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8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배신당하는 기분
요 13:21~26
지난 금요일 오전에 전주대학교 교수 한 분과 약속이 있어서 갔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마치고 교수연구동을 나오는데 가까이에 있는 축구장에서 함성이 들렸습니다.
전주대학교 축구부가 훈련하는 인조잔디 구장이 대학본부 아래 있습니다.
가서 구경했는데, 전주대학교와 서울 경신고등학교 평가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 경신고등학교 축구부라는 말에 제 가슴이 설렜습니다. 왜요?
전주대학교 설립자 강홍모 목사님이 서울 경신학교 출신입니다.
강홍모 목사님은 2002년에 소천했지만 살아있다면 이 광경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을까요?
자신이 졸업하고 모교 축구선수가 자신이 설립한 대학교 축구부와 평가전을 벌입니다.
강홍모 목사님 책을 쓴 저자로서 강홍모 목사님의 기쁨은 곧 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죠?
울타리 밖에서 구경하다가 본부석으로 들어갔습니다.
젊은 축구선수들 경기를 바로 눈앞에서 본다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입니다.
퍽퍽 소리를 내면서 부딪히고 쓰러졌다가 오뚜기처럼 발딱발딱 일어서서 다시 뜁니다.
기적이지요, 기적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그렇게 나뒹굴었다고 쳐 봅시다!
저는 그냥 으스러지고 말 겁니다. 그런데 젊음이 기가 막힙니다.
전반전을 2:1로 전주대가 앞선 채 끝났습니다. 제가 경신고등학교 감독에게 다가갔습니다.
잠깐 대화를 나눴습니다. 강홍모 목사님이 경신고 출신인 것 알고 있더라고요!
제 책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간 책을 전하고, 점심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돈까스로 점심을 예약했대요! 그 자리에서 계좌번호를 받고 30만 원을 이체했습니다.
어때요, 제가 멋지게 한턱 쏘았지요?
☞ 왜 ‘멋짐’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참 멋집니다.
<배신 당함으로 입증되는 그리스도>
☞ 예수님의 멋짐은 우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잘 들으시고 은혜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사실은 이것부터가 멋집니다. 어떤 스승이 제자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일이 하도 멋있으니까, ‘세족식’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따라 하기’에 나섰습니다. 여기저기서 세족식을 합니다.
① 예수님의 첫 번째 ‘멋짐’ ⇨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신 제자 열두 명 안에는 배신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유다야, 제발 돌이켜다오!”
“나를 배신하지 말고, 나를 따르면 안 될까?” 이렇게 간절함으로 발을 씻기십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멋짐은 여기에 있습니다.
② 예수님의 두 번째 ‘멋짐’ ⇨ “발을 씻겨 준 제자 중에 배신자가 있다”
“발을 씻겨 준 제자 중에 배신자가 있다.”
발을 씻겨 준 제자 중에 배신자가 있을 때, 진정한 세족식입니다.
☞ 여기서 꼭 짚어 할 것이 있습니다.
왜 배신자가 있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귀 기울여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매우 깊고 섬세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스며있습니다.
제자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이 드러납니다.
요 13:18b “~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구약에서 예고한 내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오실 메시야, 그는 자기 떡을 나눠 먹던 친구가 발꿈치를 듦으로써 즉, 배신함으로써~
이 땅에 오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배신자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요 13:18)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배신당해야 한다! 한국식으로 하면 “내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야 한다”입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와 섭리와 경륜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 것,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떡을 먹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군가, 하나님께, 예수님께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발꿈치를 가장 먼저 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와입니다. 다음이 아담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이 부부가 하나님의 떡을 먹으면서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일은 바로 ‘발꿈치를 든’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서 발꿈치를 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 인간으로부터 배신당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마찬가지로 제자에게 배신당하는 분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떡을 먹는 자가 발꿈치를 들었다” 이 말은요,
“성부 하나님의 떡을 먹는 자가 발꿈치를 들었다” 바로 이 뜻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왜 배신자가 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지요?
성부 하나님이 아담 하와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요?
예수님도 자기의 떡을 먹는 자 중 배신자를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배신당하는 분이고, 예수님도 배신당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설계하셨습니다.
<배신의 고통 속에 사는 인생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은 배신의 고통 중에서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기중심과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들,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사람은 어떻게 자기를 드러냅니까?
혹시 사람도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배신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까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데, 여러분에게 ‘발꿈치를 드는 자’ 혹시 있습니까?
부모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줍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발꿈치를 “들어요, 안 들어요?”
왜 나를 낳았냐고, 남들처럼 잘 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나를 낳았냐고!
제자들, “발꿈치 들어요, 안 들어요?”
“이리 와서 내 떡을 나누어 먹자!” 그래서 먹여주면, 틀림없이 발꿈치를 듭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털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차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저와 여러분 역시 배신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성령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배신했고요,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부터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배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나에게 발꿈치를 들었다 (요 13:18)
이제 배신이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할 차례입니다.
자기에게 떡을 먹여주는 사람에게 발꿈치를 드는 것이 배신입니다.
앞발을 들고 대드는 것이 배신이 아닙니다.
앞발을 들고 대드는 것은 배신이 아니고 싸움입니다. 뒷발로 차는 것이 배신입니다.
굶지는 않는지, 헐벗고 살지는 않는지, 잠은 제대로 자는지…
자기 시야 안에 두고 떡을 먹여줍니다. 잘 키워서 세상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앞장서서 가다가 떡을 먹여주는 이에게 뒷 발질을 합니다.
뒷발질한다는 뜻입니다. 뒷발질하는 것이 배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렇게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예수 믿기 이전 모습입니다.
☞ 이쯤에서 생각나는 성경 한 대목이 있습니다.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울이 예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이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때 예수님이 해보다 더 밝은 빛을 쏘았습니다. 사울의 눈을 안 보이게 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 땅에 엎드렸는데, 그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수레를 끄는 당나귀나 말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들거나 일하기 싫으면?
뒷 발질을 합니다. 뒤를 탁탁 찹니다. 그런 것 보신 기억 있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수레를 끄는 짐승이 뒷발질하는 곳에 가시 채를 매달아 놓습니다.
나무판에 날카로운 가시를 붙인 가시 채를 달아놓습니다.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 이 말씀에서 또 한가지 진리가 드러납니다.
발꿈치를 드는 일, 배신하면, 그 후유증이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자기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배신하는 일은 가시채를 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배신은 자기의 뒤에서 자기를 돌보는 이에게 뒷발질하는 것이 배신입니다.
배신의 피해는 배신한 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배신의 대가는 결코 작지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배신 이후 세상에는 온통 배신으로 차고 넘칩니다.
<배신당하는 기분>
예수님은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배신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계속 유다에게 사인을 보냅니다.
그러나 유다가 마음을 돌이킬 기미가 안 보입니다. 또 한번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고”(21절)
다른 제자들이 궁금해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요한에게 머릿짓을 했습니다. “그게 누군지 물어봐아~”
그래서 요한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누구니이까”(25절)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요한이 그게 누구냐고 질문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적셔다 가룟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내 떡을 먹는 네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
<마무리>
오늘 설교 제목이 “배신당하는 기분”입니다.
배신당하는 기분을 가장 잘, 가장 절실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 예수님입니다.
배신을 당하고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배신할 제자의 발을 씻겨 줍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첫째, 배신한 자에게 “돌아오라고~” 가시 채를 뒷발질하지 말고 멈추라고!
둘째, 배신당하는 이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고 기다리라고!
셋째, 나도 배신했던 배신자였음을 고백하고 회개하라고!
배신한 자는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믿어야 합니다.
배신당한 자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 내 구주”
나 역시 배신한 과거를 바라봐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이 어버이날입니다.
자녀를 향해 배신의 기분을 느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녀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배신했었지!” 회개해야 합니다.
배신당하는 기분, 원조는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
주님 바라보면서 삽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멋지게 삽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