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이라,
《열반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오래 이 세상에 머물 것을 원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세계를 보라.
모두가 다 무상하지 않는가.
생긴 것은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수명을 장구히 누린다 해도 언젠가는 다하리라.
대체 왕성한 것은 반드시 쇠퇴하고,
만난 자에게는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젊음은 오래 머물러 주지 않고,
건강한 사람도 병들게 되고,
목숨은 죽음에 의해 끊어질 수밖에 없다.
이같이 영원한 것이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무상하며 무엇이거나 즐거움은 없는 것이다.
《열반경 춘다품》
부처님께서는 구시나가라에서 대장쟁이 춘다가 올린
공양을 받으시고 병이 중하여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춘다가 가책으로 괴로워하자 부처님께서 오히려,
"그대는 이 공양 공덕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리라."
축복하시고 이 무상의 도리를 설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육신의 영생을 탐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 부활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육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 섭리입니다.
이것이 제행무상의 도리입니다.
죽는 것 속에서 억지로 영생과 부활을 탐내보았자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무상을 무상으로 깨닫는 것이 참된 영생의 출발입니다.
허무를 처절하게 느끼는 자 라야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육신의 죽음을 보이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상을 깨닫고 무상하지 아니한 진리 생명,
불성 생명을 찾도록 일깨우시려는 크나큰 자비심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죽음은 곧 영생불멸의 희망인 것입니다.
충청남도 신탄진에는 금강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20여 년 전 한재旱災가 들어
대청댐 물이 거의 바닥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강바닥이 거의 말라 강바닥을 파 보니
물이 아주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청댐 중간에
양수장을 설치해 놓고 물을 푸고 있었습니다.
대청댐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한 곳이
산업기지 개발공사로 공업용수를 취수하는 양수장이 있었습니다.
또 조금 내려오면 남한 제지,
코카콜라 공업용수를 취수하는 곳이고,
그 다음에 내려오면 상수도,
조금 내려오면 농업용수 취수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흘러가는 말의 힘은 약하고,
기계의 힘은 강하니 기계 쪽으로 물이 더 흘러가는 겁니다.
이것은 말법시대에는
정법은 약해지고 마구니가 강하니까
정법에 드는 사람이 적어져서 마구니,
사견 외도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께서 팔만사천법문을 설하시고 나서 법 홍수가 났습니다.
감로법甘露法이 흠뻑 내리니
육사외도들이 아무리 불교에 도전해도
깨달음에 든 자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정법正法 천 년이 지나고
상법 천 년이 지나 말법시대가 도래하니
정법이 약해지고 마구니가 강해집니다.
그 마구니의 소리는 기계 힘과 같고,
정법이 약해지는 것은 흘러가는 물이 약해지는 것과 같으니까,
물이 강한 기계 쪽으로 끌려들어 가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공업용수로 들어가면 공수폐수로 썩어서 나오고,
상수도용으로 끌려들어 갔다 나오면 하수도로 썩어서 나오며,
농업용수로 끌려들어 가면 논바닥에 들어가 말라집니다.
그러나 요행히 공장폐수나 하수도 물이 정수되어
강가로 흘러나왔을 때는 모두 바다에 흘러들어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비유하기를 각해覺海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의 바다,
아무리 마구니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정진하다 보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즈음은 마구니의 말이 강하고 달콤해서
기계처럼 당기는 힘이 강해
그 힘에 끌려들어 가면 떨어질 곳은 지옥뿐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이 구경究竟에는 바다에 들어가듯이
누가 뭐라 해도 열심히 정진하면
우리도 깨달음의 경지에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2024년 02월 06일 오전 06;00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