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
민문자
아버님 어머님
추석을 지낸 지 벌써 열흘이 다 되었네요.
두 분의 맏딸 어벙이가 출세해서
고향에 내려와 아버님 어머님께 고합니다
아버님 생각나시나요?
어느 봄날 여덟 살 된 어벙이 손잡고 강서초등학교에 가셨지요?
‘처음 보는 변소 게다를 신고 들어가 겁이 나서 절절매는 소녀에게
아! 우리 딸에게 고무신을 사 주어야겠구나!’ 하셨지요.
손가락 열도 못 세고 제 이름자도 못 쓰고 학교가 무엇인지 개념도 모르면서 학교에 입학했네요.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발표하는 날 아침 밥상에서 웃으시며 하신 말씀은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 뚝 떨어져라!’
그리고 입학금이 걱정되셨던 아버지 아랫목에 누워계시면서 저에게 받아쓰라고 이르신 편지 내용은
‘작은아버지 제가 청주여중에 합격했어요. 작은아버지께서 아버지께 말씀 좀 해 주세요.
돼지새끼를 팔아서라도 문자 중학교에 입학시켜주라고요.’
그리고 추운 눈보라 맞으며 6km를 걸어 다닐 것을 염려하시고 값비싼 모직 머플러는 못 사주시고
융머플러를 사다 주셨지요. 저는 그 머플러를 지금도 이렇게 간직하고 있답니다. 아버지!
그렇게 저를 사랑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느 겨울밤 마실 가셨다 밤늦게 들어오셔서
어머니와 나누시던 대화를 제가 엿들었네요.
농사일이 힘에 버거우셨던지 ‘나는 문자 데리고 청주에 나가 책방이나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러시던 아버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인명은 재천이다.’ 일갈하고 떠나셨지요.
지금은 서른아홉 살이면 결혼 안 한 사람도 많답니다. 서른다섯 꽃다운 어머니에게
어찌 저희를 맡기고 떠나셨나요?
그 누구보다도 우애롭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어머니께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고생하시며
저희를 지혜롭게 길러주시는 데 큰 힘이 되셨지요. 숙부와 숙모의 도움 덕분에 저희 사 남매 잘 성장해서
모두 대학교육까지 마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자식 낳고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 두 분 부모님의 양질의 유전자를 받았으므로 누리는 행복이기도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남 앞에서 늘 주눅 들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던 어벙이는 배우자를 잘 만나 그가 이끄는 대로
생활하다 보니 늙도록 평생 학교와 가까이하고 공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문단에 이력서를 올리고 열 권의 책을 펴내면서 지난해는 ‘한국현대시 작품상’이라는
제법 상다운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제 못난이 어벙이가 남 앞에서도 말 몇 마디는
제법 할 줄 알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저희를 기를 때에
‘그저 남의 눈에 꽃으로 보여라, 잎으로 보여라.’ 라고 주문을 외신 덕인가 합니다.
아버님 어머님이 생존해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오늘은 강서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 주로 저의 작품이 수록된 책과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서적 백여 권을 강서초등학교 도서관에 기증하는 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하고 왔습니다.
모교의 이번 행사 주인공의 한사람으로 참석한 저의 가슴은 금의환향한 듯 했습니다.
64년 전 초등하교 졸업식 때 오형식 교장 선생님께서 해주신 당부 ‘학행일치, 배운대로 행동하라.’
평생 제 가슴에 살아 있는 이 귀한 말씀을 후배들에게도 알려달라고 했네요.
저는 지금까지 잊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습니다.
빈한해서 중학교 입학을 겨우 하고 고등학교 때도 학자금 일부면제를 받고 교육대학 입학금과 등록금도
숙부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공부를 했지요.
결혼이후에도 음으로 양으로 숙부님께서 돌보아 주신 은혜 하늘같으나 제대로 갚지 못 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이제 한자리에 이렇게 누워 계신 걸 보면 그저 애련할 뿐입니다.
영적인 부모님 계신 세상은 가늠키 어려우나 늘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부디 앞으로도 저희 사남매 정신과 육체 모두 건강한 자손들 대대손손 점지해 주시며
그곳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21년 9월 30일 맏딸 문자 올림
첫댓글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 모든 물자가 전쟁통에 귀하던 시절
고무신도 귀했던 시절 학교에 입학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