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 묵상
1, 이사 50, 4- 7. 주 하느님께서 나의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배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봅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2, 필립비 2, 6-11. 그리스도 예수는 이렇게 인간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읍니다.
3, 루가에 의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22,14 - 23,56.
1. 인사말.
주님 안에 사랑하는 청년복음화 회원 여러분, 일년중 가장 중요한 전례시기인 성주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수난 신비가 잘 드러나고 표현해주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청년 복음화 회원님들도 이 시기의 의미를 잘 새기며 전례에 열심히 참여하고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 주의 예루살렘 입성 행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예루살렘 도시를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즉 군림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 받은 사명을 완성하고 우리 인간에 대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입성하시는 모습도 아주 겸손하시고 평화로운 모습을 지니신 것입니다.
(묵상 1) 작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 - 겸손의 실질적인 모범인 예수님.
이 작은 나뉘에 예수님께서 몸을 의지하고 입성하시는 모습이 어떠했을까 하고 보니, 위엄있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작고 초라해보이지 않았을 까 한다. 그러나 작고 초라해보이지만 위엄과 예모를 갖추신 모습 그것이 주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묵상 2) 주님은 당신의 사명을 완성하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곳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다가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다. - 소명(召命)의 완성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싶었고, 또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셨지만, 기꺼이 그 길을 가셨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고, 죄많고 고집센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길이 바로 그 길밖에 없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2, 본 미사.
주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사랑의 완성자인 예수님, 세상에 오셔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하여 주신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분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느님께로부터 사명(使命), 소명(召命).. . .예수님의 관점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처절히 벗기우고 매달려 죽으시는 상태가 되셨다. 아무도 그분을 위로해 드릴 수 없었으며 이 싸움에서 그분께 도움을 드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성부께로부터 받은 그분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께 철저하게 순명하심(필립비 2, 6-11)
그분의 소명(召命) . . . 인간 구원을 위한 것.
우리의 소명(召命) . . . 올바른 합당한 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 아름답고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는 것. 우리 자신이 주님의 성령을 모시는 올바른 성전(聖殿)이 되도록 하는 것.
2) 우리 인간의 관점.
첫째, < 변덕스런 군중들>- 무지한 인간들(1).
입성 때 환호하였던 군중들이 대사제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사주를 받고 마침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선동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올바른 주관을 갖지 못하고 시대에 편승하고 주위 사람들의 말이나 선심등에 부화뇌동할 때 우리는 본의아니게 올바른 사람을 그릇되게 단죄할 수 있는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본의아니게 또 다른 예수님을 단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바른 양심불을 밝히고 올바른 식견을 길러서 판단을 하고 살아야 하겠다.
둘째,<예수님에 대한 몰이해>- 무지한 인간들(2)
예수님의 올바른 정체에 대하여 잘 알지못하였고, 예수님께 단지 현세적 행복이나 구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처형하는데 동참하게 된 것이다.
셋째. . 인간의 독선과 탐욕, 그리고 집단적 이기심.
A, 대사제와 율법교사들. . .자신들의 집단적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함. 여기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을 우리에게 올바로 알려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율법을 어지럽히는 사악한 자로 판단함.
B. 빌라도와 같은 정치권력. ..백성의 소란을 두려워하고, 자칫 자신이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예수님이 죄없으신 것을 알고도 정치적 타협을 하여 무사안일하기를 구함. 로마 본국으로부터의 지적을 두려워함. 예수님처럼 죄도 없고 어떤 허물도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백성들의 여론에 밀리고, 힘있는 언론과 유지들 권력기관과 적당한 타협을 통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비겁하고 줏대없는 정치지도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예수그리스도가 죄가 없는 사람이며, 백성을 잘못된 방향으로 선동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대사제 등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편견에 의하여 희생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거기에 동조하고 인정해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물로 손을 씻기는 하였지만, 역사는 빌라도의 최종적인 판단과 선고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4. 결 론 : 유대인들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삶.
1) 예수님에 대한 무지를 극복하여야 한다. . .예수님을 점성술사, 미래 예언자, 보험설계사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을 올바른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는 메시야 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분의 길을 가는데 탈락하지 않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2)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인식하여야 하겠다. . . .예수님께서 그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사명을 잘 알고 인식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내게 맡겨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使命)을 잘 알아서 이를 실현해나기는 데 최선을 다하여야하겠다. 예) 무지개원리 3“ 꿈을 품으라” . .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은 젊은 시기에 ‘문서(문자)로 된 자기 소명서(召命書)가 있었다는 예화 참조. (136. 쪽 )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목표가 매우 중요함을 알수 있고,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召命)을 인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집단 이기심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우리는 얄팍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쓰며, 텃세를 하고, 심지어 의인(義人)조차 알아보지못하고 희생시키는 우(우)를 범하게 된다. 복음적인 것이 아닌 집단 이기심과 기득권에의 안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복음의 의미를 잘 알아듣고 실천해나감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노력해나갈 때, 우리는 공동체를 참으로 쇄신하고 변화할 수 있게 된다.
4)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끝까지 함께 해야 하겠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십자가에 길에 함께 간 사람들 중에도 진정 예수님의 위로와 영적인 벗이 된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였다. 대다수는 예수님을 모욕하는 군중들, 박해자들, 사형집행인들이었고, 심지어 같은 사형수이면서도 예수님을 모독한 십자가의 죄수도 있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당신의 길에 함께 할 사람을 찾고 계시며, 삶의 고통 중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함께 하고자 하는 영혼들을 진정 감싸주시며 축복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진정 이해하고 함께 한 영혼들의 예, 성모 마리아(아들의 십자가 길을 끝까지 함께 하고 슬픔을 이겨내심), 성녀 베로니까(십자가 길에서 군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 마리아 막달레나(예수님이 돌아가셧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향료를 들고 나섬), 사도 요한(성모님과 함께 주님 십자가를 끝까지 지킴)
(2010. 3. 21. 오전동 성 임치백 요셉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