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56:1~13)
‘나의 비탄함을 기록하소서. 나의 눈물을 당신의 두루마리에 적으소서.’(8절)
위의 해석은 영어 원문을 보고 직역했지만
일반 성경의 의역은 ’나의 눈물을 주님 병에 담으소서.’이다.
훨씬 더 느껴지는 감정을 잘 표현하는 의역인 것 같다.
어떤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하신 말씀,
‘정직을 행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정직하려는 것이 왜 목숨까지
들먹이는 일이어야 하는가 의아했지만
이후로 백 번도 더 현실에서
흔하고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다윗도 그런 상황이다.
악한 원수(블레셋)들이 그를 온종일, 집요하게 죽이려 한다.
다윗은 얼마나 억울할까? 얼마나 화가 날까? 얼마나 황당할까?
얼마나 지치고, 포기하거나 무너져 내리고 싶을까?
그때도, 지금도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이 차고도 넘친다.
이게 사단이 사람의 죄성을 이용하여 조성하고자 하는 세상이다.
해병대 박정훈 대령,
(단국대 학생들의 000강연에 한탄하는...)
세월호의 피해자 식구들,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 식구들...
위로를 받고 아픔을 씻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
불손한 동기로 누명을 씌우고 악마화 하는 세상.
다윗이 버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극명하고도 실존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때문에
흘린 눈물 한 방울의 이유를
하나님의 때에 아주 세밀하게 계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손익계산서라는 가치중립적인 것을
욕망의 산물이라고 치부해버려면 우리는 갈 곳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속적 손익계산서를 가지진 않지만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당한 손해를
하나님께서 모두 지불해 주실 것이라는
영적 손익계산서를 보유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난 설교에서와 같이
벼랑 끝에서 선 우리가 배수진을 치고
벼랑 끝에서 하늘을 향해 놀랍게 비상하는
더욱 용기 있고 능동적인 믿음을 가지길 원한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말이다.
현실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지만
이제, 눈물 닦고 믿음으로, 선함으로
당차게 앞으로 뛰어 나아가는 믿음!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