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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여인의 믿음! / 박조준 목사
우리는 그 동안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믿음의 열조들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 이 삭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의 생애가 어떻게 믿음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과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입니다. 그리고 여자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권이 존중되지 못하던 시대가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 성이 애굽을 떠날 때 60만 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여자와 미성년의 숫자는 뺀 것이었던 것을 기억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수를 계산할 때 여자의 수는 넣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여자의 이름이 나타난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보통 여인이 아니라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기생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만 70인역에는 매춘부라고 번역하였 습니다. 몸을 팔고 사는 여인 사람으로 취급하기 어려운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기라성 같은 믿음의 영웅들 반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신비할 정도입니 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에 보낸 편지 에베소서 2장 11∼12절에 주님과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나타난 라합이라는 여인의 처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 다. 이렇게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던 모든 특권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던 한 여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딸이 되어 자신의 운명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메시아의 족보에 라합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5절에 라합이 보아스를 낳고 했습니다. 이 혈통은 다윗에게 연결이 되고 마침내 예수님에게 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라합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의 역사적인 배경은 구약 여호수아 2장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셨는가에 대해서 들었다고 고백한 것을 볼 수가 있습 니다. 이 들음이 믿음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령 우리가 예배당에 다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느냐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습 니다. 물론 예배당에 다니는 것이 믿음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 가운데는 아내가 예배당에 나오니까 남편은 신앙생활하지 않으면서도 아내를 돕기 위해서 교회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차에 있으면 가서 일을 보고 시간 맞춰 다시 와서 아내를 데 려가고 일이 없으면 예배가 다 끝날 때까지 차에 앉아 기다리던 아주 착실한 그러나 예수는 안 믿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러기를 얼마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 차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주차 안내를 위해 서 수고하시는 분들을 볼 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하니까 기왕에 시간 여유가 있으니 까 저분들을 좀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나서 예배당에는 들어오지 않고 주차 안내하는 일을 도왔습 니다. 얼마 동안 그러는 가운데 주차 안내하시는 우리 성도님들과 가까워지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교회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고 해서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 예배당 안에 들어와 예배에 참석 하게 되고 이제는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딪쳐야 참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라합이 이방 여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들었을 때 얼마나 여리고 사람들의 간담이 서늘했을까요? 지금 하나님의 군대가 여리고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이제 곧 전쟁이 일어난다. 여리고가 어렵 게 된다. 하나님의 군대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저들은 이미 넘쳐흐르는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다. 이 사실 때문에 여리성의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 불안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습 니다. 그때 기생 라합은 유독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아, 그 하나님을 믿어야 내가 살겠 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놀라운 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신인 정탐꾼을 평안히 맞아 들였습니다. 이처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판단을 내려 놀라운 결단을 하게 한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정말 현명한 일입니다. 옛날 믿음의 선배들도 고백했습니다. 내가 두려운 날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리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시편 27편에도 두려움을 쫓은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싼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하 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영안이 밝아져서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만 보지 아니하고 우 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전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투시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히는 아람 군대가 참모 회의를 해도 미리 다 알고 대처했습니다. 그래서 아 람군대 참모 가운데 간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엘리사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 을 알게 된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없애 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밤새 도단성을 2중 3중으로 포위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알고 깜짝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탄식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의 눈을 밝히사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포위한 아람 군대보다 많음을 보게 하여 주세요. 기도가 끝나자 엘리사의 종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하나님 의 사람을 철통까지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합니다. 그러나 싸이지 아니합 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라합의 믿음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했습 니다. 그러므로 라합의 믿음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 9절에 보면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이 팔레스틴 땅, 여리고 성을 주신 것을 내가 압니다. 여기서 안다 하는 말은 신앙의 확신에 들어간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믿습니다 라는 말보다 압 니다 라는 말이 더 확실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복된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의 역사 가 무엇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압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던 한 여인의 고백을 보게 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경학자였던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할 확률은 백만 분의 일 이었다 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리했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런 무기도 없고, 사막을 막 건너온 유목민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습니다. 보이는 상황은 결코 낙관적인 것은 아니었습 니다. 그러나 라합은 보이는 현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라합이 눈에 보이는 현실분석에만 급급했다면 낙담할 수밖에 없 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 저 높고 견고한 성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 이 땅을 하나님 의 땅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게 믿으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 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혹 어떤 사람에게 구원받으신 확신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글쎄요.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부족해서요. 라고 말하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이와 같은 대답은 엄격히 말해서 겸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여기 어느 아들이 저는 우리 아버지가 제 아버지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겸손입니까? 아닙니다. 아들된 사람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압니다. 라고 하는 고 백이 귀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에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 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 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은 환난 중에 이루어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서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일 위대한 모험 가운데 하나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에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평생의 삶을 부탁한다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 니다. 물론 서로 교제하는 시간이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서로가 얼마나 압니까? 살아가면서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서로를 부탁한 다음에 신뢰가 없다면 그 삶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 다. 평생의 삶을 부탁한다는 것도 모험이지만 영원한 운명을 부탁하는 것은 더욱 모험입니다. 파스칼은 이것을 위대한 도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위로한 자를 안다고 고백 했습니다.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이 믿음의 확신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라합에게는 이런 믿음 의 확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행동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확신있는 성도는 더러 찾아 볼 수가 있는데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성도는 많 지 않습니다. 그런데 라합에게는 확신과 행동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를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의 집에 영접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간단하지만 굉장한 일입니다. 라합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영접한 사실이 들키 면 그녀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합이 이스라엘 병사를 영접하는 것은 라합의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이런 놀라운 결단을 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이 이렇게 결단한다고 해서 당장 얻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 것은 희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예수 믿는 것은 물론 예외는 있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가 많 고 교인의 수가 많으니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교양인의 필수 조건처럼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가령 터키 같은 나라에서는 예수 믿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에 취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고독한 결단을 했습니다. 아마 마틴루터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성경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말씀으로부터 받은 확신을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주여, 제가 여기 섰나이다. 제 양심은 이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매일 수가 없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루터의 고독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영광스런 결단이었습니까?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느냐? 좋다. 그 러면 나는 온 세상을 반대하겠다. 고 외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의 행동은 가히 영웅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이 이처럼 깜짝 놀랄 정도의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행동의 무슨 변화가 있습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강조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야고보서입니다. 이 책에서 진정 한 행함이 있던 두 사람을 예로 들었는데 한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라합입니 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을 행함으로 옮긴 사람을 대표해서 성경은 라합을 꼽았습 니다. 왜 믿음의 대표로 성경에 아브라함만 나오지 않고 라합이 나왔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 자도 이런 위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격려와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 2장 25절에 이와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대접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라합을 꼽습니다. 야고보 서에서는 라합을 행함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믿음입니까? 행함입니까?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이 서 로 모순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을 강조합니 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것 그 자체는 행함입니다. 그러면 이 엄청 난 행동이 무엇 때문에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까?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동은 서로 모순 되는 것이 아니고 참 믿음의 참 행함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순서에 서는 언제나 믿음이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언제나 행복이 따릅니다. 기생 라합은 우리에게 이런 신앙의 훌륭한 모본이 된 믿음과 행함의 사람입니다. 끝으로, 이와같은 믿음을 가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신앙의 위대한 고백이 이루어진 것 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고백을 낳습니다. 여호수아 2장 11절에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 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고 라합 이 고백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 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신앙이 머무는 장소라면 입술은 신앙이 고백되는 장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 순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는 없는데 입술로만 고백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마음에 있는데 입술로 고백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겁한 침묵입니다. 자기가 가진 신앙을 시인하고 고백하지 않으 면 그 신앙은 위축되고 맙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기는 부족한데 아직 성경도 모르는 것이 많은데 좀 더 기도해야 되고 인격이 성숙한 후에 전도해야지 하고 있으면 평생을 신 앙생활해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다 보면 성경을 몰라서는 안되니까 성경을 더 읽 게 되고, 아무리 내 말해서는 소용없으니 더 기도하게 되고, 전도하면서 저의 삶이 사람들 앞에 빛이 되어야 하니까 자신의 삶을 고치게 됩니다. 전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 들 앞에서 주를 시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시인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생라합은 믿음이 생겼을 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리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합의 믿음은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라합만 구 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구원에 동참하게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 1 2∼13절에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가서 좋은 것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사랑하는 식구가 생각나 지 않습니까? 하물며 라합이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깨닫게 되자마자 멸망해 가는 여리고성의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과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라합의 관심이 어떻게 보상되었습니까? 여호수아 6장 22∼23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 라엘 진밖에 두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라합이 혼자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 가족들이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그러나 여리고 가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이렇게 라합은 자기의 소중한 믿음을 자기 가족들에게 증거하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한 사람이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바울과 실라에 의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와 온 가족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민족의 심령을 위해 걱정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 9장 1절 이하를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 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 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이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동족의 구원을 위해 걱정했습니다. 민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중 누군가가 먼 저 아니 내가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서 바른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뜨거운 정열을 우리의 가슴과 입술 을 통하여 증거함으로 이 사회가 어딘가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을 찾지 못하셨던 하나님은 그 도성에 멸망의 심판을 작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똑같은 안목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주목하 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정말 의인 열 명이 있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가 이만큼 부흥한 것을 우리는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부흥하기 위 해서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삶을 통하 여 한국 교회와 역사에 기여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이방 여인 라합의 믿음을 본받아 나 자신뿐 아니라 내 가족 내 겨레를 구원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