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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18) 그 새가 왜 거기 있었을까?
1496년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예술가이며 발명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박쥐의 날개 모양을 본뜬 비행 장치를 만들어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을지를 실험했다. 하지만 인간 근육의 힘만으로는 비행을 위한 추진력을 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독일의 기술자인 오토 릴리엔탈은 현대 항공학의 선구자적 인물로서 비상하는 새 날개의 공기 역학을 연구해 1891년 최초로 사람이 탈 수 있는 글라이더를 제작했다. 그는 박쥐 모양의 날개를 한 글라이더를 타고 2000번이 넘는 비행에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돌풍을 만나 추락사한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는 3개월간 1000번이 넘는 글라이더 시험 비행 끝에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무게 174㎏의 인류 최초 유인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Flyer)호로 하늘을 나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69년에는 음속의 2배가 넘는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민간 여객기인 콩코드가 등장한다.
현재 인류는 비행기를 이용해 자유롭게 대륙과 바다를 건너 지구 어디든 빠른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으며, 이제는 우주여행 관광상품으로 지구 대기권 100㎞ 높이까지 올라가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류의 삶의 질을 이전 시대보다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 앞으로 더욱 발달된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류에게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류에게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위험도 가져왔다. 더 빨리 더 많이를 추구하는 운송수단의 발달은 사고 발생 시 그만큼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대표적인 예가 작년 말과 올해 초에 보도된 국내외 항공기 사고다.
특히 작년 12월의 국내 항공기 사고는 사고 원인 중 하나로 철새와의 충돌 가능성을 꼽는다. 계절마다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철새들은 인간이 사용하는 나침반이나 GPS 장치 없이도 수백 킬로미터 이상의 대륙과 바다를 건너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철새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은 새의 망막에 있는 크립토크롬4라는 단백질이 새의 신경계로 하여금 지구 자기장을 감지해 방향을 인식하게 하는 생체나침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새들이 본능적으로 먹이를 찾아 다른 대륙에서 날아와 새로운 곳에 머무는 지점 근처에 공항이 있다면 새와 인간의 이해관계가 겹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천지 창조 이후 하늘은 인간의 생활 범위가 아닌 새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비행기 발명 이후 이제 하늘은 새들과 인간이 공존하며 서로의 목적과 안전을 추구해야 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한 해법 제시는 새들이 아닌 인간의 몫이다. 인간 입장에서 ‘왜 공항 근처에 철새들이 많이 있을까?’의 문제는 철새들의 입장에서는 ‘본능에 의해 날아온 이곳에 왜 비행기가 있을까?’의 문제가 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밀랍으로 붙인 새의 깃털 날개로 크레타 섬을 탈출하려다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너무 높이 날아 날개의 밀랍이 태양에 녹아 바다에 추락했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 영향을 준다. 이 둘을 함께 만든 하느님의 의도를 어기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다 또 다른 이카로스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겠다.
[과학과 신앙] (19) 본 걸 믿는 걸까, 믿는 걸 보는 걸까
얼마 전 17세기 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을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바로크 시대 미술에 큰 발자취를 남긴 카라바조와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을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특히 이번에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요한 복음 20장의 한 장면을 그린 ‘성 토마스의 의심’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카라바조의 원본은 아니고,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 작가가 완성한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소장본이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토마스와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표현한 이 그림은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를 손가락으로 찔러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와 극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마치 현장 상황을 보는 듯한 ‘성 토마스의 의심‘은 감동을 넘어 충격이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그림을 통해 내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좀처럼 그림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믿음이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믿음에 대한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을 떠올리며 가톨릭 신자로서 삶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는 안 보고도 믿어야 할 것이 있으며, 그와 반대로 반드시 눈으로 보고 믿어야 할 것이 있다. 전자는 신앙적 측면에서의 믿음이며 후자는 세속적 삶에서 접하게 되는 사회현상과 뉴스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첨예한 정치적 의견 대립과 이에 따른 집단 간 갈등으로 시끄럽다. 이는 이분법적으로 갈라선 서로의 정치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의 결과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인간은 어떤 사회현상이나 인간 행동에 대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확증편향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현대의 뇌과학이 지금까지 밝혀낸 믿음 혹은 신념의 형성은 분석적이고 합리적 과정의 산물이라기보다 개인적 경험·기억·감정 등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대뇌 속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서로 다른 영역들이 복잡한 신경망들과 연결되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뇌는 인체의 몸무게 중 단 2% 정도이지만 하루 중 섭취하는 에너지의 20%나 소비한다. 따라서 에너지를 소비하며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기보다는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주관적 믿음을 바탕으로 어떤 현상을 바라보며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내리는 효율성에 따라 작동하기도 한다. 거짓뉴스와 선동가들에게 현혹되기 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피상적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하느님께 청해야겠다. 지금 나는 세상에 대해 보는 것을 믿고 있을까, 믿는 것을 보고 있을까?
[과학과 신앙] (21) 세균과 인간
1999년 프랑스 신문사 르 몽드가 선정한 ‘세기의 도서 100권’ 목록에는 영국 작가 H.G.웰스가 1898년 집필한 공상과학 소설(SF) 「우주전쟁」이 있다. 웰스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같은 유명한 SF 소설을 남겼으며, 그의 과학적 식견과 인류 문명의 지향점에 대한 깊은 고민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우주전쟁」은 지구 문명보다 앞선 화성인들이 지구를 침공한 이야기다. 화성인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간들의 무기력한 모습이 나온다. 인간만이 유일한 지적 존재라는 오만함을 꼬집고 당시 제국주의 영국의 잔악한 식민 지배를 고발한 이 작품은 여러 번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됐다. 소설은 지구의 세균에 면역력이 없는 화성인들이 세균 감염으로 자멸한다는, 조금은 허무한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소설이 쓰인 1890년대는 프랑스의 파스퇴르가 탄저균을, 독일의 코흐가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해 질병의 원인인 세균연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시기였다. 세균(細菌, bacteria)의 크기는 0.5㎛(마이크로미터)부터 0.5㎜ 정도로 매우 작아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 세균은 중세 유럽 인구의 30~50%를 죽음에 이르게 한 페스트균이나 폐렴균처럼 질병을 일으키는 종류부터 유산균처럼 인간에게 이롭거나 인체에서 공생하는 비병원성 대장균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이 세균들도 각자 생존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하느님의 또 다른 창조물이다. 세균은 보이지 않을 뿐 생물의 몸, 공기, 물, 휴대폰 표면 같은 사물 등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성 세균에 대처하는 방법이 없던 시절에는 단순한 세균감염이 치명적 합병증을 유발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28년 영국의 플레밍이 푸른 곰팡이가 세균 증식을 억제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이후 인간은 항생제를 개발해 세균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항생제 사용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군인의 생명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간만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비웃듯 세균은 항생제 내성 유전자 변이를 통해 진화하여 살아남아 지금은 어떤 항생제에도 견디는 슈퍼박테리아가 출현했다.
과학자들은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원시적인 세균의 출현을 38억 년 전으로 추정한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기 수십억 년 전부터 열악한 원시 지구 환경에 적응한 세균은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지구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소설 「페스트」에서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좋든 싫든 세균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문학적 표현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호흡기에 염증이 발생하는 대표적 질환이 폐렴인데 증상이 심할 경우 호흡부전과 사망에 이르게 된다. 폐렴은 60대 이상에서는 치사율이 30% 정도이며, 80대 이상에서는 50%나 된다. 현재 88세로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양쪽 폐에 폐렴 진단을 받고 아직도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전 세계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 교황의 쾌유를 기도하고 있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디 세균과의 힘든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해본다.
[과학과 신앙] (12) 달력을 보며
2024년이 가고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새 달력을 펼치며 새로운 1년을 시작한다.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보편적인 달력은 태양력(太陽曆)인 그레고리력(曆)으로 1528년에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이 예수회 수도사제이며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에게 제작하게 하여 반포한 것이다. 이는 B.C. 45년부터 시행한 로마의 율리우스력(曆)을 대체하는 것으로,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춘분일 후 보름이 지나고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했다. 율리우스력의 춘분일과 실제 천문학적 춘분일이 일치하지 않아 역법의 개편이 필요해서였다.
태양력으로 1년은 태양이 황도(黃道, 태양이 지나는 가상의 길)를 따라 춘분점에서 출발하여 다시 춘분점까지 돌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365.24219일이다. 이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1회 공전하는 시간이다. 통상적으로 달력은 1년을 365일로 하고 이를 12로 나누어 12개월로 한다. 원래 로마인들이 쓰던 달력에는 1년이 10개월이었는데, 로마의 2대 황제 누마 폼필리우스가 2달을 더해 1년을 열두 달로 나누게 한 것에서 유래한다.
태음력(太陰曆)에도 1년은 12개월이다. 이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1회 공전할 때 달은 지구 둘레를 12회 공전하며 위상이 변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365일을 12로 나누면 평균 30일이 나오며 이것이 1개월이 된다.
이처럼 달력은 해와 달 같은 천체의 주기적인 운동을 기준으로 인간의 경험적인 지혜와 지적 연구가 만들어 낸 시간의 규칙이다. 하루가 24시간인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하루를 아침 1구간, 낮 10구간, 저녁 1구간, 밤 12구간으로 나눈 것에서 시작됐다. 이것은 지구의 자전주기인 23시간 56분 4초와 큰 차이가 없다. 또 1시간이 60분인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60진법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시간을 ‘움직이지 않는 영원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 혹은 이후에 따른 움직임의 횟수와 범위’라고 규정했다. 뉴턴은 1687년 「프린키피아」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외부의 어떠한 것과도 관계없이 시간이란 균일하게 흐르는 ‘절대적’인 것이라 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물체의 운동 상태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달라진다며 시간은 ‘상대적’이라 했다.
우리가 시간의 본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인간과 자연의 미숙함을 성숙하게 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은 계절의 변화를 만들고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시계추가 되어 꽃이 피게 하고 낙엽이 지게 하며, 아이가 자라게 하고 어른을 노인으로 변화시킨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은 우주의 무한한 시간의 일부다. 지금 이 시각 내가 있는 이곳은 무한한 시공간의 어디쯤일 것이다.
달력을 보며 나에게 묻는다. 유한한 내 삶의 달력에 나는 어떤 가치들을 기록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 5,15-16)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 ‘철학’과 ‘철학함’의 의미
철학함이 없는 삶은 쉽게 고착화돼 생명력 잃기 십상
어휘적으로 ‘지혜를 사랑함’이란 뜻을 지닌 철학(philosophia)은 예로부터 지혜(sophia)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정신(nous) 활동 가운데 최고의 것을 지혜라 불렀다. 그들에게 지혜는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참된 믿음 혹은 참된 인식을 갖게 하는 이론적 지식과 이를 근거로 하는 삶과 직접 관련된 실천적 덕목으로서 실천적 지식 모두를 뜻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믿음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믿음이 진리 혹은 사실에 부합하지 못할 때 억견(臆見)이요 거짓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소 행동하기에 앞서 그 믿음이 참인지 또는 바람직한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은 바로 삶에서 참되고 바람직한 믿음의 근거를 찾는 사고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철학실천으로서 철학상담은 일상에서의 ‘철학함’(사변이 아닌 행동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명사가 아닌 동사를 사용)을 통해 이론 지식에 멈추지 않고, 삶의 지혜를 추구하는 새로운 학문이다.
철학은 세상을 둘러봄으로써 시작된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로서 자연 안에서 유일하게 생각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고, 처음 마주하게 되는 생소한 것들을 파악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이것이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하는 고유한 인식 행위다. 우리의 인식은 개념적 사고에 기반한다. 개념을 뜻하는 독일어 베그리프(Begriff)가 ‘파악하다’를 뜻하는 동사 베그라이펜(begreifen)에서 유래한 데서 보듯이, 주변의 것을 파악하고 잡는다(장악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개념이 없다는 것은 곧바로 인식과 이해가 불가하며, 주변의 것을 전혀 파악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 습득의 차원을 넘어서 주변을 이해하고, 주변을 파악하고 장악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자기를 위치시킴을 말한다. 철학함은 일종의 ‘세계에 거주함’이라 할 수 있다.
거주는 세계를 갖는 것이요, 바로 거기서 관습과 습관(habitus)이 형성된다. 이는 모두 우리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런 인식의 기본 요소는 다름 아닌 개념과 관념과 이념들이다. 이것들은 세계 안에서의 사물과의 관계 맺음과 사물의 정위(定位), 가치와 의미 부여 같은 인식에 기반한다. 우리가 평소 갖고 있는 세계관은 이런 것들의 종합적 틀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이런 요소들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이들에 익숙하게 될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철학함이라는 고유의 본성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다. 철학함이 없는 삶은 쉽게 고착화돼 생명력을 잃기 십상이다. 사고의 경직으로 주위와 단절되며 관계가 왜곡되고, 그 배타성으로 인해 다양한 문제에 봉착할 뿐만 아니라 한계에 부딪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일상성에 빠져 자기 존재를 돌보지 못하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런 일상성이 인간 삶의 평균성이요,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때 자기 본래성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존재로 있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오늘날 경직된 삶 속에서 자기 해방과 변화를 위해 무엇보다도 ‘철학함’이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