강현 등이 1402년에 태조의 비호 아래 일으킨 난, 조사의 난이라고도 함 14)영자 : 그림자, 여기에서 영정 인물화를 일컬음 15)유후사 : 조선 초 개성에서 서울을 한양으로 옮긴 후 뒤처리 하기 위해 설치 했던 관청 16)기내좌도 : 공양왕 때 경기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다가 태종 때 합쳐졌다. 17)적전 : 국왕이 친경하여 그 수확으로 신농후직에게 제사하기 위해 국가 공유지 위에 설정된 토지 18)시정기 : 나라일 중에 역사에 남길 만한 것들을 사관이 가려서 적은 기록 19)경차관 : 조선시대 중앙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임시 관직, 주로 5품관 이상 관원이 뽑혔는데, 때로는 당상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20)추쇄 : 빼돌린 재산이나 부역, 병역을 기피한 사람을 붙잡아 본대로 돌려놓는 일, 빼돌린 말을 찾아내어 징발하는 일 21)횡천 : 지금 경남 하동군 횡천면의 이름, 당시는 전라도 땅이었음 22)경외종편 : 유배된 죄인을 적소에서 풀어주어 서울 밖 어느 곳에서든지 뜻대로 살게 함 23)고신 :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 24)외방유배 : 죄인을 외방의 일정한 곳에 유배하는 것 25)삼별초의 난 : 고려 - 몽고 전쟁이 끝난 뒤 삼별초가 몽골 및 고려 왕조에 대하여 일으킨 항쟁 26)탐라총관부 : 원나라가 삼별초의 난을 토벌한 후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편입한 후 설치한 관청 27)골피 : 힘들게 일을 시켜 피폐하게 함 28)상마 : 다 자란 수말 29)피마 : 다 자란 암말 30)견마성 : 견마지성, 임금이나 나라에 바치는 자기의 정성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31)서생 : 회맹하는 글을 쓰며 희생하기로 한 것을 말함 32)풍운의 계합 : 명군과 헌신이 서로 만나 의기가 투합함 33)화수회 : 친목 따위를 위하여 일가끼리 모이는 모임이나 잔치 34)비궁 : 신하가 국사를 돌봄에 있어서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국사에만 힘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35)적아 : 시경 북문(北門)에 ‘王事適我 政事一埤益我(나라 일이 나에게 몰려들거늘 정사가 한결같이 나에게 더해지는 구다)’라는 말에서 따온 듯하다. 適은 之의 뜻. 36)삼사 : 노(魯)나라 계문자(季文子)가 어떤 일이든 “세 번 생각한 뒤에 행한다.〔三思而後行〕”라는 말을 공자가 듣고는 “두 번이면 된다.〔再斯可矣〕”라고 말한 고사가 《논어》 〈공야장〉에 나온다. 37)다락원 : 조선시대 서울 도봉구에 있던 공용 여행 중인 관원 및 일반인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공영 숙박시설 38)병향 : 두 분이상의 조상님 제사를 같은날 모심 39)회맹연 : 왕조 때 공훈이 있는 사람을 책훈할 때 군신이 모여서 맹세하던 잔치
******** 이글은 나주김씨 17세 김정준공과 관련된 사실(史實)을 2008년3월부터 2014년1월에 걸쳐 틈틈히 역사학자인 이해준 박사의 자문을 받아 국립중앙도서관, 고전번역원 등에 이어 제주시 청을 수차례 방문하여 조선왕조실록, 제주사인명사전, 선생안,신증동국여지승람, 독곡집(성석린) 등 관련내용을 고증하여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 검토, 정리한 내용입니다. 선조님에 관한 사료가 다행히도 600년 동안 묻혀 있다가 근래에 들어 드디어 다수 발굴 되어 사실에 기초한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천년 신라김씨 적통 후예인 나주김씨 문중의 정체성과 정통성 확립은 물론, 구심점과 일체감 조성에 기여하게 된 것은 더없는 보람과 자부심, 당당함을 새삼 느낍니다. 앞으로도 선조님의 보국안민의 얼과 정신을 선양·계승 발전하는 일에 미력한 힘이지만 아끼지 않겠습니다.********
2014,6 지상 김근학 감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