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심을 깨치는 글 >
[현안 스님의 아메리칸 육바라밀] - 제 7 편
글 | 현안賢安 (XianAn)
불교에서 우리가 늘 마음속에서 모든 것을 두 개의 양극으로 분별하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강함과 약함, 손해와 이득과 같이 말입니다. 예로 보살들은 본래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마음속으로 여자와 남자를 구분짓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 보통 여성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방식이로든 수행해서 보살의 경계에 다다르면 그걸 초월합니다. 여러분이 선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분별심을 없애버리면 더는 여자와 남자를 분별하지 않을겁니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상황에 따라서 남성 혹은 여성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 세상에 여자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동양권 문화에서는 그렇게 나타나셨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나 한국 문화에서 관세음보살님은 매우 아름답고 우아합니다. 그녀가 불교에서 자비 수행의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누구든 고통에 처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오셔서 구원해주시겠다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외워보십시오. 그리고 평소에 그런 훈련을 해보세요.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다면, 손자, 손녀가 있다면 함께 훈련해보세요. 아이들이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외울 수 있다면 앞으로 여생동안 쓸 수 있는 좋은 기술과 지식이 될 것입니다. 곤경에 처하거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늘 관음보살의 명호를 외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에 가보면 그런 분들이 꽤 많습니다. 수많은 비구, 비구니 스님들도 그렇게 할 겁니다. 사찰을 하나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게 누구나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외울 수 있습니다. “관음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 또는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이렇게 외우는 겁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십시오. 소리내서 해도 좋습니다. 가까운 사찰에서 스님들이 목탁을 치며 관음보살의 명호를 외운다면 따라해보세요. 속도를 맞춰서 하면 더 좋습니다.
보살님들은 명상해서 궁극적인 곳에 다다를때까지 수행합니다.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신통력이라 불리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로움부터 가장 위대한 이로움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선 수행입니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병에도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런게 작은 이로움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이라 불리는 최상의 형태의 집중력, 최상의 삼매에 도달하는 겁니다. 그게 선 수행의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게 선 수행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면 거기 “대자비(大慈悲)”라 불리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큰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때까지 진정한 자비가 없습니다. 오직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대자비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비가 뭘까요? 저에겐 대자비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스님의 법문에서 배운 것을 여러분과 공유해보고 싶습니다. 자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자비라 불리는 것과 대자비라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비심이란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보면 돕고 싶은 겁니다. 괴로움을 해결해주거나 괴로움을 줄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게 자비심입니다.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영적 수행을 하면 결국 자비심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예로 명상 수행에서 최상의 상태의 삼매는 자비심이라고 말합니다. 명상으로 더욱 자애롭고 자비로워집니다. 그래도 여전히 명상의 상에 도달하고 정체하면서, 그걸 대자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걸 대승의 관점에선 큰 자비라고 보진 않습니다.
대자비는 정의상 동체(同體)입니다. 그건 우리가 모두 똑같다는 뜻이고, 같은 체(몸)이라는 것입니다. 예로 우리가 선 수행으로 견성성불합니다. 그러면 불성 즉 우리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중생에게도 그게 있단 걸 알게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걸 대지혜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진리를 보아야만 '나에게도 불성이 있고, 모두에게도 불성이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보는 것이지 머리를 쓰는 게 아닙니다. 책에서 읽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책에서 모두들 우리에겐 불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부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불성을 보고, 모든 이들에게서도 그걸 보아야만 그제서야 대자비라 부를 수 있습니다. 분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자비는 자비보다 큰 겁니다. 여러분이 자비로운데, 여전히 여러분과 다른 이들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지점까지만 자비롭고, 무리한 요구를 듣거나, 터무니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난 이만큼만 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줄 수는 없어”라고 말합니다. 보살님들은 그런 분별이 없는 겁니다. 아라한은 여전히 다른 이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봅니다. 그리서 여전히 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게 자비롭다는 의미는 다른 이들과 하나이자 같은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괴로움이 즉 여러분의 괴로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더는 한계란게 없습니다. 저는 거기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거기에 다다르면 그 차이를 진짜 이해할 수 있게 될겁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분별하지 않고, 손해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겁니다. 여자와 남자, 평등과 불평등을 분별하지 않게 될 겁니다.
참고: 영화 선사의 법문. 2016년 3월 26일. 관음보살 염불의 이점
글쓴이: 현안 스님(賢安, XianAn)
2012년부터 영화 선사(永化 禪師)를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2015년부터 미국에서 명상을 지도했다.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 후 스승의 지침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정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