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언제인가 줄기차게 충효를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권력가진 사람들의 그 무슨 곡절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야 천만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있겠는가. 뿌리 없이 흔들리는 요즈음 세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고장에는 충효정신을 기릴만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 중에서도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묘골은 빼 놓을 수 없는 충절문화의 본향이다. 그곳에는 만고의 충신으로 표상되는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 곳에는 천고만신 끝에 혈통을 이어 온 박팽년 선생 후손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묘골은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다. 대구에서 성주방면으로 가다가 동곡에서 왜관으로 향하다 보면 묘골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가 안내하는 대로 완만한 곡선 길을 돌아 들어가면 어렵사리 은둔할 곳을 찾았을 법한 마을 하나가 나지막한 산줄기에 안겨 있다. 이곳이 묘골이다.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묘골에 정착하여 세상에 다시 이름을 알리기까지는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다. 박평년 선생은 쿠테타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를 상대로 단종복위를 꽤하다가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다른 충신들과 함께 멸족을 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러니 사육신에게는 후손이 있을 리 없다.
당시 죽임을 당한 박팽년 선생 일가에 얽힌 효성스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박팽년 선생의 형제들은 아버지 박중림 선생과 죽음을 맞으면서 아버지에게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매 효에 어긋납니다”하니, 아버지 박중림 선생은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다”라고 태연히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진정한 충과 효는 별개가 아님을 일깨워 주는 일화이다. 박평년 선생의 혈통이 이어진 데는 일가가 멸족될 당시, 선생의 둘째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 부인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 죽이라고 엄명하였다. 이씨 부인은 친정인 이곳 묘골에 내려와 살다가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유일한 이 혈손을 보존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 데리고 있던 노비가 딸을 낳자 서로 바꾸어 그 이름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으로 박비(朴婢)라고 지었다. 아들을 노비로 둔갑시켜 혈통을 보존한 것이다. 박비가 장성한 후인 조선 성종임금 때, 아버지와 동서지간이던 이극균이 경상감사로 내려와 울면서 자수를 권유하자 임금을 찾아가 박팽년 선생의 자손임을 이실직고하였다. 성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는 동시에 이름도 일산(壹珊)으로 고쳐 주었다. 이리하여 은둔의 세월은 막을 내리고 묘골이 충절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 성종때 손자 박일산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사 다른 충신들 함께 배향...1974년 現 육신사 건립 태고정.도곡재 등 아기자기한 공간구성수법 묘미
사육신의 혼령을 모시는 육신사가 묘골에 자리 잡은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묘골에는 박팽년선생의 손자인 박일산이 할아버지의 절의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던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이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박팽년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고조부 제사를 모신 후 잠을 자는데, 꿈에 고조부와 함께 죽음을 당한 다른 다섯 분의 충신들이 굶주린 배를 안고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일어나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다시 제사를 지냈다. 다른 충신들은 제사지내 줄 자손이 없으니 대신 제사를 지내준 것이다. 그 후부터는 하빈사라는 사당을 지어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하빈사는 나중에 낙빈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나중에 재건하여 다시 사육신을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에 그 자리에 지금의 육신사가 건립되었고, 1981년에 나머지 건물을 보완하였다. 그런데 육신사에 가면 출입구인 외삼문에는 육신사라는 현판이 붙었지만 정작 사당에는 숭정사(崇正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사당에 사육신 외에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 박중림 선생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사야 50년이 채 안된 건물이지만 묘골에는 박팽년 선생 후손들의 손길을 읽을 수 있는 오랜 건축문화유산들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고정과 도곡재이다.
이 두 건물은 보면 볼수록 아기자기한 공간구성 수법이 묘미를 준다. 보물로 지정된 태고정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 선생이 99칸 집을 짓고 살 때 세운 정자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네모진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로 세웠다.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서쪽 방에는 아궁이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정자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뒤쪽 구석에 자그마한 부엌을 꾸며놓아 아기자기함을 더해 준다.
이 건물의 또 다른 묘미는 지붕에 있다. 지붕을 살펴보면 동쪽은 팔작지붕이요 서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어 마감하였다. 부섭지붕이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고정시켜 퇴를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태고정은 맞배지붕의 합각에 서까래의 윗머리를 고정시키고 지붕을 달아내었는데, 지붕 아래에는 방과 부엌을 꾸며 농았다. 전체적으로는 단조로우면서도 뜯어보면 아기자기함을 엿보게 하는 건축방법을 사용하였다.
도곡재는 태고정의 건축수법을 흉내 내려고 노력한 건물이다. 도곡재는 정조 2년(1778)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의 살림집으로 건립되었다. 1800년대에 와서 유학자 박종우(朴宗佑)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불렀다.
이 건물은 본래 일반 민가와 비슷하였다. 집을 짓고 난 뒤 개축하면서 태고정처럼 안채와 사랑채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었다. 사랑채 부섭지붕 아래에는 대청을 연이어 높은 다락집처럼 꾸며 놓았다. 안채 부섭지붕은 초가이다. 한옥은 퇴를 빼고 칸을 달아내어 변화를 주어도 또 다른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미완성의 건축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묘골은 미리 알고 찾으면 마음이 숙연해지는 마을이다. 진정 숙연한 마음을 가지면 사육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묘골이다. 묘골에 가면 충절의 영혼들로부터 이 시대의 진정한 충효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