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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Five Books |
# of Times Cited |
Mere Christianity (Lewis)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
20 |
My Utmost for His Highest (Chambers)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
12 |
Knowing God (Packer)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임스 패커) |
10 |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기독교 강요> (요한 칼빈) |
9 |
The Brothers Karamazov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
8 |
Top Five Authors |
# of Times Cited |
C.S. Lewis (C.S. 루이스) |
39 |
Fyodor Dostoyevsky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12 |
J.I. Packer (제임스 패커) |
12 |
Oswald Chambers (오스왈드 챔버스) |
12 |
Augustine (어거스틴) |
11 |
“책은 시간과 세대를 가로질러 우리 영혼에 사상과 감성과 본질을 전달한다.”-필립 얀시
<크리스천 리더 22인이 말하는 내 영혼을 바꾼 한 권의 책(위즈덤로드)>이 발간됐다.
책에는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등 금세기 영·미권 최고의 크리스천 리더 22인이 꼽은 ‘나를 변화시킨 책’들이 수록돼 있다. 또 풀러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Fichard Mouw)나 워십리더이자 피아니스트인 페르난도 오르테가(Fernando Ortega), 윌로크릭교회 빌 하이벨스(Bill Hybels)나 동기부여 전문가 지그 지글러(Zig Zigler) 등 136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추천한 ‘자신의 신앙과 삶에 영향을 준 책 3권’도 부록에서 소개된다.
“성경을 제외하고, 당신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줬던 책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 결과다. 가능하면 세 권 이하로 대답해달라는 것 외에는 반드시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하는 책이어야 한다는 제한조차 두지 않았다.
서문을 쓴 필립 얀시(Philip Yancey)나 책을 편집한 스캇 라슨(Scott Larsen) 모두 책 읽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책의 방점 역시 거기에 찍혀있다. 필립 얀시는 “서구 문화가 하루종일 안락의자에 파묻혀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랩 음악을 듣고, <서바이벌> 같은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의 재방송이나 보는 또다른 암흑시대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며 “중세 암흑시대의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문학과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어쩌면 교회가 다시 부름받게 될지 모르겠다”고 현 세태를 개탄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독서 경향은 편중되고, 흥미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194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존 스타인벡, 윈스턴 처칠, 윌리엄 서머싯 몸 등이, 1970년대 후반의 베스트셀러 작가들로는 헤밍웨이, 헨리 그린, 존 업다이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톨킨 등이 있었지만. 1990년대에는 10년간 베스트셀러 50권 가운데 41권이 법정 스릴러 전문가인 존 그리샴, <쥬라기 공원>을 쓴 마이클 크라이튼 등 6명의 저자들이 쓴 것이었다.
얀시는 “우리는 독서 경향이 이렇게 변한 것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차거나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결연히 노력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하기 원한다면 먼저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기독교계 명사들의 인생을 바꾼 책들을 만나는 일보다 더 좋은 출발은 없다”고 말한다.
스캇 카슨은 “무엇을 읽을지 결정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데, 영이 피폐해질 만큼 우리는 위대한 기독교 성인들의 저작을 무시한다”며 “현대 작가들의 저작 중에는 성인들의 것만큼이나 위대한 책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작가들의 글만 제한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거든다.
그래서 현대 작가들도 옛 글들을 자주 인용하는데, 그들이 인용하는 옛 글들에는 단절된 시간을 연결시키고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먹이는 거의 잊혀진 작가들의 지혜도 포함돼 있다. 카슨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글과 지혜는 오래전 거의 모든 서점 선반에서 사라지거나 오늘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저자, 성인, 그리고 사상가들에게서 나왔다.
예를 들면 지난 1974년 발표된 ‘로잔 언약’ 핵심 입안자이자 <기독교의 기본 진리(생명의말씀사>, <그리스도의 십자가(IVP)> 등 명저를 저술한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J. C. 라일 주교의 <거룩>을 꼽았다. 캠브리지대학 시절 영적으로 연약해 거룩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을 소개받았으나, 이 책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거룩을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거룩>은 비록 쓰인지 100년도 더 지났지만, 결코 식상한 책이 아니다”며 “그의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수고 없는 이득은 없다’는 주제를 주목해 보라”고 권한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상임 편집위원이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을 쓴 제임스 패커는 ‘잘 알려진’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추천했다. 고전인데다 굉장히 두껍고 방대한 내용인 이 책에 대해 “지난 세월을 회고해 볼 때 <기독교 강요>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며 나쁜 영향을 끼치는 세상의 것들을 뛰어넘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며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의 기독교적 틀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22+136명에 달하는 지도자들은 독특한 은사와 하나님의 인도와 지혜를 통해 무려 710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많은 저자들에게 선택받은(?) 저자는 누구일까? 얀시는 “이 책을 읽으면서 C.S. 루이스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며 “그는 <순전한 기독교>, 즉 문화와 교단을 초월하는 공통적인 믿음의 핵심에 초점을 맞추고 반복되지 않는 수려한 문체로 영원한 진리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고 답한다.
카슨은 “당신이 서점의 서가를 뒤지며 책을 찾을 때, 이 책에 들어있는 간증들이 당신을 안내하도록 내버려 두라”며 “비록 당신이 읽는 책들이 하얀 페인트통에 떨어지는 한두 방울의 빨간색 페인트처럼 아주 미세한 변화만 줄지라도, 결국 삶의 방향을 바꿔주는 몇 권의 책을 발견하게 된다”고 제안한다.
아직 독서의 계절은 오지 않았지만, 휴가철 한 권의 책을 들고 떠나기 위해 여기 소개된 710권 중 한 권을 찾으러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 보는 건 어떨까.
작성자: 이대웅 기자
작성일: 2010년 7월 6일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9496)
한국서 되살아난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 ‘나의 최선을 드린다’ 영원한 울림
C.S. 루이스를 새롭게 만나다!
서평: 조지 세이어의 <루이스와 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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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사 | |
C.S. 루이스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까운 친구에게는 잭(Jack)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모의 사망을 계기로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인 톨킨과 다른 친구들의 영향으로 30세 때인 1929년 성공회 신앙을 받아들여 성공회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 동아리인 잉클링스의 멤버였으며,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톨킨과 우정을 유지했다. 그는 개신교, 성공회, 로마 가톨릭 등 기독교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기독교 변증과 소설, 특히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하다.
루이스는 1898년 11월 29일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루이스의 아버지 알버트 제임스 루이스(1863 - 1929)는 사무 변호사였고, 루이스의 할아버지 리차드는 19세기 중반에 웨일즈에서 아일랜드로 이사했다. 루이스의 어머니 플로런스 오구스타 루이스 니 해밀턴(1862 - 1908)은 아일랜드 성공회(Church of Ireland)사제의 딸이었다. 루이스는 한 명의 형이 있었고, 워렌 해밀턴 루이스이다. 루이스가 4살 때 그의 개 잭시(Jacksie)가 차에 치어 죽었는데, 그 때부터 루이스는 자기 이름을 잭시라고 했고 나중에는 잭(Jack)으로 알려졌다. 그 후 루이스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잭이라고 불렸다. 루이스가 7살 때 루이스의 가족은 벨파스트 동부 스트랜타운에 있는 '리틀 레아'로 이사했다.
루이스는 처음에는 개인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어머니가 암으로 죽기 직전인 1908년에 윈야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루이스의 형은 3년 먼저 그 학교에 등록해서 다니고 있었다. 그 학교는 얼마후 학생 수가 감소하여 폐교되었고, 로버트 카프론 교장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그 학교는 ”벨센”(Belsen, 나치의 수용소)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 당시 윈야드 학교의 분위기로 인해 루이스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 알랜 제이콥스의 견해가 있다. 윈야드 학교가 폐교된 후, 루이스는 집에서부터 1마일 거리에 있는 캠벨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호흡기 질환 때문에 몇달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요양원 마을 워스터쉐어 맬번으로 갔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체르보그 하우스 학교를 다녔다. 체르보그 하우스 학교는 루이스의 자서전에 '차트레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913년 9월에 루이스는 맬번 칼리지에 입학하여 다음 해 6월까지 다녔다. 이 기간동안 15살 루이스는 어린시절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신화와 초자연적인 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스는 맬번 칼리지를 떠난 후, 루이스 아버지의 옛 스승이면서 러건 칼리지의 학장인 윌리엄 커크패트릭에게 배웠다.
소년 루이스는 사람을 닮은 동물을 매우 좋아했고, 비트릭 포터 이야기에 빠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직접 동물 이야기를 상상해서 글로 쓰기도 하였다. 루이스는 형 워니와 함께 동물들이 다스리는 '복센 세계'를 창작하기도 했다. 루이스는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루이스의 아버지 집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루이스가 읽지 않은 책 한권 찾기는 풀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였다.
루이스가 십대 소년일 때, '노던니스(Northernness)'라는 스칸디나비아 고전 문학의 시나 전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전설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루이스는 '기쁨(joy)'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루이스는 자연에 대한 애정도 컸다. 루이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은 곧 북쪽(the North) 이야기였고, 북쪽 이야기는 곧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십대 때 쓴 글은 복센 이야기로부터 멀어졌고, 북유럽 신화나 자연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담은 서사시나 오페라 같은 다른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커크패트릭에게 배우면서 그리스 문학과 신화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논쟁과 추론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1916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은 다음 해, 루이스는 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자원입대하였고, 서머셋 보병 연대 서드 배탈리온에서 장교로 복역하였다. 루이스의 19번째 생일날 프랑스의 섬므 밸리의 최전선에 나가 참호전을 겪었다.
1918년 4월 15일, 루이스는 독일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쉬는 동안 아일랜드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울증을 겪었다. 그 후 10월에 복귀하여 영국 앤도버로 발령을 받았다.
1952년 9월 루이스는 조이 데이빗먼(Joy Davidman)이라는 여성을 처음으로 만난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는 무신론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조이는 미국의 소설가인 빌 그레셤(Bill Gresham)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시인이었던 조이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경을 걷고 있었고, 부부는 잠정 별거에 합의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된 것은 1950년에 조이가 루이스에게 편지를 쓰면서부터이다. 1946년경 조이는 미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을 하는데 루이스의 책이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편지는 명민함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지적인 것이어서, 루이스의 눈에 금방 들어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적 교류의 차원이었다. 조이는 1953년에 두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다. 조이가 이혼을 한 것은 이듬해인 1954년의 일이었다. 단순한 우정을 넘어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의 일로 알려져 있다.
1956년 영국 정부가 조이의 비자를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자 루이스는 그녀에게 영국 시민권을 얻게 해주기 위해 혼인 신고를 하기로 했다. 쉰 살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아온 루이스를 곁에서 지켜 본 친구들 가운데는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루이스는 혼인 신고가 조이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56년 10월 조이가 골수암 판정을 받게 되자 루이스는 깊은 충격에 빠진다. 루이스의 어머니 또한 그가 어렸을 때 암으로 사망했다. 루이스의 문학적인 표현을 빌자면, 죽음의 신이 연적이 된 상황에서 조이에 대한 루이스의 사랑은 급속히 깊어졌다. 두 사람은 1957년 3월 조이의 병실에서 성공회(Anglican) 혼인예식에 맞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조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결혼식 이후 한때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1959년 가을에 골수암이 재발했다. 조이 데이빗먼 루이스는 이듬해인 1960년 7월 세상을 떠난다.
C. S. 루이스는 대한민국 기독교 출판계에서도 인기 있는 작가이다. 그 실례로《순전한 기독교》(원제:단순한 그리스도교,The Mere Christianity)등의 일부 저작들이 영국 C. S. 루이스 협회와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은 홍성사에서 출판하고 있는데, 이는 옥명호 당시 편집장(현재 좋은 씨앗출판사 편집장)이 대학생 시절 우연히 성 바오로서원[1]에서 읽은 C. S. 루이스의 작품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2006년 4월호 《기독교사상》에 《순전한 기독교》를 번역한 이종태 목사(장로교), C. S. 루이스 팬인 옥명호 좋은 씨앗 출판사 편집장 등이 C. S. 루이스의 신학과 삶에 대해서 쓴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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