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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성가정 성지 → 천진암성지 → 양근성지 → 숙소(향촌민박)
30.8Km 26.6Km 24.6Km
21. 천진암성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놓여 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남한산성에서 광주 시내로 가는 국도 중간쯤에 ‘번내’가 있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한참 달려서야 닿을 수 있는 산골인 천진암에는
이제 끊임없는 순례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행렬에 참가한 순례자들 얼굴에는 스스로 신앙을 찾아 나선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선조들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바로 이곳 천진암에서는 이미 자랑스러운 교회사가 시작됐다.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鹿菴)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광암(曠菴)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학회가 끝날 무렵 이벽이 지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정약종이 지은 "십계명가"(十誡命歌)는
이러한 강학회의 결실을 잘 드러내 준다.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가장 먼저 이벽은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전교한다.
또 그 해 가을에는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키고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 교회의 발상지로서 천진암은 교회사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잊혀 왔다.
지난 1960년에 와서야 이곳 지명들이 문헌에 근거해 밝혀졌고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답사를 통해
한국 천주교의 요람으로서 천진암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 말부터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급진전되었고
1980년 6월에는 천진암 일대 12만 평의 땅을 매입, 그 초입에 가르멜 수녀원이 문을 열었고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으로 그 해 6월 24일 제막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한 해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가
이벽의 옆으로 나란히 모셔져 창립 선조 묘역을 이룬 것이다.
1982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이 설립되었고,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2000년까지 토목공사를 마치고
2020년까지 기초공사를 진행 중이다.
현재는 대성당 터에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2040년까지 골조공사를, 2070년까지 조적공사를, 2079년까지 마감공사를 통해
3만석 규모의 대성당이 위용을 드러낼 예정이다.
그 외에도 1994년 성지 입구에 광암 이벽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광암 성당이 세워졌고,
1999년에는 성모경당 봉헌식을 가졌다.
1992년 박물관 건립 인준 후 1995년 기공식을 갖고 시작한 천진암 박물관은
2011년 건물 공사를 마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내부 전시장과 수장고 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2013년 6월 23일에는 성모경당과 대성당터 중간에 좌대 포함 22m 높이의
'세계평화의 성모상'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세계평화의 성모상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신앙의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청동을 이용해 파티마 성모상 형태로 제작하였다.
천진암을 순례할 때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수원교구에서 위탁 운영하는
경기도 청소년야영장이 있다.
입구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실내체육관 옆으로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묘역과
창립 선조 가족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종의 아들로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난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1839년)는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며 뜻을 같이 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劉進吉, 1791-1839년)와 함께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6월 30일)]
22. 양근성지
양근(楊根)이란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양근’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예로부터 남한강 변에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었다.
버드나무는 일단 뿌리만 내리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속성수이다.
그래서 남한강 변에 심어진 버드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폭우로 인한 제방의 붕괴를 막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나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어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퍼져나갔고,
순교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졌다.
한편 양근이라는 말에서 양제근기(楊提根基)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이 말은 튼튼한 근원, 기초란 의미로 더욱 놀라운 것은
양근이라는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양근 성지의 의미가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현재 양평이란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8년 양근군(楊根郡)으로 전입한 지평군(砥平郡)의 평자와
양근군의 양자가 합해져 오늘날의 양평군이 되었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한 때 강상면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현재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이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李檗)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과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몸소 조과(朝課, 아침기도), 만과(晩課, 저녁기도),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을 바치며 천주교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당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은
신부의 역할을 하며 2년간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그리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 성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양근 성지는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조숙은 훗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종손자(從孫子)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 순교부부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1837년 1월에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근으로 가서 머물며
4주일 동안 조선말을 공부한 다음 그 읍내 신자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를 양근으로 불러
그곳에서 함께 부활 축일을 보냈다.
양근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4촌 여동생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이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한 곳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양근 성지와 관련 있는 순교자 조용삼(趙∼, 베드로, 1801년 3월 27일 순교, 독신),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1802년 1월 29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802년 1월 30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조숙(베드로)와 권천례(데레사, 1819년 8월 10일 이후 순교, 동정부부)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양근 성지의 중요성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첫째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국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모태이다.
둘째로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난 곳이다.
셋째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진 곳이다.
양근 성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용문사는
권일신이 1785년 봄 명례방(명동)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
형조 관리에게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이후
양근 사람 조동섬과 함께 8일간 침묵 피정을 한 곳이다.
2003년 전담신부 발령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양근 성지는,
대형 십자가와 기념성당, 한강변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고,
2010년에는 순교자 광장에 이숙자 수녀가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순교 조형물을 세웠고,
감호암 위에 있었던 정자 감호정과 직암정, 녹암정, 쉼터 등을
광장에 마련하는 등 새롭게 단장하였다.
2011년 5월 7일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 및 시설 축복식을 거행했다.
양근 성지는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 운동의 거점이자 복음전파의 출발점이었던
성지의 의미를 살려 소공동체 봉사자 및 구역장 반장을 위한 교육의 장이자
선교사들을 위한 훈련도장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순교한 곳으로서 참다운 부부애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과 피정에 힘쓰고, 평신도 사도직과 순교자들의 신앙과 행적을 본받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9일)]
양근성지를 끝으로 순례 3일차 여정도 끝났다.
양평부근 숙소는 가격도 비쌌지만 거의 만실로 숙소를 잡을 수 없어
내일 장시간 운전하여 갈 겟세마니 피정의 집 가는 길에 있는
향촌민박을 예약했다. 양평에서 24.6킬로 떨어진 곳이다.
숙소에 가기전에 늘 소문만 듣던 양평갈비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여주에 살 때 지나가면서 자주 보았던 집으로 맛집으로 소문이 난 곳이다.
5시경 도착하니 영업준비 중이었고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LA갈비가 유명하다고 하여 2인 분을 시키자 종업원이 와서 구워주었다.
손님이 없다보니 갈비 1대를 덤으로 받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가 제주에서 왔다고 하자 자기도 제주에 살고 싶다며
일자리 등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지금은 이모님을 도와주고 있다며~
제주에 대한 정보를 나누다보니 친한 지인같이 여겨졌고
손님도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갈비 2인분을 더 시켜서 먹고 숙소로 향했다.
민박집이라 방공기가 약간 추워 이불 1채를 더 요구했다.
내일 첫 순례지는 74.3킬로 1시간 20분 걸리는 곳이라
6시경 출발하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첫댓글
이 많은 작품으로
일생의 삶
오늘도 행복 가득 짖는 하루가 되시어요
세잎 클로버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