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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여기에 오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영접하시렵니까?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맞이할 대대적인 환영식을 계획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고서 큰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12:12-13).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굉장한 사건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때마침 유월절 예배에 참석하러 왔던 헬라인들까지도 정치적 메시야로서 예수님을 맞이하며 그에게 알려지기를 눈도장 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얼굴을 익혀놓으면 예수님의 시대가 오면 큰 유익이 될 것을 계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줄을 대기도 했습니다. 같은 출신(헬라인)인 빌립을 통하여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다가가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안드레의 협조를 구해서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잘 보이면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대권을 잡으면 자신들도 영광의 자리를 한자리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영 어긋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1. 자기를 죽일 때에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설교는 언제나 쉽고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무나 쉽고 명백한 논리입니다. 많은 열매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농사를 알고, 땅을 알고, 자연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밀알이 살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밀알에게는 죽는 날이 곧 사는 날입니다. 모든 밀알은 오직 죽음을 거쳐야 생명으로 싹튼다는 원리입니다.
한 알의 씨앗에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살아있는 한 그 생명은 언제나 갇혀있을 뿐입니다.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가 진짜 죽어 사라져 버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이 말을 한자로 표현하면 一死多生 一損多得(일사다생 일손다득) 즉 ‘한번 죽으면 여러 개를 살리고 한번 손해보면 여러 개에 이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저에게 적용해 봅니다..
“너 한 사람만 죽으면 모든 교인이 다 산다. 너 한 사람만 손해보면 온 교회 식구들이 다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너 한 사람만 죽으면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너 한 사람만 손해를 감수하면 많은 사람들이 득을 볼 수 있다”
여러분에게 한번 적용해 보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이 죽으면 여러분의 가정이 생명을 얻습니다. 나 한 사람이 죽으며 교회가 삽니다. 내가 죽지 못해 가정이 힘들고 내가 죽지 못해 내가 속한 공동체가 힘들지 않습니까?
나 한 사람만 손해를 감수하고, 나 한사람만 상처를 받기로 결단하면, 나 한 사람만 죽기를 각오하면 많은 사람이 살고, 유익을 얻고 편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농학 교수가 한 말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 싹을 틔우면 20년 뒤엔 온 세계를 밀알로 덮을 수 있을 만큼 밀의 번식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생명 안에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의견 칼날 같이 분명하여 그것을 주장한 것 좋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주장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좋을 수가 어렵습니다.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자기 주장은 분명하되 자기를 비우고 다른 사람을 세워가면 사람을 얻고 대인관계가 원만해집니다.
한국의 상황이 지금 많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함께 마음을 모아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보수와 극단적인 진보가 자기 주장을 하지만 서로 용납하지 않으면 나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서 계속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어 외롭습니다. 그러나 나 자아를 죽이고, 희생하면 풍성해 집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혼자 남게 되는 반면, 자기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은 그 곁에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죽일 때 인생이 풍요해집니다.
우리는 사해(死海)를 죽은 바다라고만 생각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천 가지 이상의 천연 자원이 내장되어 있는 자원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바다가 사해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요르단에서도 사해 물을 자기 나라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바람에,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새로운 긴장관계가 고조되었다고 합니다.
사해가 보배로운 바다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흙탕물이든 구정물이든 흘러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므로 물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물에서 결국 일천가지 이상의 천연자원을 보유한 기가 막힌 보배로운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 사해의 원리를 우리의 인간관계에 한번 적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픈 일이든지, 괴로운 일이든지, 힘든 일이든지, 오해 받는 일이든지, 상처를 받는 일이든지 우선은 다 받아들이다 보면, 그것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소화하게 되면 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라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포용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여러분 따라 하십시오. “I die everyday"
말알이 죽기 위해서는 춥고 어두운 땅 속에 파묻혀야 합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서는 죽지 않습니다. 땅 속에 묻혀야 합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 묻혀야 합니다. 밟혀야 합니다. 바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생명의 열매가 무성하게 맺히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날마다 죽을 때에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명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죽으면 죽을수록 희한하게도 내 속사람과 내 인격이 살아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죽으면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2. 자기를 희생므로 영원한 기념이 되는 것이 밀알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보십시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
늘 자기부터 챙기고, 자기 생각만 하며 자기 몸을 사리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챙기면 자기가 드러날 것 같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 사람은 잊혀지는 존재가 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에서 ‘생명’이란 바로 ‘자아’(ego)를 말합니다. 자존심만 내세워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름답게 기억되지 않는 존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에서의 ‘생명’zoe)는 ‘한번 밖에 없는 고귀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자기 인생을 미워한다는 것은 증오한다는 것이 아니라 덜 값어치 있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끔찍이 여깁니다. 조금도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죽이고, 손해 보는 것 없이 자기 생각, 자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사정을 알고서 말합니까? 그 아이가 시근이 들어야 부모의 사리를 헤아려고 합니다.
밀알은 땅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어둠 속에 썩이는 작업이 있을 때에 믿음의 시근이 들고, 성장과 성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되리라’”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다른 사람들 안에서 역사한다”
그는 자신을 죽이므로 헐벗은 사람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었고 결국 많은 사람을 생명을 이끌었습니다. 테레사는 죽었지만 많은 세상 사람들 속에 살아남아 기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살 찢고 피흘려 주시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자신을 부서뜨리는 희생하시므로 우리를 구했습니다.
히브리 격언에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흙이 부셔져야 곡식을 냅니다.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됩니다. 빵이 부서져야 에너지가 됩니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을 갖추려면 부서질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아집에 똘똘 뭉쳐진 사람은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복음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목사인 제가 부서져야 교회가 살릴 수 있습니다. 제가 깨어지지 않으면 여러분이 상처를 받습니다. 제가 부서지지 않으면 여러분이 부서져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깨어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상처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나 쉽게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상처를 받는다고 아우성치기 전에 예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 자신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자기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에 정말 상처를 아물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상처 받은 위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은 사실은 더 많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져야 합니다. 내 아집이 무너져야 합니다. 내 아성이 부서져야 합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온전한 성전을 건축하실 것입니다.
스폰지와 스치로폴의 차이점을 아시지요. 스폰지는 모든 액체를 품어냅니다. 그렇지만 스치로폴은 품지를 못합니다. 스폰지는 흘려나온 액체를 최대한 품어냅니다. 그렇지만 스치로폴은 바지작거리며 소리소리를 냅니다.
OMF의 훌륭한 선교사요 영적 지도자인 오스왈드 샌더스 목사님은 이런 시를 발표했습니다.
당신의 삶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을 가지고 측정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사랑의 힘은 사랑의 희생 속에 있으며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한 사람이 가장 많이 줄 것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요.
가장 많이 희생을 당한 사람만이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한 사람만이
가장 많이 줄 것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인생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노라 말합니다(빌 2:17). 관제가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릴 때에 본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드리는 들러리 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기 위해 제물 위에 술을 쏟아붓는 제사가 관제입니다. 이 관제는 좋은 향기만 낼 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관제는 자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조용한 희생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이름도 빛도 없이 희생의 삶으로 사그라지는 것에 대해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것은 바로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자기 죽음으로 가능합니다. 내 고집, 내 마음, 내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자아를 죽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자아가 살았습니까? 죽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앞에 죽는 자가 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를 죽이며 희생하는 자만이 역사의 기념이 됩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밀알신앙은 내가 죽으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므로 영원히 기념되는 것입니다.
밀알신앙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337, 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