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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기행] <13> 울진 왕피천 생태탐방로 사계절 공존 '비경의 보고'…걷기 마니아 '트레킹 성지' | ||||||||||||||||||||||||||||
◆봄 아홉 고개를 넘어야 마을이 나온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 굴구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내려왔다는 왕피천(王避川). 굴구지는 왕피천 물길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곳에서부터 걷기를 시작한다. 속사마을까지 7.3㎞를 걷는데 곳곳에 험한 길이 있어 관계 당국이 안전펜스를 설치했다. 군은 자연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안전시설 설치를 최소화했지만 왕피천 일대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전국의 몇 안 되는 지역이다 보니 일부 환경단체들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환경청과 울진군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초여름부터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길이 예로부터 울진읍내와 서면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서면 왕피리 사람들이 장이 열리는 매화장을 찾기 위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길 곳곳에는 돌담장, 솥을 걸어 두었던 터, 숯가마터 등 옛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오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최근 ‘트레킹 코스’로 명성을 얻으면서 걷기를 즐기는 이들에게 ‘성지순례 코스’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래도 겨울이나 평일의 굴구지는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요즘도 겨우내 얼었던 땅이 덜 녹은 때문인지 주말이라도 사람들이 많지 않다. 호젓하게 자연을 즐기고 싶다면 이때가 제격이다. ◆여름 생태탐방로를 따라가며 체험하다 보면 계곡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계곡물이 따사로운 봄볕을 머금고 여름의 색깔을 내고 있다. 울진의 이름난 불영계곡이나 덕구계곡 못지않은 짙은 녹색의 아름다움이 여름색을 띠며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에 반사돼 올라오는 온기가 제법 후끈하다. 평일이라면 계곡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는데, 물소리만 지운다면 이런 적막이 따로 없다. 계곡을 따라오르다 보면 폭포가 수도 없이 나온다. 계곡은 점입가경이다. 들어갈수록 절경이고 비경이다. 이런 절경에 전설 한자락이 빠질 수 없는 법. 급한 물이 소용돌이치는 이곳에 만들어진 용소는 폭은 좁지만 길어서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을축년 대홍수를 예감한 용이 용소에서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왕피리에 사는 새댁이 굴구지 친정으로 만삭의 몸을 풀러가다가 보게 됐다고 한다. 새댁은 그 자리에서 눈이 멀게 됐고, 낳은 아이의 몸에는 금빛 비늘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계곡의 물은 바위 색깔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쑥색 바위가 있는 소는 진한 녹색이고, 흰 화강석 바위의 물은 투명하다. 거북이 형태를 닮은 거북바위와 울진의 대표 특산물 송이를 옮겨 놓은 듯한 송이바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하지만 처음 찾는 이는 절경을 봐도 다음 번에 다시 찾아낼 자신이 없다. 그저 눈길 닿는 곳 어디라도 절경이다 보니 이름붙이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왕피천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전체 면적만 102.84㎢로, 북한산 국립공원의 1.3배에 이른다. 전체 29곳의 보전지역 가운데 왕피천이 차지하는 비율이 40%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대단하다. 왕피천을 따라 걷는 길은 원점회귀가 가능할 뿐 아니라 계곡과 산길, 마을길을 두루 섭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계곡을 건널 경우가 생기는데 깊은 곳은 물이 허벅지 윗부분까지 차오르지만 큰 부담은 없다. 계곡을 건너 평탄한 길을 만나면 어른 키만한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모나지 않는 모습이 친근하다. 바위 구간을 지나 큰 굽이를 지나면 길이 조금 험해지는데, 이때는 계곡으로 내려와 물길을 따라 걸으면 쉽다. 왕피천 계곡은 길이 없다고 생각되면 곧 새 길이 나타나고, 그러다가 막히면 에둘러 가면 된다. 만약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계곡을 건너버리면 그만이다. 계곡물은 대부분 얕고 넓은 자갈밭이 있어 쉬거나 물놀이하기에 좋다. 용소까지 가는 길은 처음과 끝이 비슷하다. 잔잔한 물 흐름을 따라 바위를 쓰다듬으며 앞사람 뒤꿈치를 따르면 어느새 목적지다. 계곡 길은 용소를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굴구지에서 용소까지 거리는 4㎞. ◆가을 계곡을 지나 산으로 이어진 탐방로를 올려다보니 금강송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치유의 숲’이라고 이름 붙여진 금강소나무숲인데, 소광리 숲을 제외하면 울진에서 가장 넓은 금강송 군락지라고 할 수 있다. 산길에는 나무 데크를 놓아 한결 오르기 수월하다.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비탈진 계곡의 허리에 파이프를 박고 길을 냈는데, 산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불만을 쏟아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에 왜 생채기를 냈는지 모르겠다”면서 "하지만 사람들이 행여 다칠 수 있다는 점을 살핀다면 그리 과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곳은 봄이지만 가을의 정취를 닮았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낙엽 때문이다. 낙엽 덮인 길은 그저 발 디딜 자리를 가늠해 줄 뿐, 목적지로 향하는 발길을 더없이 더디게 했다. 그래도 급할 게 뭐 있겠는가. 아래로 보이는 깎아지른 바위와 소, 낙엽 사이로 우뚝 솟은 금강송을 보며 천천히 오르다 보면 목적지는 금세 모습을 드러낸다. 아쉬움이 있다면 금낭화 군락지와 갈대 습지 등의 정취가 계절의 한계에 부닥쳐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겨울 금강송 숲이 우거진 길을 걸을 때면 겨울이 따로 없다. 볕이 들지 않아 한기가 오르고, 바닥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추위를 느끼게 한다. 멀리 보이는 산 역시 눈으로 뒤덮여 4월은 돼야 봄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이곳의 봄은 더디다. 계절은 봄이되 생명들은 아직 봄을 맞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금낭화도 모습을 숨겼고, 야생화도 낙엽 속에 고개를 박았다. 탐방로 난코스 곳곳에 설치된 나무 계단에 찍힌 발자국과 곳곳의 야생동물 흔적만이 황량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봄의 중턱에 겨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길이 특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찾지 않아 길이 청정하다. 굴구지 마을 입구에서 산악자전거를 타기에도 좋고, 소담한 산행을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겨울길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면 이달이 가기 전에 찾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울진군은 길과 사람이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에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군은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하루 방문인원을 50명으로 제한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군은 생태탐방로 및 계곡길 체험과 친환경농업지역 탐방, 친환경 음식먹기 체험 및 판매 등을 우선 선보이며, 관광객들의 요구를 수렴해 프로그램을 다양화해 나갈 방침이다. 산촌생태마을인 굴구지 마을에서는 계절별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봄에는 나물캐기 체험, 여름에는 대나무를 이용한 피라미낚시, 은어잡기와 물놀이, 가을에는 송이캐기 및 시식, 겨울에는 논에서 썰매타기 등을 즐길 수 있다. 숙박은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펜션을 이용하면 불편함이 없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