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8월7일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와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순교자, OFM Cap.
Beati Agatangelo de Vindocino (Francesco) Nourry e Cassiano da Nantes (Gundisalvo) Vaz Lopez-Netto Sacerdoti cappuccini, martiri
+ Gondar, Etiopia, 7 agosto 1638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 순교자
Beato Agatangelo Noury Martire
Blessed Agathangelus of Vendôme , OFM Cap. MM (AC)
(Tours, 31 agosto 1598 - Gondar, 7 agosto 1638 )
Born:31 July 1598 near Vendome, France
Died:stoned to death or hanged with the cords of their own robes (records vary)
on 7 August 1638 at Dibauria, Abyssinia
Beatified:23 October 1904 by Pope Pius X; formal recognition on 1 January 1905
Canonized :pending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순교자
Beato Cassiano Lopez-Netto Martire
Blessed Cassian of Nantes, OFM Cap. MM (AC)
(Nantes, 15 gennaio 1607 - Gondar, 7 agosto 1638 )
Born:1607 at Nantes, France
Died :stoned to death in 1638 in Abyssinia (modern Ethiopia)
Beatified :1904
Canonized :pending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방돔에서 태어났고, 21살 되던 해에 르 망의 카푸친회에 들어갔으며,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뽀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회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630년에 카푸친회는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이들 중에 낭뜨의 카시아노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카시아노는 즉시 아카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가 이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로 갔다가,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0세는 이 두 분이 17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자신들의 밧줄 띠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한 곤다르의 카푸친 순교자들,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와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떠났지만 잊히지 않았네!
200년 이상 동안, 그들의 시신이 세상에 잊힌 채 어느 한적한 아프리카 마을의 건조한 모래흙 밑에 묻혀 있었듯이, 그들의 이름도 교황청의 어느 비밀 문서보관소의 먼지 밑에서 영원히 묻힐 운명처럼 보였다. 물론, 그 두 명의 영웅적인 카푸친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은 아니었다. 200년이나 된 후에, 또 한 명의 유명한 카푸친 선교사인 피오바(Piovà)의 굴리엘모 형제가 같은 나라인 에티오피아에 활동하러 갔을 때에, 그는 자신의 동료형제들의 묘표도 없는 무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일치운동가 선교사로서 그들이 보낸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에 대한 명확한 묘사와 그들의 마지막 시련과 신앙을 위한 순교 이야기를 종합했다. 굴리엘모 형제는 오늘날 마사야(Massia) 추기경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수세대에 걸쳐 상기해 온 에티오피아의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그가 모아온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증거들 덕분에 증거가 부족해서 오래 동안 질질 끌고 있었던 그들의 시복운동이 빠르게 발전했고, 1905년 1월 1일, 성 비오 10세 교황은 교회의 복자명단에 교회일치를 위해 순교한 그 두 명의 순교자인 ‘베르돔(Verdôme)의 아가탄젤로 형제’와 ‘낭트(Nantes)의 가시아노 형제’의 이름을 추가하게 되었다.
함께 나눈 수고! 함께 나눈 운명! 함께 나눈 영광!
복자 아가탄젤로와 복자 카시아노는 자신들의 인생의 마지막 4년 동안, 선교사로 아프리카에서 함께 일했고, 곤다르(Gondar)에서 한 교수대에 나란히 매달려 교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거의 에티오피아의 회교도가 다수인 어느 마을 입구에 하나의 무덤 속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다.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이 두 개의 지천은 분명 서로 다른 프랑스의 원천에서 솟아났지만, 이집트에서 하나로 합류되었고, 그곳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막을 수 없는 강물이 되어 에티오피아의 광야에서 영생의 바다까지 흘러들었다. 곤다르의 순교자인 이 두 명의 카푸친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땅에서 취약하지만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카푸친 수도회의 부식(扶植)에 매일매일 여전히 물을 주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그 아프리카의 고대국가들 안의 가톨릭교회의 못자리에도 철저하게 물을 대고 있다.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란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생애처럼, 언제나 교회전례상에도 카푸친 수도회 역사상에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문화적, 가족적 배경에 영향을 받은 제 유일한 개성과 자신만의 타고난 재주들, 그리고 카푸친 생활과 봉사활동에 대한 독자적인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그 경험은 카시아노 형제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와 만나게 된 1634년 이전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카시아노 형제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노련한 선교사였고 9세 연상이었던 아가탄젤로 형제, 즉, 훗날에 주님의 포도밭에서 함께 일하며 또 순교 동료가 될 아가탄젤로 형제와 처음 만났던 곳이다.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
사실상 카푸친들과 함께 자라난 베르돔 출신의 소년
아가탄젤로 형제는 1698년 7월 31일에 프랑스, 베르돔에서 태어났다. 1618년 그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그는 사실상 카푸친 형제들과 함께 자라났다. 그 도시의 선거재판소의 회장으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 프란치스코 누리(Noury)는 카푸친 수도회의 주된 기금 조성자였으며, 또한 수도회의 재무를 담당한 이사(理事), 즉 ‘영적인 친구’였다. 그는 아내인 마르가리타 베옹(Béon)과 함께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아 길렀다. 세례명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지어진 아가탄젤로 형제는 그들 자녀 중 셋째였다. 1606년, 카푸친들이 베르돔의 새 형제회 부지에 십자가를 세울 때에, 어린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함께 그 공적인 경축행사에 참여했다. 그때 주민들이 카푸친 형제들에게 보여준 그 열광적인 환영은 그의 어린 마음에 잊힐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세사르-베르돔(César-Verdôme) 학교에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뒤, 결국 1618년 만 스무 살의 나이로 수도회에 입회했다.
“잿빛 추기경님”의 제자
르망(Le Mans)에 위치한 수련소에 들어갔을 때에, 프란치스코 누리는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의 수련장은 몬네이(Monnay)의 에지디오 형제였다. 1년 뒤, 종신 서약을 한 아가탄젤로 형제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620년 푸아티에(Poitiers)로 보내졌다. 푸아티에의 그의 교수들 중의 하나는 유명한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였다.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는 오늘날 프랑수아 르클레흐크 드 트럼블레이(François Leclerc du Tremblay)라는 세속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당시 프랑스의 가장 힘 있는 인물인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의 영향력 큰 고문이었다. 그 형제는 훗날 아가탄젤로 형제와 그의 동료가 될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의 생활과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의 원래 색깔과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는 즉시 ‘잿빛 추기경님’이란 뜻인 ‘la Eminence grise(라 에미낭스 그리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624년, 아가탄젤로 형제는 렌(Rennes)으로 파견되었는데, 서품을 받을 1625년까지 그곳에서 계속하여 학업을 닦았다. 그의 렌 신학교수들 중의 한 사람은 당시 또 다른 수도회 인물인 트레귀에(Treguier)의 프란치스코 형제였다. 사제서품 받은 후, 아가탄젤로 형제는 3년 동안 서부 프랑스의 인구 밀집 지역들을 복음화 혹은 재복음화 하기 위해 그곳들을 순회하는 설교자의 삶을 보냈다. 그 인구 밀집 지역들 중에는 푸아티에와 자신의 고향인 베르돔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그의 설교의 주된 목적은 듣는 사람들의 신앙을 강화시켜, 위그노(Huguenot)식 개신교의 영향력이 프랑스 공생활에서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우연한’ 외방 선교사가 주님의 포도밭에서 헌신적인 일꾼이 되다
1628년, 렌에서 설교하는 동안에 아가탄젤로 형제의 생활에 얘기치 않은 사건은 발생했다. 그 사건이 비록 하느님 섭리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었지만, 역시 아가탄젤로 형제의 옛 교수이자 ‘잿빛 추기경님’이라고 일컬어 졌던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의 정치적 책략에 의해서도 발생된 것이었다. 중동으로 떠날 카푸친 선교사들의 단체의 한 단원이 출발하기 전 병에 들었는데, 그 대신에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가 파견되었다.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는, 당시 자리가 확고하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융성한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기 위해 모여드는 수많은 프랑스의 활기찬 젊은이들을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와 재통합을 이루고자하는 그의 원대한 계획에 이상적인 도구들로 보았다. 프란치스코 형제가 ‘전 세계 복음화’를 목표로 한 이 대(大)계획을 세운 동기는 하느님의 더욱 더 큰 영광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또한 국제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갈망하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1629년 4월 29일, 계획대로 아가탄젤로 형제는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주요 항구도시인 알레포(Aleppo)에 상륙했다. 그는 곧바로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민족적으로도 이질적인 중동 나라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쓰는 공동언어인 아랍어 공부에 투신했다. 또한 시리아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여러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로 된 사회였다. 그곳에는 전례에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쓰는 시리아 동방 교회 외에,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과 레바논 마론파 가톨릭교도들, 그리고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과 소수 라틴 전례를 사용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있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유럽에서 해왔던 대중 설교 대신, 그 지역 교회 지도층과 인맥을 맺고 그들과 인내 있게 대화하는 것이 하느님을 위한 영혼들을 얻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임을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개개인에게 맞추는 것을 습득했고, 대화 상대의 실정에 따라 재조정이 가능한 짧은 연설을 준비하곤 했다. 그는 단 1년 동안 언어를 공부한 다음 일상 구어체 아랍어로 적절하게 설교할 수 있었다. 구어체 아랍어는 주로 문학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고대 아랍어와 약간 다르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학업적인 공부와 아랍어 실력이 중동에서 효율적으로 일하려는 모든 선교사들에게 필수라고 확신했다.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새로운 선교사들에게 좋은 아랍어와 라틴어 책들을 함께 가지고 오라고 권하곤 했다. 그는 직접 귀제어스(Guiggeus) ‘Thesaurus linguae arabicae’라는 라틴어-아랍어 사전을 주문했으나, 그가 이집트로 떠날 때가지 도착하지 않아 그는 그 책을 중동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동료형제들에게 물려주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동료 형제들 중 그 누구보다 아랍어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아랍어 실력이 학술적인 면에서 그릇된 교리를 논박하고 교의 진리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 많이 부족하다고 늘 한탄했다. 시리아에서 그리고 나중에 레바논에서, 그는 교회 간의 대화를 촉진함으로써 분리된 그리스도인들 간의 화해를 조성하려 했고, 그의 노력은 어떤 정도까지 성공했다. 그는 시리아의 한 주교를 가톨릭신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고위성직자가 그 지방 카푸친회 선교운동의 기반을 굳히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레바논 전역에서의 아가탄젤로 형제의 설교는 큰 무리의 군중을 끌어 모으곤 했다. 비록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교회의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는 아가탄젤로 형제의 전교 활동을 찬성했지만, 마론파의 다른 고위성직자들은 그의 활동을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마론파 총대주교의 총대리’의 수그러들 줄 모르는 적대감의 결과로 설교하던 그 고장들에서 쫓겨났지만, 레바논에서의 그의 전교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레바논의 사도’라고 일컫기도 했다.
그가 이집트에서 했던 도착화의 첫 발걸음
1633년, 아가탄젤로 형제는 이집트에 위치한 카푸친회의 선교지로 파견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콥트 교회의 총대주교인 마태오 3세 교황과의 전도유망한 대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나라였다. 그는 그곳에서 콥트교회의 지도층과 접촉했다. 콥트교회의 주교들은 언제나 수도승들 중에서 뽑힌 이들이기 때문에, 아가탄젤로 형제는 이집트 내의 그 수도승원들을 방문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시작하곤 했다. 그는 태배(Thebaid) 지방 사막에 사는 성 안토니오의 수도승들과 몇 개월 동안 살았고, ‘와디 엘 나트룬(Wadi El Natrun)’에 위치한 성 마카리오의 수도승원에도 몇 개월 동안 머물렀다. 머지않아 프랑스에서 추가 선교사들이 이집트로 파견되었고, 그들 중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는 알렉산드리아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어느 이민자의 아들의 어린 시절 꿈
카시아노 형제는 1607년 1월 16일에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루아르(Loire) 강변 도시 ‘낭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요한 로페스 네토(Lopes Neto)와 귀다 달람으라스(d’Alamras)는 포르투갈에서 이주하여 낭트에 정착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의 갓난 아들과 그 아이의 쌍둥이 누이는 태어난 다음날에 성 시밀리아노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남자아이는 ‘군디살보(또는 곤살보)’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스네(Vasenet)’라고 불렀다. 쌍둥이는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바스네는 어릴 적부터 근처에 있는 카푸친 형제회에 방문하곤 했다. 카푸친 형제들의 생활양식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 소년은 겨우 만 9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수도회 입회신청을 내게 되었다. 후일 다시 신청할 수 있을 때가지 계속 공부하라는 권고를 받은 그는 그 도시의 성 클레멘스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훌륭한 고전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언어 공부에 탁월하여 즉시 히브리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덕에 있어서도 꾸준히 진보했고, 카푸친회 입회를 준비하기 위해 고행과 정신 기도를 생활화할 줄을 배웠다. 그는 학교에서 교사들의 사랑을 받았고, 예리한 지능뿐만 아니라 어린애 같은 순진함으로도 유명했다. 결국 만 15살 때에 그는 다시 한 번 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 신청을 냈다. 그렇지만 부모의 반대로 인해, 그가 만 17살까지 수련자로 받아들여지게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외방선교지에 가기를 열망했던 젊은 카푸친 언어학자
1624년 2월 6일, 군디살보 로페스 달람으라스(Lopes d’Alamras)는 앙제(Angers)의 위치한 카푸친 수련원에서 수련자의 수도복을 입게 되었고,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자로서 그는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고행을 잘하는 형제로 주목받았다. 1625년 서약한 다음, 그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렌으로 보내졌는데, 마침 그곳에 있는 그의 교수들 중의 한 사람은 몇 년 전에 같은 형제회에서 아가탄젤로 형제에게 신학을 가르쳤던 트레귀에의 프란치스코 형제였다. 아가탄젤로 형제와 카시아노 형제는 같은 곳에서 살며 같은 교수들 밑에서 공부했지만 그들 고향인 프랑스에서 정작 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문을 닦으면서도 카시아노 형제는 선교사가 될 꿈을 품었고,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기술을 연마했다.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시험을 잘 봤고 1631년에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가 선교지로 파견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렌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했고, 1631부터 1632년까지 도시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신수품자인 카시아노 형제는 도시 외곽에서 병자들을 보호하는 형제들의 집단에 동참할 허락을 청하였고, 그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한 번 더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서 2년 후, 그 사이에 수도회의 파리 관구의 관구봉사자가 된 그 유명한 ‘잿빛 추기경님’인,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에 의해 그는 북아프리카의 카푸친 선교지로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본(Dijon)의 베네딕토 형제라는 동행자와 함께 마르세유를 떠났고, 1634년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공할 만한 한 팀이 된 복자 아가탄젤로와 복자 카시아노
카푸친 ‘교회일치운동가’들
이집트에서, 카시아노 형제는 아가탄젤로 형제가 진행하고 있었던 교회일치운동과 콥트교회 총대주교와의 교회 간 대화에 협력하게 되었다. 카시아노 형제가 그 프로젝트에 기여한 것은 청년 특유의 열정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타고난 학문적 탁월성과 언어적 재능이었다. 이와 대조되어 아가탄젤로 형제가 기여한 것은 노련한 선교사의 실제적 경험과 신중함과 노하우였다. 그들 두 사람이 함께 하면 가공할 만한 팀이 되었다. 그들은 콥트교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한 다음, 그쪽 교회인사들과 신앙의 진리에 대한 대화를 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들은 서로간의 어떠한 오해와 장애가 없도록 최선을 다했고, 성령께서 인내 있게 천천히 일하실 수 있도록, 또 완전한 교회일치에 이르는 길을 닦으실 수 있도록 그들의 모든 신뢰를 그분께 두었다. 동시에 그들은 로마의 교회 간부들에게, 특히 함께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이른바 분파적 교회에 속하는 콥트교도들에게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는 보다 더 유연한 접근 방식을 채택할 것을 권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그러한 결정들은 현지에 있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는 편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롭고 외견상으로 유망한 카푸친 선교지, 에티오피아
이제, 그들은 유망한 선교지로 보이는 에티오피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카푸친들은 로마 교황에 의해 그곳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왕들의 왕’, 파실리데스(Fasilides - ፋሲለደስ) 황제에 의해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대신하는 자리였다. (‘왕들의 왕’ 또는 ‘왕중왕(王中王)’라는 에티오피아 황제의 명칭은 토착어로 ‘네구스타 나가스트(Negusa Nagast - ንጉሠ ነገሥት)’이라는 말의 직역이다.) 파실리데스 황제는 자신의 아버지 수세뇨스(Susenyos - ሱሰኒዮስ) 1세 황제 뒤를 이어서 에티오피아의 왕위에 올랐었는데,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수세뇨스와 달리 파실리데스 황제는 가톨릭교회를 몹시 싫어하여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현지 원주민 가톨릭 그리스도인들마저 박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티오피아의 관구장대주교에 어울릴 만한 후계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총대주교에 의해 임명된다는 것은 로마의 교황과 가톨릭교회 전체에도 적지 않은 관심사였다. 그 카푸친 선교사들은 가톨릭 교리에 개방적이고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서도 호의가 있어 보이는 ‘아리미미오스(Arimimios) 신부’라는 이집트의 수도승을 그 직책에 추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리미미오스 신부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 에티오피아의 ‘아부나(Abuna)’, 즉 관구장대주교로 주교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마르코스 아부나’라는 즉위명을 삼은 그 새로운 관구장대주교는 곧 가톨릭 선교활동에 대한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자신의 옛날 친구들이었던 카시아노와 아가탄젤로 형제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베드로 레오’라고 부르곤 한) 라이프치히(Leipzig) 출신의 ‘베드로 헤예를링(Heyerling)라는 순회하는 독일 루터교도의 반가톨릭적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또 수많은 에디오피아 콥트교회의 반동주의자 성직자들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선에서 체포되어 수도에서 재판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하다
1637년 12월 하순, 두 형제는 에티오피아로 출발했다. 그들은 총대주교의 충고대로 달갑지 않은 주목을 피하기 위해 여행 말미에는 카푸친 수도복 위에 콥트교의 사제복을 입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 선교지를 설립할 그들의 계획은 그 나라에 있는 정상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 두 선교사는 도중에 해당 지방의 여러 파샤(즉 주지사 또는 영주)들의 대상(隊商)의 호위를 받으며 수개월 동안에 누비아(Nubia)의 사막을 횡단했다. (‘카라반’이라고도 하는 ‘대상(隊商)’이란은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 먼 곳으로 다니면서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여행은 매우 길고 매우 힘든 여행이었다. 결국 그들은 에티오피아의 고지대 평야에 이르렀지만, 데보레흐(Deborech)라는 국경 도시에 발을 내디디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마태오 3세의 추천서들은 압수되어 그것은 형제들의 안전 통행권을 보장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1638년 8월 5일, 베드로 헤예를링의 선동으로 그들은 노새의 꼬리에 매달려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곤다르로 끌려갔다. 그들의 목과 손이 사슬로 결박되는 동안에 카시아노 형제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이것은 우리가 이 멀고 먼 나라들로 와서 구하려고 했던 그 고귀한 보석들입니다!” 형제들은 황궁 소속 신하들에게 신문을 당하고 교도관들에게 학대당하게 되자 예전 대화 상대였던 마르코스 아부나에게 호소해 보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베드로 헤예를링은 이미 대주교에게 말하여서 아가탄젤로 형제가 자신을 퇴위시키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와 있는 것이라고 그를 설득시킨 상태였다. 그래서 아부나 마르코스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도착을 지연했다. 결국 8월 7일, 그가 카푸친들의 재판소에 나타났을 때에는 옛 친구들을 변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단죄하러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총대주교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는 카푸친 선교사들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자신의 장상인 마태오 3세 총대주교에 대해서도 서슴지 않고 온갖 욕설을 내뱉었고, 총대주교를 자신과 에티오피아 내의 콥트교회 전체에 대한 역모에 연루된 자로 비난했다. 마침내 두 카푸친 선교사에게 최후통첩은 내려졌다. 그들은 콥트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그 지방의 말을 할 줄 알았던 카시아노 형제는 둘의 이름으로 가톨릭교회의 신경을 큰소리로 외치며 고백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밧줄 띠로 같은 교수대에 매달려 교수형을 받다
카시아노 형제가 신경을 끝내기도 전에, 미쳐 날뛰는 군중은 베드로 헤예를링의 열변에 자극 받아 카시아노 형제와 아가탄젤로 형제를 목매달기 위해 그들을 교수대로 끌고 갔다. 피에 굶주린 그 군중은 급한 나머지 목을 맬 밧줄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잊어버렸지만, 두 형제는 자신들의 프란치스칸 밧줄 띠를 벗어 그것들을 대신하여 사용하라고 건네주었다. 그러므로 그 두 명의 거룩한 카푸친 사제는 서로에게 사죄경을 외어 준 다음, 자신들의 밧줄 띠로 교수대에 매달렸다. 하지만, 밧줄 띠가 거칠어서 올가미가 너무 느리게 죄어지고 있었으므로, 성난 군중은 카푸친들의 죽음을 재촉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더 증가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돌을 던지기를 시작했다. 돌 하나가 아가탄젤로 형제의 한쪽 눈을 쳤고, 그의 눈이 나가떨어졌다. 얼마 후에, 바로 1638년 8월 7일인 그날에, 곤다르의 순교자들인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와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는 그들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무덤 위에 치솟은 불기둥
그들의 시신은 근처에 있는 무덤에 묻혔고 돌로 덮어졌다. 그 지역 주민들은 밤이면 그 돌들에서 불꽃들이 솟아올라 무덤 위로 불기둥이 생기는 것을 증언하곤 했다. 그 지역 가톨릭 신자들이 시신을 ‘아자조(Azazo)’라는 한적한 회교도 마을 입구와 가까운 곳으로 이장할 때까지 이 현상은 매일 밤 계속 일어났다. 가톨릭 신자들이 무덤을 이장한 이유는, 자신들의 범죄의 모든 흔적을 없애려 했던 그 지역 당국에 의해 그 무덤이 파해져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 두 번째 무덤은 주민들이 약 200년 후 마사야 추기경에게 가르쳐준 무덤이다. 1928년, 어느 지역의 사제는 에티오피아로 여행해온 이탈리아 사람에게 그 무덤 현장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설명했다. “이곳은 평지에서 올라온 그 두 외국인이 매장된 위치입니다. 이분들은 파실리데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곤다르의 순교자들 - 선교와 교회일치운동과 카푸친 형제성에 대한 증거자들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와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는 신앙을 위한 영웅적인 순교자들일뿐만 아니라, 당시의 규범에 따라 그들의 사목활동 대상이 된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사람들의 언어와 종교적인 문화들과 다양한 역사를 배우고, 또 그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교회일치’의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특별히 타고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와 그 교회가 가르치는 근본적인 진리에 꾸준히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이 일해 왔던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 기꺼이 적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이와 배경과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았으며 함께 죽은 참된 더욱 작은 형제들이었다. 합류된 그들의 순교자 피는 그들의 선교적, 문화적, ‘교회일치적’, 종교적 노력을 완성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카푸친 형제적 생활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모든 상황, 즉 장소, 시간, 사람들, 전례, 그리고 이와 비슷한 기타의 것들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나라들)의 교사들은 이곳 나라들의 관례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기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결정은 선교사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옛 시절에 그들은 그러한 성사에서의 교류(communcatio in sacra)는 금지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이의를 가진다면, 선교지에서 그 어떤 좋은 일을 함에 있어 필요한 모든 수단과 희망은 파괴되어 버립니다. 실제로 그것은 수많은 어려움을 일으킵니다. 이곳에 수많은 콥트교도들이 있는데, 저는 그들의 전례서들에서 이단인 디오스코러스(Dioscorus)와 세베러스(Severus)을 향한 탄원들 외에는 아무 오류도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단들의 그러한 탄원을 제외한다는 의무 하에, 이 책들을 미사 거행에 사용해도 될 것을 사제들에게 허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제들은 백성에게 추문을 일으키지 않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
“이것(사슬)은 우리가 이 멀고 먼 나라들로 와서 구하려고 했던 그 고귀한 보석들입니다!” -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이콘]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6세기.루브르박물관,파리
목판에 그려진 이콘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콥트 교회에 기원을 두고있다.
(이콘.신비의 미-장긍선신부편저.참조)
이집트 정교회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이콘 가운데 하나로서,
구세주 예수님과 곱틱(Coptic)교회의 수도원장 성 메나(Mena)와의 친교가 잘 담겨져 있다.
(정웅모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여러분들은 나의 벗들입니다.
이 이콘을 자세히 보면 메나스라고 전해진 성인 곁에 나란히 서서 그의 어깨에
다정히 당신 오른 손을 얹고 계시는 예수님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계십니다.
메나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함께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런데 메나스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체험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길에서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말재주도 없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체험도 부족합니다’라고 거듭 고백합니다.
그런 메나스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예수님께서 정겹게 어깨를 마주하시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서,
가장 소중한 친구로서 예수께서 늘 함께 계심을 체험합니다.
"혹,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혹 어미가 어린 젖먹이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메나스의 나약한 믿음이 하느님 안에서 굳건해 집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분께서 함께 가시기에 자신의 약점이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함께 가시니 힘이 납니다.
(소공동체길잡이2003년7,8월호에서)
요한 15,11-17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콥트교회 Coptic church
이집트인의 콥트 국민교회.
639∼640년 아라비아인 지배아래 성립,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밑에 속한다.
교회법은 위사도서간(僞使徒書簡), 고대 공의회문서, 비잔츠, 시리아 법률자료, 여러 주교의 지령에 따라 성립.
교의상 가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황의 통치권교도권상의 수위(首位)에 관한 점이다.
전례는 콥트어를 사용. 신도수 약 85만명, 콥트인 프로테스탄트 5만명, 가톨릭 귀일교회 신도 3만명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
이슬람권 이집트에 압도적으로 많은 주요 그리스도교 교회.
7세기 아랍인이 점령하기 이전의 이집트 민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아이지프티오스’(아랍어로는 qibt, 콥트는 서구화된 발음임)라 불렀다.
그뒤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아이지프티오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자 이 용어는 소수 종교집단인 그리스도교도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5세기 이래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그리스도의 단성만을 인정하는 견해) 교회에 속했으며, 스스로를 이집트 교회라 불렀다.
19, 20세기에는 콥트 정교회로 자칭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콥트인들 및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동방정교회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4, 5세기에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451)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콥트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중단했다.
■콥트 성가 Coptic chant
7세기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 전 그리스도교에 귀화한 고대 이집트 후손들의 예배음악.
아랍어 ’qibt’에서 유래한 ’콥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ios(’이집트인’ 또는 ’이집트어’)의 전와어(轉訛語)이다.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로 이집트인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계속 믿던 소수인들에게만 이 명칭이 적용되었다.
함셈어족인 콥트어는 997년에 아랍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콥트의 예배용 언어로만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콥트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리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콥트의 의식이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콥트인들은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은 근래에 와서 필사 악보와 예배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성 메나스축일:11월11일
*소공동체길잡이 7,8월호 성화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