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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온산 제단(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한 논리로 완전해독) 원문보기 글쓴이: 티끌
예수님이 우리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어느 사이트에서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
논란이 난무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는 그에 대해 글을 쓸 소재를
얻어낸 어부지리를 만났다. 그동안 이에 대한 글을 많이 올렸으나
오늘은 각도를 바꿔서 심도 있게 피력해 보고자 한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면
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후에나 지금까지 인류세상은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의 아수라장으로 널부러져 있단 말인가?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인들만 암것도 모르는채 헛소리를 남발하고 있는 게 예수구원론이다.
그렇다면 성경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구원론은 거짓말이란 말인가?
거짓말이 아니다. 사실이다. 예수님은 기독인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듯이
구원자임이 틀림없다. 이는 예수님이 어느 시각에서 보면 구원자이기도
하고 어느 시각에서 보면 구원자가 아니기도 하다는 뜻이 되는데,
왜 그러한지 이제 자세히 고찰해 보기로 한다.
동양학에서는 창조세계를 논할 때 무극, 태극, 황극, 이렇게 셋으로 말한다.
성경에서 천지창조의 하나님도 성부(하나님), 성자(초림예수님),
성신(재림예수님), 이렇게 삼위일체론으로 말한다.
즉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신하나님, 이렇게 셋으로 말하며 그 셋은
창조의 시작에서 창조의 마침까지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창조가 그 시작에서 마침까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알려주시는 인간심령창조에 있는 것이다.
자연계 창조의 이야기가 중점이 아니고 인류에게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시는 인간심령창조에 대한 기록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엔 인간의 죄라든가 인간의 구원이라는 기록이 빼곡한 것이다.
죄란 무엇이고 구원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죄란 하나님의 천지창조론을 모르는게 죄이며, 구원이란
하나님의 천지창조론을 모르는 죄가 깨끗이 사함받은 자에게, 즉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은 자에게 주시는 영생의 선물이 구원이 된다. 따라서 반드시
죄가 먼저 들어오고 난 연후에, 죄사함 받고 구원은 나중에 있게 된다.
그러면 죄는 언제 들어 왔으며 구원은 언제 있게 되는가?
죄는 성자하나님(초림예수님) 때 들어 왔으며, 구원은 오늘날
성신하나님(재림예수님) 때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저 이천년전
초림 예수님 때는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었다.
오히려 초림 때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가 들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 4복음서에는 초림예수님의 구원론이 등장하는가?
이제부터 일반적인 개념정립에 도움이 되도록 동양학의 무극, 태극, 황극을
도입하여 상고하기로 한다.
성부하나님은 무극이요, 초림예수님은 시작의 태극이요, 재림예수님은
완성의 황극이 된다. 무엇에 대한 시작이며 완성인가? 다시 말하는데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인간심령창조에 대한 시작이며 완성으로
태극이며 황극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태극이며 황극이 되는 것이다.
알파는 초림의 태극이며, 오메가는 재림의 황극이다.
초림예수님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인간심령창조의 시작으로 오신 분이다.
(자연계 창조가 결코 아니다.)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에, 즉 태극이기 때문에 그 선임자 무극의 하나님을
그대로 드러내어 오셨다. 선대의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이 혼재된
혼원무극이었다.
음양이 혼재된 일원론의 무극의 하나님을 초림 예수님은 그것을 갈라
분리해서 양손에 하나씩 쥐고 나오셨다고 하겠다.
한 손엔 빛을, 다른 한 손엔 어둠을 쥐고 나오신 태극의 하나님이
초림 예수님이다.
왜 그렇게 음양을 또렷이 갈라낸 양면성의 태극으로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한 손에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참 진리의 빛" 으로
오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죄를
사해주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며 또한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반드시 구원과 진리의
"빛" 이다. 누가 뭐래도 "빛" 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빛은 예수님의 전면성에서 발현되는 빛은 아니고
한쪽 손 일면성에서 빛인 것이다. 일면성에서만 빛이긴 하지만, 여하간
그 일면성에서 바라본 예수님은 분명히 인류를 구원할 빛이기 때문에
성경 4복음서에
예수님이 우리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기록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그러나!
그 진리의 빛을 액면 그대로 주셨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진리의 말씀을 감추어진 비유로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형이상학이다. 그 형이상학의 진리를 형이하학으로, 즉 육체의 예법으로
감추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비유라고 하는 것인데,
비유는 밝혀진 진리가 아니므로 “어두움” 이 된다.
이렇게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가지고 오셨으므로 다른 한손엔
“어두움”을 쥐고 오셨다고 한것이다.
초림예수님은 빛과 어두움(음양)을 양손에 각각 쥐고 오신 태극이다.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쥐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진리의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다른 일면으로는 어두움(비유)을 드러내기 위하여
비유가 아니면 한 마디도 아니 하신다고 했던 것이며, 비유이기 때문에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아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고 했던 것이다.
제자들도 사도들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깨닫지 못하는 비유의 말씀이라면 그 게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결국은
말씀을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12-14>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여기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이라고 했는데 진리의 성령은 오늘날
오시는 재림예수를 뜻한다. 초림예수님은 어둠의 비유를 베풀어
말씀하셨으므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감당치
못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즉 때가 아니므로 다 알려주지 못하셨다는 뜻이다.
초림 예수님은 창조의 시작인 태극이므로 온전히 다 알려주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의 재림예수님은, 즉 진리의 성령은 비유가 아니고 그 비유를
명명백백히 진리의 말씀으로 밝혀서 창조의 완성을 이루실 터이므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의 재림예수님은 창조완성의 황극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감추어진
비유를 창세부터 낱낱이 밝히게 되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을 모르는
진정한 죄 사함도 구원도 이루시게 되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저 이천년전 초림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비유로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진정 절대로
죄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게 된다.
비유는 아무도 직접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명백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어두움" 이 된다. 누가 뭐래도 "어두움" 이다.
그러나 그분이 주신 비유말씀의 숨겨진 내용자체로는
누가 뭐래도 "진리의 빛" 이다.
내용 자체로는 진리의 빛이기 때문에 일면으로는 명백히 죄사함과
구원주가 되지,만 그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방법에서는 어두움의
비유이기 때문에 결국 죄사함과 구원이 허당을 짚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초림예수님은 죄사함과 구원주라는 말잔치만 성대했을 뿐,
사실적으로는 결국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 무주공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창조의 태극에서 나타낸 어두움은 아무 의미가 없이
사람들만 농락했단 말인가? 절대로 아니다.
창조의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막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어둠의 비유가 가진 막중한 의미란?
어둠의 비유는 사탄마귀를 잡을 수 있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즉 사탄마귀에게 던져주는 낚시밥이 곧 어둠의 비유가 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지 알아본다.
창세기 1-3장은 성경전체를 푸는 열쇠가 되며, 그 중에 에덴동산 이야기는
예수님의 초림 때와 재림 때에 대한 순수예언서이다.
에덴동산엔 옛뱀(사탄마귀)이 있었는데 그 옛뱀은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금하신 선악과를 먹도록 사주하여 성공한 이천년 전 사도바울이 된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악과를 먹이는데 성공한
마귀가 되었는가? 바울은 본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죽이는
살인자였다. 하지만 그 일은 그의 생애 동안에만 국한되는 한계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전향하여 오히려 예수믿는 사람이 되어서
신자들의 인기몰이를 받는 전환기를 맞았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했는가? 막가파식 예수신앙을 부추켰다.
그 이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당도 가고 살아서 휴거도 된다고
성경에 없는 말을 가르쳤던 것이며,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온 세계의 신자들은 누구나 그의 가르침에 대환호하며 추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성경이 아무나
깨달을 수 없는 비유였기 때문에 속임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참 뜻을 깨달아야 하는 비유임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깨달을 엄두도 내지 못한채 그 비유 그대로를 비유 아닌 사실로
믿게 하기도 하고, 또한 성경에 없는 거짓말도 얼마든지 보태기도 하고,
있는 말을 빼기도 하는 가감을 누워서 떡먹기로 했던 것이다.
<예수천당-불신지옥> 이라는 기독인들의 예수1번지 구호는 어디서 나왔는가?
비유를 그대로 사실로 가르쳤거나 또한 성경을 가감한 사도바울에게서 나왔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천당이요, 예수 안믿으면 무조건 불신지옥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곧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이다.
비유를 깨닫지 못한채 무조건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선" 이요,
예수 안믿으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 "악" 이 된다는 뜻에서
"선악과" 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같은 선악과를 금하신 반면,
바울은 오직 예수를 부르짖으며 선악과를 이천년 동안 주야장창
먹여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보내주신 말씀이 비유이기 때문에
그 비유말씀을 그대로 구원의 사실적 말씀으로 받아드리면 죽게
된다는 뜻에서 믿는 나는 선, 믿지 아니하는 너는 악, 이러한
선악구별의 선악과를 금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옛뱀 바울만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였을까? 아니다.
오늘날 신흥교단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옛뱀의 후손 용(자칭 메시야집단)들도
바울이 준 선악과와 함께 자신들이 새롭게 창안한 선악과를 맘껏 먹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지만 성경이 비유이기 때문에 성경을 맘대로 가감하면서
자의적으로 멋대로 풀어서 자신들만이 구원을 이룬다는 선이요,
타인들은 멸망의 악이라고
사자후를 토하는 주장을 하니 그것이 곧 비진리요, 선악과인 것이다.
이렇게 옛뱀이나 옛뱀의 후손 용들이 선악과로 배불리며 그들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이 비유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경이 비유라고 자기들 맘대로 달떡도 만들고, 쑥떡도 만들고, 개떡도
만들며 맘대로 요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만큼 악마 거짓 신들의
화신이 되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고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살인자 마귀였음이 입증이 되는 동시에,
그 마귀는 결국 오늘날 재림 예수님으로부터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초림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신약 4복음서의 비유는,
그리고 구약성경이 모두 오늘에 대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마지막 때에 오늘날 재림주에 의해 사단마귀가 잡혀지게
되는 절대적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림 예수님은 재림 때의 창조완성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초공사를 놓으신 것이 된다.
오, 마귀를 잡을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비유였던 것이다!!
비유는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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