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스의 눈을 가진 포수(捕手) 리더십>>
미국의 아버지들이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칠 때 필독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가르쳐 줄 101가지 야구이야기」라는 책에는 가장 영리하고 책임감과 희생정신이 있어 보이는 아이를 포수로 택하라는 충고가 있다. 포수야말로 리더십이 필요한 포지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리더십 관점에서 배울 점이 많은 포수의 세계를 경영의 시각으로 들여다 보자.
아르고스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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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포수의 제 1 조건은 넓은 시야다.
포수는 최소한 다섯 군데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 첫째 투수와 항상 눈빛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 둘째, 감독의 사인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투수와
수비수들에게 전달하려면 벤치도 바라봐야 한다.
- 셋째,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의 움직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작은 몸짓과 표정에서 허점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 넷째, 누상에 나가 있는 상대팀 주자의 움직임도 추적하고 있어야
견제 사인을 내거나 도루를 저지할 수 있다.
-다섯째, 그라운드에 퍼져 있는 우리 수비수의 위치도 수시로 파악해야 한다.
이 밖에도 상대팀의 벤치와 주루코치,
그리고 심판도 수시로 살펴야 하는 대상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몸 전체에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괴물 아르고스가 나온다. 제우스가 이오 공주와 바람을 피우다 헤라에게 들통날 위험에 처하자 공주를 암소로 변신시켰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헤라는 괴물 아르고스에게 명하여 암소를 감시하도록 한다. 잠을 잘 때에도 두 개의 눈만 감고 자면서 사방 경계를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는 아르고스의 눈이야말로 좋은 포수의 필수 조건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쟁터인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야생 동물들이 보여주는 생존 전략을 기업 경영의 시각으로 연구한 책 「세렝게티 전략」에는 넓은 시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동물로 기린이 나온다. 기린의 눈은 포유류 중 가장 크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6미터 높이에서 사방을 두루 살필 때 멀리 지평선에 있는 조그마한 움직임도 잡아낼 정도로 시력도 뛰어나다. 우두머리 기린은 아득히 먼 곳에서라도 포식자를 발견하게 되면 무리를 안전한 곳으로 미리미리 이동시킨다. 기린에게 종족 보존의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넓은 시야인 것이다.
크건 작건 조직을 책임지는 리더라면 넓은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중요한 업무나 우수한 인재에만 시야를 좁혀서는 곤란하다. 코닝의 HR부사장인 리처드 오리어리는 한국에서 열린 2009년 글로벌 HR포럼에서 “1%의 핵심인재에만 집중하다 99%의 더 중요한 역량들을 잃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리더는 조직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 모든 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포수와 마찬가지로 리더에게도 아르고스의 눈이 필요한 것이다.
탁월한 심리전략가
팀을 승리로 이끄는 포수들은 심리를 잘 활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포수는 투수의 심리 상태에 따라 가장 편안하게 호흡을 맞추어 주어야 한다. 또한 타석에 들어서는 상대 타자의 작은 숨소리나 습관적 몸짓에서 심리 상태를 간파하고 이를 역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등 뒤에 서있는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 성향을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하여 코스를 공략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심리 활용에 능한 포수가 팀 승리에 숨은 주역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훌륭한 포수는 팀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대개 유명한 포수들을 보면 약간의 쇼맨십과 활달하고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뉴욕양키즈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는 성적이 좋지 않아 심리적으로 위축될 때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 it’s over)’라는 유명한 말로 팀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칭기즈칸의 유럽 정복 시발점이 된 호라즘(지금의 이슬람권) 전쟁 당시의 이야기다. 몇 달에 걸쳐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이동하느라 지친 부하들이 낯선 기후와 토양, 적은 숫자의 군대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때 칭기즈칸은 우호적이던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항복하면 무사하지만 저항하면 무자비하게 도륙당한다’는 공포심을 군대에 앞서 먼저 보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부하들에게 알리며 ‘이미 적들은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다’는 말로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결국 탁월한 심리 전략으로 싸우기도 전에 승기를 잡은 칭키즈칸은 손쉽게 호라즘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수의 심리 활용 능력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뛰어난 포수와 그렇지 못한 포수는 경험과 학습량에서 판가름된다. 국내 프로야구의 경우 포수는 한 팀에 보통 20여 명이나 되는 투수 모두의 강약점, 투구성향과 성격까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이나 상대 팀 타자,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한 학습이 있어야 실전에서 적절한 심리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부하들의 심리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평소 끊임없는 관심과 이해 노력 등 많은 학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조직을 이끄는 리더는 알 필요가 있다.
묵묵한 이타주의자
포수는 야구에서 가장 힘들고 고단한 포지션이다. 다른 선수와 달리 유일하게 쪼그려 앉아경기를 한다. 그것도 얼굴에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4kg이 넘는 보호 장구를 몸에 두른 채로 일어섰다 앉기를 수백 번씩 반복한다. 포수라면 무릎 관절에 이상이 오는 것을 숙명으로 여길 정도다. 평균 4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경기에 더운 여름철이면 보호 장구 속에서 한증막을 체험하기 일쑤다. 공격과 수비가 전환될 때면 남들보다 더 빨리 뛰어들어와 장비를 입거나 벗어야 한다. 투수와 달리 휴식을 위한 로테이션도 적용되지 않기에 주전 포수는 매 경기 투입되곤 한다. 홈으로 쇄도하는 상대팀 주자를 태그 아웃시키려면 온몸으로 저지해야 하며 이때가 부상의 위험도 가장 높다. 자동차보다도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이 배트에 빗맞아 얼굴이나 몸으로 날아들기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 그러나 포수가 이런 처지에 불만을 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포수는 앞에 나서기 보다 언제나 뒤에서 없어서는 안될 기여를 하는 ‘그림자 리더십(Shadow Leadership)’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야구 경기에서 가장 많이 뛰는 선수가 포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타자가 공을 치게 되면 포수는 반사적으로 마스크를 벗고 타자처럼 1루 뒤 쪽을 향해 뛴다. 1루 송구가 뒤로 빠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타자가 친 공이 높이 뜨면 누가 잡아야 할지 큰 소리로 알려주고 번트 수비에서는 박차고 뛰어나가 스스로 공을 잡든지 아니면 어디로 던져야 할지를 지시한다. 훈련 시에도 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것이 자신의 타격이나 수비 연습보다 더 중요시된다. 또한 여러 명의 투수를 위해 공을 받아주는 일은 자신의 기술만 연마하면 되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가장 힘들고 많이 뛰는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포수는 그 중요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역대 미국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야구 선수 중 포수의 숫자가 꼴찌에서 두 번째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표 1> 참조). 미국 메이저리그의 올스타 포수 출신인 폴 로두카는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공을 던져야 할 지 대부분의 경우 투수와 포수는 생각이 일치한다. 그러나 혹시 생각이 다르더라도 투수가 원하는 공을 던지도록 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되어 포수의 볼 배합 능력이 도마 위에 올라도 포수는 묵묵히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는 외롭고 힘든 자리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알아야 할 것과 챙겨야 할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반대로 리더의 고민과 어려움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이는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리더는 포수와 마찬가지로 힘든 역할에 불만을 품어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조직에 대한 기여와 부하들의 성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낄 때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어머니 같은 편안한 품
포수는 야구장의 ‘안방마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홈플레이트 뒤에서 경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투수에게 가장 편안한 품을 제공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수는 투수가 강속구와 변화구를 가리지 않고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도록 아무리 까다롭게 날아드는 실투라도 몸을 던져 막아내야 한다. 위기에 몰린 투수가 심리적으로 흔들릴 때면 즉시 마운드에 올라 격려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야구 전문가들에 따르면 볼 배합 능력보다 투수에게 편안함을 제공해 주는 능력이 포수의 핵심 역량이라 한다. 좋은 투구를 이끌어내는 ‘투수 리드’는 천재적 두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인성과 친화력으로 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상급 포수들은 서글서글한 성격과 인간적인 매력으로 동료들에게 인정받는다. 경기나 훈련 시간 이외 일상 생활에서도 포수는 투수와 거리감 없이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경기 당일 투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할 때 감독이 포수의 의견을 중시하는 것도 이런 ‘감(感)’ 때문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쿠바와의 결승전 당시 9회 역전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었다. 당시 김경문 감독은 진갑용 포수의 의견에 따라 당초 계획과 달리 정대현 투수를 투입하였다고 한다. 결국 우리나라의 금메달 획득에는 포수의 감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훈씨는 연주자들이 가장 편안해하는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연습 시간에는 한 음을 30분 이상 연주시킬 정도로 혹독하지만 실제 연주에서는 지휘대에 올라 지휘봉을 들어 올리기 전에 언제나 연주자들을 향해 애정이 듬뿍 담긴 부드러운 미소를 보낸다. 초긴장 상태에 있는 연주자들에게 시작에 앞서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은 2002년 월드컵 폴란드와의 첫 경기 전날 밤에 선수들을 한 명씩 불렀다. 그간의 체력 측정 결과와 함께 ‘내가 지도했던 레알마드리드 선수들보다 너희들의 체력이 더 우수하다’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당시 주장 홍명보 선수는 “네 차례의 월드컵 출전 가운데 가장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히딩크 감독은 선수에게 편안함을 주는 리더였다.
편안함은 업무적 관계만으로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최고의 축구 감독으로 칭송받는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 상태나 경기 감각은 물론 그라운드 밖에서의 사생활, 정신적인 자세 등에도 꼼꼼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가장 편안한 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누구나 더 많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부하에게 편안함을 주려면 불안한 모습으로 실투성 공을 던지는 부하를 ‘온 몸으로 블로킹’ 해주는 노련한 포수와 같은 리더가 되어야 한다.
준비된 리더
포수는 야구의 모든 포지션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관찰한다. 따라서 팀 전체를 이해하고 이끌어가는 감독 역할에 보다 유리하다. 2009년 우승을 차지한 조범현 감독은 “포수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투수와 타자의 움직임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경기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라고 말한다. 포수는 경기를 통해 게임 전체를 꿰뚫어 보는 감독의 시각을 평소에 자연스럽게 연마하는 것이다.
리더십은 리더가 되고 나서 배워야 하는 역량이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전문성이 높고 업무에 탁월하던 사람이 리더가 되고 나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왕왕 있다.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역할이 달라지고 담당 범위가 넓어지는 것에 당황하는 것이다. 리더가 아닌데 어떻게 리더십을 미리 배울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면 포수에게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포수는 다른 모든 포지션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진다. 조직에서도 평소에 나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과 업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경험해 보지 않았던 업무나 분야의 지식에 대한 필요성이 더 커지게 된다. 리더나 동료, 부하들과의 관계에서 리더십을 고민하는 포수와 같은 ‘준비된 리더’라면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남보다 한 발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