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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가 공자를 사숙해 유학의 아성(亞聖)이 되었듯이 정약용은 성호 이익(사진)을 사숙하면서 실학의 최고 학자가 될 수 있었다. |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으로 당시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중심인물이었다. 이가환과 성호학파의 지식인 그룹을 통해 이익의 학문 세계를 접한 정약용은 비로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과 사회개혁에 대한 구상을 통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서양의 과학기술 및 신문명을 수용하는 열린 마인드를 갖추게 된다. 이가환과 성호학파 지식인들과 함께 토론하고 또 이익이 남긴 유고(遺稿)들을 공부하면서 정약용은 실학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스스럼없이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배우다)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고 말했다. 맹자가 공자를 사숙해 유학의 ‘아성(亞聖)’이 되었듯이 정약용은 성호 이익을 사숙하면서 ‘실학의 최고 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생(儒生)에 불과했던 정약용에게 실학의 정신과 방법으로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큰 꿈을 갖게 한 인물이 성호 이익이었다면, 그와 같은 큰 꿈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정약용을 가르치고 지원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정조대왕이었다.
정약용은 나이 22세 되던 1783년 소과(小科)에 합격한 유생들이 임금에게 사은(謝恩)하는 행사가 열린 창경궁 선정전에서 정조대왕을 처음 만났다. 당시 정조대왕은 정약용보다 10살 많은 32세였다. 이때 정조대왕은 정약용에게 얼굴을 들라 하며 나이를 묻는 등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명군(明君) 정조대왕이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정약용은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대과(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정약용은 그 후 수차례의 실패 끝에 28살이 되는 1789년 비로소 대과에 합격해 조정에 출사(出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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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은 정조대왕(사진)과의 만남을 통해 성호 이익을 사숙하면서 품은 큰 뜻을 현실 정치에서 하나 둘 실현해나가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
정조 즉위 6년째인 1781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20여년 동안 초계문신에 선발된 관료들이 13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규장각이 길러낸 이들 ‘개혁 인재’는 본래 정조가 뜻한 대로 ‘새롭고 참신한 개혁정치 세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이 중 정약용은 정조가 가장 총애한 ‘최우등 개혁 인재’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이렇듯 정조대왕과의 만남을 통해 성호 이익을 사숙하면서 품은 큰 뜻을 현실 정치에서 하나 둘 실현해나가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정약용은 정조대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 스승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훗날 자신은 “항상 정조대왕의 가르침을 저버릴까 삼가고 두려워하며 살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대왕의 각별한 관심과 총애 그리고 정약용의 개혁적 성향과 남인이라는 출신 배경은 반대파인 노론 세력이 그를 집중적으로 견제·공격하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정조대왕의 24년 치세(治世) 동안 숱한 개혁 노력에도 선왕(先王:영조) 시절 이미 깊게 뿌리내린 노론의 권력 기반은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1800년 정조대왕이 49세의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 개혁정치는 붕괴하고 노론 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재등장한다. 선왕인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필두로 노론 세력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무너뜨리고 개혁정치를 뒷받침한 남인 세력과 젊은 개혁 관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해나간다.
노론이 움켜쥔 탄압의 무기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천주교’ 문제였다. 이미 정조 생전에도 천주교 문제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던 정약용은 이때 벼슬에 대한 모든 뜻을 접고 생가(生家)가 있는 초천(苕川:마현)으로 낙향해 오직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정약용은 자신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는 숙청의 피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스스로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堂號)을 내걸고 또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지어 세상의 비방을 홀로 짊어진 자신의 운명과 노론의 마수(魔手)를 피해 나가려고 했다.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고,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서 하지 않는 일은 그만둘 수 있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이란 항상 그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내켜하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중단된다. 반면 하고 싶은 일이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또한 때때로 그만둔다. 이렇다면 참으로 세상천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내 병은 내가 스스로 잘 안다. 결단력이 있으나 꾀가 없고, 선(善)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을 모른다. 마음 내키는 대로 즉시 행동하며 의심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스스로 그만둘 수 있는 일인데도 마음이 움직이면 억제하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도 마음에 걸려 찜찜한 구석이 있게 되면 그만두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 돌아볼 줄 몰랐다. 서른이 넘어서 지난날의 잘못을 깊게 깨달았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선(善)을 끊임없이 좋아하였으나 세상의 비방을 홀로 짊어지고 있다. 이것이 내 운명이란 말인가! 이 모두가 타고난 내 본성 때문이니, 어찌 내가 감히 운명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나는 노자(老子)의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與兮若冬涉川),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猶兮若畏四隣)”이라고 했다. 이 두 마디는 참으로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싶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물이 뼈를 에는 듯 차갑기 때문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건너지 않는 법이다. 또한 사방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남의 시선이 자신에게 미칠까봐 염려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나서지 않는 법이다.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경전(經典)과 예절(禮節)에 대해 같음과 다름을 논하려고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 않아도 해로움이 없다면 부득이한 일이 아니다. 부득이한 일이 아니라면 또한 그만두어도 된다.
다른 사람을 논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려 조정 신하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려고 하다가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이 알까 두려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운 일은 마음에 크게 거리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크게 두려움과 꺼림이 있다면 또한 그만두어야 한다.
진귀하고 즐길만한 옛 골동품을 두루 모아볼까 하다가 이 또한 그만둔다.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공금을 멋대로 쓰고 훔치겠는가? 이 또한 그만둔다. 온 마음에서 생겨나고 뜻에서 싹튼 것은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만두고, 아주 부득이한 경우일지라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는 일 또한 그만둔다. 진정 이와 같이 한다면, 세상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내가 이러한 뜻을 깨달은 지 이미 6∼7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뜻을 당(堂)에 이름 붙여 달려고 했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만두었다. 이제 고향 마을인 초천(苕川)에 돌아와서야 문미(門楣)에 써서 붙이고, 더불어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다산시문집』, ‘여유당기(與猶堂記)’-
정녕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는(猶)’ 삶은 정약용이 남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짊어져야 할 운명이었을까? 그러나 그토록 신중하고 경계하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라이벌이 될 수 있는 당파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노론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조선에서 ‘남인(南人)으로 산다는 것’은 그토록 가혹한 일이었다.
다산(茶山)…유배지 만덕산(萬德山)의 ‘차(茶) 나무’와 ‘팔경(八景)’
노론은 정조대왕이 사망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801년 2월 천주교 신앙을 빌미삼아 정조시대 남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혁세력들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노론의 칼날은 특히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용(丁若鏞)의 죄를 어찌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사학(邪學)은 반드시 나라를 흉악한 재앙(災殃)의 지경에 이르도록 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가환은 흉악한 무리의 자손(子孫)으로서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다가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유혹하고는 스스로 교주가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구입해온 요망한 서적(妖書)을 그 아비에게 전하고, 그 법을 수호(守護)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가계(家計)로 삼았습니다. 정약용은 본래 두 추악한 무리와 어울리고 마음을 서로 연결하여 한패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들 세 흉인은 모두 사학(邪學)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청하옵건대 전(前) 판서 이가환, 전(前) 현감 이승훈, 전(前) 승지 정약용을 빨리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엄중하게 국문(鞠問)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한 다음 신속하게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으소서.”
-『순조실록(純祖實錄)』1년 2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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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신앙을 빌미삼아 노론세력이 일으킨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정약용의 집안은 몰락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매형 이승훈(오른쪽)과 셋째 형 정약종(왼쪽)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
정약용의 집안은 몰락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매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고,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현재 전남 완도군 신지도)로, 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정약용 자신은 장기현(현재 경북 포항시 장기면)으로 유배형을 당했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해 10월에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연경(북경)의 프랑스 신부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정약용은 강진으로 그리고 정약전은 머나먼 섬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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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의 강진 유배 생활을 얘기할 때 일반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단어는 ‘다산초당’이다. |
처음 정약용은 마땅한 거처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나마 처음 거처라고 정한 곳이 동문 밖 주막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스스로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비록 비참한 유배객일지라도 선비의 품격과 아취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때 사의(四宜)란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 일을 뜻하는데 ‘담백한 생각, 장엄한 용모, 과묵한 언어, 신중한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여유당과 함께 정약용을 대표하는 다산(茶山)이라는 호(號)는 이렇듯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고 있던 유배 생활 도중에 탄생했다. 다산(茶山)은 지명(地名)이다. 즉 정약용이 유배당한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소재한 만덕산(萬德山)의 또 다른 이름이 다산(茶山)이다. 이곳에 수많은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別稱)이다. 평소 차를 즐기고 주변에 전파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차 마니아’ 정약용은 혹독하고 가혹한 유배지에서 자신에게 아낌없이 차를 제공해주는 만덕산을 애호(愛好)하게 되었고, 이에 그 산의 별칭인 다산(茶山)을 기꺼이 자호(自號)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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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은 지명이다. 정약용이 유배당한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소재한 만덕산(사진)의 또 다른 이름이 다산이다. |
실제 삼국 시대와 고려 때까지 성행했던 ‘차 문화’는 조선에 들어서면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더러 차를 즐겨 마신 사대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기호나 취향에 불과했지 ‘문화’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茶山)에서 직접 차를 제조하고 주변 인물과 사찰(寺刹)로 차를 전파하기 전까지 조선에는 이렇다 할 ‘차 문화’가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당한 지 4년째 되는 1805년 우연히 만덕산에 자리하고 있는 백련사라는 절에 놀러 갔다가 주변에 야생 차가 무수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 정약용은 백련사의 승려인 아암 혜장에게 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알려준 차 만드는 방법은 이후 강진과 인접해 있는 장흥의 보림사와 해남의 대둔사(대흥사)에까지 전해졌다.
특히 정약용은 유배 생활 도중 얻은 위장병을 치유할 약용(藥用)으로 차를 마셨기 때문에 만약 차가 떨어지면 차 제조법을 가르쳐 준 아암 혜장에게 ‘걸명시(乞茗詩)’나 혹은 익살스럽게도 상소문의 형식을 띤 ‘걸명소(乞茗疏)’를 보내 차를 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아암 혜장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청한 이 시는 최초의 ‘걸명시(乞茗詩)’로도 유명하다.
“전해오는 소문에 석름(石廩) 밑에서 / 예로부터 좋은 차(茗)가 나온다는데 / 이 시기가 보리 말리는 계절이라 / 기(旗)도 피고 창(槍) 역시 돋았겠구나. / 곤궁하게 살면서 굶주림이 습관이라 / 누리고 비린내 나는 것은 비위가 상해 / 돼지고기와 닭죽은 / 너무 호사로워 함께 먹기 어렵네 / 다만 묵은 체증(滯症)에 몹시 괴로워 / 간혹 술 취하면 깨지 못한다네 / 숲에 사는 스님의 차(茶)에 도움을 받아 / 육우(陸羽 :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다신(茶神)이라 불림)의 솥에다 조금이나마 채웠으면 / 차를 베풀어 진실로 병만 낫는다면 /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준 것과 무에 다르리 / 모름지기 불에 찌고 말리기를 법식(法式)대로 해야 / 차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다네.”
-『다산시문집』, ‘혜장 스님에게 보내 차를 애걸하다(寄贈惠藏上人乞茗)’-
그리고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7년째 되는 1808년, 나이 47세 때 정약용은 귤동 마을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외가로 먼 친척뻘이 되는 윤단(尹慱)이라는 사람의 산정(山亭)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茶山草堂)이 된다.
다산초당에 기거한 이후 정약용은 약천(藥泉)이라 이름붙인 샘을 파고 차를 만드는 맷돌과 차 바구니, 차 화로 그리고 다조(茶竈) 등을 갖추어 놓고 마침내 차를 필요한 만큼 스스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만덕산(다산) 아래 자리한 초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유배지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사라져버린 조선의 차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고 전파한 ‘차 마니아’ 정약용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꽃핀 ‘차 문화’는 이후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며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차 나무와 함께 정약용이 끔찍이 사랑했던 다산(茶山:만덕산)의 또 다른 절품(絶品)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 곧 ‘팔경(八景)’이다. 차와 더불어 팔경(八景)은 고단한 유배지의 삶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활력소와 같았다.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는 ‘다산팔경 노래(茶山八景詞)’라는 시를 보면 정약용이 얼마나 이 풍경에 매혹 당했는가를 알 수 있다.
①불장소도(拂墻小桃) : 담을 스치고 있는 작은 복숭아나무
“산허리를 경계삼아 널찍하게 탁 트인 담장 / 붓으로 그린 양 봄빛 완연하네 / 어찌 그리 사랑스럽나 싱그러운 산에 비가 멎고 난 후 / 작은 복숭아나무 몇 가지에 복사꽃 어여쁘게 펴 있는 모습.”
②박렴비서(撲簾飛絮) : 발(簾)에 부딪치는 버들가지
“산 속 집 발(簾)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잘고 고운 무늬 / 다락(樓) 머리에 살랑대는 버들가지 그림자로구나 / 산골짜기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는 게 아니라 / 봄바람이 버들가지 흔들어 맑은 연못물 희롱하네.”
③난일문치(暖日聞雉) : 따뜻한 날 들려오는 꿩 울음소리
“우거진 칡덩굴 아름다운 햇빛 아래 / 작은 화로에는 차 끓이는 연기마저 가느다랗게 끊겼는데 / 어디에서인가 울어대는 세 마디 꿩 소리가 / 구름 속 지게문(牕) 아래 잠깐 든 잠을 바로 깨우네.”
④세우사어(細雨飼魚) : 가랑비 내리는 날 물고기 먹이 주기
“황매(黃梅) 나는 5월 가랑비에 수풀가지 젖으면 / 물 위에는 동그란 물방울 천 개나 일지 / 저녁밥 서너 덩어리 일부러 남겨두었다가 / 난간에 기대앉아 어린 물고기에게 밥을 주네.”
⑤풍전금석(楓纏錦石) : 비단 바위에 얽혀 있는 단풍나무
“옅은 구름에 살짝 덮인 올망졸망 바위무더기 / 가을 지나 바위 옷에 동그란 무늬 자라날 때 / 연지 바른 붉은 잎이 무수하게 덮으면 / 푸른색이 짙은지 붉은색이 옅은지 구분하기 어렵네.”
⑥국조방지(菊照芳池) : 연못에 비친 국화(菊花)
“바람 고요한 연못 위 닦아놓은 거울 모양 / 이름난 꽃 기괴한 돌 물 속에 가득하네 / 바위 틈 병두국(幷頭菊 : 한 줄기에 두 송이 꽃이 핀 국화)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 / 물고기 뛰어놀면 작은 물결 일어날까 두렵구나.”
⑦일오죽취(一塢竹翠) : 언덕 위 푸르른 대나무
“눈 덮인 산등성이 음지에도 바위 기운 푸르고 / 높은 가지에 잎 떨어지느라 새로이 소리날 때 / 언덕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푸르른 어린 대나무가 / 서루(書樓)의 세밑 풍정(風情)을 붙잡고 있네.”
⑧만학송도(萬壑松濤) : 깊은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
“작은 시내 휘돌아 맑은 산을 감싸 안고 / 푸른 갈기 붉은 비늘 만 개의 장대 모양 우뚝 솟아(해송(海松)이 마치 대나무 장대와 같다) / 거문고와 피리 소리 들끓는 곳 바로 여기 있으니 / 온 집이 차갑도록 하늘 높이 바람이 부네.”
만약 앞으로 다산초당을 찾아갈 독자가 있다면 정약용이 남긴 차향(茶香)과 함께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다산팔경(茶山八景)’을 제대로 감상할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한다.
사암(俟菴)…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며
정약용은 생전에 10여개가 넘는 호를 썼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여유당·다산과 함께 삼미자(三眉子), 열수(洌水), 철마산초(鐵馬山樵), 탁옹(籜翁),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苔叟), 문암일인(門巖逸人) 사암(俟菴) 등이 정약용이 남긴 호다.
이 중 정약용이 처음 사용한 호는 ‘삼미자(三眉子)’였다. 정약용은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고 난 후 남은 마마 자국 때문에 눈썹이 세 마디로 나뉘었는데, 이를 두고 자신의 호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했다. 얼굴의 흉터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특징으로 삼을 만큼 정약용은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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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정약용의 고향 마현(馬峴:마재)은 뒤로는 천마(天馬)가 날아오르는 듯한 형세의 철마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풍경 좋은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따라서 ‘열수(洌水)’와 ‘철마산초(鐵馬山樵)’라는 호에서는 고향 마을을 끔찍이 사랑했던 정약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예로부터 정약용의 고향 마현(馬峴:마재)은 뒤로는 천마(天馬)가 날아오르는 듯한 형세의 철마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풍경 좋은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따라서 ‘열수(洌水)’와 ‘철마산초(鐵馬山樵)’라는 호에서는 고향 마을을 끔찍이 사랑했던 정약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을 ‘대나무 껍질(籜)’에 빗대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한 ‘탁옹(籜翁)’이라는 호에서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경세가(經世家)의 기개와 포부를 타고 났지만 역적(逆賊)과 폐족(廢族)의 신세로 전락해 머나먼 유배지로 내쫓겨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정약용의 비애(悲哀)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어난다. 정약용은 과연 이들 10여개의 호 중에서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호(號)로 기억해주기를 원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남달리 자의식이 강했던 정약용이 후세 사람들에게 특별히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호(號)를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려면 정약용이 직접 쓴 자신의 묘지명, 즉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字)는 미용(美庸)이며, 호는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고 음직(蔭職)으로 출사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며, 영종(英宗 : 영조) 임오년(1762, 영조 38년) 6월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가의 마현(馬峴) 마을에서 낳았다.”
-『다산시문집』,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壙中本)’-
여기에서 정약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산이나 여유당이 아닌 아주 생소한 ‘사암(俟菴)’을 자신의 호(號)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정약용은 이 ‘광중본(壙中本)’보다 더 자세하게 자신의 인생 역정을 기록한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집중본(集中本)’에서는 당호(堂號)가 ‘여유당(與猶堂)’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면서도 여전히 호는 ‘사암(俟菴)’으로 기록했다.
‘사암(俟菴)’은 ‘기다릴 사(俟)’자와 ‘암자 혹은 초막 암(菴)’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정약용은 무엇을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기에 생전에 사용한 수많은 호나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다산’이나 ‘여유당’이 아닌 ‘사암’을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호로 기억해주기를 바랬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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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평생 남긴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는 대부분 18년 강진 유배 생활 도중 탄생했다. |
왜 정약용은 폐족(廢族)의 굴레를 쓴 채 유배객의 신세로 전락해 더 이상 희망이 없던 바로 그때, 보통 사람의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에 이르도록 이토록 저술 및 집필 활동에 매달렸을까? 타고난 지식 욕구 때문이었을까? 혹은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벼슬로는 이루지 못한 명예와 영광을 학문에서나마 얻으려고 했던 것일까? 분명 이러한 욕구와 열정 그리고 명예욕이 정약용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이유는 정조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더불어 꺾여버리고 또 유배형에 처해진 후 현실의 정치무대에서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정약용 자신의 큰 꿈 곧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사회개혁(社會改革)의 의지와 구상을 학문적으로나마 실천하고 완성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현실 정치세계에서는 이미 좌절당한 큰 꿈을 미래의 개혁 세대를 위해 학문적으로나마 준비하고 완성해놓겠다는 의지 때문에 그는 온 힘을 쏟아 저술 및 집필에 매달렸던 것이 아닐까?
유배지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저술 및 집필 활동은-물론 현실 개혁안이었지만-그 뜻과 의지가 보다 더 미래를 향해 있었다고 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호(號)로 소개한 ‘사암(俟菴)’은 바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큰 꿈을 이루어 줄 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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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호(號)로 소개한 ‘사암(俟菴)’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큰 꿈을 이루어 줄 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또한 『마과회통(麻科會通)』류의 저술은 과학기술 특히 의학 분야에 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며 『아언각비(雅言覺非)』나 『이담속찬(耳談續纂)』류의 집필은 문자와 일상생활 속의 언어 및 풍속에 관한 현실 개혁안이자 미래 청사진이었다. 그리고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나 『대동수경(大東水經)』과 같은 저서는 역사 속 강역(疆域)의 변화와 현실 영토 문제를 정확히 다루어 외교 관계와 국토의 효과적인 활용의 미래 청사진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렇듯 정약용은 정조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노론 세력과 세도가문의 권력독점과 수구반동정치로 인해 다시는 자신의 큰 꿈을 현실 정치무대에서 펼칠 수 없다는 엄혹한 상황을 알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최선의 방법을 선택해 묵묵히 나아갔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못다 한 경세치용과 사회개혁의 큰 꿈을 현실 정치무대에서 이루어 줄 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