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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6년 4월 19일(화) 10:00~11:00
장소 : 신제주 4.19기념탑
회장 : 강영석
사무총장 : 김봉오
참석 : 80여 명
1960년 4월 19일 자유당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4·19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은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이승만은 환국(還國) 이후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에게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또한 이것은 그의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숱한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점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그는 6 ·25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死守)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감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다. 또한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 시작하였다.
1952년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 연금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백골단(白骨團)' '민족자결단(民族自決團)'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지역구에서는 난데없이 국회의원을 성토하며 사퇴를 외치는 군민대회가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拔萃改憲)'으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더욱 떨어졌다.
1954년 11월 이승만은 재차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제한(重任制限) 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이른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이라는 기상천외한 개헌을 단행하였다. 당시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36표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했는데, 투표결과 찬성이 135표에 그쳐 부결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재적의원인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므로 이를 사사오입하면 135명이라고 하면서 전날의 부결을 뒤집고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으로써 사사오입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급서(急逝)함으로써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자유당은 선거법에 언론규제규정을 삽입한 ‘협상선거법(協商選擧法)’을 통과시켜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언론을 봉쇄해놓고 관권에 의한 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였으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追慕票)가 20%에 달하였고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분명히 밝혀졌다.
그리고 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회의사당에 무장경찰과 무술경찰을 배치하여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완력으로 막고 ‘2·4보안법파동(二四保安法波動)’을 일으켜 언론규제와 야당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59년에 이르러 자유당 정권은 야당계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몇 차례의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기자를 구속했으며, 정부를 비판하던 《경향신문(京鄕新聞)》을 폐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극에 달한 온갖 정치적 비리가 4·19혁명의 간접적 원인을 조성하였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지지 성향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인 조병옥(趙炳玉)이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渡美)하게 된 것을 기회로, 5월 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하였다.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음모의 내용은, ① 4할 사전투표(事前投票), ② 3인조에 의한 반공개(半公開) 투표, ③ 자유당의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④ 야당참관인 축출, ⑤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⑥ 내통식(內通式) 기표소의 설치, ⑦ 투표함 바꿔치기, ⑧ 개표 때의 혼표(混票)와 환표(換票), ⑨ 득표수의 조작 발표 등이었다.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의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함으로써 백일하(白日下)에 폭로되었다. 이때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사(急死)함으로써, 이승만의 4선(四選)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3월 17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라는 미명(美名) 아래 행해진 국민주권의 유린행위였고,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4 ·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遊說日)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 ·중 ·고교 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마침내 시위를 벌였다. 이어 3월 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 ·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시위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4월 18일 고려대생 3,000여 명이 의사당 앞에서 연좌(連坐) 시위를 한 후 귀교하는 길에 정치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10 여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시위에 앞서 밝힌 고려대생들의 선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지난날의 학생들은 일제(日帝)에 항거하고 멸공전선(滅共戰線)의 전위대열(前衛隊列)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한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궐기하자.” 고려대생들의 4 ·18시위는 그 다음날 학생들이 총궐기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미리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서 총궐기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 선언문도 4 ·18 고려대 선언문과 맥락(脈絡)을 같이하는 것으로 “학생들은 더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만은 없으며 정의와 민주수호를 위해 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자극된 수많은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경찰이 경무대(景武臺)로 통하는 효자동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승만과의 면담을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늘어가자, 시위 군중은 더욱 흥분하여 경찰 지프차를 탈취하여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였다. 또 일부 시위군중은 자유당정권의 전위부대의 하나였던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反共靑年團) 본부, 그리고 자유당 본부 등을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서대문경무대'로 알려진 이기붕의 집도 습격하였으나 이 곳에서는 정치폭력배들이 시위 학생들을 몽둥이로 살상까지 하였다.
서울 시내는 완전히 무정부상태였고, 모든 질서는 회복할 수 없는 수라장이 되었다. 이 날의 구호는 “3 ·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등 독재규탄과 민주수호 및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서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을 진주시켰다. 사망자 약 100명에 부상자 약 450명에 달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시위는 계엄군의 진주로 다음날부터 일단 멈췄다.
그러나 4월 23일 서울시 주관으로 4 ·19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合同慰靈祭)를 올리자 일제히 이에 반발, “어용(御用) 위령제는 4 ·19희생자에 대한 모독이다. 학생들이 주최하는 위령제를 다시 거행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한편, 4월 23일 부통령 장면이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퇴하자, 이기붕도 자신의 부통령당선을 사퇴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고, 이승만도 자유당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결코 정부통령선거를 다시한다거나, 대통령직을 사퇴한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당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의 분노가 다시 일기 시작하였고, 4월 25일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59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三府要人)들은 3 ·15부정선거와 4 ·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時局宣言文)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에 나섰다. 이 날의 교수 시위는 자유당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반군중들은 계속해서 야간 시위를 벌이며 “자유당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4월 26일에는 다시 학생들이 거리를 메워 태평로는 4 ·19 때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었다.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계엄사령관 송요찬(宋堯讚)이 주선하여 학생과 시민대표 5명이 이승만과 면담하고 시국수습을 위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 ·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어 11시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4월 28일 이기붕 일가(一家)가 경무대의 일실(一室)에서 자살하였음이 확인되었고, 5월 29일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났다. 결국 이승만이 이끈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고 새로운 공화정을 위한 준비를 위해 허정(許政) 과도정권(過渡政權)이 뒤를 이었다.
4 ·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主導勢力)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義憤)이 집단행동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變轉)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 ·19혁명은 한국의 정치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一大事件)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民主意識)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西歐)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國政)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 ·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 ·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第一步)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 ·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19년 3 ·1 독립운동과 1926년 6 ·10만세사건,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 ·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 ·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脆弱性)으로 미완(未完)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 ·19혁명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가장 민주적이며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나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은 민주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적 각성이 결국 5 ·16군사정변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지만, 4 ·19혁명이 5 ·16군사정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4 ·19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 ·1혁명에서 촉구되고 추구된 민주이념과 사회정의의 실현은 한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가치(最高價値)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4 ·19혁명은 한국 헌정발전사에 있어 영원불멸의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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