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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복음서 강해를 마치고 매 번 그랬듯이 구약성경중 한 권을 잡아서 강해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어떤 본문을 해야할 것인지를 정하려는데 잘 잡히지 3주 정도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구약성경의 본문을 잡아서 설교하기는 정말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분명한 복음의 내용이 나와서 복음을 기준으로 말씀을 전하면 되는데 구약은 암시적으로 복음이 제시되어 있고 역사와 문화등 이스라엘의 전반적 문화속에서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복음의 내용을 찾아야 하기에 참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선지서 중 하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성경을 살펴보다가 눈에 확 들어온 본문이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구약성경 아모스입니다. 아모스서는 구약성경의 책들중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과 공의의 집약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죄인이기에 죽음으로 죄 값을 갚아야만 하는 공의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데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여 자기 스스로 죄를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을 어차피 죽음으로 죄값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을 죽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려주시는 사랑의 표현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형집행과 하나님의 사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한 구약성경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모스서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아모스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아모스의 메시지가 그 당시의 사회적 부정과 불의, 불법을 폭로하고 있고 그 당시 종교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순과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주제로 다루며 하나님의 책망이 수없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살펴볼 이 아모스서를 통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아모스를 통해 깨닫기를 원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 사회의 부조리, 이 세상의 악행속에서도 참 신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선지자 아모스의 삶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닥치는 인생의 경험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 본문의 선지자 아모스도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선택받은 선지자가 되었음에도 인생의 역경을 엄청나게 겪었음을 우리는 아모스서를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로 살아갈 때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이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이것이 걱정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정말 하나님의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는 첫째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모스 1장 1절입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서는 유다 웃시야 왕,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 때에 기록되어 구약성경 선지서중에서는 시기적으로 제일 첫 번째로 기록된 예언서입니다. 주전 750년경 아모스서가 기록될 당시 북 이스라엘왕국은 부자는 큰 번영을 누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한없이 굶주림을 당하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 근방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상태를 진단하고 죄악에 대한 경고를 주시며 해결책을 제시해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 아모스서입니다. 특히 이스라엘민족에 대해서는 이 시대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표시들을 보여주시며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아모스는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본문 아모스 1장 1절의 말씀을 보니 “드고아 목자 중의 한 사람인 아모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유다의 왕 웃시야가 다스리고 북쪽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드고아 출신 선지자 아모스가 등장한 것입니다. 드고아는 농촌지역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깡촌입니다. 옆에 좀 큰 도시가 붙어있는 시골지역이 아니라 떨어져도 한참을 떨어진 산간벽지같은 느낌의 시골지역입니다. 그런 곳에서 목자로서 지내었던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아모스이지만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르심 이전에 어떤 정상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보통 선지자가 되려면 선지학교를 나와야하겠지만 선지학교는 고사하고 일반적인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양을 치는 목자이며 곡식을 재배하며 시골에서 지내는 아모스를 사용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대변하기 위해서 호세아를 사용하셨다면 또한 가난한 신분에 변변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아모스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실 메시지가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산간벽지 시골에서 아모스를 부르셔서 그에게 공의를 외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며 특히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외침에도 사람들이 아모스에게 집중했고 사람들은 아모스의 외침에 크게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할 사람이었고 도시에서 살았다든지 신분적으로 유명해서 외모가 이끌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똑똑해 보이지 않고 실제로 어떤 내세울 학벌도 없고 가진 것 없는 아모스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하나님의 사명을 담당하는 큰 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부르셨을까요? 아모스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아모스의 외침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아모스는 대단히 윤리적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용기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맡은 일이라며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인물로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사람을 꼽습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민족을 통솔할 만한 위치의 사람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상태였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셨기에 그들을 쓰시기 위해 여러 상황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순종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그 부름에 응답하여 일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에게 큰 역사를 기대할지 모르겠지만 신앙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유명한 사람을 통해 큰 역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참 신앙인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묵묵히 수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그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시고 능치못함이 없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께 받은 소명에 충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상상해 봅시다.
빛이 1초에 지구 일곱바뀌 반을 돈다고 합니다. 이런 속도로 일 년간 달려간 거리가 1광년이라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에게 발견된 가장 먼 거리의 우주행성은 퀘이사라는 별인데 현재 알려진 바로는 퀘이사까지의 거리가 약 180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말로는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는데 지구에서 퀘이사의 거리도 광속의 약 90%정도로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하니 이건 빛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크기가 이 우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일까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편견으로 생각하는 어떤 직업의 귀천이 아닙니다.
영국의 극작가이며 세계의 대문호인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어떤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들어오자 대부분 사람들은 식사하다 말고 일어서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며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영국의 보물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그 식당의 하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하인의 한숨을 듣고는 밖으로 나가 “왜 한숨을 내쉬었습니까?”라며 물었습니다.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영광스런 인물인데 반해 나는 밥이나 얻어먹기 위해서 식당의 마당을 쓸고 있는 신세니, 나 자신이 가엾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당신은 식당의 마당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귀하게 쓰시는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귀함은 빈부귀천의 가치관속에서 귀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쓰실 것인지, 하나님께서 어떤 삶을 우리가 살아갈 것인지를 우리가 깨닫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그 부르심에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는 둘째로 모함받고 누명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모스 7장 10절입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귀한 선지자라는 사실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대적들이 득세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지자직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뽕나무 치는 자요 목동에 불과한 자가 어떻게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불신하는 사람들앞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은 아모스를 불러 하나님께서는 “벧엘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은 남왕국과 북왕국의 국경지대에 있는 도시로서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를 세운 곳입니다. 아모스는 벧엘로 가서 거짓 종교와 부도덕과 사회적 불의를 무섭게 공격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인 아마샤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아모스가 하는 것에 대해 분을 견디지 못하고 여로보암에게 가서 아모스를 모함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겨야 할 제사장 아마샤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아모스를 모함하면서 아모스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아모스가 모함받은 내용이 뭔가요? 첫째는, 아모스가 왕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모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로보암왕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연사로 죽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이라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면서 북쪽 이스라엘에서 돈벌이를 하지 말고 유다땅으로 가서 거기서 배를 채우고 거기서 예언하라고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돈벌이한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아모스 7장 12절입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아마샤는 자기가 돈을 벌 목적으로 종교인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 오히려 아모스가 돈이 목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누명을 씌웁니다. 아마샤가 아모스 7장 12절에서 아모스에게 남쪽 유다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서는 예언해 봐야 아무 소득도 없으니 유다 땅으로 가라”는 의미입니다. 아마샤는 완전히 직업적인 종교인이었습니다. 아모스를 자신의 돈벌이 경쟁자로 생각하며 견제하는 아마샤라는 우스운 종교인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소득을 올리고 있으니 당시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모함한 내용은 아모스가 외치는 모든 예언이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7장 1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왕의 성소가 있는 왕의 영역에서는 설교하지 말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외치라고 하는데 세상권력은 외치지 말라고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은 답답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 진정한 사명자의 결단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세상 권력을 눈치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아마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신 말씀을 외치며 선지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며 외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한다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어떤 상황에 자신이 놓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담대한 복음전파자의 삶을 살 것이라는 다짐을 하는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구약성경 에스더에 보면 페르시아왕 아하수에로 시대때 하만이라는 총리가 이스라엘민족을 싫어해서 이스라엘민족 전체를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이스라엘의 지도급 인사인 모르드개도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 미리 아하수에로의 왕비로 이스라엘 여인 에스더를 세워놓으셨습니다. 모르드개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이려고 했던 하만의 계획이 실행되려는 찰나 에스더 왕후가 차린 잔치에 왕과 하만이 초대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왕비 에스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달라고 하면 주겠다는 엄청난 제안을 합니다. 이 때가 기회라는 생각으로 왕비 에스더는 왕에게 어느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자신의 민족을 몰살하려고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왕이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에스더 왕비는 ‘그 자가 바로 지금 왕 앞에 있는 이 악한 하만’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격분한 하만이 에스더를 제압해보려고 달려들었는데 그것이 왕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왕비를 신하가 성폭행하려는 장면으로 보여졌습니다. 이 일은 더욱 왕을 화나게 만들었고 왕은 결국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들어놓은 나무에 하만을 매달아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만은 악할 뿐만 아니라 속임수가 많고 지능적인 사람이었으며 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선하고, 지혜로우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에스더가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모든 죄와 허물과 악을 이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악한 공격을 받아도 하나님의 공의가 이긴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갈 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귀한 선지자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온갖 방해자들도 많았고 모함을 받고 죽을 위기에도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라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갈 때 온갖 고통속에서도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온갖 힘든 일들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분명 나에게 이런 사명을 주셨는데 왜 이렇게 일이 힘들어라고 생각하고 있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는 셋째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아모스 7장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 나오는 ‘너’는 아모스 선지자가 아니라 아모스선지자의 경고에 대해 거부하며 심지어 아모스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던 여로보암왕을 뜻합니다.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 왕국 멸망을 예언하는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모스의 메시지를 거부한 이스라엘왕국은 결국 무서운 심판아래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주전 733년 앗수르의 공격을 받았고 721년에는 2만 7천 명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런 혼돈과 파멸의 위기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인 아모스는 지켜주시고 아직 그래도 소망이 남아있는 남쪽 유다왕국은 살려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인구적으로 남과 북을 비교했을 때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중 강력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북쪽 이스라엘입니다. 자원도 많고 외교수단도 좋아 주변 나라들과 수많은 동맹도 맺었고 이스라엘 열두지파중 열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으로 분립했던 만큼 인구에 있어서도 월등하게 큰 나라가 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조건을 가지고 인간적 힘이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앞에서 교만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살 길은 우리의 능력,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37편 4,5절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베드로전서 5장 7절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어느 청년이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가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그는 먼저 명성과 재산을 최고 가치관으로 적고 아래쪽에 건강을 포함시켰습니다. 완벽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그의 선생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니, 아니야, 자네는 인생에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네. 자네에게 마음의 평화가 없다면 명예나 재산, 건강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평안한 마음, 평안한 생활입니다. 돈이 많아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많아도 걱정이 많아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건강에 대한 지나친 우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소유할 있는 것들중 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소유로 인해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하고 스트레스가 생기고 삶이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안하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평안을 위해 오셨습니다. 완전한 평안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하지만 참다운 평안은 예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와 참 사랑의 은혜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혼돈스러운 세상, 힘든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원의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을 때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고난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 있다면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고 견딤, 평온함, 쉼과 같은 성경의 단어는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쁨과 평안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그 길에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살아가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길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 길이라고 확신한다면 우리에게는 걱정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로 하루하루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신 사람에게는 항상 도우심을 허락하시며 은혜의 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구원받은 인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평안함이 항상 넘치는 것입니다. 정말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참된 평안만 넘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이제 구약성경 아모스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 상태가 어떤 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일단 아모스의 활동 시대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처럼 형식적인 신앙을 고수하며 세상의 부귀영화를 꾀하고 잘 먹고 잘 살면 다 될 것이다라고 낙관하지는 않는 지 우리를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똑같이 살아도 내가 교회만 다니고 있다면 하나님께 찬양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복주실 것이라고 착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만 가지고는 복된 삶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진실된 신앙생활, 진정한 가치관의 전환, 참된 인생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 우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르셨는 지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사명을 깨닫고 소명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를 왜 보내셨는 지 깨닫고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저와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종교적인 형식주의입니다. 외형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부터 외면까지 우리의 가치관과 말과 행동까지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모스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종교적인 형식과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떨쳐버리고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으로 생각하며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으로 행동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한 주간 아니 이제 이 말씀을 듣고 평생 살아가면서 정말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세상은 여전히 죄악이 가득한 어둠가운데 있지만 우리 삶의 모습은 정말 주변사람들에게 빛을 선사하며 참 희망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