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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니고데모 이야기(1-15)와 세례 요한의 증언(22-36) 사이에 위치한다.
니고데모라는 빵과 세례요한이라는 빵 사이에 끼어있는 샌드위치 속과 같다.
한편으로는 생뚱맞은 본문 같기도 하다.
니고데모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이라고 시작하는 본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이야기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전문가들 즉 신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 이야기의 신학적 해설(Commentary)이자, 니고데모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한다.
1-15절까지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내용'이다.
니고데모가 묻고 예수님이 대답하는 구조이다.
반면에 오늘 본문 16-21절은 예수님의 '선포' 에 해당한다.
지난 주 본문을 살펴보자.
10절부터 예수님의 선포가 시작되었다. "빨간색 글씨"(개역개정판 기준)
21절까지 계속된다.
그러니깐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니모데모에게 직접 말씀하신 선포의 일부분이다.
그럼에도 개역개정판에 의하면 오늘 본문이 단락으로 구분되어있다.
동일한 선포인데, 왜 10-15절과 16-21절로 구분되어있나?
그 이유?
1) 16절에 나오는 '독생자(외아들)'라는 용어는 독특한 표현이다.
예수님이 다른 복음서 내에서 자신을 가리킬 때 직접 사용하신 적이 없는 용어이다.
유독 요한복음에만 소개된 용어이다.
요한은 이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1:14,18).
이런 이유로 16절부터 시작되는 본문은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한 뒤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기록한 내용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개역개정 / NIV 등: 15절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끝난 것으로 보고,
16절부터는 저자의 해설 문단으로 구분했다.
NIV에서는 16절부터 검은색 글씨로 인쇄했다.
고로, 오늘 본문은 사도요한이 니고데모 개인의 이야기를 개인을 넘어 독자 전체를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로 확대 해석한 말씀이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소개되는 장면과 유사하다.
내담자가 상담자를 찾아와 깊은 상담을 나눈 후 내담자가 떠났다.
내담자 니고데모가 떠났다.
이에 상담자가 관객들을 향하여 "저분은 참 힘들게 사셨구나" 아니면 "저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장면과 같다.
니고데모가 자리를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상담내용을 정리하여 모든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 이야기의 해설판 확장판이라고 할수 있다.
다시 한 번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살펴보자(1)
그는 바리새인이었다.
당시 바리새인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 70만명 중 약 6,000명뿐인 영적 엘리트 그룹이였다.
상위 1%미만의 그룹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613개의 세부 조항("..하라" 248개, "..하지 마라" 365개)을 만들어 목숨 걸고 지켰다.
그 세부조항중에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바쳤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구약 성경 레위기 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의무적으로 금식해야 하는 날은 일 년에 딱 하루, '대속죄일'뿐이었다.
유대력 7월 10일 (대속죄일 / 욤 키푸르): 출애굽 후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내려오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죄를 저질렀다. 산에서 내려와 이 모습을 본 모세는 크게 분노하여 하나님께 직접 받은 첫 번째 십계명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다.
이로 인해 백성 3,000명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심으로 통회하고 회개하자, 모세는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하며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증표로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주어 모세를 하산하게 하셨는데, 그날이 바로 7월 10일이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온 민족의 죄를 사함받는 대속죄일이 제정되었다.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최종적으로 용서받는 유대교 가장 성스러운 날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를 일주일에 두 번, 일 년으로 치면 무려 100일 이상을 자발적으로 금식했다.
그 요일은 목요일과 월요일이었다.
일주일에 이틀을 굶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해 보라.
월요일에 굶고, 화·수 이틀 밥 먹고, 목요일에 또 굶는다.
인생의 약30%를 평생 굶으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것은 그들의 생활 루틴이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목요일과 월요일은 예루살렘에 큰 시장이 서는 장날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장터로 쏟아져 나오는 날이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그날, 일부러 머리를 감지 않은채 산발을 하고, 얼굴에는 하얗게 재를 뒤집어쓰고, 창백하고 초췌한 표정으로 장터를 느릿느릿 걸어 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수군거린다.
'와, 저 사람 좀 봐. 또 금식하나 봐. 진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의 고통을 즐겼다.
그 고통의 대가로 사람들의 존경과 '나는 너희와 달라'라는 종교적 우월감을 즐겼다.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애통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려는 지독한 연출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는 오늘날 우리가 수입의 10%를 떼어 헌금하는 수준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의 십일조를 이렇게 꼬집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박하와 회향과 근채가 무엇인가?
시골 마당 구석 텃밭에 잡초처럼 자라는 허브, 약초, 그리고 마늘이나 미나리 같은 채소들을 가리킨다.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버는 농작물이 아니다.
그냥 집에서 요리할 때 냄새를 잡으려고 몇 뿌리 뜯어 사용하는 흔하디 흔한 풀떼기들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마당 구석에서 박하 잎사귀 열 장을 따면, 돋보기를 들이대고 정확히 한 장을 찢어서 십일조로 바쳤다.
회향 씨앗 백 알을 수확했다면 눈을 비벼가며 열 알을 정확히 세어 십일조로 바쳤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어 저주받을까 봐, 법을 어겼다는 찝찝함을 견딜 수 없어서, 풀 한 포기, 씨앗 한 알까지 미친 듯이 계산해 십일조로 바치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열심인가? 얼마나 철저한 헌신인가?
겉으로 보면 이보다 더 완벽한 신앙인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이런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2절)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닌 "훌륭한 사람, 뛰어난 '랍비(선생)'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어릴 적 학교에서 세계 4대 성인? 예수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라고 배웠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성인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갑니까?"(4절)라며 철저히 육신의 생각으로만 반응했던 것이다.
그는 율법의 박사였지만 영적인 일을 깨닫지 못하는 어둠 속 인물이었다.
종교적 열심히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마일리지가 구원을 주지 못한다.
커피를 10번 주문하면 11번째 커피는 무료로 주는 가게가 있다.치킨을 한 번 주문할 때마다 쿠폰 한 장을 받고, 그 쿠폰을 10장 모으면 만 원을 할인해 주는 치킨 브랜드가 있다.
이런 제도가 마일리지제도이다.
혹시 이런 제도를 구원에 적용하려는 성도는 없겠지요?
주일예배 쿠폰, 수요예배 쿠폰, 십일조 선교헌금 주일헌금 절기헌금 감사헌금 쿠폰으로 하나님 나라 마일리지를 적립하고 있는가?
신앙생활을 마일리지 적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마일리지가 적립되면 될수록 우리들의 영적인 어둠은 점점 더 깊어져간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 충격적인 진단을 내리셨다.
'니고데모야, 너 그렇게 살아서는 하나님 나라 근처에도 못 간다. 너는 지금 지독한 밤(어둠) 속에 갇혀 있다.'(5)
저는 이 대목에서 우리를 생각했다.
우리 한국교회를 생각했다.
혹시 우리 모두가 지독한 어둠에 갇혀있지는 않은지를?
어쩌면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보다 더 짙은 어둠속에 있지는 않은지를?
니고데모의 문제는 게으름이 아니라 '지나친 열심'이었다.
자신의 열심, 자신의 종교적 마일리지 쿠폰, 자신의 도덕적 무결함이 너무 견고하다 보니, 예수님이라는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자신의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에, 그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구원자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내면의 공허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 없음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과도한 교회 봉사와 종교 활동에 중독되어 있는 부류들이 있다.
"어떤 부부가 있다. 남편은 매달 생활비를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넉넉히 보냈다.
결혼기념일마다 꽃다발도 잊지 않았다.
바람 한 번, 말썽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
겉보기에 이 남편은 의무를 다하는 완벽한 남편같다.
그런데 아내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눈을 맞추며 대화한 지는 몇 년이 지났다.
서로의 아픔이나 슬픔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남편의 의무'만 열심히 행했던 것이다.
과연 이 부부는 건강한 부부일까? 성실한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남편도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사랑하지 못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더 열심히 남편이라는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을까요?
니고데모의 신앙이 그랬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모두에게 메시지를 던지신다.
21절을 읽자.
"진리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신다.
"진리를 아는 자"가 아니다.
'진리"? 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가리킨다.
"진리를 아는 자"란? 머리와 지식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니고데모가 대표적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자 율법학자로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알고 있는 자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주일 설교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자신의 삶속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반면에 "진리를 따르는 자"(21절)?
"진리를 따르는"에서 '따르다'의 헬라어 원어는 '포이온(ποιῶν)'으로, 영어의 'doer(행하는 자)'이다.
단순한 '행동'을 넘어선 '실천(Practice)'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관념이나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외부의 결과물로 만들어 내거나 삶의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옮기는 실천을 말한다.
"지속적으로 삶속에서 구현되는 실천 행위"
즉 "진리를 행하는 자"? 손과 발로 살아내는 '실천'을 가리킨다.
"우리는 건강해지는 법을 몰라서 살을 못 빼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을 켜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떻게 운동해야 하는지 정보가 넘쳐난다.
우리는 건강 관련 유튜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저렇게 하면 건강해지는구나 뱃살이 빠지는 구나"
그러나 아무리 건강 지식이 박사급이어도, 밤마다 야식을 먹고 침대에 누워만 있다면
그리고 순간 순간 핑계를 창조하여 운동하는 시간을 내 팽게친다면
그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헬스장에 등록하고 운동 기구의 사용법을 마스터했더라도, 직접 땀을 흘리며 바벨을 들지 않으면 근육은 자라지 않는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소화기 사용법과 대피로 위치를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시험을 치면 100점을 맞을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자욱해졌을 때, 무서워서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다면 그 지식이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신앙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설교를 듣고 주일예배참석쿠폰을 주머니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어도
성경 공부를 많이 해서 성경지식에 정통해도
들었던 성경정보와 지식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건강 유튜브를 보는 것'과 똑같다.
진짜 신앙은 말씀대로 손과 발을 움직여 삶의 땀방울을 흘리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진리를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도 없고 들어갈수도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신다.
"진리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다(21)
신앙생활의 목적을? '자신이 행한 종교적 업적과 의로움'에 만족하는 것에 두었다면
혹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고 인정 받는데 두었다면
그 사람이 바로 2026년의 니고데모이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한국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중 니고데모같은 부류는 전체 성도중 몇 퍼센트쯤 될까요?
우리는 지식을 아는 자가 아니라 지식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24시간 예수님의 인격으로 사는 자들이 되어야한다.
자신의 의가 아무리 정당하고 선할찌라도 그 선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를 믿는 다면 바로 그 사람이 니고데모이다.
어느 교회에 모두의 존경을 받는 '박 권사님'이 계셨다.
그녀는 자녀 셋을 모두 명문대에 보내고 신실한 신앙인으로 키워내어 성도들 사이에서 '현숙한 여인'의 본보기로 통했다.
박 권사님 스스로도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하고, 철저히 말씀으로 자녀를 훈육한 자신의 '선한 노력과 의'에 깊은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이 된 둘째 아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박 권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아들을 앉혀놓고 눈물로 책망했다.
"내가 너를 기도로 키웠는데 네가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느냐? 네가 이러면 엄마가 평생 쌓아온 신앙과 기도가 뭐가 되니? 남들이 엄마를 뭐라고 보겠어!"
박 권사님은 아들의 영혼이 아파서가 아니라, 자신의 '완벽한 기도의 어머니'라는 의로운 타이틀이 깨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의 방황을 바로잡아 '자신의 의로움'을 다시 증명하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도를 하면 할수록 마음에는 평안 대신 아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남들이 나를 실패한 어머니로 보면 어쩌지?'라는 두려움만 가득 찼다.
니고데모처럼 사람의 평판이라는 '밤의 어둠'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종교인의 가장 큰 비극은 '악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에 취해서'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내 의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신앙을 도구로 삼는다면,
그가 바로 2천 년 전 예수님 앞에 서 있던 니고데모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정신차립시다.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착함 자신의 성실함에 취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살면 우리의 밤은 더 깊어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