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곧 소멸하고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인류를 강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 세계를 통일 할 것처럼 기승을 부리던 사회주의가 1백년의 수명을 다하고 멸망했듯이 민주주의도 수명이 다 되어 멸망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세상에 나온 지가 어언 2백년, 사회주의 보다 1백년이나 더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처럼 멸망하지 않는 이 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인류를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한 주의주장이 아니라 아 직까지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주의주장이 세상에 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도 멀지 않은 장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민 주주의를 대체할 신시주의(神市主義)라는 것이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맞 아야 할 역사적인 현실이다. 신시는 인류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국가형태이다. 우리의 조상 마고 할머니가 삼신산 이 있는 봉래, 방장, 영주에 세우신 인류최초의 사이버국가였다. 그 뒤를 이어 한인 할아버 지가 한국(桓國)라는 이름의 신시국가를 계승하였고, 다음에 한웅 할아버지가 나와서 사이버 국가와 현실국가를 통합한 형태의 발전된 신시국을 태백산과 흑수 사이에 건설하였다. 마지 막으로 단군 할아버지가 조선을 백산 아래에 세우면서 10년마다 한 번씩 신시를 열었다. 신시국은 요새 말로 영토의 개념을 초월한 사이버국가이다.
마고 할머니가 신시국을 세울 때, 후손을 하나로 결속시킨 주의주장이 해혹복본(解惑復本)이었다. <해혹복본>이란 "의혹 을 풀고 원래대로 돌아가라"는 주의주장이었다. 마고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에 사셨던 분이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그때 지구에 는 기상재해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태평양에 있었던 뮤대륙과 대서 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가 덮쳐오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때 살아 남아서 인류의 조 상으로 기록된 분이 태평양쪽에서는 마고 할머니였고, 대서양쪽에서는 멜키지덱이었다. 마고 할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도지(符都誌)에 있다.
멜키지덱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창 세기에 있다. 천문학자에 따르면, 당시에 지구가 당한 재해의 원인은 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세차운동이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 지구의 중심에 서 보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동북쪽으로 23.5도 기울어져 팽이처럼 돌고 있기 때문에 일 어나는 현상이다.
북극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지구는 23.5도에서부터 서 서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23.5도까지 기우러진다. 이때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 황도북극에서 북극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보고, 반대편에 있는 직녀성 쪽으로 쓰러지는 기간을 12500년으로 본다고 한다. 도합 25000년 동 안 지구 중력의 회전축은 지구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동북쪽과 서북쪽을 왔다갔다한다. 이 렇게 회전축의 방향이 변하는 때에 지구가 뒤집어져 천재지변이 일어나 생물이 멸망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말세나 상법시대가 이때이다.
<종말론>의 근거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러 나 북극성과 직녀성이 지구가 쓰러지는 것을 잡아 주므로 매번 뒤집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2000년을 시작하는 금년 춘분날인 3월 20일은 북극성을 향하고 있던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성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직녀성시대로 가기 시 작한 것이다. 일부 몰상식한 종교가들이 지구 멸망의 날로 잡은 날이 사실상 금년 3월 20일 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종교가들이 이날 이전에도 여러 번 지구 멸망의 날을 잡았다. 그러 나 지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시대이다. 지구 중력의 회전축이 직녀 성을 향하고 있었던 때를 선천(先天)이라고 하고,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때를 후천(後天)이 라고 한다. 마고 할머니는 왜 지구가 쓰러져 선천과 후천이 생기는지 그 의혹을 밝히라고 하였고, 후손 이 그가 떠나온 직녀성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를 함축한 말이 <해혹복본 >이다. 그가 그 징표로 제시한 것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돌에 새긴 신체(神體)인 천부삼 인(天符三印)이다. 천부삼인을 그대로 거울에 옮긴 것이 신당에 걸어 두는 명두이다. 명두를 걸어두는 신당을 지었는데, 사방 한 장(丈, 10尺, 3.3m)의 규모 지은 전각이었다. 이 전각을 방장(方丈)이라고 하였고, 방장이 있는 곳을 소도(솟대를 세우는 곳)라고 하였다.
굿을 할 때 쓰는 신장대는 방장에 세운 솟대에서 나온 것이다. 굿상에 올리는 시루에 신대를 꽂는 것은 방장에서 나온 것이다. 시루는 신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루가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 았고,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산을 시루산(烝山, 증산은 임금님 산이라는 뜻이다)이라고 하였 다. 안택굿에서 무당이 신대를 꽂은 시루를 들고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옛날에 상고시대에 임금이 제관이 되어 굿을 할 때 행했던 의식이 그대로 굿에 남아서 전해 오는 것이다.
안택이라는 말이 지금은 한 집안의 평안함을 비는 굿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상고시 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단군왕검이 마고 할머니에게서 전수한 삼신신앙과 한웅 할아버지에 게서 전수한 태백진교를 발전시켜 덕교(德敎, 덕사상)를 만들어 선포하시고 나라의 사대문 안에서 안택을 빌었다는 의미가 있다. 안택(安宅)이란 나라의 서울을 정하기 위하여 방위를 잡는 일이다. 당시에는 북두칠성이 떠오르는 동북간방(東北艮方)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동 북간방에 잡은 터를 서사태방위(西四宅方位)라고 한다. 동북간방에 터를 잡고 사대문을 내는 데, 이때 올린 굿이 안택굿이다. 성주거리에 나오는 성조는 당시에 처음 집을 짓고 궁궐 을 지은 성조 할아버지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내력>이라는 책에 보면, 성조거 리는 반드시 단군왕검을 먼저 청배하여 굿을 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 하면 단군왕 검 때 서울 백산 아래에서 처음 안택한 감격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한웅 할아버지는 신시를 세우고 태백진교(太白眞敎, 참사상) 선포하면서 두 가지 신시나라의 국정지표를 내세웠다. 정치는 화백(和白)으로 하고,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은 책화(責禍)로 한다는 것이었다.
화백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의회제도이다. 책화는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 나라의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제도이다. 앞으로 전 세계는 사이버국가를 창설하자는 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 시대엔 한 국가 가 크게 힘을 쓰지 못한다. 사이버시대엔 어느 나라든 IMF와 같은 국가적인 재난을 당할 수 있다. 주식시장을 통하여 일시에 자본을 빼내 가면 하루아침에 나라가 거덜난다. 우리는 IMF라는 이런 쓰라린 경험을 한 바가 있다. 그래서 모든 나라가 참여하여 단 하나 의 사이버국가를 만들어 자국이 당하게 될 피해를 예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는 법률과 제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사이버국가 의회에는 사이버인간을 대표로 참석시 킨다. 이 의회에서는 다수결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100% 찬성의 화백제도로 운영 이 된다. 100% 찬성이 도출 될 때까지 불찬성에 대하여 단계별로 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자동으로 불이익이 돌아가게 한다. 가령 식량공급을 축소한다던가, 연 료공급을 축소한다던가 하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일시에 시장을 교란하여 국가경제를 파 국으로 몰아가도록 한다. 이리하여 100% 찬성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책화는 책임져야 할 자리에 앉은 사람은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잘못을 저지르면 "통치행위는 처벌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최고 사형까지도 당해야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시대에 부활하는 구원의 여인 '마고'
우리에게 마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민족과 나라는 그들 나름대로 '구원의 여인상'을 가지고 있다.
국민에게 꿈을 주고 결속시켜 줄 '구원의 여인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유한 단 한 분의 여신을 받들어 모시려고 한다. 우리의 선조는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는 민간신앙으로서 삼신할머니인 마고를 받들어 모셔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삼신 할머니를 미신 정도로 취급한다. 이것은 무지에 서 나온 소치이다. 결코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금모낭낭(金母娘娘)이나 서왕모(西王母)를 구원의 여신으로 친다.
일본은 천조 대신(天照大神)을 최고의 여신으로 모신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삼국관계에서도 우리 역사에 마고의 등장은 절박하다. 우리에게는 이들을 초월하는 마고가 있다.
우리가 마고를 부활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고는 후손에게 신표인 삼신을 새긴 '천부삼인'을 전수하고, 모든 종교의 원전이 될 수 있 는 '해혹복본(解惑復本)'을 가르쳤다.
천 부삼인은 인류가 천문을 시작했다는 징표가 된다. 특히 천문이 동이에 의하여 인류 최초 로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천문에서 우주의 원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데, 그 원리가 '천 부경(天符經)'에서 제시하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원리'이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한웅천왕에 의하여 세상을 이끌어 가는 '참사상'인 '태백진교(太白眞敎)' 를 출현하게 하였고, 단군왕검 시대에 가서 덕교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마고의 존재를 우 리의 문화사와 종교사에서 자리 매김 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마고가 후손에게 가르친 '해혹복본'이 '종말론'의 미혹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종교인들 에게 구원의 빛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마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은 시급하다. 마고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부활하도록 도와주면, 마고의 휘하에 금모낭낭이나 서왕모나 천조대신이 무릎을 꿇게 될 것으로 본다.
국가의 형태와 국가의 기능을 초월한 초국가 신시
원래 신시는 각 종족의 대표가 삼신산 아래에 와서 함께 모여 하늘에 제를 지내고 시장을 열어 문물을 교환하였다.
신시는 의회와 시장의 기능만을 갖춘 나라로, 각 종족이 제사를 지 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할 때만 나라로서 의사를 결정하고 시장을 여는 초국가적 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각 종족의 대표가 참석하는 의회를 화백이라고 하였고, 또한 문물 을 배에 싣고 와서, 해변에 당(幢, 깃발)을 꽂아 놓고 서로 필요한 것을 찾아서 교환하는 것 을 시장이라고 하였다.
요 즈음 신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시의 의회기능은 100% 찬성을 도출하는 화백의회제도 였고, 신시의 시장기능은 세금을 바치지 않는 문물교환과 세금을 바치는 문물교환의 2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하가 불어나면 물에 잠기는 신시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신시는 묘도군도
봉래 방장 영주 세 섬은 발해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묘도군도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설을 지상에 제일 처음 발표(愛石 1999. 9월호)한 분이 장동균씨(九山 張東 均 한국애석문화연구소장)이다. 장동균씨는 애석지에 실린 '신시본토기 3 신시의 발생지는 삼신산? 고조선의 뿌리 신시는 바다에서 탄생하였다'는 제목의 글에서 묘도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해도(海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바다(편집자 주, 발해)를 건너가기 전에 봉래가 있고, 그 주변으로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등고선이 꾸불꾸불 보이는 곳이 언덕인데, 제일 높 은 곳이 해발 439m의 주산이다. 최초로 등장하는 청구(靑丘, 편집자 주, 역사서에 기록된 청 구는 지금의 탁록이다. 청구라는 지명이 상나라 이후에 탁록으로 바뀌었다) 땅으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이 해도를 분석하기 위해서 수심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그려 넣은 것이다. 진한 갈색은 육지이며, 살색에 가까운 색깔로 칠한 곳은 수심 15m 이하의 뻘 밭이다. 청색 은 15m이상으로 수심이 깊은 등주수도(登州水道)이며, 급류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된 패수(浿水)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징검다리 같은 발판을 디디고 건너면 수심 3.8m 밖에 안 되는 곶(串)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장산도가 나타난다. 갈색으로 표시 된 곳이 물 밖으로 보이는 섬들이다. 태백산으로 추측이 되는 북장산도 옆에 탱글렁도가 가 깝게 위치하고 있다. 제사를 올리던 장소로 추측이 되고, 탱글렁도 옆으로 청색으로 그려진 곳이 조천지(朝天池)로 추측되는 연못이다. 섬의 주변으로는 동쪽으로 깊은 바다로 보이는 장산수도(長山水道)가 있고, 이 곳에는 어장 이 형성되어 있다. 이 외의 바다는 대부분이 수심이 15m 이내의 낮은 곳이므로 5, 6천년 전 에는 간조시에 모두 물 밖으로 드러나는 뻘 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의 밀물과 썰 물의 차이는 8∼10m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추측이다."
묘도군도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은 '묘도(廟島)'의 '묘(廟, 사당)'자와 탱글렁도의 탱글 렁(하늘)'이라는 문자들이다. '묘'자는 이 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음을 나타내는 문자고 보고, '탱글렁은' '단군'을 의미하는 문자라고 본다. 한국문자학회에 따르면, '묘(廟)자'는 신농 국시대에 나라에서 전욱고양이 임명한 제관이었던 중여곤(衆艅 )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 데에서 생겨난 문자라고 한다. '탱그렁'은 몽골족의 '천공'이나 '천상계'를 의미하는 '탱그리 (Tangri)'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단군왕검은 중여곤의 후손이다.
묘도군도에서 하늘에 제를 지낸 사당을 의미하는 문자인 '묘'자가 발견이 되고, 단군을 의미 하는 '탱그렁이라는 문자가 발견된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그러나 신농국이 생기기 이전에, 신농국의 조상인 고시(高矢)를 농관(農官)으로 썼던 한웅천 0왕이 세운 신시국이 먼저 있었다는 점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 면, 묘도군도를 삼신산으로 보았을 때, 삼신산이 신시이므로, 한웅천왕이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국을 세웠다는 기록의 출처가 묘도군도에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삼신산과 신시씨
규 원사화 단군기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조천석(朝天石)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조천석'은 조천지(朝天池, 장동균씨는 탱그렁도와 북장산 사이에 있는 바다로 비정)에서 찾 아낸 '수석'이 아닌가 한다. 그가 조천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조천석을 방장산에서 방장 에 모신 '삼신의 신체'로 보았던 때문일 것이다. 조천석을 수석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삼각 산 형상의 수석을 삼신산의 모형인 석가산(石假山)으로 보거나, 삼신의 신체로 볼 수 있다.
"수반 가운데 놓여지는 산수경석의 유래가 원지(苑池)문화에서 발생하였음을 발견하였고, 지 당 안에 둥근 섬을 만드는 이유가 삼신산 중에서 한 개의 산을 선택하여 선계(仙界)를 상징 하는 뜻으로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런 삼신산문화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백제시대의 남궁지와 고구려시대 안학궁의 진주지, 신라시대 월지 등에 삼신산을 조성하였 다는 설명이 있다. 원지 안에 조성하는 섬의 숫자가 세 개로 통일되지 않고, 부여 남궁지는 하나, 경지 월지는 다섯(세 개로 보이지만 실제는 다섯 개임), 평양 안학궁터의 진주지는 네 개로 되어 있다.
중국 진시황의 난지궁 연못에는 봉래산이 조성되었고, 한나라의 태액지에는 봉래, 방장, 영주 등의 삼신산이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장동균) 그렇다면 삼신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북애자北崖子가 숙종 2년인 1675년에 저술한 역사서)에 옮겨 쓴 태시기(太始記)와 단군기(檀君記)는 한웅천왕을 신시씨 (神市氏)라고 밝힌다. 따라서 삼신산의 주인에 한웅천왕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천문학에서 찾아야 하는 마고의 신시개천
현대천문학에서는 우주의 역사를 2000년 단위로 끊어서 2000년마다 한 시대로 보고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사자궁시대, 거해궁시대, 음양궁시대, 금우궁시대, 백양궁 시대, 쌍어궁시대, 보병궁시대, 마갈궁시대, 인마궁시대, 천갈궁시대, 천창궁시대, 쌍어궁시대 로 구분하는 12궁시대이다. 12궁시대는 12간지에서 나온 것으로, 사자궁시대는 자(子, 쥐)에, 거해궁시대는 해(亥, 돼지)에, 음양궁시대는 술(戌, 개)에, 금우궁시대는 유(酉, 닭)에, 백양궁 시대는 신(申, 원숭이)에, 쌍어궁시대는 미(未, 양)에, 보명궁시대는 오(午, 말)에, 마갈궁시대 는 사(巳해, 뱀)에, 인마궁시대는 진(辰,용)에, 천갈궁시대는 묘(卯, 토끼)에, 천창궁시대는 인(寅, 호랑이)에, 쌍어궁시대는 축(丑, 소)에 해당한다. 12궁시대 표에 보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이다.
이 시대는 사자궁시대로 12간지는 자(子)에 해당한다. 12간지의 자는 시작을 의미한다. 1년으로 치자면 동지에 해당한다. 동지는 겨울의 긴긴 밤을 끝내고 시작의 눈을 뜨는 때로서 역사를 시작함 을 의미한다. 이고선이 쓴 심당전서(心堂全書) 단서대강(檀書大綱)의 삼황개국기(三皇開國紀)에, 한인천제 가 나라(桓國)를 세운 날을 360 갑자(甲子, 桓紀 9199년) 상달(上月) 3일이라고 하였다. 한웅 천왕이 나라(神市. 배달나라)를 세운 날도 4321년 갑자(神市紀 5898년) 상달 3일 이라고 하 였다. 단군조선의 전신인 단국(檀國, 청구)을 자오지 한웅(치우천왕)이 세운 날도 신시개천 1261년 갑자 상달 3일이라고 하였다.
단군왕검이 장가든 나라인 웅심국은 한인천제의 대를 이어오는 나라로서 단군왕검의 처(하백녀)의 조부 천일태제(天一泰帝)의 나라였다.(주, 이고선 선생의 조선기는 천일태제를 황조고皇祖考, 지일홍제를 황고皇考라고 하였으나, 한단고기 부소보고 금문신고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하면, 천일태제는 처조부, 지일홍제는 장인으로 보아 야 합당하다고 생각되어 그리한 것이다) 천일태제는 한국개천 5941년, 신시개천 1621년, 단국개천 361년 되는 해를 갑자개천원년(甲 子開天元年) 상달 3일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로 하였다. 한국, 신시, 단국, 배달나라 모두가 왕조를 세운 시대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상달 3일을 나라를 세우는 날로 잡았다는 것은 상달이 언제인가를 볼 줄 아는 천문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각 나라가 나라를 세운 당시에는 자월(子月, 11월)을 세수(歲首, 첫 달)로 삼고, 동지 날을 원일(元日, 첫 날)로 잡았다. 이를 보면 동짓달을 시작한 달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1월 상달(지금은 10월을 상달로 한다)를 여러 나라를 거쳐오면서 수천 년 동안 지 켜왔음에도 불구하고 마고의 개천년대와 개천일을 사서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4000∼12500년 전 사이에 지구가 기상이변과 화산폭발로 인류가 전별 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이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대서양 쪽에서는 멜키지덱이, 태평양 쪽 에서는 마고가 역사 기록에 올라 있다.
멜키지덱은 성경의 창세기에 나와 있고, 마고는 우리 의 부도지와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와 있다.
인류역 사의 시작을 12간지의 자(子)로 본다면, 이때에 해당하는 12궁 시대는 사자궁 시대이 다. 사자궁 시대는 12000년 전으로, 인류의 시조인 멜키지덱과 마고시대에 해당한다. 이렇게 역사의 시발을 사자궁 시대에서 시작하면, 9199년 전에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시대는 거 해궁 시대에 해당하고, 5898년 전에 신시를 세운 한웅천왕의 시대는 금우궁 시대에 해당하 고, 4333년 전에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의 시대는 백양궁 시대에 해당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는 쌍어궁 시대를 지나서 이제 막 보병궁 시대로 들어섰으므로. 현재에서 과 거로 12궁 시대를 역추적하면 마고시대에 다다를 수 있다.
그 렇다면 마고시대 언제 인류 최초의 신시였던 삼신나라가 세워졌을까? 그 해답은 한국 신 시 조선 등 모든 나라가 상달 동짓날 나라를 세웠으므로, 갑자년 상달 초3일에서 찾아야 한 다. 마고가 지금으로부터 14000년 ∼ 12000년 전 사람이라면, 그때 갑자년은 12000년 전이어 야 한다.
따라서 12000년 전 상달 초3일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설사 500년의 년차(年差)가 있다고 해도, 동짓달 동짓날에는 변동이 없으므로, 마고의 개천 년대는 12000년∼12500년 전 인 BC10000년∼BC10500년 상달 3일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름 '마고지나'
동이문명을 시작한 마고지나
<동이(東夷)>는 우리의 직계 조상이다. '마고'가 신시를 세우고 그의 후손인 '황궁'과 '유인'과 '한인'과 '한웅'의 대를 이어 '황제'가 역사에 나오기 이전까지 중원 땅을 다스린 인종은 <동이> 이외엔 어떤 인종도 없었다. <동이>가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 문명을 동이문명(東夷文明)이라고 한다.
태초에 동북아시아에는 인류 최초로 동이문명(東夷文明)을 탄생시킨 <동이족>만이 오손도 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천문을 시작하였고, 하늘에 제사 지내기를 시작하였다. 시장을 열어 한 곳에 모이니 이를 신시(神市)라고 하였다. '동이문명'의 탄생을 역경(易經)에서는 지화명이(地火明夷)라고 말한다. '지화명이'란 "땅위 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동이"이라는 뜻이다. 역경에서 동이의 '지화(地火)'가 사국(四國)을 밝힌다고 했다. '지화'가 바로 문명의 모체가 된다.
땅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이 일을 최초로 한 사람들이 <동이>이다. 오늘날 '사국'은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와 이들 세 나라에 기초를 두면서도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도 아닌 제 3의 나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직 '제 4국'이 출현하지 않은 이상, 지금도 이 괘의 효력은 유효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
앞으로 생겨날 제 3의 나라는 3국이 연합하여 만들게 될 미래형의 국가로 해석이 가능 하다. 사이버 상에서 탄생이 가능한 나라가 바로 이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를 <새로 태어나 는 신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앞 으로 <새로운 신시>를 탄생하게 할 뿌리가 될 시원문명(始原文明)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밝힐 '지화'를 어디에서 구해야 할 것인가? 이 지화를 밝힐 사람 들은 <동이>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이것은 국경과 국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핏 줄과 정신이 동이에 맞닿아 있으면 그가 어디에 살고 있든 편을 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이문명을.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황화문명이 우리의 조상이 인류 최초로 탄생시킨 동이문명임을 모르고 한족문명(漢 族文明)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잘못 알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황하유역을 포기하고 한반도로 철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민족이 동에 있었다. 이는 우리 조상이 한족과 겨루어 오면서 사실상 진시황 초기에 조선이 멸망했 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 이후로 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지금의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 두 번째 이유는 동이가 마고지나(麻姑之那), 한국(桓國), 신시(神市), 조선(朝鮮)으로 나 라의 이름이 바뀌면서 최초의 이름인 '마고지나'를 보전(保傳)해 오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마고지나'를 잊어버린 것이다.
'마고지나'는 모든나라의 원형
'마고지나'의 문명은 우리 최고의 조상인 '마고'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 년대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 12000년 전에 해당한다. 이때가 한웅천왕이 신시국가를 세우기 이전에 최초로 세운 신시국가시대였다.
신 시국가는 오늘날의 국가체제와 다른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국가체제이므로 초국가체제(超國家體制)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신시를 표방하고 나선 한웅천왕의 신시시대에 오가(五加)체제에서 우리는 마고시대의 초국가체제를 유추할 수 있다.
<이고선>이 쓴 <조선기>는 단군왕검이 그의 장인인 '지일태제(地一泰帝)로부터 '배달나라 '를 인수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때가 BC2333년이다. 그러나 BC2311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다. '달나라'를 '조선'으로 바꾸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불어나서 오가체제를 유지 할 수 없게 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부여'가 건국되고, 이어서 '고구 려'가 건국된다. 이들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선포한 '고려'가 건국된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면서 여러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하였지만, 단 하나 사라 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마고지나'라는 나라 이름이었다. '마고지나(麻古之那)'란 '마 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 증거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정부에서 부르는 나라이름과 백성이 부르는 나라이름이 달랐던 '고려'
고려에는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의 이름'과 백성이 부르는 '나라의 이름'이 따로 있었다.
' 고려'는 외교문서에나 나오는 국가명칭이고, 백성이 부르는 진짜 나라 이름은 '마고지나'였다. 나라에서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부를 때, 백성은 '고려'라고 부르지 않고 '마고지나(麻古之那)'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고지나'는 고려의 백성이 살고 싶어했던 나라, 현실을 떠나서 찾아가고 싶어했던 고려 백성의 유토피아였다. 왜, 고려엔 '백성이 부르는 나라 이름'과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 이름'이 각각 달랐을까?
이는 고려의 백성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부르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했던 데에서 비롯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려의 백성이 '마고지나'라고 부른 나라는 마고가 인류 최초로 세운 '신시나라'였다.
신 시 는 그 맥을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으로 이어 오고, 다음에 한웅천왕이 세운 신시나라의 체제 로 자리 잡았다가,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이 10년마다 한 번씩 신시를 열다가, 진시황 8년에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백성들은 역사적인 유물이 된 '마고지나'를 놓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고지나'는 언젠가 회복해야 할 고려 사람들의 근원상징(根源象徵)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 당하고, 민족이 역시 남과 북으로 분단 당하고, 외세에 의하여 국 가적인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오늘의 국가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고지나'라는 심원한 근원상징은 우리의 꿈이 되고 나아가서 현실로 성취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고지나'는 땅에서 우주의 중심과 일치하는 곳에 우리의 조상 마고 할머니가 세운 최초의 나라, 지금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나라였다. 영토에 대하여 개념정립이 전혀 아니 되었던 나라,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모이는 사람들의 나라, 초국가적인 나라였다.
이 나라가 앞으로 온 세계 인류가 세우게 될 사이버 국가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시의 원리를 천착해 보는 일이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마고지나'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사유체계가 우주의 원리인 삼태극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삼태극 원리 위에 세워진 나 라가 신시였다. 삼태극의 원리란 음양조화의 원리이다. 이 원리를 원시신앙으로 발전시킨 분 이 마고였다. 그래서 삼신신앙이 나왔고, 삼신신앙의 성지인 <봉래>, <방장>, <영주>의 삼 신산을 기점으로 하여 삼신신앙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마고의 뒤를 이어서, 삼태극의 원리에서 나온 신시의 원리를 삼신철학으로 정리한 분이 한 웅천왕이었다. 그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원리로 신시의 원리를 정리하였다. 이 원리를 국 가체제에 적용하여 화백(和白)과 시장(市場)과 인사(人事)의 세 축을 만들어 이끌어 갔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게 하여 나라가 당하는 자연재해에 대하여 자신을 책화(責禍)로 다스렸다. 이를 공동선(共同善)의 실현, 곧 덕(德)으로 보았다. '마고지나'가 고려시대까지 백성의 마음에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왜소 함과는 달리 선조들의 그 당당한 거대함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무신도에 나오는 '마고','마고'가 인류 최초로 '마고의나라'인 '마고지나'를 세웠다.
고려역사에 나타나는 마고지나
고 려가 원(元)의 속국이었던 시대에, 원은 고려 땅에 정동성(征東省)을 두어 고려를 다스렸다. 고려의 임금은 종(宗)에서 왕(王)으로 격하되었고, 나라의 관리들은 두 패로 갈라져 한 패는 고려에 붙고, 다른 한 패는 원에 붙었다.
원에 붙은 자들은 왕을 배반하고 고려를 배반하였다. 고려사를 개작하여 후대에 전한 조선의 역사가들은 고려의 현실을 과장하여 기록하였다.
임금의 권위를 폄하하였고, 관리를 원의 노예로 만들었다. 고려의 말기는 이렇게 암울한 시 대였다. 그래서 고려의 백성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버리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지 리멸렬 한 고려에서 신시의 근원상징인 '마고지나'가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 이후의 시대인 조선시대와 현 대한민국에서도 어떠한 무게를 지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사 세가 제 36 충혜왕>에 나오는 '마고지나'를 보기로 한다.
"고려사에 고려의 28대 충혜왕은 타락한 인간처럼 기록되어 있다.
원나라에 붙어 종노릇을 하는 <이윤>, <조익청>, <기철> 등이 원나라로 가서 중서성에 왕이 불경스럽다고 모함하 였다. 원 황제는 충혜왕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하려고 <타적>과 <별신가> 등 사신 6 명을 고려로 보냈다. 왕은 백관들을 인솔하고 교외에 나가 원나라에서 도착한 사신들을 영접하였 다.
돌연히 사신 <타적>과 <내주> 등이 왕을 발길로 차고 포박하였다. <신예>라는 자가 병 사들을 매복시켜 원나라 사신들을 도왔다.
아무도 왕의 안위를 위하여 대항하는 자가 없었 다. 백관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고, 칼에 맞거나 창에 맞은 자가 많았고, 2 명은 살해당하였다. <타적> 등은 왕을 급히 말에 태워 그곳을 빠져나갔다.
원 나라에 가서 왕을 모함하였던 <기철>과 <홍빈>이 왕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던 원나라 사람 <고룡보>의 명을 받아 정동 성(征東省)의 업무를 보았다. 왕은 원나라에 압송되어, 시종 한 사람 없이 홀로 계양현을 거 쳐 악양현으로 귀양가다가 독살 당했다. 이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다. 고려 백성들 사이에 아야요(阿也謠)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阿也 '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아야 '마고지나' 종금거하시래)
아아 '마고의 나라' 이제 떠나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고려 백성들이 고려를 고려라고 하지 않고 '마고지나'라고 하였다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계승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정체성이 계승된다는 것은 정체성이 타고나는 주술성도 함께 계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 시의 사람들은 고려가 멸망한 고구려에서 나온 문자이므로, 고려가 언젠가는 당 나라에게 멸망한 고구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고려는 국가로서 존립 의 기반이 되는 독립성과 자주성을 상실한 채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 러한 결과로 충혜왕은 원에 체포당해 갔고 귀양길에서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백성들 이 이러한 나라 같지 않은 나라의 이름 '고려'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 들의 속사정이 당시의 속요인 '어아가'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아야 한다 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한자에 나타나는 주술성
<한국문자학회>와 중국인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9∼1993)>에 따르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한(韓)'자는 "요(堯)임금을 죽이고 제위(帝位)를 찬탈한 순(舜)임금"에게서 나온 문자라고 한다.
그 어원적인 의미가 순시대(舜時代)에 "쿠데타, 반역, 모략, 살해" 등이었으므로, 과연 이 '한(韓)'자를 그대로 국호로 써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문 자를 그 문자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 가면 높아 갈수록 이에 따라서 주술성도 함께 높 아 간다고 본다면, 우리가 '한(韓)'자를 그대로 쓰는 한, "쿠데타, 반역, 모략, 살해" 등이 가 져다 주는 주술성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50년 역사에서 이를 이미 충분히 경험할 만큼 경험하였다.
남북의 좌우대립의 이념에서 빚어진 여수순천 제주도의 좌익반란사건, 대구의 10월 좌익노 동자폭동, 남한 점령을 기도한 북한의 6,25 군사남침, 민주화 혁명이라고 일컫는 4.19 학생혁 명, 군사 쿠데타라고 말하는 5.16 군사혁명, 또한 광주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는 광주의 대 학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 사건을 일으킨 시대적인 당위성이나 그 사건이 가지고 이 는 정체성이나 역사성이 어떻든 간에, '순임금'에게서 발현한 '한(韓)'자가 내포하는 '쿠데타' 의 주술성과 '반역'의 주술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난무하는 온갖 중상과 모략, 음해와 모략, 특히 정치권을 사로잡고 이는 이러한 현상들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도가 지나친 것들로, 이러한 것들도 역시 '순임금'에게서 발 현한 '모략'의 주술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이 나라 밖으로 도망쳐 불귀의 객이 되었고, 다음 대통령은 군사혁 명이 일어나 하야 당했으며, 그 다음 대통령은 측근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하였다. 다음 대통 령 역시 하야를 당했다. 다음 대통령들은 줄줄이 감옥을 드나들어야 하였다. 이도 또한 '순 임금'에게서 발현한 '살해'의 주술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S 우리가 국호에 '한(韓)'자를 그대로 쓰는 한 앞으로도 대한민국 50년 역사에서 본 '순임금'의 주술성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무엇 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언젠가 우리가 우리의 주도로 남북통일을 이룩했을 때, 축배를 들기도 전 에 되치기를 당하여, '순임금'의 망령이 춤을 추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제주의 옛 이름 '영주(瀛洲)'에 숨겨진 '마고지나'
제주는 삼신나라인 '마고지나'에서 나온 '영주'
제주도는 삼신산에서 건너간 섬이다. 그래서 옛 이름이 영주(瀛洲)이다. 영(瀛)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에서 갈라져 나간 산이라는 뜻이다.
말 하자면 영주산이 새끼를 쳐서 옛 영주가 된 것이다. 옛 영주가 지금의 제주이다. 영주산이 의미를 갖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에서 12000년 전 사이의 일이다. 동 이의 조상인 마고가 그의 후손과 함께 삼신산에 세운 신시(神市)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 롯한다.
그가 세운 '마고신시' 즉 마고의 나라인 '마고지나'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봉래와 발 해만을 잇는 일직선상에 징검다리처럼 일곱 섬이 칠성의 형상으로 늘어서 있는 바다 한가운 데였다.
이 곳의 섬들을 묘도군도(廟島群島)라고 한다. 여기에 두 섬이 있으니 이 두 섬이 영주로 비정할 수 있는 장산도(張山島)이다. 북쪽에 있는 섬을 북장산도라고 하고, 남쪽에 있는 섬을 남장산도라고 한다.
영 주산은 남장산도나 북장산도 두 섬 중의 하나에 있는 산으 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우리가 '남과 북'을 '북남'이라고 하지 않고 '남북'이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서 남쪽이 북쪽보다 우선하므로 남쪽에 있는 남장산도를 영주로 보고자 한다.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인 것은 마고시대 사람들이 이 고장에 건너와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제주의 옛 이름 두 가지 '영주'와 '탐라'
제주도의 옛 이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주'이다. '영주'는 마고가 다스리던 '마고지나'의 삼신산(三神山)인 '영주', '방장', '봉래'의 세 산 중의 하나인 '영주산'에서 퍼져 나온 이름이다.
제주신화에 따르면 삼신이 이 고장의 시조인 고씨 양씨 부씨에게 시집을 옴으로써 비로소 영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신화에 나오는 삼신은 태초의 삼신인 마고 궁희 소희 세 분의 후손이다.
둘째는 탐라(耽羅) 또는 탐랑(耽浪)이다. '탐라'는 북두칠성의 첫째 별인 탐랑성(貪狼星)이 관장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주(星主)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성주가 '마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마고가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탐랑성 을 관장하는 마고가 성주가 된다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 자기의 직계 조 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성주상'을 차리고 자기 조상과 함께 성주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여기에서 "직녀성이 탐랑성을 관장하는 별"이라는 데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므로 설명을 해 보면, 마고가 우리의 직계조상으로 직녀성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천추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마고는 직녀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 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0년∼12000년 전에 지구중력의 회전축의 중심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말이 된다.
신산에서 바다를 건너가는 마고 삼신.영등바람을 타고간다.
영중의 삼조탄생지인 삼성혈 삼조는 바다를 건너온 마고삼신과 결혼했다.
삼신의 나라 영주 탐라
우리나라의 전국 방방곡곡엔 신화나 설화나 무가나 지명에 마고삼신이 남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들 흔적은 다른 고장에선 대부분 깊이 파고 들어가야 찾아 낼 수 있으나,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다른 고장에 남아 있는 것과 달리 기록과 구전으로 나타난 것들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이라 쉽게 찾아 진다. 먼저 역사기록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地, 단종端宗 2년 1454년 간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탐라현(耽羅縣)은 제주도 남쪽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지금 진산鎭山:한라산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毛興穴이 라 하니, 이것이 그 땅이다) 맏이를 양을라(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라(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 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빛 진흙으로 봉인한 목함(木函)이 동해빈(東海濱)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 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쪽빛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해(西海)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계셔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으니, 마땅히 배필 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가 사시복지 (射矢卜地)하니, 양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 이도(第二都)라 했으며, 부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세종 32년(1450년)에 간행한 영주지(瀛洲誌)에 실린 삼성신화(三姓神 話)가 있다. 실린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에 실린 것과 거의 같으나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① '탐라'를 '영주'라고 하였다.
② 세 처녀와 사자가 온 나라 '일본국'을 '동해(東海碧浪國)'이 라고 하였다.
제주대학의 현용준(玄容駿) 교수의 <무속신화와 문헌신화>에 자세한 연구가 실려 있으므로, 중복되는 부분은 피하기로 하고, 마고삼신과 관련하여 아직 연구가 안된 부분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 저, 국호(國號)에 관한 것이다. '탐라'는 북극성인 탐랑성에서 온 것이고,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탐라'는 인류가 아직 대량으로 출현하지 않고 소수의 인종만 살았던 선천시대(先天時代, 지구의 회전축이 천추성을 향하기 시작한 천추성시대)부 터 지명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주'는 동이(東夷)의 시조인 '마고'가 삼신산 (三神山)에 신시(神市)를 열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이름이므로, 후천시대(後天時代)부터 쓰 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탐라'와 '영주'는 선천개천이냐, 후천개천이냐 하는 시대적 차이를 보이는 이름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해빈(東海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동해바다 해안가'로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고선(李固 善)이 쓴 '조선기(朝鮮紀)에 이와 똑같은 지명이 이미 단군조선시대에 나온다. 평제(平帝) 구을(丘乙) 단군 때인 병인 5년(BC2092)여름에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국 사 람이 표류하여 '동해(지금의 황해)빈'에 닿았다는 기록이다.
세 번째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이라고 한 , 한 대목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기'가 고려사에서 영주와 탐라의 출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고기'는 옛 사서(史書)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고기'의 기록을 옮겨서 고려사 를 편찬할 때, 당시 기록자들이 고려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저지른 '붓 장난'이 있었을 수 있 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기'에 '을나(乙那)'가 어떻게 기록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之那)'가 '을나(乙那)'로 곡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고려사 충혜왕조에, 고려의 옛 이름을 '마고지나(麻古之那)'라고 하였다. '마고의 옛 나라'라 는 뜻이다.
나(那) 는 나라를 의미하므로, 고씨 양씨 부씨가 탐라(영주)의 시조인 만큼 이들 의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을나(乙那)를 지나(之那)로 고쳐서, 그 뜻을 '나라' 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로 읽으면 '고을나'는 '고지나'가 되고, '양을나'는 '양지나'가 되 고, '부을나'는 '부지나'가 된다.
네 번째는, '목함'과 '석함'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함(函)의 의미는 문자로 해석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해"가 들어 있는 상자이다.
또한 목함은 '동쪽으로 가는 배'를 상 징하고, 석함은 '서쪽에서 실려 온 귀중한 물건'을 상징한다.
다섯 째는, 세 신인과 세 처녀의 의미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삼이라는 숫자는 이들이 '마고삼신(麻姑三神)'의 자식임을 상징한다.
세 신인은 모흥혈(毛興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모(毛)는 "털이 흰 소의 쇠꼬리"인 모( )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모는 무당이 모무( 舞, 쇠 꼬리 춤)를 출 때 들고 추는 쇠꼬리이다. 혈(穴)은 모( )를 꽂는 구멍이다. 흥(興)은 모를 구멍에 꽂아 일으켜 세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상 말한 것을 정리하면, 모흥혈은 춘분 마지굿을 할 때 모를 꽂아 세우는 구멍이다.
그러므로 고 양부 세 사람이 모를 꽂아 놓고 쇠꼬리 춤을 춘 곳이 모흥혈이 되는 것이다.
세 처녀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를 찾아 온 '마고삼신'의 후예임을 상징한다. 아마 세 처 녀가 가지고 온 것에 종자 이외에 마고의 신표인 '천부삼인'과 '해혹복본'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기록에는 아니 나오나 이 고장 무가사설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고장 무가사설에
"할로(漢拏) 영주(瀛洲) 삼신산(三神山) 상상고고리(上峰) …"
라는 대목 이 있다.
무가에서 한라산을 영주 삼신산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 고장에서 하는 영등제는 2월 바람으로 오는 마고삼신을 마지하는 마지굿이다.
영등제에 오는 마고삼신은 어디에서나 두 딸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들이 삼신이기 때문에 마고와 궁희와 소희가 함께 오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일본국과 벽랑국에 대한 해석이다. 일본국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붓 장난이다.
탐 라나 영주에 걸맞지 않은 상대가 일본국이라는 말이다. 오늘날의 제주가 탐랑성과 마 고삼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후세의 사가가 제주의 역사를 폄하하기 위 하여 붓 장난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벽랑국은 '바다나라'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 된다.
제주무가에 나오는 할로 영주 삼신산인 제주도 한라산, 민족의 영산이다.
마고가 보낸 삼신은 삼신신앙의 선교사
마 고는 왜 삼신을 '할로 영주 삼신산'에 보낸 것일까? 그 이유는 삼신신앙의 전파에 있었지 않나 한다. 모흥혈에서 삼신신앙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는데, 모흥혈에서 남삼신과 여삼신을 '할로 영주'의 시조로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부도지(符都誌)>에 따르면, 마고가 생존했던 시대에 지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천문학자가 말하는 "지구가 뒤집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지구에 나타난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마고가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종 들에게 선교사로 파견한 사람들이 삼신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마고는 선교사로 떠나는 삼신들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보냈다. 그 하나가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신체로 모신 '천부삼인(天符三印)'이고, 다른 하나가 삼신시대의 삼신신앙의 교리인 '해 혹복본(解惑復本)'이다.
삼신들이 곳곳에서 활동을 함으로써 '해혹복본'을 교리로 하는 삼신 신앙과 칠성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동이(東夷)가 마고할머니가 가르친 '해혹복본'의 보호막 안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기러기로 둔갑한 오리
전 통혼례 때 보면 북두칠성이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에 혼례婚禮를 시작한다. 저녁에 결혼의례를 치르므로 혼례라고 하는 것이다. 북두칠성이 뜨는 시각에 혼례를 올린다고 하여 이 혼례를 초례醮禮라고 한다. 이때 <기러기>아비라는 사람이 기러기 한 마리를 붉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 신랑을 뒤에 세우고 신부집에 도착한다. "기러기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생명이 끝날 때가지 짝의 연분을 지킨다고 하여, 신랑이 백년해로百年偕老 서약의 징표로서 신부 어머니에게 바친다"고 하나, 이 말은 그럴 듯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오리가 기러기로 둔갑을 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기러기아비가 신부집에 기러기를 모시고 가는 것"은 기러기가 마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러기아비가 모시고 가는 것"은 기러기여서는 아니 되고 오리여야만 한다. 따라서 이 말을 바꾸면, "오리아비가 신부집에 오리를 모시고 가는 것은 오리가 마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마고가 보낸 삼신을 모시고 간 사자의 역할을 지금도 오리아비가 대를 이어 하고 14000년 동안 해 오고있는 것이다."
집안에서 오리아비로부터 오리를 받는 사람은 신부의 어머니이다. 신랑집에서 신부의 어머니를 마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의식이 바로 오리를 전달하는 의식이다. 마고를 기억하고 숭상하자 하는 전통이 오리를 매개로 하여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의례를 전안례奠雁禮라고 하는데, 우리의 정체성을 흐리는 말이므로 정체성을 살리는 말인 전압례奠鴨禮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압鴨자를 여종 또는 하비下婢의 뜻으로 함께 쓰고 있고, 안雁자를 가짜 모조품이라는 의미로 함께 쓰고 있는 것을 보면, 혼례와 관련하여 문자에 무엇인가 의미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역사에서 보면 전시대의 문자의 의미가 후대에 와서 정반대의 의미가 되는 것은 정치적인 변혁이 있었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임금시尸자가 시체시尸자로 둔갑을 한 예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시자는 원래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문자로 치우천왕시대만 해도 치우천왕을 의미하는 임금이라는 문자로 쓰였다.
그러나 황제가 치우천왕을 죽이고 중원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 기가 막힌 멋진 문자는 시체시자로 의미가 바뀌고 말았다.
마고삼신에게서 나온 삼신사상
영 주로 시집온 마고삼신은 요즈음 말로 삼신종교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오리를 앞세워 어디든지 바람처럼 파고들었다. 이것이 지금도 마을 입구에 서있는 솟대의 유래이다. 마고삼신은 무엇을 이 땅에 전파하고자 이 땅에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일까? 이는 천주교가 성모 마리아를 내세워 전 세계를 상대로 포교를 해 온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마고가 성모 마리아로 변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모델이 바로 마고가 된다. 마고의 원형상징이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고삼신은 무엇을 전파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지상에 생겨난 어떠한 종교도 깰 수 없는 <천부삼인天符三印>과 <해혹복본解惑復本>이었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원형原形의 교리敎理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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