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KBS와 MBC 사장들은 90여일 앞으로 다가온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초조해하고 있다. 밴쿠버동계올림픽의 쓰라린 추억 때문이다. SBS에 독점중계권을 뺏긴 KBS와 MBC는 이정수(쇼트트랙) 선수의 첫번째 금메달 소식을 메인 뉴스 프로에서 각각 18초, 27초간 단신 형식으로 보도해 시청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나중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KBS 김인규 사장은 지난 2일 창립 기념식에서 "SBS가 신나게 동계 올림픽을 독점 중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울분을 삼키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KBS 사원이 아닐 것"이라고 했고, 2월 말 간부회의에서도 "SBS의 남아공 월드컵 단독 중계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라"고 역설했다. 노조의 반발로 아직 사무실에 출근도 못한 김재철 MBC 신임 사장 또한 3일 여의도 방송센터 마당 임시 천막에서 "세금을 들여 양성한 국가대표들이 출전하는 경기를 특정 방송이 독점 중계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바로잡겠다"고 했다. 양사(兩社)는 최근 자사(自社)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의 보편적 시청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동 중계가 바람직하다"는 여론을 확산시키는 선전전(宣傳戰)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에서 3사가 극적 합의를 통해 공동 중계에 나설 경우 실제 국민들의 보편적 시청권이 확보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SBS는 이미 6500만달러(약 750억원)의 중계권료를 투자했다. 3사가 공동 중계를 하게 될 경우 KBS와 MBC는 최소 200억원 이상의 금액을 SBS에 지급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규모의 거액을 쏟아부은 3사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광고 수익을 통해 손익을 맞추려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지난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수없이 지적됐던 무리한 겹치기 편성으로 귀결될 것임이 자명하다.
올림픽과 달리 월드컵 예선 48경기 중 동시에 벌어지는 경기는 16개에 불과하다. 한 방송사가 단독 중계한다고 해서 '다양한 경기를 못 본다'는 얘기가 나올 이유가 적다는 뜻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 방송위원회는 "TV 3사가 동시 생중계했을 뿐 아니라 재방송을 통해 3회 이상 중복 편성한 경우가 전체 중계방송의 85%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중복 편성을 해 다른 프로그램을 보길 원하는 시청자들의 시청권을 빼앗으면서 보편적 시청권 운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 당시 "채널 선택권을 빼앗겼다"는 시청자들 비난도 빗발쳤다. 결국 채널 숫자에 상관없이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경기의 숫자는 별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그런 경쟁을 벌이면서 방송 3사가 독일 월드컵에서 얻은 총 광고 수익은 628억원이었다.
방송 선진국들의 경우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열리면 각 방송사들이 긴밀히 협조해 시청자들에게 최대한의 선택권을 안겨준다. 똑같은 경기 중계를 똑같은 화면으로 여러 채널에서 한꺼번에 쏟아내는 일은 없다. 한국 방송사들이 그런 신사도를 가졌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국민의 보편적 시청권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상업 이익을 추구하는 SBS의 독점도 찜찜하고 남 발목이나 잡으려는 KBS·MBC측의 공동 중계 주장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 시청자들 생각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