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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8;9-23. 19;1-19. 또 다시 광야의 인생이 된 다윗. 2024. 4. 28.
하나님은 항상 좋든지 나쁘든지 어떤 상황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 상황의 내용을 가지고 교훈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오늘 압살롬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길을 가지만 다윗은 허물의 잘못을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이런 상황을 불신앙와 신앙으로 그리고 넓은 길과 좁은 길로 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인생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으로 말씀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쪽에 있게 되고, 어느 한편의 인생이 되는데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과 반석위의 인생과 하늘아래 속한 사람들을 믿음의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크게 차이가 없어서 그 삶이 그 길처럼 보여 집니다. 어느 때는 넓은 길이 훨씬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잠14;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보고 생각하면 같거나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형통한 것처럼 보여 지고, 고난의 연속으로 보여 집니다. 오늘 압살롬과 다윗이 그렇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기하급수로 번성을 하지만, 아벨의 후손들은 번성은 고사하고 바람 앞에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욥8;7절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세상의 길은 편안하고, 의인의 삶은 고난이기도 합니다. 어떤 길은 넓어 가기도 쉽고, 그래서 찾는 사람도 많으나 의인의 길은 들어가는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중은 심히 창대케 됩니다. 왜요? 욥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찌해야 하나요? 양쪽이 아닌 한길을 결정해야 합니다. 선택이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끝까지 한 길을 결정했지만 모든 책임은 압살롬에게 주어집니다. 다윗은 세 번째 광야의 인생이 됩니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지위와 자리를 돌려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회복되었을까요? 답은 광야의 인생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의인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결정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다윗이 어떻게 왕궁으로 돌아오게 되나요? 진심으로 여러 환경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다윗의 입장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었을까요? 반역자들을 평정하러 나가는 군사들에게 절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반역한 압살롬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18;31―33.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고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이 소식에는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1-1. 의인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악인과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악인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고,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허물이 있지만,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삼하7;14절.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혹독한 시련을 받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다윗의 생애는 바람 앞에 등불 같았고, 악인들이 승리를 한 것처럼 비쳐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어두움 속에서 광야정신을 회복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회복이 돌아 왔습니다. 압살롬은 그의 생애 속에 한 번도 하나님께 묻는 기도가 없었습니다. 자기 생각만을 쫓았고, 사람인 아히도벨에게만 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8-19장은 다윗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가? 입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을 때때로 고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고난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쳐다만 보아도 고난 가운데 두지 않습니다. 욥5;17―21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란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 할 것이라. 여러분, 징계 받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싸매시며 그 손으로 직접 고치시고. 죽음과 칼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24;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 지느니라. 의인은 일어납니다. 반드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여호와닛시이며, 승리의 깃발입니다.
1-2. 구스인이 말하는 또 하나는, 승리가 슬픔이 된 소식(19;2)입니다. 다윗과 그의 편에 선 군사들이 승리를 했습니다. 압살롬과 그 편에 선 사람들은 멸망을 당했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의 소식이 다윗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통한 슬픔이 되었습니다. 이기긴 이겼는데 이 승리 속에 비통함이 포함 포함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비록 압살롬이 아버지의 목에 칼을 겨눈 반역자이었지만 사랑한 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승리를 했는데 승리해서 행복하고 좋은데, 행복하고 좋은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승리가 있습니다. 이김이 탄식을 동반하는 승리입니다. 그래서 이김이 슬픔이 되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히려 슬픔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왜 다윗의 승리가 고통이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 앞에서 허물이 있는 사람은 4배를 갚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이 될 줄 모르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이 자신에게 적용이 됩니다. 여러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하는 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듣기에 좋고 아름답고 열매가 되는 표현은 검증이 되어 열매를 맺는데 나쁜 말은 그냥 나쁜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다윗의 말대로 어떻게 4배를 갚습니까? 밧세바 사이에 난 아들이 8일 만에 죽습니다. 외동 딸 다말이 큰 아들 암논에게 괴로움을 당합니다. 암논이 압살롬에 의하여 살해됩니다. 세 째 아들, 압살롬이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하여 살해 됩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씀할까요? 허물의 용서와 허물이 만들어 낸 문제에 대한 책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 다 깃발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복귀를 하고, 압살롬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본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고 기억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책임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왜 허물에 대하여 경계를 해야 합니까? 경계하지 않으면 비록 주의 구원을 입을 지라도 때로는 그것이, 이김이 슬픔이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심해야 되고 스스로 복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김이 기쁨이 되고, 이김이 진정한 승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래야 형통한 삶이 됩니다.
2. 의인이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상충이 되지 않지만 구약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신약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끝은 은혜로 끝이 납니다. 원죄와 자범죄 까지도, 아니 앞으로 실수할 수 있는 죄악 까지도 하나님은 은혜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입니다. 보냄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는 압살롬이 상수리 나뭇가지에 메달려서 죽는 것이 저주의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단번에 십자가 나무에 죽이심으로 이 모든 책임의 문제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더 큰 은혜의 삶이 주어졌고 세상에 대하여 두렵지 않게 된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실수나 잘못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실수와 잘못 때문에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육이 죽는 것과 함께 영도 stop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영이 살기위해서 육을 중단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어떻게 죽게 됩니까? 압살롬 편에 선 이스라엘이 다윗 편에 선 군대에게 패했습니다. 이 때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도망을 치다가 그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노새는 빠져나가고 압살롬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물론 다윗이 작전을 잘 세우고 작전을 수행한 것을 간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전의 중요성과 함께 작전이 잘 실행되었습니다. 요압, 아비새, 잇대에게 작전의 실행을 명령하여하여 승리를 합니다. 여러분, 결론만 가지고 이야기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나의 의지와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 합니다. 이것의 결과가 압살롬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요압이 작은 창 셋을 압살롬의 심장에 박았고, 그의 부하 10명이 죽어가는 압살롬을 확인 사살했습니다. 이 내용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압살롬의 삶을 중단되었습니다. 왜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렸을까요? 압살롬의 머리털은 교만의 상징이었습니다. 14;25―26절.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 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고 칭찬뿐입니다. 백성들이 그의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에 화근이 됩니다. 좋은 것과 칭찬받게 된 것이 도리어 화가 되었고,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안하무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나타냈습니다. 잠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압잡이 입니다.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무에 달려 죽으면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저주 받았다고 합니다. 신21;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으로 빨리 데려 갔습니다. 왜요?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육체의 삶을 중단시켰습니다. 16―18절. 압살롬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소개하는데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신은 큰 구멍에 던져졌고, 그 위에 심히 큰 돌 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압살롬은 세 아들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으므로 자기 이름으로 비석을 세웠으나 자기가 죽었을 때 그 비석은 구덩이와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자랑할 수 없습니다.
3. 다윗이 어떤 사람을 사랑했을까요? 다윗은 용서의 사람이었고, 그의 마음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칭찬하는 사람과 반겨주는 사람만 사랑했을까요? 관계된 모든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싫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밉든지, 괴롭게 하든지 고통을 주든지, 모든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사랑했을까요?
3-1. 압살롬입니다. 가족으로서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한 이유가 자녀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들 압살롬은 반역하여 왕위를 빼앗고 아버지를 죽이려한 아들이었지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내 아들, 압살롬을 부르며 대성통곡했습니다. 쉽지 않은 반역한 압살롬을 사랑했습니다.
3-2. 함께 한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아둘람 동굴에서 400명이 다윗에게 나아옵니다. 나중에는 600명이 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중요하고 앞장 선 한사람이 중요하고 여러분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진실함과 품어주는 사랑이 있고, 관용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공동체는 감동을 줍니다.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대개는 누구에게 사람들이 모입니까? 돈과 권력이 있거나, 재미와 기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도망치는 사람과 죽음 앞에 놓인 사람에게 모여들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런 처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러분, 처음 시작을 누구와 함께합니까? 능력이 있고 힘깨나 쓰고, 물질이 있는 사람들과 시작을 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사울에게 쫓겨서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환난당한 사람과 빚진 사람과 마음이 원통한 사람과 쫓겨 난 사람들입니다. 사실 다윗은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고, 빚을 갚아 주고,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왜 찾아 왔을까요? 그들을 끌어들이는 무엇이 다윗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다윗을 찾아왔고, 따랐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다윗의 사람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이 늘 함께 했습니다. 이것이면 됐잖아요? 더하여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갓 선지자가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했을 때에도 순종을 했습니다. 사울 왕이 노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사울 편에 서서 고발하고 죽이려 하기 때문에 유다 땅으로 올라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바로 순종합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부모를 공경하며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도망치고 있고, 언제 사울과 대적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부모님을 보호해 달라고 모압 왕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버릴 수 있고, 진심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삼상 23장에 그일라성이 블레셋에 의해 노략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을 돌보기에도 부족한 처지이었지만, 다윗은 적은 수의 동료들과 함께 블레셋과 싸워서 그일라 성을 구해주었습니다. 다윗은 꿈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비전입니다.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용사들도 있었습니다. 대상11:15.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에 그를 찾아왔던 세 사람의 용사가 나옵니다. 그 이후로 다윗의 주변에는 많은 용사들이 모여들었고, 아비멜렉과 같은 제사장들과 갓과 나단 선지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다윗의 꿈을 함께 품고 동행을 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꿈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합니다. 그 비전이 가치와 의미와 영광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모여듭니다. 그러면 무엇이 환난당한 자와 빚진 자와 원통한 사람들로 구성된 이 아둘람 굴의 공동체가 감동을 주는 공동체가 되었을까요? 일방적으로 품어주고 섬기고 축복해주는 다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광야 생활과 죽음과 쫓기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열정은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열정과 울타리의 열정인 무조건 사랑입니다.
3-3. 저주한 사람과 비방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저주한 사람은 시므이고, 비방한 사람은 미갈 입니다. 도망을 갈 때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환궁을 하고 승리를 자축하는 순간인데 19;33절에 시므이에게 맹세를 합니다.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갈 때 시므이가 언덕 위에 서서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돌을 던지며 저주할 때 당장 죽일 수도 있었으나 용서해 주었고, 승리하고 돌아올 때 시므이가 길가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빌 때에도 그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고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올 때에 왕의 체면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힘을 다하여 기뻐 뛰며 춤을 추며 환영했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딸 미갈이 비웃으며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같이 그 심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었다고 비웃었을 때에도 다윗은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다윗은 자신을 향하여 저주하는 사람과 비방하는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이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3-4. 지적하는 사람과 죽이려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다윗이 범죄 했을 때에 무명의 선지자 나단이 와서 손가락질하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책망할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왕의 권위로 나단을 쫓아 버리거나 투옥하지 않았으며 체면을 생각하여 변명 하거나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지적하는 나단을 사랑했고, 죽이려는 사울 왕을 사랑했습니다. 어디서요? 엔겐디 동굴 속과 십 황무지에 있을 때에 위험과 복수할 기회가 있었으나 옷자락만 베고,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사랑했습니다.
3-5. 장애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한 므비보셋을 사랑했습니다. 19;24-30절. 반란이 평정된 후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도 그곳으로 왕을 영접하러 내려갔습니다.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온 날까지 므비보셋은 세 가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19;24.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깍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므비보셋의 마음은 나에게 은총을 베푼 다윗이 여기에 계시지 않으니 남이 나를 해치지 않을지라도 나의 즐거움은 이미 잃었다.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가 계시지 않는데 어찌 단장할 마음이 있으랴? 므비보셋은 다윗이 베푼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26-28.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 와서 왕을 맞을 때 왕이 므비보셋에게 물었습니다.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까? 므비보셋은 다만 속임 당한 사실만 조금 언급합니다. 19;29-30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왕이 평안히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나의 득실을 계산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나의 주께서 얻은 바가 되었다면 내게 잃은 것이 있을지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모든 문제는 당신이 평안한가? 평안치 않는가에 있을 뿐 당신이 내게 주신 것이 여전히 남아있는가? 없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진심어린 므비보셋을 사랑했습니다.
3-6. 위기의 상황에서 다윗을 공궤하고 충성한 바르실레를 사랑합니다. 19;31-39절.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을 보내어 요단을 건네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왕을 배웅하고자 요단까지 내려왔습니다.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팔십세라. 저는 거부인 고로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나이가 늙었으나 궁지에 처한 다윗을 공궤하였습니다. 도와 두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다윗은 바르실래를 위해서 영광스런 궁궐까지 동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바르실래가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다윗 왕의 후의를 사양하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끝까지 사양을 합니다. 청컨대 종을 돌려보내서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소서. 다윗 왕을 요단까지 안전하게 배웅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런 진심의 바르실래를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그래서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회복과 여호와 닛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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