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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공세를 개시한 다음날 미군이 원산 상륙작전을 개시한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한반도 전선을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戰區(전구)로 나누고, 미 제10군단에 동부전선을 맡겨 동해안 항만에 상륙작전을 실시하게 한 것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최대 실책 중 하나였다…(중략) 이에 따라 兵站線(병참선)의 핵심기지인 부산항과 인천항의 滯船(체선) 사태를 야기해 서부전선에서 제8군의 兵站(병참)의 악화를 자초했고, 동부전선에서 국군은 겨울에 夏服(하복)을 입고 포탄도 부족한 채 전투를 해야 했을 만큼 참담한 상황이었다.
國共內戰 때 연마한 人海戰術·運動戰·포위섬멸전
맥아더의 북진계획은 洛東江(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한 미 제8군을 서부전선에, 仁川상륙작전에 성공한 미 10군단을 동부전선에 배치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竝進(병진)시키는 것이었다. 1개 戰域(전역)에 2인의 戰線(전선)사령관을 배치한 ‘투톱 시스템’에 의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사이
산악지대에 폭 80km의 구멍이 생겼고, 바로 그 구멍으로 중공군이 쏟아져 나왔다. 可用(가용)병력이 압도적인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의
스케일이 갑자기 대여섯 배로 커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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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남하 경로(큰 화살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 인민군이 韓滿(한만) 국경선
부근까지 후퇴하게 되자, 중국은 항미원조라는 이유로 군대를 한국전에 투입하였다. 중국군은 심양(봉천)을 중심으로 신의주, 청성진 방면과 만포진, 중강진 방면으로 들어와서 서부전선의 희천, 운산 근처와 동부전선의 장진호 부근에 숨어 있었다. |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했던 초기의 전술은, 蔣介石(장개석) 총통의 國民黨軍(국민당군)과의 內戰(내전) 때 형성된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술로 대표된다.
그 첫째가 人海戰術(인해전술)이다. 毛澤東(모택동)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결국 “절대적 優位(우위)의 兵力(병력)을 집중해 敵(적)을 소멸한다”는 뜻이다. 중공군은, 참전 前부터 大병력을 압록강 北岸(북안)인 滿洲(만주)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제1차 공세에 들어가기 직전인 1950년 10월24일까지 6개 군단(18개 보병사단과 3개의 포병사단)의 병력 30만 명을 평안도와 함경도 사이의 산악지대에 숨겨놓고 있었다. 이것은 맥아더의 예상을 다섯 배 이상 웃도는 대병력의 집결·출동이었다.
그들이 국군과 미군에게 결전을 걸었던 1950년 11월 말(중공군 2차 공세)에 이르면 중공군의 병력은 이미 45만 명에 달해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을 압도했다. 무기·장비 면에서 후진성이 두드러졌던 중공군은 실제 작전에서 압도적인 병력, 즉 人海戰術(인해전술)로 유엔군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運動戰(운동전)이다. 운동전이란 게릴라的 戰法(전법)에서 기원한다. 즉, 流動性(유동성)을
강조한 것으로 중공군이 가장 중요시하는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무기와 장비 優位(우위)의 적군에 대해 단기결전 및 장거리 이동, 配備(배비·부대
배치 및 대비) 태세의 변화, 끊임없는 공격을 수단으로 삼으면서 어느 특정 지역·거점의 고정적·수동적 방어를 꺼려한다. 뒤에서 살필 것이지만,
중공군이 1950년 10월 하순부터 1951년 5월까지 한반도 남북에서 발동된 모두 다섯 차례의 공세는 ‘운동전의 모범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그 세 번째의 常套(상투)전술은 包圍殲滅戰(포위섬멸전)이다. 毛澤東은 “敵의 열 손가락 모두에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 敵의
손가락 하나를 절단하는 것이 낫다”는 名言(명언)을 남겼다. 이 전술은 據點(거점)지역의 탈취보다 적 부대의 섬멸에 重點(중점)을 두고 운동전을
진행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전투에서 우세한 병력을 집중, 敵軍의 일부에 대한 분할·포위섬멸을 강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1951년 전반까지 각 작전에 있어서 중공군은 몇 번이나 정예의 소수 병력을 국군·유엔군의 후방에 잠입시켜 그 後退路(후퇴로)를
끊음으로써 국군·유엔군을 동요시켜 놓고, 거기서부터 四方八方(사방팔방)으로 총공격을 거는 포위섬멸전을 벌였다.
1950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상순까지의 약 2주간에 단행된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서 유엔군은 위에서 말한 중공군의 기본전술에 無知(무지)해 작전실패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輕敵必敗(경적필패)의 전형적 사례였다. 그렇다면 미국은 중공군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중공 수뇌부는 1950년 10월2일 한국전쟁에의 개입을 결심했다. 그날 深夜(심야), 중공 수상 周恩來(주은래)는 파니카 印度(인도)대사와 회견하고, “미군이 38선을 넘어 北上하는 경우, 우리들은 坐視(좌시)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하도록 했다.
그 메시지를 전달받은 美 국무부는 주은래의 聲明(성명)이 “虛勢(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소련과 중공이 북한정권을 구원하기 위한 외교 노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며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美 CIA(중앙정보국)도 白堊館(백악관)에 제출한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중공군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
<중공이 만주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는 움직임은 보이지만, 한반도에의 전면 간섭을 뒷받침할 만한 확고한 증거는 없다. 군사적으로 보아도 그들은 한반도에 개입하는 最良(최량)의 타이밍을 놓쳤다.>
1950년 10월15일, 태평양 上의 웨이크島에서 개최된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 때도 맥아더는 중공군의 전투력을 다음과 같이 얕보았다.
“우리들은 지금 중공군의 개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압록강을 도하시켜 파견 가능한 병력은 5만이나 6만 명
정도밖에 없으며, 더욱이 공군도 없다. 만약 중국인이 평양까지 南下(남하)한다면 대규모 살육을 自招(자초)하는 것이다.”
사실, 중국은 1894년의 淸日(청일)전쟁과 1931년의 滿洲(만주)사변은 물론 1937년에 발발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終戰(종전)과 더불어 끝난 中日 10년 전쟁 때도 일본군에 일방적인 패배를 거듭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의 장군 한 명도
戰死(전사)시키지 못한 군사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웨이크島 회담 불과 사흘 후인 10월18일,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진입했다. 여기서
맥아더의 전략·전술적 오판과 그에 따른 北進과 좌절의 과정을 음미해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맥아더의 실책— 戰線 지휘권 二元化
맥아더는 낙동강방어전의 主力(주력)이었던 미 8군을 북상시켜 平壤(평양)으로 진격하고, 仁川상륙작전의 主力인 미 10군단을 동해안의 강원도 북단 元山(원산)에 상륙시켜 평양을 포위한다는 전선 지휘권의 이원화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했다. 맥아더의 이 구상에 대해 유엔군사령부의 참모들조차 우려하고 있었다.
예컨대 맥아더사령부의 병참부장은 “병참 지원은 분할하는 것보다 통일하는 방식이 훨씬 용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군 측도, “元山 상륙은 불필요한 작전이다. 미 10군단은 海路(해로)로 진격하는 것보다 서울로부터 陸路(육로)로 直攻(직공)하는 쪽이 훨씬 일찍 元山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에게 飜意(번의)를 건의하는 참모는 없었다. 仁川상륙작전에서 大성공을 거둔 맥아더의 威信(위신)과 聲望(성망)이 참모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미 8군 참모들은 물론 ‘1개 전선의 2인 지휘관’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⓵ 미 8군이 북한군을 추격전의 주역이 되는 경우, 미 8군의 현재 태세와 보급상황 때문에
38선으로부터의 공격개시는 2주간 후로 된다. 이것은 북한군에게 이탈과 再편성의 기회를 준다. 그러나 미 제10군단은, 현재 서울 주변에 있고,
더욱이 인천항으로부터 용이하게 보급을 받고 있다. 따라서 미 10군단을 제8군 예하로 편입시켜 추격의 主役(주역)으로 기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원활한 공세를 개시할 수 있다.
⓶ 미 10군단이 원산으로 항해하기 위해 仁川港(인천항)에서 승선하는 데만 약 2주간이
소요되겠지만, 그 사이에는 인천항의 滯船(체선)으로 보급품의 揚陸(양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 8군은 釜山港(부산항) → 경부선을 통해 보급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미 8군의 공세가 더욱 늦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⓷ 동해안을 북진중인 한국 제1군단은 미 10군단이 元山에 상륙하는
것보다 먼저 원산을 점령할 것이다. 위험한 상륙작전을 仁川에 이어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⓸ 또 미 10군단이 원산으로부터
西進(서진)하여 평양을 포위하려고 해도 시간을 맞출 수 없다. 더욱이 북한군의 主力은 이미 궤멸한 만큼 미 8군은 혼자라도 평양 공략이
가능하다.
결국 미 8군이 생각하고 있던 북진계획안은, 워커 8군사령관이 한반도 전선의 全 지상군을 통괄·지휘하는 것으로, 미 10군단을 8군 예하에 편입시켜 그것을 主力으로 삼아 평양을 공략하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構想(구상)에 따라 한반도의 전선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中將(중장)이 지휘하는 서부전선과 미 10군단장 알몬드
少將(소장)이 지휘하는 동부전선으로 兩分(양분)되었다. 서부전선의 워커 사령관은 휘하의 미 제1군단과 국군 제2군단 등 모두 6개 사단, 1개
여단, 1개 공수여단 등 13만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동부전선에는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제10군단 예하에는 미 해병1사단·미 7사단과 국군
제1군단(수도사단·제3사단) 등 모두 4개 사단이 있었다.
그렇다면 맥아더 構想(구상)은 실제의 현장에서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원산 상륙을 위해 미 제1해병사단이 필사적으로 인천항에서 병력과 장비·차량 등을 탑재하고, 미 제7사단이 陸路(육로)로 부산항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공략 목표였던 원산은 10월10일 국군 제1군단에 의해 간단하게 점령되었다. 국군 제1군단은 계속 북진해 10월17일에는
함흥·흥남까지 점령했다.
한편 미 10군단은 10월16일에 인천항을 출항해 부산항을 거쳐 10월19일에 원산 앞바다에 도달했다. 그러나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이 도주하면서 부설한 機雷(기뢰)의 掃海(소해·바다에 부설한 기뢰 등의 위험물을 제거함)에 시간이 걸려 상륙은 10월26일에야 이뤄졌다. 당연히 10월19일에 함락된 平壤 공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10월25일 서부전선에서 개시된 중공군의 제1차 공세를 견제하는 데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新맥아더 라인의 형성
북한 수뇌부는 이 무렵 江界(강계)로 후퇴하면서 다음의 방어선을 설정했다.
제1차 방어선 : 安州(안주)∼价川(개천)∼德川(덕천)
제2차 방어선 : 熙川(희천)
제3차 방어선 : 江界(강계)
당시, 안주∼개천 以北으로 패주하고 있던 북한군은 약 4만 명, 또 훗날 ‘鐵(철)의 삼각지대’라 불리는
鐵原(철원)-金化(김화)-平康(평강)의 삼각 지구에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제2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이때까지 한국군 이외의 부대에
대한 ‘北進 한계선’으로 정하고 있던 定州(정주)∼寧遠(영원)∼咸興(함흥)으로 이어지는 축선, 즉 ‘맥아더 라인’을 再검토하고
있었다.
그 결과, 워싱턴의 訓令(훈령) 범위 내에서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해서는
宣川(선천)∼古仁洞(고인동)∼坪員(평원)∼豊山(풍산)∼城津(성진)을 연결하는 線에의 진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 10월19일 이를
發令(발령)했다. 이 새 진출선은 압록강까지가 약 60km의 거리다. 그 후 이 線은 ‘新맥아더 라인’이라고 불렸다.
동시에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을 미 제10군단의 지휘 하에 배속시켰다. 알몬드 소장의 미 제10군단과 워커 중장의 제8군을 동서로
竝進(병진)시켜, ‘新 맥아더 라인’을 향해 진격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1개 戰線(전선)에 2人의 전선사령관을 배치하는 兵法上(병법상)의 실수를
범했다.
또 10월20일에는 유엔군의 예비인 제187공정연대전투단을 서부전선의 肅川(숙천)·順川(순천) 지역에 낙하시켜 金日成과 북한군 主力의
退路(퇴로)를 차단함과 함께 평양 부근에 구속되어 있는 다수의 유엔군 포로를 구출하라고 명했다.
공정연대는 기습 낙하를 결행,
약간의 저항을 배제하고 同지역을 점령,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主力은 이미 淸川江(청천강) 이북으로 철퇴했고, 1개
연대 정도의 북한군 병사를 포획하는 데 그쳤다. 또 유엔군 포로는 이미 북방으로 후송된 뒤여서 구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유엔군은 쾌조의 북진을 계속했다. 서부전선의 미 8군은 西로부터 미 제1군단(영국 제27여단, 미 제24사단,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국군 제2군단(제6사단, 제8사단)이 잇달아 청천강을 건넜다. 또 미 제10군단이 맡은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元山(원산)·興南(흥남) 부근에서 橋頭堡(교두보)를 확대하면서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의 상륙을 기다리며 北進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계속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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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38도선 돌파와 北進 |
맥아더 원수는 전쟁의 종결을 예상하고, 10월24일 압록강을 향한 총추격을 명했다. 1주일 전에 발령되었던 ‘新맥아더 라인’은
철폐되고, “全부대는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쾌속 진격을 계속하는 유엔군에게도 큰 문제점이 있었다. 兵站線(병참선)이 길어지고, 더욱이 북진에 따라 한반도의 지형상 正面(정면)이 갑자기 넓어져 戰力(전력)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 河口(하구)∼두만강 河口에 이르는 국경선은 약 1000km로 평양∼원산 線의 무려 네 배에 달한다.
또 서부의 미 8군과 동부의 미 제10군단 사이에는 狼林山脈(낭림산맥) 등의 산악지대가 펼쳐져 있어 유엔군의 連携(연휴·link)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위험을 예감한 사람은 없었다. “압록강·두만강까지만 도달하면 전쟁은 끝난다.” 각 부대는 그대로 국경을 향해 질주했다.
미 제1군단은, 미 제24사단에게 新義州(신의주)를 향해 진격시키고, 英國 제27여단에게 博川(박천)을 점령해 大寧江(대령강)의 渡河(도하)를 준비케 했다. 그 右側(우측)의 국군 제1사단은 10월23일 軍隅里(군우리) 북쪽의 나무다리를 건너 淸川江을 넘어설 무렵, “종전과는 다른, 폭풍전야와 같은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드디어, 제1사단은 安州(안주) → 寧邊(영변) → 雲山(운산)을 거쳐 10월25일에는 靑山鎭(청산진)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돌연 강력한 敵(적)의 저지를 받았다. 이상한 군복의 병사 한 명을 잡아 심문해 본 결과, 놀랍게도 그는 북한 병사가 아니라 중공 병사였다. 중공의 大병력에 저지당한 국군 제1사단은 압록강을 향한 북진이 불가능해졌다.
국군 제1사단의 水豊(수풍) 방면 진격이 중단되자,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미 제1기병사단의 제1기병연대에게 국군 제1사단을 추월해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아울러 신의주로 향하던 영국 제27여단도 미 제24사단과 전투임무를 교대했다.
국군 제2군단 예하 제6사단은 溫井(온정)을 거쳐 10월25일 檜木洞(회목동)에 진출했다. 압록강까지는 하루 거리. 그 右翼(우익)의 국군 제8사단은 德川(덕천)·寧遠(영원)으로부터 熙川(희천)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그때까지 유엔군 수뇌부, 심지어 서부전선의 밀번 제1군단장까지도 중공 정규군의 개입을 半信半疑(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북한
패잔병에 중공의 의용군 소수가 가담했다는 정도의 인식만 하고 있었다. 이 무렵, 동부전선에는 실제로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었지만, 미 제10군단은 아직 동해안 항만에 상륙조차 하지 못했다. 국군 제1군단은 국군
제3사단에게 元山·咸興의 교두보를 확대하게 하면서 同 지역을 평정케 하고, 수도사단을 북진시켰다. 수도사단은 新浦(신포) → 北靑(북청) →
利原(이원)을 점령하고, 다시 북상했다. 각 부대는 압록강으로, 두만강으로 진격했다. 곳곳에서 중공군 병사들을 포획했지만, 개의치 않고 그냥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무렵, 20만의 중공군에 압록강을 건너 북한의 산악지대에 들어와 유엔군에 대한 공세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유엔군은 운명의 날인 10월25일을 맞이했던 것이다.
毛澤東, “한국군 제6·7·8사단부터 각개격파하라”
맥아더의 구상대로 미 8군과 미 10군단은 한반도의 東西에서 제각기 별개의 작전을 전개했다. 북진에 따라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틈새는 더욱 확대되고, 연휴는 더욱 곤란해졌다. 바로 이 틈새를 뚫고 산악지대에 잠입한 중공군의 공세로 머지않아 유엔군의 大破局(대파국)을 예고했다. ‘1개 전선에 2인의 전선사령관’이 부른 참화였다.
미 8군사령관 워커는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이 오래 됐고, ‘불독’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거침없이 직언을 하는 캐릭터였다. 10군단장 알몬드는 책임감이 강하고, 맥아더의 지시에 순응했던 참모장 출신이었다. 맥아더는, 이렇게 개성이 강하고 성격도 전혀 다른 이 2人을 경쟁시키려 했던 듯하다.
어떻든 미 제10군단 예하 제7사단이 동해안 元山에 상륙하기 위해 滯船(체선) 상태인 仁川港(인천항)에서 승선치 못하고 육로로 釜山港(부산항)에 도착했던 10월12일 벌써 중공군의 첫 선발대는 압록강을 가만히 도하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10월20일에는 서부전선의 국군 제2군단 예하 국군 제6·제7·제8사단이 이미 順川(순천) 신창리∼成川(성천)을 잇는 線까지 이르렀다. 중공군의 球場(구장)∼德川(덕천)∼寧邊(영변) 등 예정 방어지역에서 70∼100km 떨어진 거리였다. 동부전선의 국군 수도사단은 10월19일 이미 咸興 일대를 점령해 중공군의 예정 방어지역에 도달해 있었다.
이때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 선견대 5개 사단은 압록강 남안의 朔州(삭주)·萬浦鎭(만포진)에 도달해 있었다. 그들의 예정 방어지역까지는 120∼270km나 떨어진 남쪽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이 유엔군보다 먼저 예정 지역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중공군에도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유엔군이 아직 중공의 大軍이 한반도에 들어온 사실을 모른 채 도로를 따라 마음 놓고 북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은 중공군 부사령관 洪學之(홍학지)의 회고록 《抗美援朝戰爭回憶》(항미원조전쟁회억)의 관련 부분 인용이다.
<그들(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東西로 분산되어 있는 데다 중앙부의 한국군 3개
사단(제6·제7·제8사단)이 돌출돼 있었다. 동서 兩 전선 사이에 80여 km의 커다란 틈도 있었다. 이러한 모양새는 아군(중공군)이 敵(국군과
유엔군)의 판단 착오에다 병력을 분산해 마구잡이로 진격하는 약점을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기동 중의 적에게 기습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월21일 새벽 2시30분, 毛澤東은
彭德懷(팽덕회·지원군사령관)·鄧華(등화·부사령관)·洪學之(부사령관 겸 후근사령관)·韓先楚(한선초·지원군사령부 참모장)에게 보낸 전보에서
“아군(중공군)은 불시에 主力 3개 사단을 집중시켜 한국군 제6·제7·제8사단부터 各個擊破(각개격파)하라”고 지시했다. 모택동의 지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번에 한국군 3개 사단을 격파해 출국 후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
朝鮮 戰勢(조선 전세)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임. 병력배치에 대해서는 彭·鄧 동지가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실행토록 할
것….>
각개격파(Defeat in detail)란 敵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은 틈을 타서 그 낱낱을 따로따로 격파하는 것을 말한다.
중공군 제1차 공세 때의 敎訓― “이렇게 슬픈 결심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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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1차 공세 시 戰況圖. (1950년 10월24일~11월1일) |
1950년 10월25일, 中共軍(중공군)은 청천강 북쪽의 雲山(운산)·溫井(온정)·熙川(희천)
정면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추격하던 유엔군 각 부대는 갑자기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드디어 중부 산악지대에서 옆구리와 등 뒤가 포위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당초 그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중국인 병사가 포로로 붙잡혔지만, 중공군이 공식 개입한 것이 아니라 私的(사적)으로 참전한 義勇軍(의용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企圖秘匿(기도비닉·조용히 들키지 않고 움직임)에 철저했던 데다 맥아더 원수 등 유엔군의 상층부가 중공군이 개입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 유엔군의 북진을 계속케 하여, 비극적인 결과를 부른 것이다.
중공군 제39軍(중공의 軍은 우리의 군단에 해당)은 雲山(운산)의 국군 제1사단을 압박해 제1사단의 후퇴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미 8군 사령부는 휘하의 미 제1기병사단에게 “꾸물대는 국군 제1사단을 超越(초월)하여, 빨리 水豊(수풍)댐을 향해 돌진하라”고 명령했다.
이 무렵, 溫井(온정)의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도 중국군 제40軍의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무너졌다.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과 제8사단의 일부를 급파, 溫井의 탈환을 기도했지만, 거꾸로 중공군의 포위를 받고 무너지고 말았다.
중공군은 제40軍을 온정으로부터, 또 제38군을 희천으로부터 西南進(서남진)시켜 미 8군의 우익을 크게 포위해 球場洞(구장동)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 8군은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을 이 지역에 급파, 右翼(우익)의 防護(방호)를 맡겼다.
이 무렵, 全局(전국)을 보면, 미 8군은 미 제1기병사단에게 雲山(운산)으로부터의 북진을 기도하게 했고, 반면 중공군 主力(주력)은 그 동쪽으로부터 右旋回(우선회)를 계속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위기가 고조된 10월31일, 중공군은 我軍의 포격과 공습을 피하기 위해 산불을 질러 연막을 치고 있었다.
중공군 제40군과 제38군은 국군 제2군단의 配備(배비)가 아직 엉성한 틈을 타 球場洞(구장동)을 점령하고 院里(원리)로 육박해 왔다. 樂觀(낙관) 무드였던 전황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 무렵 국군 제1사단은 雲山(운산)초등학교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 제11·12·15연대를 운산 외곽에 배치시키고 있었다. 상황 점검의 결과, 운산 북쪽에 진출한 제15연대의 피해가 가장 컸고, 제11·제12연대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백선엽 제1사단장은 즉각 미 제1군단사령부로 달려가 밀번 군단장에게 국군 제1사단의 후퇴를 건의했다.
11월1일, 미 8군은 처음으로 중공군의 개입을 공식 인정하고, 淸川江(청천강) 선으로의 후퇴와 방어태세로의 전환을 명했다. 국군
제1사단은 즉시 立石(입석)∼寧邊(영변) 선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때 파머 대령의 미 제8기병연대는 국군 제1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국군
제15연대의 左翼(좌익) 능선 너머로 진출하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 직할 高射砲群(고사포군)이 발사한
1만3000발의 집중포화로 중공군의 공격 기회를 차단한 가운데 운산 남쪽 10km의 立石(입석)까지 무사히 탈출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진출한 미 제8기병연대가 退路(퇴로)를 차단당한 채 골짜기에서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미
제1기병사단은 예하 제5기병연대를 파견해 제8기병연대의 철수를 지원했다. 이리하여 제8기병연대의 主力은 빠져나왔지만, 8기병연대의 제3대대는
완전 고립돼 통신마저 두절되었다.
구원을 위해 출동한 제5기병연대도 위험해졌다. 11월2일 15시00분, 마침내 美 육군 史上
前例(전례) 없는 결단이 취해졌다.
“제5기병연대는 구출 작전을 포기하고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하라!”
敵의 바다에 외로운 섬처럼 완전히 고립된 미
제8기병연대의 제3대대는 11월4일까지 치열한 혈전을 펼쳐 일부는 敵의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총병력 800명 중 600명은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少將은 이렇게 獨白(독백)했다고 한다.
“군인의 생애에는 많은 슬픈 추억을 간직하게 마련이지만, 제3대대의 구출 작전의 포기만큼 슬픈 결심은 없었다.”
압록강 도달의 환희도 잠시…
중공군의 공세는 운산·온정·희천 정면에 한정되었고, 다른 정면에서는 대규모 공세가 없어 유엔군 예하 각 부대는 다시 전진을 계속했다.
미 8군의 좌익으로 진격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은 제21연대를 新義州와 30km 거리의 中江洞(중강동)으로 진출시키고, 미 제5연대를 압록강과 40km 거리의 이구洞으로 진출시켰다. 그런데 11월1일 “진격을 중지하고, 청천강 線으로 후퇴하라”는 뜻밖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신의주로 향하던 미 제21연대의 선봉인 제1대대는 1950년 7월5일 水原(수원) 남쪽 烏山(오산)에서 유엔군으로서 북한군과 初戰(초전)을 치른 스미스 支隊(지대)였다. 결국 스미스 지대는 미군으로서 최초의 전투와 최북단의 전투를 체험했던 기록을 남겼다.
한편 압록강변의 楚山(초산)을 겨냥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제7연대와 제2연대를 竝進(병진)시켜 두 연대 간에 北進 경쟁이 벌어지게 했다. 先行(선행)했던 제7연대는 北으로 내달려 사단 主力과의 간격이 크게 벌어졌다. 10월25일, 임부택 대령의 제7연대는 개마고원의 檜木洞(회목동)에 도착했지만, 험한 산길만을 달려 도중에 중공군과 遭遇(조우)도 하지 않았다.
사실 중공군은, 유엔군이 양호한 도로를 따라 차량 및 전차를 이용해 전진하는 것으로 판단, 국군 제7연대가 통과한 山岳路(산악로)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10월26일, 국군 제7연대는 진격을 계속, 楚山(초산) 남쪽에서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 패잔부대를 격멸한 후, 無人之境(무인지경)의 楚山을 점령하고, 다시 6km를 북상해 이날 오후 2시15분 압록강변에 도착했다. 장병들은 “압록강이다!”라고 환호했다. 이것으로 전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태극기를 꽂았다.
그런데 그 무렵, 70km 후방의 溫井(온정)에서는 국군 제2연대가 중공군에 격파되어 한국군 제2군단은 그 대응에 쫓기고 있었다. 또 국군 제7연대는 ‘중공군의 바다’에 고립되어 퇴로가 차단되어 있었다. 10월27일, 제7연대는 “남쪽으로 철퇴, 사단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참으로 靑天霹靂(청천벽력)이었다. 그 후 제7연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탈출해 남하를 시작했지만, 부대는 흩어져 고난의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부전선에서는 10월26일에 이르러서야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의 元山 상륙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이 공세를 개시한 다음날 미군이 원산 상륙작전을 개시한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한반도 전선을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戰區(전구)로 나누고, 미 제10군단에 동부전선을 맡겨 동해안 항만에 상륙작전을 실시하게 한 것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최대 실책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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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26일, 美 1해병사단의 원산 상륙작전 모습 / 출처: 병학사 刊 <한국전쟁> |
仁川상륙작전에 동원된 미 제10군단 휘하의 미 제1해병사단을 인천항에서 해로로 부산항으로 이동시키고, 미 제7사단은 육로로 부산에 이동시켜 합류시킨 다음에 부산항에서 해로로 북한의 동해안 항만에 상륙시켰다. 이에 따라 兵站線(병참선)의 핵심기지인 부산항과 인천항의 滯船(체선) 사태를 야기해 서부전선에서 제8군의 兵站(병참)의 악화를 자초했고, 동부전선에서 국군은 겨울에 夏服(하복)을 입고 포탄도 부족한 채 전투를 해야 했을 만큼 참담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동해안의 元山港(원산항) 등지에서는 북한군이 부설한 機雷(기뢰)를 제거하기 위한 掃海(소해) 작업 때문에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1군단이 이미 점령해 놓은 항구에 뒤늦게 상륙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예하 미 제7사단은 10월29일이 된 뒤에야 함경남도 利原(이원)에 상륙을 개시했다.
한편 10월20일부터 미 제10군단의 지휘 하에 들어간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은 元山·興南의 橋頭堡(교두보)를 확보하면서, 豆滿江(두만강)을 향해 동북 방면으로 진격했다.
狼林山脈(낭림산맥)을 경계로 서부전선을 담당한 제8군이 공격을 중단되고 있는 동안, 동부 전선을 맡은 미 제10군단은 동해안 상륙 후
순조롭게 진격해 鴨綠江(압록강) 상류인 惠山鎭(혜산진)에 돌입했다. 이때 맥아더는 “왜 8군은 10군단처럼 진격하지 못 하는가!”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을 꾸짖기도 했다.
60만으로 증강된 중공군 병력
다시 서부전선의 상황이다. 후퇴로 전환한 제8군은 격렬한 전투를 되풀이하면서 청천강 선까지 南下해,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11월5일 24시경이 되면 중공군의 공세는 갑자기 뚝 그쳤다. 왜 그랬을까? 다음은 당시 지원군(중공군) 총사령관 회고록인 《彭德懷 自述(팽덕회 자술)》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 군(중공군)은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軍은 한국군의 6∼7개 대대와 미군 小부대를
소멸시켰을 뿐, 아직 적의 主力을 소멸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敵의 기계화 부대의 움직임은 날래고, 陣地(진지) 구축의 속도도 빠르다. 敵의
主力은 전차부대로서, 방어망을 만들어 놓고 있다. 우리 지원군의 장비로써 적군에 陣地戰(진지전)을 거는 것은 불리하고, 패배를 당할 가능성조차
있었다.>
어쨌든 중공군은 제1차 공세에서 짧게 끊어 치는 기습에 의해
국군과 유엔군을 저지, 그들의 主力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는 제1차 목적을 100% 달성했다. 前線(전선)에서는 중공군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고, 유엔군 앞에는 북한군이 나타나 遮蔽幕(차폐막)을 구성했다. 그 사이, 중공군은 후방 30km지점에서 가만히 반격의 거점을 만들고,
다음 공세의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미 공군은 정체된 지상군을 대신하여 청천강 이북을 초토화하는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이 무렵,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과 보급을 저지하기 위해 압록강 다리의 폭파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워싱턴의 반대로 일단 중지되었지만, 맥아더의 강력한 항의에 의해 1950년 11월6일 폭격이 허락되었다. 이틀 후인 11월8일 폭격이 개시되었다. 이때 사상 최초의 제트機 간에 공중전이 벌어졌다. 맥아더는 滿洲(만주)의 폭격까지 요구했지만, 워싱턴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철원-김화-평강의 삼각지대를 비롯한 후방에서는 북한군이 후퇴 시 잔류시켰던 게릴라 부대가 제2전선을 형성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兵站線(병참선)의 공격 및 통신선의 절단, 식량 및 피복의 강탈 등을 자행해, 미 제9군단과 국군 제11사단 등이 그 토벌에 나서고 있었다. 중공군의 제1차 공세를 당한 후에도 유엔군은 아직 중공군의 병력을 7만 명 정도로 낮춰 보고 있었다. 또 그 목적도 한정적인 것으로 판단했다.
한편 동해안의 미 제10군단도 국경지대를 향해 순조로운 진격을 시작했다. 즉, 11월5일부터 미 제3사단이 元山에의 상륙을 개시했고, 미 제1해병사단은 長津湖(장진호) 방면으로 전진했으며, 미 제7사단은 11월21일 惠山鎭을 점령함으로써 압록강변 상류에 도달했다. 11월26일에는 국군 제3사단이 合水(합수)를 점령하는 등 국군 제1군단은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다.
1950년 11월24일, 유엔군은 또다시 압록강을 향한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 장병들은 신속히 적을 밀어붙여 전쟁을 종결하고, 본국에 돌아가 크리스마스를 맞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매스컴은 이것을 ‘크리스마스 攻勢(공세)’라고 命名(명명)했다.
크리스마스 공세는 유엔군 사령부가 북한 주둔 중공군의 전력을 최소 3만 명, 최고 7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유엔군 산하 11만 명의 병력이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發起(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중공군은, 제3야전군 예하 제9집단군의 제20·제26·제27軍마저 동부전선에 투입돼 무려 6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